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폴리시] 증세 포비아 극복 핵심은 투명성과 신뢰… 재정 문해력 강화, 공공 서비스 지속 가능성 두고 국민들 설득해야. (⌚6분)
윤석열 정부는 건전 재정을 외치다 무너졌다. 세수는 펑크나고 국가 부채는 치솟고 정부가 돈을 안 푸니 가뜩이나 어려운 내수가 박살났다. 이재명 정부는 다를까. 대선 토론 때는 ‘증세’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부자 감세를 철회할 거냐고 묻자 “경제 상황이 너무 어려워 유보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국책연구기관 KDI(한국개발연구원)가 ‘보편적 증세’를 주요 정책 대안으로 제시한 보고서(인구고령화 시대의 조세구조에 대한 연구)를 발간해 눈길을 끈다.

증세 논쟁, 이게 왜 중요한가.
- 이재명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출발했다. 당장 재정 정책 기조에 관심이 쏠린다.
- 이재명은 유세 도중에 “나랏빚이 1000조 원으로 늘었다는 둥 나라가 빚을 지면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우리 국가 부채가 50%가 안 되는데, 다른 나라들은 다 110%가 넘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할까. 이재명 정부가 맞닥뜨린 첫 번째 질문이다.
- KDI 선임연구위원 김학수는 부가가치세(소비세)와 개인소득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 선진국인 30개 OECD 회원국 자료를 이용해 조세 구조 변화가 조세 수입 변동성, 경제성장, 형평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왜 소득세와 부가가치세인가.
- 첫째, 세수 비중(조세 수입 대비 세목별 세수의 비율)이나 부담 수준(GDP 대비 세목별 세수의 비율)을 확대해도 세수 변동성이 크지 않다. 세수 확보가 안정적이다. 반면, 경기 변화에 민감한 법인세는 세수 변동성이 큰 세금이다.
- 둘째, 경제성장에 비교적 덜 부정적이다. 김학수에 따르면, 법인세는 부담 수준이 커질수록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소득세나 부가가치세의 경우 통계적으로 유의한 변화는 없었다. “한국의 법인세 부담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업 경쟁력 제고에 부담이 되는 법인세 인상은 지양해야 한다”는 게 김학수 생각이다.
- 셋째, 누진적 소득세는 형평성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보통 부가가치세 등 소비세는 역진적(소득이 적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높은 조세를 부담하는 현상)이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파악되지 않았다.
- 김학수는 “기존 연구에서 우려하는 소비세의 형평성 악화 가능성은 개인소득세 강화와 함께 취약 계층에 대한 재정 지출로 보완할 수 있다”고 했다. 소득세와 부가가치세를 함께 조금씩 인상하되 소비세 인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형평성 저하를 개인소득세 강화로 보완하자는 것이다.
- 한국의 개인소득세 법정 최고세율은 49.5%(지방소득세 포함)로 OECD 국가 중 12번째다. 독일(47.5%), 스페인(45%), 영국(45%), 미국(43.5%), 스위스(41.5%) 등보다 높다. 그러나 최고세율 적용 임계소득은 10억 원으로 2024년 평균 소득의 20배에 달한다. 10억 원을 초과하는 소득에만 49.5% 세율이 적용된다.
- 대부분 OECD 국가의 경우 최고세율 적용 임계소득은 평균 소득의 3배 내외 수준이다. 김학주는 “점진적으로 최고세율 적용 임계소득을 낮춰 최고세율 적용 소득 구간을 확대하는 방향의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증세는 정권 교체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
- 보고서의 흥미로운 대목은 ‘증세 포비아’ 실증 분석이다. OECD 국가 중 IMF가 지정하는 선진국(Advanced Economies)에 속하는 30개국 사례를 분석해 실제 세금 인상이 정권 교체에 영향을 미쳤는지 따졌다.
- 1979년 영국의 부가가치세 도입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자료를 살핀 결과, 515건의 3대 세목(소득세, 일반소비세, 법인세) 세율 개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세율 인상은 247건, 인하는 268건이었다.
- 3대 세목의 세율 인상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례는 총 247건 중 30건(12.6%)이었다. 소득세 또는 부가가치세 인상의 경우만 보면, 정권 교체 사례는 150건 중 30건으로 20%에 불과했다. 정권 교체는 총선·대선 등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교체된 사례를 지칭한다.
- 한국은 부가가치세나 개인소득세와 같이 과세 기반과 납세자 범위가 넓은 세목의 세수 확보 기능을 강화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10%의 부가가치세 세율도 5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다. 괜히 세율을 인상했다가 정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트라우마는 안정적 세입 확충 수단으로써 부가가치세가 논의되지 못하는 원인이다.
- 김학주는 “해외 사례 검토 결과는 우리의 우려와 다소 상반된다.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인상이 반드시 정권 교체를 가져온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보편적 증세는 곧 정권교체를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쳐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올리지 않겠다”, 공약 번복에 무너진 정권.
- 세금 인상이 정권 교체로 이어진 몇 가지 사례도 특기할 만하다. 한 번의 세율 인상으로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3대 세목의 복합적 세율 인상, 또는 하나의 세목이 거듭되어 추가 인상된 경우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 그리스 사례를 보면, 2010년 부가가치세 및 소득세 세율 인상과 2013년 소득세 세율 인상이 2015년 정권 교체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부가가치세 및 소득세 인상은 2019년 정권 교체에 영향을 줬다. 포르투갈도 2010~2011년 각각 2건의 부가가치세 및 소득세 세율 인상이 2011년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 세율 인하 공약을 번복했다가 역풍을 맞은 사례도 있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1989년 대선에서 “제 입술을 읽어보세요: 세금은 절대 올리지 않겠습니다”라는 공약을 번복하며 소득세 최고세율을 인상했다. 세율 인상은 공화당의 12년 장기 집권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 정권 교체가 됐는데도 새 집권당이 전 정부 세율 인상 계획을 그대로 계승한 사례도 있다. 독일의 2007년 부가가치세 세율 인상 계획은 2005년까지 집권했던 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구상했지만 국민 저항에 부닥쳐 보수 성향 기독교민주연합의 메르켈 총리가 단행했다.

증세하고도 여론 잡는 방법 있다.
- 세율을 인상하더라도 재원 활용 계획을 명확히 밝히거나 세율 인상 필요성을 제대로 공표하면 여론의 호응을 이끌 수 있다.
- 2019년 일본 아베 정부는 부가가치세 세율을 10%로 인상했다. 국민 저항을 줄이려 일부 품목에 경감세율 8%를 도입하고, 부가가치세 인상 재원 중 약 1.7조 엔을 무상 유아 교육에 사용하겠다는 지출 계획을 밝혔다. 이런 노력에 정권 교체를 피할 수 있었다.
- 앞서 언급한 독일 총리 메르켈은 인상한 3%포인트의 부가가치세 재원 중 2%포인트는 적자 축소에 활용하고, 1%포인트는 고용기여금 비율 1.6%포인트 인하 및 연금기여금 0.4%포인트 인상분에 활용할 것이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 증세를 단행해도 이후 경제 정책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 받으면 정권 교체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공약에 없던 소득세 인상으로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에 승리를 내줬다. 그러나 1998년 연방 정부가 1960년 이후 처음으로 7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지지율을 회복했고, 클린턴은 2000년 8년 임기를 채우고 퇴임했다.
- 1984년 이스라엘 총리직에 오른 페레스는 1985년 450%까지 치솟는 초인플레이션에 경제 안정화 정책 일환으로 부가가치세를 인상하고, 공공 부문 급여 동결 및 축소, 화폐 공급량 통제, 고정환율제 등을 실시했다. 1년 뒤인 1986년 인플레이션율을 1%대로 낮추며 국민 지지를 받았다.

소리 없이 깃털 뽑는 건 불가능, 핵심은 투명성과 신뢰.
- 세금은 조세 저항을 부른다. 막강한 조세 징수권을 갖고 있던 17세기 프랑스 정부도 징세의 기술을 “거위가 소리를 덜 지르도록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깃털을 뽑는 것”에 비유했다. 소리 없이 털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 조세 저항을 최소화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조세 수입을 확보할 책임은 정치에 있다. 이를 위해 재정 효율성과 효과성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여야 한다.
- 김학주는 재정 효율화를 위해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같은 의무 지출을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중고 학령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데 복지 정책의 주 대상자인 고령 인구는 급증한다. 현실 변화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내국세수에 연동해 지방 교육재정의 중앙 정부 부담을 산정하는 방식은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 현 재정 제도 하에서는 아무리 지출을 효율화해도 재정 수입이 부족하다는 점, 이로 인해 공공 서비스의 지속가능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일반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재정 문해력(fiscal literacy) 제고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김학주는 “재정 문해력 제고를 위한 정책적 노력을 전담할 기관이 필요하다”며 “해당 기관은 우리나라 재정의 단기, 중기, 장기 위험 요인을 분석하고, 접근이 쉬운 플랫폼을 통해 그 의미를 널리 알려야 한다. 재정 지표에 대한 시민의 문해력을 높여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