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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논에 마련한 작은 웅덩이 ‘둠벙’. 지금은 보기 힘든 둠벙이 경남 고성에는 500개 남짓 남았습니다. 9명 농부와 직접 만난 김훤주 기자가 고성 둠벙의 자초지종(시말)을 기록합니다. (⏳4분)


고성 둠벙 시말기 (연재)
  1. 논의 생명줄, ‘둠벙’을 아십니까?
  2. 둠벙의 있고 없고와 크고 작고는 어떻게 결정될까?
  3. 둠벙 만들기: 여섯이서 이레는 일해야
  4. 저 논에 고인 것은 물이었나 땀이었나
  5. 주렁주렁 풍성하게 매달린 옛날 추억들
고성군 삼산면 삼봉리315-7에 있는 둠벙.

둠벙이란?

둠벙이란 논에 마련한 작은 웅덩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는데 조상들이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모아두기 위해 창안한 수리 관개 시설입니다. 옛날에는 논농사를 하는 데라면 전국 어디에나 흔하게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서 보기 드문 실정입니다. 저수지와 지하수가 대거 개발되면서 그 필요성이 줄어든 데 따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성군에는 둠벙이 500개 남짓 그대로 남아 있어서 독특합니다. 까닭이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나요? 고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인데다 산들이 해안에 바짝 붙어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산기슭에서 해안 갯벌까지 폭이 좁은 편인데요, 여기에 벼농사를 짓는 논이 모여서 계단식으로 다랑논을 이루고 있습니다.

편평한 대지가 넓게 펼쳐지는 낙동강·한강·영산강·금강·섬진강 등 큰 강의 하류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렇다 보니 고성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 또한 바다까지 이르는 길이도 짧고 경사도 가파릅니다. 큰 강이 흐르는 평야 지대에 견주면 논농사에 필수인 물을 안정적으로 얻기가 어려운 구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물이 적은데다 좁고 가파르기까지 해서 현대식 수리 관개 시설을 갖추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또 설령 갖추었다 해도 완전하고 충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둠벙은 여전히 쓰임새가 작지 않았고 덕분에 둠벙이 많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174-2의 내산리 고분군 아래에 있는 둠벙.

국가중요농업유산 고성 둠벙

이제 이 고성의 둠벙들이 2019년 ‘고성 해안지역 둠벙 관개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열네 번째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중요성과 특별함을 인정받는 전통 유산이 된 것입니다.

‘농업유산’이란 “오랜 기간 형성․진화되어 온 전통적 농업 형상과 시스템 및 그 결과로 나타난 농촌 경관 등 모든 산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국가중요농업유산’은 이 가운데 “국가 차원에서 지정하여 관리·보전·유지·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2023년까지 모두 18곳이 지정되었습니다.

지정 기준은 ①역사성·지속성, ②생계 유지, ③고유성, ④전통성, ⑤특별한 경관, ⑥생물다양성, ⑦주민참여 등 일곱 가지이고, 목적은 ①농촌 자원의 보전, ②생물다양성의 증진, ③전통 유산의 품격 향상, ④관광자원 활용 등 네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2020년에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에서 ‘고성 해안지역 둠벙 관개시스템’을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WHIS)으로 지정하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ICID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관개 시설물의 보존·유지·홍보 등을 위하여 유네스코 등의 자문기관 역할을 하는 비영리 국제기구인데요, 고성의 둠벙이 갖는 역사적·예술적·사회적·기술적 가치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것이지요.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631에 있는 둠벙.

2023년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을 살펴보면 고성의 둠벙을 비롯하여 김제 벽골제, 수원 축만제, 당진 합덕제, 수원 만석거, 완도 청산도 구들장논, 강진 연방죽 생태순환 수로농업 시스템, 의성 전통수리농업 시스템 등 8개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도 등재되어 3관왕을 이룩하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하여 지정하는 세계 각국의 전통 농업유산으로 ①자연경관, ②생물다양성, ③생태계의 회복탄력성 등이 기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청산도 구들장논 농업, 제주 밭담 농업, 하동 전통차 농업, 금산 전통인삼 농업, 담양 대나무밭 농업, 하동·광양 섬진강 재첩잡이 손틀어업, 제주 해녀 어업 등 7개가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지금 있는 둠벙들을 좀 더 잘 관리·보전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친화적인 전통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서 다음 세대에서도 제대로 활용되도록 하는 것이 이런 국제기구들의 활동 목표이니까요. 더불어 우리 국민들이 둠벙을 제대로 충분히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둠벙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커지기를

[고성 둠벙 시말기]는 고성의 둠벙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이해와 사랑이 좀더 커지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만든 안내 책자입니다. 이를 위하여 2023년 9월과 10월 두 달에 걸쳐 거류면 화당·신용·거산리와 마암면 삼락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아홉 분을 만나 뵙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쁜 농사철인데도 1인당 2시간 넘게 시간을 내어주시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둠벙과 둠벙을 둘러싼 여러 전통 요소들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둠벙에 담겨 있는 조상들과 농민들의 실사구시하는 정신과 피땀 어린 노력의 정신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거류면 신용리의 박광길·김봉완·김학상·김재용·남택세 선생님, 화당리의 임용철·김종만 선생님, 거산리의 박용일 선생님, 마암면 삼락리 곤기마을의 이영상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과 함께 큰절을 올립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충실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둠벙은 왜 만들었을까?

지금 가서 둠벙을 보면 아주 예쁩니다. 도도록하게 둘러싼 두둑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밑에서 위에까지 빼곡하게 쌓아올린 돌들은 가지런하니 보기가 좋습니다. 벼가 자라는 논을 배경으로 삼은 주변 풍경도 풀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서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농촌 경관을 위해 둠벙을 만든 것 아니냐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둠벙은 논농사 때문에 필요해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날이 가물면 물이 없어서 구석마다 파두었습니다. 천수답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인데 그런 데에 둠벙을 팠던 것입니다. 덕분에 천수답이라도 크게 물 걱정 안 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거지요. 80년대 초반만 해도 둠벙으로 물 대는 논이 많았을 정도로 옛날에는 둠벙이 생명줄이었습니다.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231-10의 가야시대 유적이 출토된 솔섬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둠벙.

지금은 농촌에도 농사를 짓지 않고 양식을 사서 먹는 집이 많지만 당시는 집집마다 대여섯 마지기씩 논농사를 해서 먹을 식량은 스스로 마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어지간하면 논 한 도가리(논의 개수를 세는 단위, 배미)마다 둠벙이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그래야 한해 농사가 안심이었고 그래야 집안 식구들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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