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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글에 온전히 담기길 바랍니다. 혹여 그렇지 못했다면, 어떤 비판도 겸허하게 감수하겠습니다.

제가 감히 10.29 참사 희생자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제 이름을 공개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게 저라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관계들, 의미들에서 이제 그만 해방되길 바랄 것 같습니다. 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간절했는와는 상관없이, 또 때론 얼마나 부질없고, 또 허무했던가와 상관없이… 그저 그냥 없음에서 없음으로 돌아가 쉬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게 다소 쓸쓸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그게 제 마지막 바람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다른 마음을 가졌을 참사 희생자들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든 저와 같지 않은 마음이든 그 마음을 우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참사 희생자들은 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어받은 사람, 유족은 그 마음을 대신 전할 자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권리입니다. 우리는 그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존중의 마음이 공동체의 질서를 만드는 기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존중이 없다면, 그게 무슨 공동체입니까. 무슨 어려운 법률을 따지고, 보도윤리를 언급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때와 비교하고, 무슨 무슨 사건과 비교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며칠 전 ‘기억을 기억해야 한다: 1029 이태원 참사를 함께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10.29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한 참여연대와 정보공개센터의 정보공개 및 정리 작업을 소개하고, 동참을 권하는 글이었습니다. 10.29 참사를 추모하는 일, 그 출발점은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희영 구청창은 물론이고,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이상민 행안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윤석열 대통령까지. 하지만 참사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과 명단 공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명단을 공개해야 책임자를 좀 더 효과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족에게 고인의 이름을 알리는 것에 관해 동의를 구한 뒤에, 이름을 공개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먼저 자신의 판단으로 명단을 공개하고, 그 뒤에 유족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겠다는 더 탐사와 시민언론 민들레의 방침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더 탐사와 민들레도 좋은 취지로, 고심 끝에 명단을 공개했을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더 탐사가 명단 공개 직후 그 명단을 배경으로 떡볶이 광고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분노가 치밀고, 경멸감이 생깁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습니다. 어떤 죽음도 떡볶이 광고의 수단이 되어선 안 됩니다. 시민언론 민들레의 ‘명단 공개’에 관한 기사들도 읽었습니다. 10.29 참사를 추모하는 마음,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당위가 그 낯선 이름들을 알고 나서 더 커지거나 혹은 더 작아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명단을 꾸며도 그건 그저 이름들일뿐입니다. 명단 공개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취지를 존중하지만, 먼저 유족에게 정중하게 동의를 구하고, 승낙을 받아야죠.

윤석열 대통령이 희생자의 이름도 얼굴도 없이 국화꽃만 두고 추모한다고 비판하는 것에 공감합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거냐, 아니면 국화꽃을 추모하는 거냐는 비판에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희생자 명단에 관한 입장과 당위에 관한 기사들을 쏟아내며 그것만이 ‘올바른’ 추모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모습은 참사를 굳이 ‘사고’라고 강변하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과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유족에게 동의를 구한 뒤에, 고인이 살다 간 생의 기억들을 남기는 것, 그것마저 진정으로 고인의 뜻인지는 알 길 없지만, 그 뜻을 이어받은 유족의 뜻을 존중해 하나씩 그 이름들을 새기고, 전하는 것, 그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이라고 말하는 인터넷신문 민들레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을 움직인 기사는 BBC 뉴스 코리아의 한 기사입니다. “이태원 사고: 희생자들에 대하여” (2022년 11월 1일)라는 기사죠. 이 기사는 참사 희생자가 너무 짧게 머물렀던 삶의 풍경과 남겨진 유족과 친구들의 전언을 담담하게 전합니다. 물론 이런 기사들은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참가한 후 연기자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배우 이지한(24세)
  • 사건 당일 생일을 맞아 축하하고 있었던 최보성(24)
  • 옆에 있는 여성을 구하고 있다고 친구 김대희(19)에게 마지막 목소리를 남긴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 라우(21)
  • 유족이 “멋진 천사”로 기억한 호주의 영화 제작자 그레이스 레이치(23)
  • “아들아 외출했다면서. 조심하렴”이라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전한 스티브 블레시의 아들 스티븐 블레시(20)
  • 아버지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밝은 빛과도 같은 아이”였다고 추모한 미국 켄터키대학교 간호학도 앤 기스케(20)
  • 일본 홋카이도 출신으로 한국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토미키와 메이(26)
  • 카자흐스탄 서북부 악퇴베 출신으로 러시아의 카잔연방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 중이었던 마디나 셰르니야조바(26)
배우 이지한(24),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 라우(21), 스티븐 블레시(20), 앤 기스케(20) (재인용 출처: BBC코리아, 왼쪽 상단 시계방향순으로) 

그 이야기들, 희생자들이 생전에 꿈꿨던 그 소망들, “멋진 천사”를 잃은 가족들의 전언과 “모두에게 사랑받는 밝은 빛과도 같은 아이”를 잃은 유족의 슬프지만 따뜻한 이야기는 참사의 아픔과 대비되어 저에게 이 비극의 의미를 다시금 환기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공개해서가 아니라 그 삶의 편린들이나마 저에게 잠시나마 전해졌기 때문이죠. 희생자들의 꿈과 소망의 시간을 무참히 깨뜨려버린 원인과 이유를 반드시 밝혀내고, 이들이 온전히 누렸어야 할 시간들을 빼앗아간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제가 ‘사회적 죽음’을 만날 때마다 떠올리는 문구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죽음에 대해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김현) 죽은 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정치 아닌 것이 없고, 세상에 수단과 도구 아닌 것도 없습니다. 목적과 수단이 엄격하게 분리되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그럴수록,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만은 경건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단 공개의 당위를 마치 박해받는 투사라도 된 것처럼 비장하게 이야기하는 더 탐사의 모습과 “떡볶이 참 맛있네”라고 먹방 광고를 이어서 하는 더 탐사의 모습. 그 두 모습은 기괴한 이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그건 마치 동전의 이면처럼 서로 닮아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저분들은 스스로 옳고, 스스로 정당할 것 같네요. 저 개인적으론 더 탐사가 박해받는 언론 투사인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만든 괴물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다만, 이번 일 만큼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심으로 반성하길 바랄 뿐입니다.

10.29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오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합니다. 자신의 책임이라며 가슴을 치는 현장의 공무원들이 아니라 저 위에서 이 모든 비극의 구조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에게 끝까지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당연히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는 이런 허망한 죽음이 없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다만, 명단 공개가 마치 대단한 정의이고, 그것이 박해받는 투사의 사명을 홀로 수행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더 나아가 그런 판단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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