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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 이 글은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에서 이어집니다. 

스티븐 크라센 박사(Dr. Stephen Krashen, 출처: alchetron https://alchetron.com/Stephen-Krashen) 그의 웹사이트 http://www.sdkrashen.com 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스티븐 크라센 박사(Dr. Stephen Krashen, 출처: alchetron) 그의 웹사이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초 크라센은 [제2언어 습득의 원리와 실제] (1981) 1에서 자신의 제2언어 습득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다섯 가지 가설을 제시합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습득과 학습은 전혀 다르다.
  2. 습득에는 자연스러운 순서가 있고, 이를 거스를 순 없다.
  3. 학습된 것은 순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발화에는 쓸 수 없고 모니터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4. 적절한 인풋이 충분히 주어지면 언어습득은 저절로 된다.
  5. 언어습득 과정에 정서적 장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크라센은 각각을 다음과 같이 명명했습니다.

  1. 습득-학습 구분 가설 (The acquisition-learning distinction)
  2. 자연 순서 가설 (The natural order hypothesis)
  3. 모니터 가설 (The Monitor hypothesis)
  4. 인풋 가설 (The input hypothesis)
  5. 정의적 필터 가설 (The Affective Filter hypothesis)

오늘은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첫 번째 가설 즉, ‘습득과 학습은 구별된다’는 가설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스티븐 크라센, [제2언어 습득의 원리와 실습]

스티븐 크라센, [제2언어 습득의 원리와 실습] (1981, pdf)에서 제2언어 습득에 관한 자신의 핵심 가설을 밝혔다. 외국어 교육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풋 담론’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저작.

습득과 학습은 다르다:
THE ACQUISITION-LEARNING DISTINCTION

먼저 크라센은 습득과 학습이 다르다고 가정합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전.혀. 다르고, 아예 겹치는 부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크라센의 표현을 빌리자면 습득과 학습은 서로 구별된 독립적(distinct and independent) 과정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직접 밝히죠.

‘습득’이란?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이 ‘습득(acquisition)’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동의 언어습득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아이가 ‘자, 이제 엄마 뱃속에서 나왔으니 좀더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워볼까?’라고 작정하는 일은 없죠. 자신을 둘러싼 언어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든 알리려 애쓰고, 다양한 의사소통 상황에 끊임없이 ‘던져지면서’ 모국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동의 언어 습득은 말을 배우기 위해 연습하고 노력한 게 아니라 살다보니 말이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모국어를 어느 정도 습득했다 하더라도 해당 언어의 문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국어 문법을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는 것은 대개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빠나 엄마, 언니 혹은 형이 ‘자 오늘은 한국어 어순에 대해 공부해 볼까?’라며 언어를 가르쳐 주진 않죠.

결과적으로 영어를 어느 정도 공부한 성인이라면 한국어 문법 체계보다는 영문법 체계를 설명하는 게 더 쉽습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자, 오늘은 맘 잡고 한국어의 '은는/이가'를 정복해 보자.' 이렇게 우리말을 배운 분은 없겠죠?

‘자, 오늘은 맘 잡고 한국어의 ‘은는/이가’를 정복해 보자.’ 이렇게 우리말을 배운 분은 없겠죠?

사실 모국어를 아는 것은 몸의 구조와 기능을 아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구조와 기능을 명확하게 설명하진 못합니다. 이를 제대로 설명해내기 위해서는 의학 그중에서도 해부학 지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학습’이란? 

학습은 이와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교실이나 학원에서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입니다.

한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A어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회화를 배우려고 네이티브 스피커반을 골랐죠. 수업에 가면서 이런저런 기대를 할 겁니다. 강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거기에 어떤 어휘나 문법, 관용표현이 쓰였는지 관심을 둘 것입니다.

이렇게 의도적인(intentional) 배움의 과정을 학습(learning)이라고 부릅니다. 학습은 배우려고 배우는 것입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아동이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과는 다르죠.

크라센이 생각하는 습득과 학습. 그는 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없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성인도 모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크라센이 생각하는 습득과 학습. 그는 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없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성인도 모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크라센은 습득과 학습은 전혀 다른 과정이고, 둘 사이에는 공통된 영역이 없다고 말합니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겹치는 데가 없다는 주장(a non-interface posi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춘기 이후에도 언어습득기제(LAD)는 살아있다!

크라센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국어 습득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인 촘스키의 언어습득론을 차용합니다. 지난 글에서 살핀 바와 같이 촘스키는 인류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언어습득기제(Language Acquisition Device: LAD)를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어떤 언어든 쉽게 습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문제는 촘스키의 이론이 모국어 습득을 설명하는 이론이라는 점입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어를 습득하는 과정에 관해서는 그다지 깊은 통찰을 줄 수 없었죠.

'변형생성문법'을 제안한 노엄 촘스키 (위키미디어 공용)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C%97%84_%EC%B4%98%EC%8A%A4%ED%82%A4

노엄 촘스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촘스키의 언어이론을 수용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모국어 습득을 담당하는 언어학습기제의 역할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이를 대략적으로 분류하면 다음 세 가지 견해가 도출됩니다.

  1. LAD에 완전히 접근 가능하다 (a full-access view): 모국어건 외국어건 언어를 배울 때 LAD의 기능이 충분히 활용된다는 견해.
  2. LAD에 부분적으로 접근 가능하다 (a partial-access view): LAD가 사라지지는 않으나 뇌의 변화 등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해 LAD의 기능이 점차 제한된다는 견해.
  3. LAD는 외국어 학습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no access view): LAD의 기능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퇴화되며 사춘기 이후라면 전혀 접근할 수 없다는 견해. 이후 언어습득은 여타의 다른 지식을 배우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짐.

크라센의 견해는 이 중 ‘LAD에 완전히 접근 가능하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LAD는 사춘기 이후에도 완벽한 기능을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성인이 아동과 완벽히 같다는 건 아닙니다. 특히 성인이 특정 언어의 발음을 습득하는 능력은 아동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죠. 다만, 근본적으로 성인도 아동과 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습득(acquisition)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언어를 규칙(rules)이 아닌 메시지(message) 즉,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인이든 아동이든 구조(structure)가 아니라 의미(meaning)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울 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인 학습자 여러분도 용기를 내세요!)

그는 자꾸만 학습(learning)을 하려는 학습자들이 무척이나 못마땅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배우려고 드니 배우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학습하려 하는 게 문제인데 학습의 효율을 높이려 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에게 언어습득의 열쇠는 습득(acquisition)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겨진 질문

지금까지 스티븐 크라센의 언어습득이론의 핵심 가정을 이루는 ‘습득/학습 가설’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크라센의 가설은 당시 획기적인 주장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후 외국어 교사 및 연구자들은 그의 주장에 적지 않은 비판을 가하였습니다. 몇 가지를 열거해 보겠습니다.

타인이 만든 질문에 끌려다니 않고, 스스로 문제를 창조할 수 있기를.

(1) 습득과 학습은 정말 겹치는 부분이 없을까? 학습을 하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습득이 되는 경우는 없을까? 습득 과정에서 의식적인 노력으로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 경우는 없을까?

(2) 영어를 온전히 외국어로 배우는 상황에서 습득만을 고집하는 게 현실적일까?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습득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게 가능할까?

(3) 크라센에 따르면 언어습득에 있어 구조와 규칙을 의도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많은 문법서와 문법수업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여러분들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서 크라센의 이론은 어떤 함의를 지닐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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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성우
초대필자, 응용언어학자

성찰과 소통, 성장의 언어 교육을 꿈꾸는 리터러시 연구자입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라는 관점에서 영어교육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산문집 [어머니와 나]를 썼고, ‘영어논문쓰기 특강’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작성 기사 수 : 7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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