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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논에 마련한 작은 웅덩이 ‘둠벙’. 요새 보기 힘든 둠벙이 고성에는 500개 남짓 남았습니다. 9명 농부와 만난 김훤주 기자가 고성 둠벙의 자초지종(시말)을 기록합니다. (⏳6분)


고성 둠벙 시말기 (연재)
  1. 논의 생명줄, ‘둠벙’을 아십니까?
  2. 둠벙의 있고 없고와 크고 작고는 어떻게 결정될까?
  3. 둠벙 만들기: 여섯이서 이레는 일해야
  4. 저 논에 고인 것은 물이었나 땀이었나
  5. 주렁주렁 풍성하게 매달린 옛날 추억들

둠벙 물 나누기

모내기가 끝나고 장마철도 지나간 다음 날이 가물어지면 농촌은 느닷없이 바빠집니다. 나락이 자라는 논에 물을 대야 했으니까요. 둠벙에서 물을 푸고 고랑에서 물을 끌어들이느라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둠벙은 개인 소유입니다. 논에 딸려 있는 것이 둠벙이고 논에는 저마다 주인이 있으니까 둠벙에서 나는 물은 좀처럼 나누어 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일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다툼이 일어날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물이 되게 많이 나거나 논에 대고 나서 남으면 이웃에게 쓰라고 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별나게 물이 많은 둠벙이 열에 서넛은 되었습니다.

여럿이 목욕할 만큼 커다란 둠벙. 거류면 삼락리 273-2.

이런 둠벙에서는 오늘은 논 주인이 푸고 내일은 이웃 사람이 끌어가고 하는 식으로 나누어 썼습니다. 물을 끌어가는 사람은 논 주인이 설치해 놓은 두레채로 물을 풉니다. 두레박에서 물이 쏟아지는 원래 자리에다 자기 논으로 내려가도록 물길을 낸 다음에 두레질을 하였습니다.

여러 집에서 함께 쓰는 커다란 둠벙도 있습니다. 특히 삼락리 너른 들판의 구롱논에 있었던, 둠벙이라기에는 너무 커서 ‘못’이라고 불렀던 한 마지기 넓이 둠벙은 더욱 그랬습니다. 저수지가 들어서고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그 효용을 다해 지금은 메워지고 말았습니다.

여럿이 목욕할 만큼 커다란 둠벙. 마암면 삼락리 315.

그 명맥을 잇는 새로운 둠벙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마암면 두호리 4번지 농경지 옆 하천 부지에 자리 잡은 일명 ‘밀가루둠벙’이 그것입니다. 1981년 삼락리 곤기마을 사람들이 고성군으로부터 밀가루를 인건비로 지원받아 만들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땅은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다 함께 팠고, 돌은 사람들이 지게 말고 경운기로 싣고 왔으며 둠병을 돌로 쌓아올리는 것은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시던 곤기마을 주민 두 분이 담당했습니다. 전체 모양은 타원형인데 지금은 여기에 두어 뼘 높이로 콘크리트 담장을 두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올려놓았습니다.

고랑 물 싸움

물은 고랑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둠벙 물은 주인이 있지만 고랑 물은 주인이 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인이 없다 보니 고랑에서는 서로 가져가려고 다투는 물 싸움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물 싸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골 안에 있는 상답들은 고랑 물이 풍성해서 둠벙조차 없어도 될 정도였고 그 아래 둠벙이 있는 천수답들도 그다지 심한 가뭄만 아니면 ‘오늘은 이 집에서 대고, 내일은 저 집에서 대고’ 하는 식으로 조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날이 바짝 가물면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내리쬐는 햇볕에 타들어가는 것은 벼포기보다 농부의 마음이 먼저였습니다. 위아래도 없고 멀고 가까움도 없이 고랑에 고인 물을 두고 서로 다투었고 웅덩이를 먼저 파겠다고 으르렁거렸습니다.

많이 깊지 않은 둠벙. 거류면 신용리 193-1.
많이 깊지 않은 둠벙. 거류면 화당리 116.

괭이로 위협하거나 고함을 지르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물을 퍼가지 못하도록 고인 물을 몸으로 가리기도 했고 물길을 돌리지 못하도록 물꼬 위에 엎어지기도 했습니다. 삼촌과 조카가 하루종일 소리높여 다투었고 시아주버니 앞에서 제수씨가 윗도리를 훌러덩 벗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물 싸움은 날이 가물면 다들 물 욕심을 내니까 일어나기 마련이었습니다. ‘물 도둑질은 양반도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고 진짜 싸움은 아니고 가뭄 한철 지나고 나면 다 원래대로 돌아가고 끝이었습니다.

둠벙 치기

시간이 흐르면 둠벙 밑바닥에는 뻘이 차이고 벽면의 돌 틈새에는 찌끄레기가 끼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물을 담아두는 용량도 줄어들고 물이 나오는 구멍도 막히니까 때맞추어 들어가서 쳐내곤 했습니다.

주로 모내기를 앞둔 봄철에 많이 했지만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물 때도 하고 여름에도 하고 가을에 추석 쇠고도 하고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해에도 여러 번 틈나는 대로 둠벙을 쳤고 어떤 사람은 3~4년에 한 번 정도 둠벙 치기를 했습니다.

이끼와 풀이 자라나 있어 둠벙 치기가 필요한 석벽. 거류면 신용리 174-1.
둠벙 치기를 해서 말끔한 둠벙. 거류면 거산리 195-1.

아주 깨끗하게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새미(샘, 우물)는 먹는 물이니까 해마다 꼼꼼하게 쳤다면 둠벙은 농사짓는 물이니까 물구멍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했습니다. 이를테면 도구(물곬=한 방향으로 트여 물이 빠져나가는 길)로 들어온 물이 논을 거쳐서 들어왔다가 다시 봇도랑으로 나가는 둠벙이 있었는데요, 물이 흘러다니니까 뻘흙이 밑에 쌓일 수밖에 없어서 해마다 한 번씩은 쳤습니다. 그러던 것이 들어오는 물길을 막았더니 차이는 게 없어져서 굳이 해마다 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둠벙을 치려면 먼저 물을 빼내야 합니다. 요즘은 양수기로 하지만 옛날에는 두레박이나 바가지 또는 양동이로 다라질 때까지 퍼냈습니다. 그런 다음 소쿠리를 갖고 들어가서 고여 있는 뻘을 삽으로 퍼 담아 올렸습니다. 돌 틈에 끼어 있는 찌끄레기들도 함께 걷어내었습니다.

무너진 데가 있거나 손질할 데가 있으면 수리·보수도 이때 같이 했습니다. 허물어진 돌이 있으면 그대로 썼고 모자라면 고랑이나 산 밑에서 돌을 가져와 썼습니다.

미꾸라지도 잡고

둠벙 치기라 하면 함께 떠오르는 것이 바로 미꾸라지입니다. 가을에 추석이 얼추 되어 가면 둠벙에 물을 빼내고 미꾸라지를 잡았지요. 논에 나락꽃이 피는 시기를 ‘자무래기’라고 합니다. 암술 하나에 수술이 여섯 올라와 1주일 정도 피는데 이 무렵에 잡히는 미꾸라지가 가장 맛있습니다.

고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러 넣어서 키우는 둠벙이 아니면 미꾸라지가 주로 잡혔고 다른 것은 붕어나 장어 아니면 논고둥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아무래도 논에 대려고 거의 날마다 계속 물을 퍼내니까 물고기가 제대로 살 수 없는 환경이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유독 미꾸라지가 많은 둠벙도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빨래를 많이 하는 둠벙이었는데 빨랫비누가 그렇게 해롭지는 않았던 모양이고 빨래하면 나오는 때 같은 것이 미꾸라지한테는 먹을 만한 영양분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놀기도 하고

1950~1980년대는 시골 마을마다 어린아이들이 버글버글했습니다. 그때는 소를 집집마다 한 마리씩은 키웠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면서 풀 뜯어 먹게 풀어놨다가 오후에 학교 마치면 소 찾으러 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여럿이 어울려 노는 게 일상이었는데 날이 더우면 할딱 벗고 둠벙에 뛰어들어가 물장구치며 놀곤 했습니다. 멀리서 뛰어와서 풍덩 떨어져 들어가는 그런 놀이도 하고 헤엄도 치고 했는데 이를 두고 목욕한다(미역감는다, 멱감는다)고 했습니다.

또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면 논과 둠벙이 모두 놀이터였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논은 메인스타디움이고 둠벙은 보조경기장이었지요. 자치기, 연날리기, 공차기를 논에서 했고 썰매 타기는 논에서도 둠벙에서도 했습니다.

마을 쉼터이자 놀이터이기도 한 둠벙. 거류면 신용리 151-2.

둠벙은 어른들 눈을 피해야 할 때도 찾았습니다. 움푹 꺼진 물자리는 여럿이 모여도 어지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쥐불놀이는 어른들이 못 하라 하니까 눈길을 피하려고 여기서 준비를 했습니다. 동네 청년들에게는 화투 같은 도박성 놀이를 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둠벙은 동네 아낙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빨래터이기도 했습니다. 사람 사는 마을과 가깝고 물이 풍부하고 깨끗한 둠벙이 그랬습니다. 8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지 않았습니다. 젊은 어머니들도 아기를 들쳐업고 나와서 천기저귀를 여기서 다 빨았지요.

빨래는 겨울철에 특히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빨랫돌도 갖다 앉혔는데, 물자리에도 있었고 물이 둠벙에서 봇도랑으로 흘러나가는 어귀에도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것도 한 시대의 풍경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슬픈 기억들

둠벙에서 사람이나 동물이 빠져 죽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둠벙 중에는 깊이가 4m 이상으로 깊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벽면을 돌로 마감해 놓아서 어지간하면 그 돌을 붙잡고 디디면서 타고 오르면 될 것 같지만 어린아이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겠지요.

보통 서너 살이나 대여섯 또는 예닐곱 살 어린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했는데요, 부모로서는 가슴이 미어지고 땅을 치며 통곡할 만큼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어른들도 빠져 죽었습니다. 어떤 아저씨는 자신의 불치병을 비관하여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삼베 빨래를 하던 중 실수로 빠졌다가 다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깊이가 상당한 둠벙. 거류면 신용리 188-1.

이렇게 둠벙에 사람이 빠져 죽는 사고는 동네마다 거의 빠짐없이 다 있었습니다. 요즘은 아니고 30~50년 전에 그런 슬픈 일들이 드문드문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사고를 막기 위해 둠벙을 메워 버리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습니다.

살아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50여 년 전 본인이 17~18살 때에 막내여동생이 둠벙에 빠져 거의 숨이 멈추기 직전까지 간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 끄집어내어 겨우 살려낸 분이 있었습니다. 그때 막내여동생은 3~4살이었는데, 지금도 한 번씩 만나면 당시 일을 떠올리곤 한다고 합니다.

동물들이 발을 헛디뎌서 빠졌다가 살아나오지 못하고 죽은 채로 물 위에 둥둥 떠 있기도 했습니다. 또 논두렁에 있던 고라니가 물을 마시려고 그랬는지 둠벙으로 뛰어내렸는데 그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산 채로 건져내어 그대로 풀어준 적도 있고 잡아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야생 동물을 잡거나 먹으면 불법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고 오히려 많은 경우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 좋은 기회로 여겼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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