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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6일(현지시각) 미국 연방 대법원은 대법관 5:4로 동성 결혼에 합헌 결정했고, 이로써 미국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이는 세계적 추세라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끼리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나라가 존재합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지난 2014년 12월 서울시민인권헌장 “성적지향 및 성별 정체성”이라는 문구를 헌장에 넣었고, 이를 통과시켰지만, 결국 서울시는 이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선포를 거부했습니다.

여전히 동성애에 대해 “전 아무튼 반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성애 마귀”라는 증오와 혐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울려 퍼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동성애를 ‘인권의 항목’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슬로우뉴스는 미국의 동성 결혼 합헌 결정에 즈음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글로컬포인트의 기고를 특별연재합니다. (편집자)

  1.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을 통해 만난 혐오와 사랑
  2. 성적 수치심과 혐오의 프로파간다: 증오로 성장한 개신교 우파
  3. 보수 개신교계의 생존 전략: 미 군정에서 2010년 이후 행동 그룹까지 (상) 
  4. 보수 개신교계의 생존 전략: 동성애와 진보를 사회악으로 만들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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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sense] 인터넷은 문화 전쟁터다.

다양한 의견이 부딪치고 대결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 전장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검색어를 넣으면 온갖 혐오 발언들이 튀어 오른다. 그중에는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을 통해 동성애자를 혐오스럽게 그리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표적으로 2013년 신문 광고로 실렸던 한 ‘양심 고백’을 들 수 있다. 그는 과거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회개하고,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동성애자의 ‘더러운’ 성생활을 폭로한다. 예컨대 ‘찜방’에 대한 묘사라던가, ‘식’으로 말해지는 취향 중심의 연애 행각, 항문성교와 AIDS에 대한 공포 조장 등이 그 내용을 채운다.

한 동성애자의 양심 고백? 

동성애 광고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은 불쾌와 혐오를 통해 오히려 독자를 매혹시킨다. 그리고 그런 ‘불쾌의 매혹’ 속에서 동성애자를 혐오 대상으로 구성하며, 동성애자 당사자에게 모멸감을 주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이런 혐오 발화는 지나치게 파편화되었거나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왜곡되었거나 편향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면서 동성애자 개개인의 삶을 제도적, 실존적인 위기로 내몬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로의 변화를 막고 그런 변화의 주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혐오의 프로파간다, 그 중심 개신교 우파

‘혐오의 프로파간다’에 기대는 반(反)동성애 운동의 중심에 한국 개신교 우파가 있다.

이 글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과 깊게 연루된 한국 개신교 우파가 성적 수치심을 거쳐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더불어 어째서 그들이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정동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방법론으로 취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 우파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기반을 둔 원리주의적이고 극단적인 교리해석을 선보이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세속화된 방식으로 정경유착을 통해 거대한 시장을 형성해 왔다.

Beatrice Murch, CC BY https://flic.kr/p/etbXm
Beatrice Murch, CC BY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다큐멘터리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 우파의 동성애 혐오발화는 단순히 종교적 믿음이라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라는 제도와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혐오 자체의 문제다.

‘증오’로 성장한 개신교 우파 

개신교 우파가 해방 이후 교세를 확장하고 한국 사회 기득권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대었던 구조와 지금 개신교 우파의 반동성애 운동을 추동하고 있는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은 흥미롭다.

김진호는 해방을 전후해서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의 조우 속에서 한국 교회가 성장할 때 공산주의와 북한체제에 대한 ‘증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증오는 개신교 우파의 ‘마음의 제도’였다. 이때 1950~1960년대에는 반공에 기댄 ‘파괴적 증오’였던 것이 1960년대에서 1987년에 걸치는 기간에는 발전주의에 기댄 ‘생산적 증오’로 전환한 것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함께 진동했음을 보여준다.

‘파괴’에서 ‘생산’으로의 전환은, 해방 후 한국 정부가 반공주의와 인민주의에 기대어 국가 정체성을 세우는 데 집중하고, 군사정권 이후 ‘희망과 발전’이라는 긍정의 수사에 기대어 획일적인 산업화, 서구화를 추구했던 것과 정확히 그 궤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1일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통곡기도회'. 이 날 기도회에선 7가지 죄목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했는데, 그 중에는 △ 붉은악마 △ 국가보안법폐지 저지  △ 사립학교법개정 저지△ 북한 구원이 포함됐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015108.html) 하나님앞에 죄책 고백을 했다.
2004년 11월 1일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통곡기도회’. 이 날 기도회에선 7가지 죄목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는데, 그중에는 △붉은악마 우상숭배 회개 △국가보안법폐지 저지 △사립학교법개정 저지△북한 구원이 포함됐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그런데 그 증오라는 마음의 제도를 추동하고 그 성격을 규정한 문화적 바탕은 성별 이분법에 기반한 남녀의 성 역할 구분이라는 가부장제적 성별 구조였다. 김진호는 이처럼 젠더화된 교회의 성격을 ‘과잉 남성성’이라 설명하고(김진호, 111), 김나미는 과잉 남성적 개발주의의 ‘주도적 남성성’으로 설명한다(김나미, 282).

전통적인 이성애 중심주의와 남성중심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가 한국 개신교 우파의 조직 성격과 작동 체계를 결정짓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고,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가 전일적인 근대화를 추동했던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남성 지도자와 헌신적인 여성 내조자를 바탕으로 기업과 교회, 정치권력이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기업과 교회와 정권이 세습된다.

정치·경제·교회의 닮은꼴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셈이다.

국회 교회

새로운 ‘증오’의 필요성 

이렇게 남성성을 중심으로 하는 ‘증오’에 기대고 있던 한국 개신교 우파는 1990년대 민주화와 소비사회화에 영향을 받게 된다.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의 체제와 “너무나 닮은 개신교의 제도와 담론은 민주화 이후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타인의 취향과 신념에 대한 배타적인 일방주의는 소비 사회적 주체가 된 자존성 강한 시민들에게 지체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김진호, 122)

그리고 이는 개신교 우파의 성장 둔화와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에 교회의 시장화와 함께 개신교 내에서의 신자 유치를 위한 무한경쟁이 시작되면서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개신교 우파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발해내는 것이 전통적인 반공주의로부터 게으르게 되살려 낸 ‘종북’이다.

그 외의 다양한 소수자들, 특히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여성, (성적 규제를 벗어난) 10대, 그리고 (무조건 성으로 환원되는) 동성애자와 같은 ‘성적으로 문란한 소수자들’이 덧붙여졌다. ‘외부의 적’이라는 수사는 “상실감에 빠진 개신교 신자에게 목표 의식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이는 “여러 극우 기독교 베이스의 인터넷 미디어, 그리고 온·오프라인의 극우 네트워크 조직이 탄생”으로 이어진다(김진호, 127-128).

Zing Wong, CC BY SA https://flic.kr/p/9fUej7
Zing Wong, CC BY SA

주도적 남성성의 위기

이때 ‘종북’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핵심적인 적대의 대상으로 성적 소수자들, 특히 남성 동성애자가 등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개신교를 지탱하고 있었던 주도적 남성성이 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주도적 남성성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여성주의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신사회 운동의 성과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경제위기 등을 이유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놓인다.

이 시기와 맞물려 등장한 “동성애자 인권 운동, 혹은 이반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운동을 주도했던 LGBT 조직들”은 “헤게모닉 남성성에 대한 진보적인 저항”의 주체가 되었다(김나미, 287). 개신교 우파는 이런 헤게모닉(주도적) 남성성의 위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우려했는데, 이런 위기는 곧 기존의 성별 위계와 성 규범에 변화가 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 우파가 기대고 있었던 효율적인 성별체계를 뒤흔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 혼란마저 불러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 안에서 한국 개신교 우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서 ‘성소수자’ 특히 주도적 남성성의 허상을 폭로하는 존재로서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한다. 여기에서 증오의 프로파간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미묘하게 그 결을 달리하는 혐오의 프로파간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전면전은 모멸감을 주고 수치심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그야말로 ‘수치스럽게 하기’가 혐오를 생산하는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의 문화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guy masavi, CC BY SA https://flic.kr/p/pckUnm
guy masavi, CC BY SA

왜 수치심인가? 

그렇다면 왜 수치심일까?

수치심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마음이다. 분노하거나 울거나 웃거나 행복해하는 동물은 많지만,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는 동물은 인간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매우 ‘인간적’이라는 의미에서, 수치심은 또 한편으로 개인의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Grey World, CC BY https://flic.kr/p/bo4aQq
Grey World, CC BY

수치심은 그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의 문제이며, 동시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리즈 콘스타블은 이처럼 수치심이 개인적, 간주체적,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복잡한 상태를 “상관적 문법(relational grammar)”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2014년에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12세 어린이 성폭행 3년 구형’ 사건에서도 이런 상관적 문법이 작동하고 있다. 피해자는 성폭행을 ‘공포’로 경험했지만, 어머니가 그 사실을 듣고 음독하는 순간 이것은 그저 두려운 일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수치스러운 일’로 각인된다.

ⓒYTN  http://www.ytn.co.kr/_ln/0103_201410021951496240
ⓒ YTN

그리고 3년 구형의 원인인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음’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적 성 관념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한다. 이처럼 상관적 문법 안에서 피해자의 공포는 수치와 중첩되거나 혹은 수치로 전환한다. 그리고 사회는 다시 그런 수치심을 ‘성’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고 그를 둘러싼 도덕과 규범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한다.

상관적 문법과 그 악순환의 고리는 수치심을 사회의 관습과 도덕을 전달하는 일종의 그릇으로서 작동하게 한다. 수치심이라는 정동이 성이라는 문제 있어 “사회적 상호작용의 핵심적인 규제담당자”(Johnsohn&Moran, 8)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수치심, 자기 파괴적 고통 

또한 수치심은, 만회할 수 있는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죄책감’과 달리, 개인의 정체성에 달라붙어 돌이킬 수 없는 근본적인 고통을 준다. 사회의 성적 규범은 ‘온전한 성’, 즉 ‘인종적으로 주류인 이성애 비장애인 남성의 성’으로부터 변별해 낸 차이에 바탕을 둔 몸, 섹슈얼리티, 성적 정체성을 수치심의 공간으로 구성하고, 그에 기대어 제도적 규범을 견고하게 만들고 영속하게 한다. (이때 ‘차이’란 오직 규범적인 성이 그것을 ‘차이’로 인식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특성으로 부각된다.)

개인들은 자신이 여자라서, 동성애자라서, 트랜스젠더라서, 장애인이거나 혹은 이인종이라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수치심은 “한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에 깊이 자리 잡고 있고”, 그래서 “쉽게 용서될 수도 없다.”(Johnsohn&Moran, 2) 그렇게 수치심은 사회의 규범적인 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강력한 기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수치심의 효과는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악성이다.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바닥으로 꺼지고 싶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수치심에 대한 은유가 보여주듯이 수치심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띤다.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을 손상”시키며, 자신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한다. 수치심은 개인을 “깊은 수동의 상태(Wurmser, 78)”로 몰아넣고, 이런 수동의 상태는 또 다른 수치심을 낳는다.

수치심과 모멸감의 관계 

수치심은 그 효과가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되어 온 방법론이자 가장 파괴적인 방법론 중 하나다.

그리하여 개신교 우파는 대중이 선고하는 ‘명예형’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적 혐오 발화를 수행한다. 그것은 때로는 직접 수치심을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욕은 모멸감 주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 모멸감은 기실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모멸감은 부당하다는 인식과 억울함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므로 수치심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모멸감은 분노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분노하라!’라는 요청이 보여주는 것처럼, 분노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다. 모멸이 수치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여기에서 개신교 우파가 혐오 발화를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만성적인 ‘망신주기’는 점차로 개인에게 타인이 강요하는 수치심에 굴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결점 있고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효성 있는 환상, 혐오와 수치 

원죄와 수치의 수사가 지니고 있는 자기 파괴적 속성의 효과에 익숙한 개신교 우파는 스스로 ‘포비아’(두려움, 공포)라는 ‘만성적인 질병’이 되고자 한다. 견고한 성별 위계에 균열을 내는 성소수자들이 펼쳐 보이는 전복의 에너지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은 혐오가 필요하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단순히 ‘이건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다’라고 수치의 수사를 무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극복되거나 폐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혐오와 수치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에 기대고 있는 환상이지만, 명백하게 실효를 발휘하고 있는 환상이다. 수치심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상관적 문법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개인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위에서 그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개인에게도 강제함으로써 수치심의 거미줄을 친다. 이 거미줄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촘촘하게 그/녀의 삶을 옥죄어 온다.

2013년 11월 3일 오후 서울 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 맞이 한국 성소수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해외 협력자들의 선언문 발표 기자회견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694987.html
2013년 11월 3일 오후 서울 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 맞이 한국 성소수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해외 협력자들의 선언문 발표 기자회견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똥이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혐오는 증오보다 그 실체를 포착하기 힘들다. 스튜어트 월턴은 혐오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혐오의 촉발이 침, 콧물, 가래, 귀지, 오줌, 똥, 정액, 피(특히 생리혈) 같은 고약한 신체 분비물이나 썩거나 곪는 생물학적 과정의 구체적인 예에 뿌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월턴, 141)

즉, 혐오는 깨끗하고 안전한 주체의 견고한 경계를 위협하는 더럽고 천한 것(정신분석학적 용어로 하자면 비체적인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일견 정확한 설명인데, 우리는 ‘똥’을 혐오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혐오의 대상이 실제로 나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거나 혹은 나를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들은 안정적인 정체성의 감각을 유지하는데 위협이 되기 때문에 배제되고 타자화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내가 단정하고 깨끗한 존재이기 위해서, 내 몸 안에서 나온 똥은 더러운 것이 되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즉각적으로 처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똥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똥

혐오, 정체성 형성을 위한 타자화

실질적이거나 물질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 위험한 것, 불쾌한 것,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로서 여겨지는 것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혐오란 우리 시대에 점차로 불안정해지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혐오란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가 선보였던 것과 같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적대가 제거된 시대에 어떤 집단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등장하게 되는 타자화인 셈이다.

즉, 성적 소수자성이란 그 자체로 이성애 남성 한민족이라는 낡은, 그리고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에 균열을 내겠다고 위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성소수자의 시민권을 의제로 내건 운동들은 그에 적극적으로 균열을 내기 때문에, 혐오 대상이 된다.

개신교 우파만이 문제는 아니다. 혐오는 모든 총체성이 사라지고 거대한 담론이 죽어버린 시대를 숙주로 성장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오랜 목표를 달성했다고 상상하지만, 실은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다. 혐오는 이런 시대 속에서 반동적인 방식으로 정체성의 불안을 극복하고 복고적으로 견고한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되어버린다.

Alex Pepperhill, CC BY ND https://flic.kr/p/cUuknb
Alex Pepperhill, CC BY ND

혐오의 시대, 모멸의 문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간에서 혐오가 꿈틀거린다. 이는 정치적 입장이나 종교적 믿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나와 다른 타인을 배제하고 공격하는 수단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만성적인 망신주기”, “만성적인 혐오 발화”가 어떻게 개인에게 수치심에 굴복하게 하는가를 떠올린다. 이런 ‘혐오 – 만성적인 망신주기 – 수치심’의 삼각형은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서 타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모멸의 문화’가 지배적이 되는 것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신교 우파의 혐오 발화가 모멸감을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일베에서의 여성 혐오, 호남 혐오, 이방인 혐오 역시 모멸감을 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디지털 시대의 ‘모멸의 문화’는 과거 공동체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주기(public shaming)’가 그러했던 것처럼 배타적인 공동체성을 구축하고 그 공동체의 내부 규범을 강화한다.

이것이 개신교 우파의 혐오 발화를 특정 종교의 문제, 혹은 특정 종교인의 문제로만 국한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좀 더 광범위하게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반동적 복고주의와 모멸의 문화를 고민해야 한다.

Moyan Brenn, CC BY ND https://flic.kr/p/eNgbFm
Moyan Brenn, CC BY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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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나미, 「한국 개신교 우파의 젠더화된 동성애 반대 운동」, 『말과 활』 7호, 일곱번째숲, 2015.
김진호,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모멘툼』 vol.01, 자음과 모음, 2014.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 지성사, 2014.
스튜어트 월턴, 『인간다움의 조건』, 이희재 역, 사이언스 북스, 2012.
Erica L. Johnson·Patricia Moran eds., The Female Face of Shame,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Léon Wurmser, The Mask of Shame, Baltimore: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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