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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어딘가에서 리어카를 끄는 여성 노인을 본 적이 있다면, 그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우리는 그들을 ‘폐지 줍는 할머니’라 부르며 지나친다. 조금 더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그래도 무언가 일을 하시니 다행’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 속엔 잔인한 위안이 숨어 있다.

소준철의 책 『가난의 문법』(푸른숲, 2020)은 이 익숙한 풍경의 의미를 정면으로 묻는다. 저자는 도시사회학자이자 현장 연구자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의 한 지역(북아현동 일대)에서 재활용품 수집 노인 여성들을 장기간 관찰하고 인터뷰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은 통계로 요약할 수 없는 ‘가난의 경로’, 즉 한 개인이 어떻게 노년기에 이르러 거리 노동자가 되는지를 시간 단위로 따라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알게 된다. 가난은 결과가 아니라 문법이라는 것을.

가난은 문장처럼 반복된다

책의 제목이 ‘가난의 문법’인 이유는 명확하다. 문법은 규칙이다. 누군가는 다른 문장을 쓰고 싶어도, 문법이 허락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노년 빈곤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살았어도, 성실히 세금을 냈어도, 한국 사회의 문법 속에서 늙는다는 것은 불완전한 문장이 되는 일이다.

소준철은 “도시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을 관찰한다. 그는 ‘윤영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그녀의 생애를 따라간다. 한때 북아현동에 단독주택을 가졌던 윤영자는, 남편의 퇴직과 질병, 자녀의 실패, 재개발로 인한 이주와 부채를 거치며 점점 추락한다. 결국 그녀는 폐지 수집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야기는 통계나 설문이 아닌 시간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책의 각 장 제목이 “13시 15분”, “14시 30분”, “16시 30분”인 이유다.

하루의 시간표 속에 가난이 기록된다. 언제 길로 나가야 폐지가 많을지, 어느 고물상은 더 잘 쳐주는지, 리어카를 어디에 세워야 단속을 피할 수 있는지. 노년의 하루는 생존의 문법으로 짜여 있다.

‘노오력’ 신화의 붕괴…“쓸모없는” 인간의 쓸모

한국 사회는 가난을 여전히 ‘의지의 문제’로 본다. “열심히 안 해서 그렇지”, “자식 잘못 둔 탓이지.” 이런 말들은 윤리의 탈을 쓴 폭력이다. 『가난의 문법』은 이런 통념을 깨부순다.

가난한 노인은 더 열심히 일한다. 폐지를 더 많이 모으려면 남들보다 일찍 나와야 한다. 길바닥을 뒤지며 무게 50 kg짜리 리어카를 끈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인 세계에서 경쟁은 치열하다. 이 세계엔 연금도, 노동법도, 휴식도 없다. 노인은 여전히 일하지만, 일을 해도 가난하다.

한국의 노인 고용률은 OECD 상위권이다. 그러나 노인 빈곤율도 OECD 1위다. 이 모순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하는 노인들이 가난을 탈출하지 못하는 구조, 바로 그것이 ‘가난의 문법’이다.

소준철은 이 구조를 ‘쓸모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산업화 시대의 노인은 여전히 가족과 공동체에서 역할을 가졌다. 그러나 도시화·핵가족화 이후, 노인은 더 이상 필요한 노동력이 아니다. 그는 생산에서 배제되었지만, 소비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는 그를 ‘쓸모없다’고 부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폐지 수집 노인은 사회가 만든 환경 산업의 말단 노동자다. 그들이 모은 종이와 병, 캔은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 순환한다. 그들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 환경복지’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노인의 쓸모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인정받지 못할 뿐이다.

도시의 구조, 정책의 빈틈

책은 도시 공간이 어떻게 노인을 밀어내는지도 추적한다. 서울 북아현동은 한때 중산층 주거지였다. 그러나 재개발로 인해 세입자 노인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공공임대주택은 멀고, 기초연금은 턱없이 적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길 위의 노동’뿐이다.

노인 일자리사업도 한계가 뚜렷하다. 저자는 지적한다. “일자리 사업은 ‘일한다는 체험’을 제공하지만, 생계를 보장하진 않는다.” 대부분의 노인 일자리는 하루 3시간, 한 달 27만 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경쟁률이 높아 “취업시험”을 봐야 한다. 노년은 다시 경쟁의 트랙 위로 불려나온다. ‘일하는 노인’이 이상적인 모델이 된 사회에서, 노인은 쉼을 ‘특권’으로 느낀다.

『가난의 문법』의 미덕은 학문적 분석보다 감정의 절제에 있다. 저자는 관찰자와 참여자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오간다. “불쌍하다”는 말 대신, 존중과 거리두기로 노인을 그린다. 소준철은 노인을 ‘대상’이 아니라 ‘시민’으로 기록한다. 책의 문장은 간결하지만 문학적이다.

“그녀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 어제와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나가야 내일이 있다.”

소준철, 『가난의 문법』

이 한 문장은 통계 1줄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가난은 데이터가 아니라 생활의 언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난한 여성들 그리고 ‘이중의 그림자’

소준철이 주목한 인물 대부분은 여성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의 노인 빈곤은 젠더화되어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 6년 더 오래 살지만, 노후소득은 훨씬 적다. 그들은 가사노동으로 국민연금 가입에서 배제되었고, 비정규직·단시간 노동을 반복하며 노년에 이르렀다.

따라서 『가난의 문법』은 단순한 노인 빈곤 연구가 아니라, 여성의 생애사 연구이기도 하다. 남성 노인은 사회적 역할 상실로 인한 고립을 겪지만, 여성 노인은 생계 유지와 돌봄 책임을 동시에 짊어진다. 이중의 그림자다. 책 속 여성 노인들은 “집이 아니라 거리에서 살아남는다.” 그들에게 폐지 줍기는 선택이 아니라 존엄의 마지막 형식이다. 일을 해야 비로소 자신이 ‘쓸모 있다’는 감각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의 문법』은 복지 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국가 정책은 늘 ‘복지 대상’을 전제한다. 그러나 폐지 수집 노인은 그 틀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공식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그림자 노동자’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소득 산정 기준에 따르면, 폐지 수입은 ‘근로소득’으로 간주되어 기초수급액이 줄어들 수 있다. 즉, 일하면 손해다. 이제 가난의 문법은 완성된다. 일하지 않으면 굶고, 일하면 더 가난해진다.

이 악순환은 개인의 탓이 아니다. 정책이 ‘노동의 윤리’를 모른 채 숫자로만 인간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가난의 정치, “나도 옛날엔 잘살았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사회학자 이전에 기록자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는 인터뷰 대상자들을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기억한다. 윤영자, 정순자, 남정자…. 이 이름들은 사라질지도 모를 ‘가난의 역사를 기록하는 문장’이 된다.

소준철은 “가난의 문법은 사람의 말투와 몸짓에 배어 있다”고 말한다. 노인이 카트를 끌며 중얼거리는 “이놈의 종이값이 또 떨어졌네”라는 한 마디 속에는 시장 구조, 국제 자원 가격, 정책 실패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 한 문장이 사회 전체의 축소판이다.『가난의 문법』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문장은 이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가난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다.”

노인은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한다. “나도 옛날엔 잘살았어.” “이 나이에 누가 도와주겠어.” 그 말들에는 수치심과 자존심이 동시에 들어 있다. 우리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해명을 요구할까? 왜 ‘가난하지만 당당하다’는 말이 칭찬처럼 쓰일까? 이것이 바로 가난의 정치다. 복지는 권리가 아니라 품성의 시험으로 변한다. 그 틀 안에서 인간은 더 작아진다.

쓸모 없음을 허락받고 존엄하게 살 수 있을 때

『가난의 문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기 때문이다. 책은 ‘불쌍한 노인’을 ‘사회적 주체’로 되돌린다. 우리의 윤리적 시선을 재구성한다. 그들의 하루를 관찰하는 일은 곧 우리의 문법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가난한 타인을 불쌍하게 본다. 이제 시선을 거꾸로 돌려야 한다. 가난한 노인을 보며 느끼는 불편함은 결국 우리가 속한 체제의 모순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순간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질문한다:

“노인이 되어도 괜찮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단지 복지의 문제를 넘어, 노년의 존엄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노인이 되어도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라 ‘쓸모 없음을 허락 받는 인간’으로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성숙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가난은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노년의 빈곤은 세대의 미래를 비춘다. ‘가난의 문법’은 노인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문법이다.

나는 이 책을 단순히 ‘사회문제 보고서’로 읽지 않았다. 이 책이 가진 힘은 태도에 있다. 소준철은 ‘관찰’과 ‘존중’ 사이의 거리를 지킨다. 그의 문장은 친절하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 균형감이야말로 사회학이 문학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서평자로서 나는 이 책이 문화 정책·기억·노동의 문제를 다루는 나의 연구와도 깊이 닿아 있다고 느꼈다. ‘지속 가능한 K-컬처 생태계’가 결국 누구의 노동 위에 서 있는가를 묻는 일이라면, 『가난의 문법』은 그 질문의 출발점에 있다.

가난을 다시 쓰는 법

가난의 문법을 바꾸는 일은, 가난한 사람의 문장을 다시 쓰는 일이다. 그들의 말을 편집하고, 삭제하고, 교정해온 사회의 습관을 멈추는 것이다.

“길 위에서 리어카를 끄는 노인들이 사라지는 사회가 아니라, 그들이 리어카를 놓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은 그 ‘놓을 수 있음’의 조건을 묻는다. 그 물음에 답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가난의 문법』은 통계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가난을 읽어낸 책이다. 한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사회 구조의 복제물이 되는지, 한 문장의 문법처럼 반복되는 빈곤의 패턴을 해부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거리에서 마주친 리어카의 쇳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그건 단순한 고철 소리가 아니다. 노동의 잔향, 존엄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외면해온 사회의 문법이다. 가난은 문장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가난을 문법대로 쓴다. 이 책은 그 문법을 바꾸라고, 아니, 다시 쓰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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