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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인터뷰 52.] 어느새 2025년도 도망치려 한다. 붙잡을 수 없겠지만, 붙잡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인간과 노동. (⌚9분)

0. 여는 말: 세계와 나 그리고 북극성

나는 세계와 얼마나 연결돼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때로 고립감을 느낀다. 나는 때로 가족과 친구, 많은 이들과 연결된 나 자신을 느낀다. 뉴스에서 읽는 ‘저 세계’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는 여전히 선명하지 않다. 세계는 ‘나’의 주관적 인식과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세계와 나의 관계는 우연적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이며, 선택적이라기보다는 강압적이다. 그 세계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걸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걸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다. 세계는 무자비하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우리는 거대한 대륙으로 대륙을 감싸안은 대양으로 연결돼 있다.

그런 무자비한 세계를 나는 소심하게 여행한다. 매일 수영을 하고, 산책하며 책을 읽는다. 수영은 내 위태로운 배, 독서는 내 작은 돛이다. 그리고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 북극성, 내 소심한 여행의 길라잡이가 있다. 이상헌은 그런 나의 북극성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다. 그에게 2025년, 그토록 낯설고 동시에 식상하며 무자비한 세계의 흐름을 회고해달라고 청했다.

분열하는 세계: 미국의 불안, 중국의 자신감
‘2025 회고’

질문∙정리: 민노
답변: 이상헌

1. 분열하는 세계: 미국의 불안, 중국의 자신감

세계는 분열하고 있다. 두 조각이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다층적이고 다원적으로 분열한다. 이런 분열 속에서 미국은 아주 공격적인 양상을 띠고, 중국은 그런 미국 모습과는 대비될 정도로 온건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이 아닌 그 내실로 평가한다면, 미국은 위축되고 중국은 오히려 강건하게 글로벌 리더를 자임한 2025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아주 역설적이다. 미국은 표면적 공격성에 비례하게 중국의 위상과 자신감은 공고해졌고, 그런 중국과 대비해서 미국의 불안은 가중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리더십은 미국이라는 ‘적대적 짝패’에 대한 반응과 반작용으로 더 확고해졌다. 적어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중국은 글로벌 리더십에서는 미국보다 우위에 섰고,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다.

폴 크루그먼(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은 최근 마틴 울프와의 대담에서 미국은 중국에 많이 밀려 있다고 평가한다. 미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건 중국이 아니며, 오히려 미국이 중국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20256.12.10 올라온 울프와 크루그먼의 대담. 이번 대담 제목은 “미국 대 세계”다. 그리고 이미 많은 분야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섰다고 크루그먼은 지적한다.

미국의 표면적 공격성 이면에 깔린 미국의 불안, 그리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중국의 자신감이 서로 대비되는 한 해였던 것 같다. 특히 환경 산업 부문에서 그 대비가 두드러졌다. 2025년 중국은 1월부터 11월까지의 누적 무역 흑자가 1조 800억 달러를 기록해 역대 최초 연간 1조 달러 무역 흑자를 돌파한 나라가 됐다. 다른 나라들도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다시 미국으로 재수출하려는 전략을 취한다.

두 공룡의 각축전 틈바구니에서 선 나라들은 사정도 입장도 제각각이다. 우선 두 거인의 눈치를 보는 나라가 꽤 많다. 한편 싱가포르처럼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나라도 나온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특히 지정학적인 국가 안보 문제까지 걸려 있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다양한 생존 전략과 시나리오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2. AI (그리고 한국의 제조업)

중국과 미국은 AI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싸우고, 그 뒤를 쫓는 나라들이 있다. 이들 나라들은 어쨌든 AI에 뛰어든 나라들이다. 한국은 AI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여긴다. 미래의 밥벌이라는 건데, 실제로 AI 투자에 적극적인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AI는 세상을 두 쪽으로 나누는 것 같다. AI에 뛰어든 소수의 나라 vs. 뒤처진 수많은 나라.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진다. 마치 고속열차 같은 느낌이랄까. 마치 서울과 부산을 1시간 안에 주파하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서울-부산을 1시간에 안에 주파하는 게 우리 삶에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꼭 그렇게 빨리 갈 필요가 있나? 무엇보다 그런 빠른 기차를 위해 그에 부합한 철도를 깔 돈은 있나.

찬찬히 생각해 보면, 아직 생산성에 미치는 AI 효과는 기대보다 크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하반기부터는 AI 버블론이 크게 대두했다. 기업이 실제로 AI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외부에 비치는 것처럼 영향력이 크지 않다. 투자 대비 생산성이나 업무 효율성을 제고하는 긍정적 효과를 고려해도 수천억 달러를 투자하고 ‘난리’를 친 것에 비하면 극적인 효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버블 걱정이 좀 더 커진 거고.

한편, 한국을 생각하면, 후발주자로 이렇게 열심히 적극적으로 AI 투자하는 아주 ‘소수’의 나라가 있고, 그런 나라들 가운데서도 한국은 좀 도드라지는 것 같다. 정부가 그런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국을 바라보는 외부 시선은 ‘야 저렇게 뛰어드네?’ 그런 입장도 있고, ‘저게 될까?’ 그런 회의적 시각도 있다. 굉장히 불확실한 투자라는 것만이 확실한 상황이다. 예전 중공업, 반도체 투자 상황과 비슷하다고 본다. 다른 나라에서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본다. 부러움과 회의가 공존한다. 부러워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나라는 하고 싶어도 ‘제조업’ 베이스가 부족해서 못 하는데 한국은 그게 된다.

📌 참고: 한국의 ‘제조업 베이스’

“블룸버그 등 자료에 따르면, 제조업 강국 가운데 한국의 산업 포트폴리오가 가장 안정적이다.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보면 대만 시장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64% 수준이다. 한국은 36% 정도로, 여타 제조, 소비 산업과 비교해 보면 균형적이다. 일본도 균형은 잡혀 있으나 IT 비중(24%)이 다소 낮다. 독일은 자동차, 기계, 등 제조업 비중이 높지만, 독일 제조업은 빠르게 중국에 밀리고 있다.” (홍성국, 김도연 기자의 지난 17일 자 슬로우뉴스 인터뷰 중에서)

금산분리 이슈에 관해선 기업 내의 불공정이나 부퍠를 막기 위한 게 금산분리 원칙인데, 산업 쪽에 있는 사람이 금융을 불안하게 할 수 있고, 그 역도 성립할 수 있다. 시장 메카니즘의 공정이나 효율성 때문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할 때, 금융 조달이 쉽지 않고, 그때마다 일일이 금융권과 ‘딜’을 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의 비효율성, 변수, 비용이 많이 드니까 금산분리 완화 요구가 생긴다.

100조 “월드 이벤트” 뒤에 따라온 삼성과 SK의 금산분리?

그게 특혜라는 건 맞지만, 전략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 확정적으로 구체적인 의견을 내기는 어렵다. 다만, 그 특혜에 대한 ‘대가’를 사회적으로 고민할 필요는 있다. 대기업에 금융 지원을 할 수 있지만, 그 특혜에 따른 대가, 그렇다면 기업이 사회와 공공에 무엇을 돌려줄 것인지, 그런 ‘사회적인 딜’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세금을 늘리든지 아니면 공공에 투자한다든지. 사실 세금만 잘 내도 양반이긴 하다(웃음). 쓸데없는 독과점 추구나 소비자를 호구로 여기는 행태만 하지 않아도 고마운 일이긴 하다.

3. 극우 포퓰리즘과 미러링

극우 포퓰리즘은 어제오늘 문제는 아니다. 2025년은 그 반대편에 선 진보 혹은 리버럴의 ‘미러링’ 현상이 극우 포퓰리즘만큼 보였던 한 해 같다. 즉,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방식이 좌파 파퓰리즘 방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맘다니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다. 뉴욕시장 선거에 관해선 그 정책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까지 포퓰리즘이라고 평가하는 건 좀 과한 것 같다. 임대료 문제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혁명적(포퓰리즘)으로 보이지만, 그런 논의는 이미 있어왔다. 그리고 공짜 대중교통이나 공짜 공공교육은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 ‘레디컬’하지 않다.

한편으로 유럽은 말하는 방식으로 보면, 좌파가 우파를 미러링하는 방식으로 포퓰리즘화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그 양쪽의 극단에서 탈피하려는 목소리와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 트럼프는 누가 뭐래도 미국 제조업을 부흥하려고 한다. 그런데 건설 같은 경우에는 규제가 아주 심하다. 맨해튼 경우에는 새로 집을 짓는 게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이제 많은 이들이 ‘왜 이렇게 미국은 집값이 비싼가’, ‘건축 허가 받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가’라며 문제를 지적한다.

리버럴의 포용적이고 민주주적인 의제를 견지하면서 생산이나 제조업을 부흥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트럼프 우파에게 빼앗긴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남성 노동자’ 정치 기반을 어떻게 다시 되돌려 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 같다. 좌파적 포용성에 생산주의자적인 측면을 포괄하려는 움직임이다. 미국 민주당 계열의 목소리다. 좌파의 리포지셔닝이랄까.

그리고 유럽에서도 그런 유사한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 프랑스, 영국, 독일…할 것 없이 그렇다. 건설 분야에서는 심지어는 큰 빌딩을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 임대료를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문제의식에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공급(건물을 짓는 방식)을 늘려야 한다, 인프라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그런데 인프라에 투자하려면, 가장 큰 문제가 그 땅에 대해 ‘동의’를 받는 일이다. 생각보다 복잡하다. 통상 처음 계획보다 비용이 3~4배씩 들고 그런다. 그런데 중국은 철도를 비롯한 인프라를 뒤집어 갈아버렸다. 중국은 중앙에서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중국식으로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중국 혹은 한국식의 국가 주도, 정부 주도 방식이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케인스가 경제는 ‘수요 관리다’라고 할 때, 이제는 ‘공급’ 측면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랄까. 케인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총수요인데, 수요가 부족해서 고질적인 경제 패턴이 생긴다는 것이다. 국가가 지속적으로 수요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1933년 대공황 극복을 위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중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 TVA)가 그런 대표적인 사업이다. 지금은 그런 정책이 오히려 실패의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리버럴 쪽에서도 생각의 변화가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인 ‘TVA’법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1933.

물론 아직은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정치인이 있는 건 아니다. 맘다니가 이런 변화의 상징에 가깝긴 하지만, 아직은 평가하기 어렵다. 맘다니는 아직 임기를 시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4. 산업 안전, 터닝포인트

계엄은 일부러 제외했다. 그러면 남는 건 산업 안전에 관한 사회적인 관심이다. 이렇게 산업 안전에 관해서 모든 레벨에서 논의가 진행된 경우는 이전에 없었다. 정치권에서도 적극적이고, 이런 계기를 통해서 ‘터닝 포인트’가 생길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이런 관심이 ‘현장’의 변화로 이어질까? 시스템 자체를 바꿔낼 수 있을까? 그게 핵심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계속 이어지는 사망사고로 증명됐다. 유보적인 관점으로 말하는 이유는 정치적인 움직임, 공공의 관심이나 시스템의 변화는 매우 긍정적임에도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가 아직 잘 전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굳이 대규모 파업이나 시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언론 반응을 통해 추정컨대 노동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상시적인 창구랄까, 소통의 통로랄까, 그런 현장 목소리를 전달하고 이어주는 움직임, 장치와 기구, 제도적 뒷받침이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현장 목소리는 아주 중요한 ‘퍼즐 조각’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어쩌면 ‘터닝 포인트’로 역할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 대다수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쁘다. 그래서 기업이 조금 위험하더라도 더 일하자고 하면 노동자들이 그만하자고 해야 하는데, 현장에서 그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더는 노동자 희생 없이 변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도와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게 정부 입장인데, 특히 대통령의 구체적인 언명은 그런 ‘안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보인다. 특히 중소기업과 같은 작은 규모에서는 그런 지원과 움직임이 필요하다. 현장 노동자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도 필요하다. 현장 목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고, 항상 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쿠팡 노동자들 이야기는 달랐다)

5. 쿠팡을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 ‘쿠팡을 생각한다’는 모멘템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플랫폼, 대리전, 입장들). 경쟁적인 구조에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런 혁신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독점이 완성되면 혁신은 멈춘다. ‘창조적 파괴’를 제창한 슘페터가 사회주의를 싫어했던 이유가 독점 때문이다. 시장의 독점, 독점이 완성되면 혁신은 사라진다.

경쟁을 통해 독점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많은 나라의 ‘반독점법’은 그 기업을 강제로 분할해버린다. 한국의 공정거래관련법은 유사한 조항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좀 많이 부족해 보인다. 한국의 반독점법은 한국의 일반적인 대기업을 대상으로 짜여진 것이라서 ‘플랫폼’ 기업인 쿠팡에 적용하기엔 부족하다. 적확하지 않다. 기존 반독점법은 소비자 보호에 치중하고 있다. 핵심은 플랫폼 자체의 독점 분산이다.

한국의 법체계가 아직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비스 산업에서의 독점 규제에는 취약점이 있고, 백화점 담합 규제 같은 제도로 플랫폼을 규제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아직 우리가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 문제가 ‘쿠팡’으로 대두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느 쪽으로든 의미 있는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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