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논에 마련한 작은 웅덩이 ‘둠벙’. 요새 보기 힘든 둠벙이 고성에는 500개 남짓 남았습니다. 9명 농부와 만난 김훤주 기자가 고성 둠벙의 자초지종(시말)을 기록합니다. (⏳5분)
고성 둠벙 시말기 (연재)
- 논의 생명줄, ‘둠벙’을 아십니까?
- 둠벙의 있고 없고와 크고 작고는 어떻게 결정될까?
- 둠벙 만들기: 여섯이서 이레는 일해야
- 저 논에 고인 것은 물이었나 땀이었나
- 주렁주렁 풍성하게 매달린 옛날 추억들
- 갖은 생명을 풍성하게 품는 삶터이자 놀이터 (끝)
둠벙이 없는 논은?
둠벙이 없는 논도 있었습니다.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물이 좋아서 둠벙이 필요 없는 논이었고 다른 하나는 둠벙이 필요한 천수답인데도 토질이 맞지 않아 파지 못하는 논이었습니다.
둠벙이 필요 없는 논은 이렇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논이 위에서 물이 내려오니까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산삐알(산비탈) 위쪽 골(골짜기) 안에 있는 논이 물이 좋았습니다. 산중턱까지 논이 있었는데, 이런 논은 옆에 있는 고랑(개울, 도랑)으로 물이 끊이지 않고 흘렀습니다. 그래서 논에 둠벙을 파는 대신 고랑에 물이 고이도록 여울을 만들어 자기 논으로 물길만 내면 되었습니다.
산삐알 위쪽 이런 논은 물 걱정이 없다고 해서 상소답이나 상수답(나는 물을 받아서 쓰는 논을 뜻하는 생수받이 또는 생수답과 통함)이라고 불렀습니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농약을 안 쳤어도 가을이 되면 나락이 노랗게 잘 익었습니다. 둠벙이 없어도 되는 위쪽 논을 가지려고 둠벙이 있는 아래쪽 논과 바꾸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는 묵정논이 되었지만 그때는 으뜸 논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밖에 평지에 있어서 물 대기 좋은 논도 둠벙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을 구렁논 또는 구롱논(움푹 팬 곳에 있는 논)이라 하는데 마동호 근처라든지 산기슭에서 바다까지 이르는, 폭이 널찍하고 편평한 들판에 많이 있는 편입니다.

반면 둠벙이 필요한데도 파지 못하는 논은 이렇습니다. 둠벙을 만들려고 땅을 팠는데 거기에 작살(작은 돌=자갈)이 있으면 물이 나지만 뻘(펄, 개흙) 층을 만나면 물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논이 커서 여기저기 파 볼 수도 있지만 그때는 서너 도가리를 모아도 한 마지기가 될까 말까 하고 심지어는 열두 도가리가 한 마지기인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논이 작아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둠벙이 없는 논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당연히 말라붙어 버리지요. 천수답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논은 논으로 제대로 쳐주지도 않아서 대부분이 헐값으로 거래되었습니다.
둠벙이 두세 개인 논
논 하나면 둠벙도 하나인 것이 기본입니다. 하지만 논은 하나인데 둠벙은 두세 개가 있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쪽 구석에 하나 있고 저쪽 구석에 또 하나 있고 어떤 때는 가운데 즈음에 둠벙이 하나 더 있기도 합니다.
둠벙이 논농사에 필수였던 그때는 쌀을 한 움큼이라도 더해 먹으려고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일부러 두 개나 세 개씩 파지는 않았습니다. 둠벙을 파게 되면 그만큼 나락 심을 땅이 줄어드니까요.
논 하나에 둠벙이 두세 개 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한 둠벙에서 나는 물이 별로 많지 않아서 부족해서 하나 더 파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를 팠는데 시원찮으면 다시 하나 더 파는 식으로 해서 두 개 세 개 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둠벙을 파면 물이 계속 나야 하는데 처음에는 났다가 2~3일 지나면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시원찮은 둠벙에도 물이 고여 있을 때가 있는데 하늘에서 비가 오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얕은 둠벙은 물이 얼마 고이지도 않지만 고여도 금세 새어 나갑니다. 시원찮은 둠벙을 곡식이 귀했던 옛날에는 그대로 두지 않고 바로 메웠습니다.
두 번째는 둠벙 하나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물이 많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논 도가리가 크면 물을 많이 대야 하니까 둠벙이 두 개 세 개 있을 수 있습니다. 대체로 작은 논은 둠벙도 작고 큰 논은 둠벙도 큰데요, 큰 둠벙 하나를 팔 수 없는 조건이면 작은 둠벙을 두세 개 장만했습니다. 또한 물이 금세 빠져나가는 자갈논도 그만큼 물이 더 필요하니까 하나 더 팔 수도 있었습니다.

둠벙은 왜 대체로 작을까?
물을 모아두려면 둠벙이 클수록 좋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대체로 조그맣습니다. 물론 큰 것도 있지만 작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가로세로 길이와 너비가 2m 안팎으로 앙증맞은 느낌을 주는 둠벙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까요?
옛날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포클레인 같은 장비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크게 만들수록 인력도 많이 들고 시일도 많이 걸리고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꼭 필요한 최소한에서 멈추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 최소한’은 ①논이 얼마나 큰지와 ②둠벙에서 얼마나 물이 나는지가 결정했습니다.
논이 작으면 둠벙이 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는 경우에도 둠벙을 크지 않고 작게 만들었다고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물이 많이 날수록 담아놓는 둠벙도 덩달아 크게 해야 하지 않나 싶은 거지요.
맞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물이 많이 나면 둠벙이 크고 물이 적게 나면 둠벙이 작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물이 매우 많이 나면 오히려 둠벙을 작게 만들었습니다. 깊이도 보통 둠벙은 적어도 한 길이 되지만 이런 둠벙은 1m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바닥까지 달달 긁어서 퍼내도 1시간 정도면 다시 물이 찰랑찰랑 가피서(고여서) 새벽에도 퍼내고 아침에도 퍼내고 점심에도 퍼내고 저녁에도 퍼냈습니다. 물이 많이 가피도 자주 퍼내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또 물을 퍼낼 때 무겁게 두레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가벼운 바가지로 퍼내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기로 양수기를 돌려 퍼냅니다만, 그때는 이보다 힘이 들지 않고 수월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이 천천히 가피고 둠벙이 컸다면 생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적이었고 보통은 이런 정도 크기였습니다. 너비는 2~2.5m가량에 길이는 4~5m 정도 되면 가장 무난하고 최소 3m는 되어야 쓸만하다고 했습니다. 무한정 키우지는 못했고, 이 정도면 그나마 적당하겠다 싶은 데서 멈추었던 것입니다.


큰 둠벙도 없진 않다
일반적으로 보면 산삐알 아래 작은 논에는 둠벙이 작고 들판에 있는 커다란 논에는 둠벙도 커다랗습니다. 지금도 가서 보면 논 도가리가 작은 화당리나 신용리는 작은 둠벙이 대부분이고 들판이 상대적으로 너른 거산리나 삼락리는 둠벙들이 대체로 커다랗습니다.
지금은 메워져서 없지만 삼락리에는 둠벙이라 하기에는 너무 커서 ‘못’이라고 불렀던 한 마지기 크기 둠벙도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은 둠벙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논마다 하나씩 있었습니다.



요즘 새로 만드는 둠벙은 어떨까요? 사실 새로 만드는 것은 많지 않고 원래 있던 둠벙을 보수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행정의 지원을 받아 정비를 하는 과정에 다들 규모를 키워서 크고 널찍한데다 깊이도 상당합니다.
1990년대 들어 포클레인이 나오면서 옛날 오로지 인력에만 기대어야 했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한꺼번에 많은 물을 모아둘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적당한 규모에서 멈추었던 옛날 둠벙의 절제는 사라진 듯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