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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학교 폭력’이라는 단어를 맞딱뜨리면 처벌이나 퇴출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과 충돌은 신체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 뿐만 아니라 괴롭힘과 따돌림, 차별, 배제 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더 글로리’나 정순신 아들 사건처럼 극단적인 사건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갈등을 조정하고 피해와 상처를 복원하는 게 학교의 역할이고 책임이어야 합니다. 현행 학폭법은 피해 학생의 복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가해 학생을 선도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학교 폭력’이라는 말에 함축된 학폭법의 문제를 살펴봅니다. 법무법인 경 정연순 변호사의 기고입니다.

여는 글: 학폭의 함정, ‘더 글로리’를 넘어서
박연진 대학 못 가게 만드는 것,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결말인가.
못 본 척하는 친구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내 새끼 운명을 건 전쟁”, 학폭위가 해법이 될 수 없는 이유.
“너는 그래도 우리의 좋은 친구야”- 회복적 정의와 회복적 생활교육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기고] 정연순 변호사, “법률은 문제를 오히려 악화할 수 있다. 필요한 건 화끈한 처벌이 아니라 끈질긴 현장 개선 노력이다.”

학교폭력예방법은 2004년에 제정됐다. 끔찍한 학교 폭력 사건들이 언론과 대중의 시선에 잡히면서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듯한 두려움에 이를 방치해둘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 듯 일어났고 국회는 부랴부랴 법을 제정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법률 용어를 꼽으라면 나는 ‘성폭력’과 ‘학교 폭력’을 꼽고 싶다. 그 이유는 이 용어들이 대중의 시각이나 현장의 문제를 간과하고 선도와 교화, 처벌의 영역을 넘나들며 일대 혼란을 가져왔으며, 범죄와 비범죄의 구분을 가장 많이 엉크러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도 넓은 범주에 걸친 현상을 단 하나의 단어로 아우르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주로 언론에 의해 보도된 ‘학교 폭력’ 의 잔학성에 분노한 사회에 의해 태어난 학교폭력예방법은,

1. 가장 넓은 범위의 ‘폭력’이라고 부를 만한 모든 행동과 사건을 포함했고(예를 들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나 째려보는 것, 즉 왕따에 속하는 행위들이 모두 학교 폭력으로 불린다.)

2. 형사 처벌이 아닌 교화 처분임을 표방했지만 학생들에게는 형벌과 같이 받아들여지는 9가지 처분이 내려지고

3. 이러한 처분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게 하였으며 상급 학교 진학 및 이후 진로에 반영하게 하고

4. 학교 담당자들의 판단에 따른 재량을 인정하지 않았다. 초기의 강경 일변도의 방침을 그후 여러 번 수정되어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생활기록부에 삭제하는 등의 조치도 도입됐다. 학교장의 재량적 판단 또한 2021년부터 일부 도입됐으나, 여전히 학교폭력예방법은 우리에게 예방이나 교화, 선도보다는 ‘강경한 사후 처리 절차’를 법으로 도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중에는 범죄라 불러도 될 만한 사건들도 있고 자라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흔히 있을 만한 경미한 다툼도 있는데 이 모든 사건들이 ‘학교 폭력’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정리되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로 소년법상 보호처분 사건은 생활기록부에 그 전력이 기록되지도 않음에도 후자의 경우에는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어 영구히 박제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결국 법이 의도한 것과 다르게, 법을 가장 잘 활용하는 측, 그것도 당연히 당사자인 학생들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부모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절박하거나 유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children finger pointing at a boy sitting on a wooden floor
Photo by Mikhail Nilov on Pexels.com

그래서 현장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1. 학교 폭력의 범주가 넓은 것을 이용하여, 피해 학생이 학폭으로 신고하면 가해자측 역시 상대방이 한 행위를 어떻게든 꼬투리삼아 학폭으로 신고한다. 주로 교사나 학부모, 지역 유지, 경찰로 이뤄진 위원회는 판단에 자신도 없고 어느 한쪽의 편을 든다는 비난도 두렵고 법에서 정한 범주가 워낙 넓으니까 둘 다 학폭으로 처리한다. 이런 일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부모를 둔 학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 학폭 처리 절차에서도,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부모의 관심이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 학생의 합의를 받기 위해 온갖 가능한 수단을 다 쓰고, 법정대리인으로 이의등 각종 구제절차를 직접 진행하거나 변호사를 선임해서 대처할 수 있는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까. 시간과 돈, 권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인 거다. 변호사를 선임하고도 구제절차에 직접 나와서 한시간을 울면서 간곡히 호소하는 부모와 아예 그런 절차를 진행할 힘도 시간도 없는 부모가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의 생을 가른다.

3. 부모의 관심과 의지에 따라, 너무도 넓고 미묘한 사건의 맥락에 따라, 현장의 각기 다른 처리 역량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1호부터 9호까지의 처분이 어떻게 해서 정해지는 것인지는 결국 누구도 그 객관적 기준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남는 것은 단지 생활기록부의 기재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그 기재를 둘러싼 구체적인 사정은 사라진다. 가해자로 지칭되었던 그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어 언론에 등장했을 때, 과거의 사정은 일방적으로 부활하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현재의 그이를 ‘폭력범’으로 단죄할 태세를 갖춘다. 세상일이 돌아가는 것을 어느 정도 여유있게 바라볼 줄 아는 부모들은 학교폭력 사건에 휘말리는 자신의 아이에게 그 아이의 책임을 성찰하게 하려고 할까, 아니면 어떻게든 그 혐의를 벗기려고 필사적인 시도를 먼저 해볼까.

4. 학교 폭력 사건은 신고가 요건은 아니지만, 신고가 없으면 사건을 조사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소한 다툼은 결국 하나하나 따지자면 다 ‘학폭’이다. 그 정도와 형태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땅히 규제할만한 폭력이 일어나도 당사자들이나 학교가 이를 학폭으로 다루지 않으면 학폭은 없었던 것일 뿐이다.

예전에 학교 폭력 사건을 하나 다룬 적 있다. 부자나 유명인 자녀들이 다닌다는 사립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놀라운 것은 법이 시행된 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 학교에서는 학폭 사건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교육청 조사 과정에서 그 사건은 물론, 가해자가 관련된 다른 폭력사건이 하나 더 드러났는데도 학교는 둘 다 학폭으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교육청이 조사에 나서 이를 학폭으로 처리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자 학교는 끈질기게 소송을 해서 법원으로부터 “해당 학생이 폭력을 가했다고 입증할 증거 불충분하다”는 판결로 이를 뒤집었다. 그 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정말로 착하고 순해서 사소한 폭력조차 없었을까? ‘강전’이라고 불리는 전학처분을 이용, 문제학생 치우기, 주고받기를 한다는 말을 듣는 학교들이 있는가 하면, 10여년이 넘도록 공식적으로는 아이들끼리 사소한 다툼하나 없는 학교도 있다.

5.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요? 물으신다면, 학교 폭력과 학교 폭력이 벌어지는 현장,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아이들간 폭력의 문제는 부모와 사회의 문제라는 것, 그것은 발생 원인에서 뿐만 아니라 해결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우리는 공정함과 정의를 위해서 법률을 제정하지만, 법률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제도와 법률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서 그렇겠지만, 특히 미래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아이들이 매일 생활하는 현장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화끈한 처벌이 아니라 끈질긴 현장 개선 노력이라는 것 말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그 모든 학교 폭력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극악한 것들을 모아 놓은 전형적인 사례와 같이 보여서 우리 모두를 분노케 하지만, 한때의 분노가 사그러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면에 대한 냉정한 성찰과 교육현장에 대한 세심한 시각에 근거한 개선 의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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