[솔루션 저널리즘] 쿠팡만큼 풀기 어려운, 암흑의 핵심…학교폭력에 관해 알고 싶은 서너 가지 것들. (⏰14분)
한 독자(교사)의 피드백
얼마 전 한 독자께서 이런 글을 저희 슬로우뉴스에 보내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의 고등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현직 교사입니다. 올해 3년 차이고, 3년 모두 학교폭력을 담당하는 부서(속칭 생활안전부)에서 근무하였습니다. 9월 17일 슬로우레터 중 학교폭력 피해 관련하여 의견이 있어 몇 줄 남깁니다.
- 학교폭력 피해를 경계하는 마음은 얼마든지 두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장의 시각에서 학교폭력의 가/피해자를 결정짓는 요인은 대단히 모호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 두 명 사이에서 다툼이 있다고 가정할 때, 두 학생 중 먼저 신고를 한 학생이 피해학생이 되고 신고를 당한 학생은 가해학생이 됩니다. 해당 부분을 악용하여 개인적 다툼을 학교폭력 신고 제도를 이용하여 보복하려 하거나 변호사들에게 신고를 부추김당하는 학생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피해 정도를 가늠할 때 단순 피해학생의 수를 측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보는 방법이 아닐 듯합니다.
- 그러면 관건은 무엇일까요? 저는 처분 수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폭력 처분은 1~9호로 나뉩니다. 이 중 1~3호 처분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유예 대상으로 사실상 기록이 남지 않는 처분입니다. 가해행위가 경미할 경우 내려지는 처분입니다. 따라서 4호 처분 이상의 처분 사실을 확인하고 별도로 통계를 내는 것이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 그런데 이 또한 문제가 남습니다. 학교폭력처분은 각 교육지원청에서 심의 후 판정하는데, 비슷한 혐의에 대해서도 지원청별로 처분 결과나 처분 경과가 가지각색입니다. 그런데 교육지원청이 처분에 불복하는 수단은 행정 소송이 유일합니다. 이로 인해 가해학생과 피해학생 모두 학교폭력 처분 결과에 신뢰를 둘 수 없게 됩니다.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특수한 사례로 정작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가 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아 몇 자 적었습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슬로우뉴스의 ‘솔루션 저널리즘’ 첫 번째 주제였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별로 변한 게 없네요.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고, 오히려 더 심각해졌지만, 출구는 조금씩 닫히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죠. 정말 어려운 문젭니다. 하지만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고민하고 토론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폭력의 구조와 쟁점을 슬로우뉴스가 취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최대한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이 글이 또 다른 대화와 토론을 위한 재료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1. “가장 문제가 많은 법률 용어” 학교폭력이란 무엇인가?
독자 여러분께서는 학교폭력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더 글로리’의 연진이가 떠오르시나요? 도대체 학교폭력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마치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처럼 대한민국에서는 그야말로 ‘열린 질문’입니다. 아주 나쁜 쪽으로 그렇습니다.
학교폭력는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주’와 ‘바다’의 광활함입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잔인한 고문이라고 할 정도의 상습적이고 집단적인 폭행∙상해도 언론에서는 학교폭력으로 말하고, 초등학생들끼리 놀이터에 덩그러니 놓인 친구의 가방 속 ‘포켓몬 카드’를 한장 훔치는,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사소한 잘못도 우리나라 제도에서는 학교폭력입니다. ‘포켓몬 카드 훔친 친구’는 실제로 학폭위에서 3호 조치를 받았습니다.

복도에서 어깨를 툭 치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것도 ‘신고’하면 학교폭력인지 아닌지를 끝까지 가서 ‘심의’해야 하고, 체육시간 축구하다가 기분 나쁜 태클을 당했다고 악의가 있다며 신고하기도 합니다(그런데 기분 좋은 태클도 있습니까?). 그만큼 학교폭력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경미한 학폭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취지에 공감합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아무리 작아 보이는 학폭도 세심하게 여러 각도에서 그 상처와 파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뜻과 방향을 충분히 존중하고 경청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하고 어떤 집단에도 갈등은 있습니다. 그런 ‘실수’와 ‘갈등’마저 폭력이라는 말로 가두고, ‘처벌’만을 우선으로 하면, 학교폭력은 더 해결하기 어려워집니다.
정연순 변호사는 이런 모호하기 짝이 없는 ‘학교폭력’ 개념을 “가장 문제가 많은 법률 용어” 중 하나라고까지 말합니다(나머지 하나는 ‘성폭력’). 왜 그런지는 이 글을 다 읽으면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상해도 학교폭력이라고 말하고, 사소한 오해도 학교폭력이라고 신고합니다. 슬로우뉴스는 그래서 학교폭력이란 말 대신 학교폭력을 세 가지 개념으로 구별하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른바, 학교폭력 삼분안입니다.

2. 학교폭력 삼분안: 갈등, 괴롭힘, 범죄
⑴ 학교 갈등
⑵ 학교 괴롭힘: 불링(Bullying). 협의의 학교폭력
⑶ 학교 범죄: 미국 질병관리청(CDC)에서 총기 사용이나 중상해 등을 염두에 둔 공중보건의 과제로서 학교폭력(school violence)과 학교 괴롭힘(Bullying)을 구별하고 전자를 가리킬 때의 그 학교폭력. 범죄로서 처벌을 고려해야 하는 행위.
학교 갈등은 당사자인 학생, 교사, 학부모에게 최대한 자율적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조율할 수 있습니다. 학교 괴롭힘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협의의 학교폭력이고 ‘교육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노르웨이 교육학자 단 올베우스가 학문으로서 그리고 실천적인 ‘예방교육’의 차원에서 이론화하고 체계화했습니다. 학교 범죄는 학교가 주체로서 규율하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 속에서 펼쳐지는 잔혹하고 상습적인 고문에 가까운 상해행위는 교육의 대상을 넘어서 국가 공권력이 나서서 처벌해야 할 범죄입니다.
이제 학교폭력이라는 모호한 말을 지우고,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집단에서든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은 그 갈등의 해법으로, 학교 괴롭힘은 거기에 어울리는 교육적 방법론으로, 학교가 품어야 할 행위를 범위를 한참 넘어선 범죄에 대해서는 학교 바깥에서 형사법으로 규율해야 합니다. 그것이 슬로우뉴스가 제안한 삼분안입니다.

범죄와 괴롭힘, 갈등이 서로 ‘학교폭력’이라는 모호한 말 속에 뒤섞여서 학교폭력을 ‘안개 속의 풍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육 주체들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고민해야 할 학교폭력을 응징과 정의 실현이라는 막연한 분노에 휩싸인 대중이 평가하고, 변호사와 회의 한 시간 전에야 학폭 관련 자료를 손에 쥔 몇몇 어른들이 손쉽게 재단합니다.
언론은 이를 바로잡지 않고 한 푼의 ‘클릭 저널리즘’을 위해 과장하고 부추깁니다. 뜻 있는 교사들은 2011년 대구의 비극을 학교폭력으로 구조화한 이주호 당시 교육부 장관의 ‘학폭 생기부 기재’ 정책 이후로는 학교폭력에서 점점 더 스스로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좀 더 상세히 후술합니다.
3. 결정적 사건: 학교폭력 생기부 기재(2011)
학교폭력을 1호에서 9호처럼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은 어떤 행위를 학교폭력이라고 ‘신고’하면, 그 신고를 취소하기 전까지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간 조립품처럼 계속 하나씩 절차를 더해가며, 서로 생채기를 내고, 변호사에게 비싼 돈을 주면서까지 ‘내 새끼 위한 전쟁’을 치릅니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 학폭위에 방치된 아이는 1호 처분을 받아야 하는데도 생기부에 ‘빨간 줄’이 올라가는 4호 조치를 받기도 하고, 6호 조치 정도는 받아야 할 학생이 막강한 변호사 그룹의 조력으로 3호 조치를 받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학폭은 교육적 반성과 성찰의 과정이 아니라 ‘내 새끼 운명을 건 전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위에서 이주호(2011년 당시 교육부 장관)를 언급했는데요. 오늘날 학교폭력의 뒤틀린 구조, 특히 학교폭력의 ‘사법화’와 ‘행정화’를 초래한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학교폭력을 생기부에 ‘기록’하도록 행정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교육적 행태라고 많은 교사들이 반대했지만, 비판 교사들을 징계하면서까지 강행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일입니다.
2011년의 비극(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와 2023년 비극(서이초등학교 교사 자살 사건)은 서로의 거울쌍입니다. 이 두 개의 비극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주호 교육부장관.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을 통해 드러난 고 권승민 군의 유서에는 같은 반 학생들의 ‘물고문, 구타, 폭행, 협박, 금품 갈취 등의 상습적 괴롭힘’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그 분노에 대한 정치의 대답이 바로 ‘학교폭력 생기부’ 기재였습니다.
2년 전 학교폭력을 취재하면서 많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와 관련 연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성향(소위 보수, 진보)을 가리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은, 학교폭력을 둘러싼 이 모든 난맥상이 시작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학교폭력 생기부 기재’를 뽑습니다. 학교폭력을 본격적으로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와 변호사가 죽고 살기로 치고받는 ‘치열한 전쟁’으로 만든 사건입니다.
2011년 대구 중학생 권승민 군의 비극은 이주호 교육부장관이라는 끈(학교폭력 생기부 기재)을 통해 2023년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4. 추방된 자: 진실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
현재 학폭법(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은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그 문제들을 여기에서 다 열거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엇보다 학폭법은 ‘학교폭력’이라고 불리는 어떤 행위가 있고, 그것을 논의해야 한다고 할 때, 그 행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 실체, 그 진실에 관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다 제외시킵니다.
우선 교사는 스스로 그 ‘지옥’에서 빠져나왔고요(학폭심의위,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이관). 교사는 이제 더는 학교폭력에 관해서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저 최소한의 ‘중개자’ 혹은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학폭법의 ‘진화’ 과정은 교사가 학교폭력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학폭 생기부 기재’라는 높은 산에서 던져진 눈덩이의 필연적 결과이지 교사 탓은 아닙니다.
그리고 학생들 역시 이 진실의 공간에서 제외됩니다. 학폭법은 철저하게 가해자(가해 추정 학생)와 피해자(피해 주장 학생)만을 이 잔인한 ‘게임의 링’ 위에 남깁니다. 학교폭력은 아직 자아가 형성 중인 초중고 학생의 ‘시간’과 학교라는 강제로 갇혀진 ‘공간’이 결합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갈등은 당연히 학교와 교사와 학생 당사자 및 학부모의 교육적 과제이자 숙제인데, 그 숙제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몫으로, 학부모 간의 전쟁으로 변질시키고, 학교도 교사도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빠집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법률 게임’이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오프라인의 권력과 재력과 부모의 ‘가처분 시간’이 개입합니다. 돈 있고, 연줄 있고, (특히 시간) 여유 있는 집이 이 ‘법률 게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다시 학생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학생들,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학교폭력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들입니다. 가해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건 나머지 학생들이고, 피해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건 나머지 학생들입니다.
왜냐고요? 그 나머지 학생들이 이 학교폭력의 구조를 결정하는 결정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해를 도와주는 방조자가 될 수도 있고, 그 괴롭힘을 그치게 하는 중단자가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학교폭력을 미연에 막는 예방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도 이 나머지 학생들과의 관계는 아주 중요한데, 그들 중에서 ‘단 한 명’만 있어도, 단 한 명만 내 편이 있어도 피해자는 (협의의) 학교폭력(학교괴롭힘)을 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학폭 전담 조사관이 학폭을 조사합니다. 이에 관한 교사노조, 교총, 전교조, 좋은교사, 참학의 입장이 궁금한 분은 직접 관련 기사를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학폭위 심의의 웃픈 풍경
심의 1시간 전에 사건의 진실과 가장 먼(그걸 우리나라 제도는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아이러니….웃픈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학폭 사건 자료를 받아서 그날 바로 그 진실을 그야말로 판정합니다. 한두 건이 아닌 여러 건을 다루면서 그렇게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료를 보는 건 1시간쯤 전입니다. 전직 경찰이나 교수, 의사, 전문직들이 그걸 합니다. 그러면 참 객관적이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들 이마에다가 1호에서 9호까지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5. 신고제도와 맞폭: 변호사만 행복한 세계
다시 학폭법으로 돌아가면, 철저하게 ‘절차’만을 세밀하게 규정한 이 교육행정법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학교폭력을 스스로 학교 안에서 고민할 기회를 ‘철저하게’ 차단합니다. 어쩌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법들 가운데, 적어도 제가 아는 법 가운데, 가장 반교육적인 법이 바로 대한민국의 학폭법이라고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학폭법은 교사의 자발적 소외를 승인했고, 학생들을 완전히 배제했으며, ‘학교의 문제'(교육의 문제)를 마치 무슨 법률적 분쟁과 같은 어떤 것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니 결국 이 지옥에서 행복한 건 변호사뿐입니다. 교사도 학생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가 패자일 뿐이고, 유일한 승자는 변호사입니다.

이 절차법으로서의 학폭법은 특히 ‘먼저 신고하면 장땡’이라는 특유의 절차 규정을 포함합니다. 신고자가 아무리 허황된 신고를 하더라도 그 절차를 중단할 수 없고, 교장 선생님이 아무리 중재하고 싶어도 신고자가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끝까지 갑니다. 그러니 상대방은 ‘맞폭'(맞신고)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교육의 문제는 유사 법정 싸움이 되어버립니다.
이걸 누가 구조화했다고요? 다시 복습합시다. 이 모든 불행의 구조는 ‘학폭 생기부 기재’라는 이주호 당시 장관이 던진 작은 공이 한국 사회의 모순, 특히 양극화와 경쟁적인 입시 구조 속에서 거대한 눈덩이로 굴러 떨어지는 중입니다. 그것 자체로 이제 아무도 이 거대한 눈덩이를 막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6. 연진, 괴물의 탄생: 잔인한 권력과 매력과 진실
‘더 글로리’의 연진이는 학폭, 특히 협의의 학폭인 학교괴롭힘의 가해자라기보다는 미국식으로 보면, 스쿨 바이올런스, 형사적으로 규제하고 제어해야 하는 ‘학교 범죄자’입니다. 다만, 연진이라는 드라마 속 캐릭터는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발생적 구조와 요소를 잘 담고 있습니다.
학폭 가해자는 대체로 인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합니다. 얼굴이 이쁘고, 잘생겼으며, 운동을 잘하고, 집은 적어도 중산층은 되며, 해외여행을 하느라고 학교도 좀 빠져줘야 합니다. 부모의 네트워크(인맥)이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이걸 레고 블럭처럼 조각으로 만들어 볼까요.
- 공부
- 인기
- 외모
- 힘
- 재력
- 집안
- 인맥
이런 요소들은 누구나 원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조건입니다. 학생들이 학습하는 건 세계이고, 또래이며, 무엇보다 부모이고, 교사입니다. 학생은 모방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해갑니다. 그 모방의 기준은 세상이 학교가 교사가 그리고 또래들이 원하는 것(권장하는 것), 그리고 피하는 것(금지하는 것, 금기시하는 것)입니다. 연진이는 이 모든 조건에 해당합니다. 부모의 권력과 엄마의 이기적이고 튀틀린 욕망을 연진이는 자연스럽게 모방(학습)합니다.

그런 욕망은 학교 안에서 오히려 증폭합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런 연진이를 모방하고, 연진이의 ‘범죄’를 모른 척하거나(왜냐하면 두 번째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거기에 동조합니다. 교사들은 그런 연진이를 모른 척하거나 이사장과 같은 위선적인 권력과 권위에 굴복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연진이의 희생자가 실은 연진이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진이는 피해자가 자신과 똑같은 ‘짝퉁’ 옷을 입은 걸 우연히 쇼핑몰에서 보자 그 피해자를 응징합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아닙니까? 우리나라 정치의 모습, 거대한 조직과 기업에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굴복시키는 모습, 그런 세상의 뒤틀린 욕망과 권력의 법칙이 가장 안전하고 평등하며 자율적이어야 할 학교에 그대로 이미 완전하게 ‘이식’되었습니다. 그걸 다소 과장해서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게 ‘더 글로리’일 뿐이고요. 그 속에서 펼쳐지는 노골적인 범죄를 일상적인 차별과 괴롭힘으로 바꾸면, 조직적인 소외와 구별 짓기로 바꾸면 그대로 ‘리얼리티’가 잘 살아 있는 다큐멘터리가 됩니다.
7. 적대적 귀인 편향: 내재화된 공격성
학교폭력을 취재하고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적대적 귀인 편향’(Hostile Attribution Bias, HAB)이라는 표현을 만났던 일입니다. 어떤 논문에서 어떤 가해자 학생이 스스로 왜 죄의식을 품지 않는지(못 하는지)에 관해 심리적 오류의 하나인 ‘적대적 귀인 편향’을 그 이유 중 하나로 제시했습니다.
적대적 귀인 편향은 말이 좀 어렵고 직관적이지 않은데요. 사실 별것 아닙니다. 사람은 부정확한 의사 표시를 ‘적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가령, 중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쉬는 시간 복도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아이들은 좁은 복도에서 어깨가 부딪히기도 합니다. 학기초, 낯선 공간 낯선 얼굴에 둘러싸여 강요된 조직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일상적인 ‘충돌’은 배려나 이해보다는 즉각적이고 불쾌하며 불안하고 내재적인 공격성을 품게 합니다. 그걸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그런 ‘적대적인 심리 반응’은 일반적이고, 그건 그래서 심리적 오류입니다.
가해자 학생의 ‘권력’은 승계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형성적’ 권력입니다. 2인자 그룹에서 언제든 ‘찬탈’할 수도 있는 그런 위태로운 권력일 수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타깃'(희생양, 피해자 학생)을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을 괴롭힙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권력행위이면서, 심리적으로는 ‘적대적 귀인 편향’의 오류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합니다.

8. 낙인찍거나 잊어버리거나
우리나라 학폭법은 앞서 말했든 ‘진실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철저히 제외하는 절차법입니다. 그리고 교육적 과제이자 함께 극복해야 할 숙제인 학폭을 당사자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돈 싸움, 권력 싸움, 인맥 싸움, (여유 있는) 시간 싸움으로 만드는 반교육의 결정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폭을 영원한 사회적 낙인으로 만들어 그 실체적인 진실과 상관 없이 1호에서 9호까지의 ‘도장 찍기’로 만들어 버리는 이 학폭법은 그야말로 한국적 정의의 모습, 그 깊은 그림자를 닮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위선적이고 성급하며 반교육적입니다. 그 엄벌주의는 앞서 삼분안에서 이야기했던 ‘학교 범죄’에서는 고려할 수 있을지언정 학교갈등에서는 배격해야 할 방법론입니다. 학교괴롭힘에서도 그런 낙인보다는 함께 모두의 과제로서 학교폭력의 ‘구조’를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의 학폭법에서는 그런 대화, 회복,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치 학폭을 두둔하는 것과 같은 또 다른 낙인으로 돌아올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야기하는데, 현재 시스템에서 학교폭력를 해결할 방향은 아주 명확해 보입니다.
- 학폭 생기부 기재 폐기해야 합니다.
- 경쟁적인 입시교육 대신 전인교육을 해야 합니다.
- 행정적 절차와 처벌만을 강조하는 학폭법 대신 학교의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 학교의 자율성을 부여하려면 교사의 권위를 제대로 확립해야 합니다.
- 회복적 정의와 회복적 생활교육의 방법론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 교사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으려면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의 교육 주체가 서로 권한과 의무를 조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한민국 교육 구조를 그 근본에서 뜯어고치는 일에 가깝습니다. 쉽지 않아 보입니다.

폭력의 구조: 마치 쿠팡 같은…암흑의 핵심
학교폭력은 어디에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겪는지는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학생이 지금도 앞으로도 힘들 겁니다. 하지만 연진이에게 복수를 꿈꾸면서 18년 동안 칼을 가는 송혜교 같은 슈퍼(맨+신데)렐라를 학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떠올려선 안 됩니다. 어쩌면 ‘더 글로리’ 속 문동은의 절망이나 고통 만큼 어둡고 슬픈 일상적인 괴롭힘, 차별과 소외를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사실은 학교폭력의 가장 어두운 풍경이고, 한국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가장 순수하게(이 말 굉장히 싫어하지만) 스스로 꿈꾸고, 경쟁하지만 그래서 서로 아끼고 애정하는 그 가장 아름다운 나이를 더럽히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과 어른이 만들어놓은 구조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내 운명을 건 게임의 경쟁자인 입시교육 위주의 학교에서 반성과 성찰과 희생과 나눔을 배우는 전인교육은 불가능합니다. 인권을 무슨 이기적인 권리 투쟁인 것처럼 가르치면서 조화와 배려를 교육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아이들은 한국 사회가 도달한 그 위대함의 이면에 있는 야만과 상처를 스스로 투영할 뿐입니다.
그건 마치 쿠팡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