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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논에 마련한 작은 웅덩이 ‘둠벙’. 요새 보기 힘든 둠벙이 고성에는 500개 남짓 남았습니다. 9명 농부와 만난 김훤주 기자가 고성 둠벙의 자초지종(시말)을 기록합니다. (⏳4분)


고성 둠벙 시말기 (총 6회)
  1. 논의 생명줄, ‘둠벙’을 아십니까?
  2. 둠벙의 있고 없고와 크고 작고는 어떻게 결정될까?
  3. 둠벙 만들기: 여섯이서 이레는 일해야
  4. 저 논에 고인 것은 물이었나 땀이었나
  5. 주렁주렁 풍성하게 매달린 옛날 추억들
  6. 갖은 생명을 풍성하게 품는 삶터이자 놀이터 (끝)

빛나는 보석, 둠벙

인간이 만들고 인간의 삶과 애환이 서린 논에는 그러면 다른 생물들은 얼마나 많이 살고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무려 5668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 동안 논을 드나들면서 연구·관찰했더니 그렇게나 많은 생물이 살더라는 얘기입니다. 논에 사는 생물이 이렇게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인간의 선량한 관리’ 덕분이라고 합니다. 자연은 그대로 놓아두면 모든 생물이 다같이 풍성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산에서 참나무와 소나무가 함께 자라면 활엽수이고 속성수인 참나무에 밀려 소나무가 도태되어 버립니다. 논두렁에 억새와 띠풀이 섞여 있다가도 나중에 보면 높이 자라는 억새에 치여 키가 작은 속새는 사라지고 맙니다. 반면 참나무나 억새를 적당히 자르고 솎아내면 소나무도 속새도 같은 자리에서 공존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럿이 목욕할 만큼 커다란 둠벙. 거류면 삼락리 273-2.

‘선량한 관리’란 논에서 벌어지는 인간 활동 전부를 말합니다. 논·논두렁·봇도랑·물꼬·고랑 이런 것들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거기서 풀을 베고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고 벼를 심는 것, 그리고 물을 모으고 흘리고 가두고 빼는 등의 모든 것들이 선량한 관리에 해당됩니다.

이런 논에서 둠벙은 특별한 지위에 있습니다. 논에 살던 생물들이 물이 마르거나 얼어붙어서 살기 어렵게 되면 둠벙으로 옮겨갑니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사는 식물에게도 둠벙은 가장 멋진 삶터입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물이 고여 있기 때문입니다. 둠벙은 이처럼 다양한 생물들을 더욱 풍성하게 품어주는, 생명 활동 보증수표라 할 수 있습니다.

삶 그 자체였던 둠벙

논과 둠벙은 사람들의 삶 자체였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을 버틸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생존의 수단이었습니다. 둠벙에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면 갈피마다 피와 땀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둠벙을 보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과학자고 기술자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날이 가물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면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대를 이어 연구하고 실험하고 실천한 결과이니까요. 그들은 둠벙과 궁개를 창안할 정도로 지혜가 뛰어났습니다. 튼튼하고 보기 좋게 돌을 쌓을 만큼 재주도 좋았으며 흙과 돌을 퍼내고 나를 만큼 힘도 세었습니다.

궁개. 경남 생태관광협회.

둠벙은 역사의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둠벙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옛날 모습 그대로 둠벙을 가꾸고 지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더불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조상들이 피어린 노력, 삶의 지혜, 끈질긴 실천 등도 함께 인식하고 공유해 나가면 더욱 좋겠습니다.

밥은커녕 송기떡, 쑥버무리, 개떡 같은 것을 먹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가 어린 친구들로부터 “그때 왜 배가 고팠어요?” 하는 반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천수답, 구롱논, 이런 거 아무도 모르지 싶습니다. 둠벙을 통해 옛날을 돌아보고 오늘날을 살펴보면서 다가오는 내일은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면 좋을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둠벙에서 놀자

논과 둠벙은 쌀을 만들어내는 생산기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오랜 옛날부터 자라나는 어린 친구들에게 놀이터 구실도 했습니다. 그런 과거를 되살려 앞으로 계속해서 여기를 놀이터 삼아 놀아보면 어떨까요?

마침 찾아보았더니 이런 연구 보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초·중학생들에게 ‘농업’이나 ‘논’에서 무엇이 생각나는지 물었더니 논에서 놀아본 적이 없는 학생은 ‘쌀’ ‘채소’처럼 농산물을 주로 떠올렸지만 논에서 놀아본 학생은 ‘녹색’ ‘흙’ ‘물’ ‘송사리’ ‘잠자리’ 등 생태·생물 관련 단어를 많이 떠올렸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판을 가로질러 둠벙을 찾아나선 아이들

이처럼 논에서 논다는 것은 논에 사는 수많은 생명을 체험하고 그것들과 어울린다는 얘기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때로는 놀라움이 동반되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논과 둠벙에서 많이 놀아본 사람일수록 생명에 대한 이미지와 지식이 풍성해지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커지게 마련일 것입니다.

삶터에서 놀이터로

이미 고성 둠벙에서는 그런 놀이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둠벙·논 생태체험으로 ‘둠벙과 논으로 떠나는 생태 대탐험’이 10월 14(토)·15(일)일과 21(토)·22(일)일 나흘 동안 오전과 오후로 나눠 모두 여덟 차례 치러졌습니다.

그다지 널리 알리지 않았는데도 젊은 부모와 자녀 등 매회 정원 30명을 채웠습니다. 잠자리 애벌레, 개구리와 올챙이, 미꾸라지와 참붕어, 물자라와 장구애비 등 둠벙에 사는 여러 가지 생물을 몸소 잡아 살펴보면서 물 푸는 두레질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고성 둠벙 자연생태 트레킹도 ‘둠벙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10월 28일(토)과 29일(일) 이틀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매회 30명씩이 참여한 가운데 바닷길을 걷고 논두렁을 타면서 가을 하늘 아래 갈대와 억새도 구분해 보고 둠벙의 다양한 모양도 살펴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갯벌에 내려가 게와 조개·고둥 등 바다 생물과 어우러지는 시간도 보냈습니다.

둠벙 모양이 제각각 다른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습.
둠벙에서 뜰채로 곤충 등을 건져 살펴보는 아이들
둠벙 전체 모습을 살펴보는 아이들

이처럼 2023년에 시작된 둠벙·논 생태체험과 생태 트레킹은 2024년 10월과 올해 5월에 더욱 알찬 내용으로 삼락리 둠벙체험장과 신용리·화당리 일대 들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고 ‘시작이 반’이라 했는데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옛날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터였던 둠벙이 이제는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이 함께 노니는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리로 이어지는 논두렁은 자연과 함께하는 공존과 공생의 한마당으로 어우러지는 포근한 생명길로 거듭나고 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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