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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은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함께 태아산재법의 협소한 시행령에 대한 비판 의견서 서명을 모으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이 글의 필자는 조승규 노무사,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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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에게는 ‘태아산재’라는 말이 생소할 것 같다. 일터의 위험 때문에 노동자가 일하다가 아프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산재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떤 위험은 노동자 본인이 아니라 노동자의 아이를 아프게 한다. 이 경우를 우리는 태아산재라고 부른다. 태아산재의 법적인 용어는 ‘건강손상자녀’이고, 태아산재법 또한 별도의 법이 아니라 관련한 산재보험법 개정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 말할 때 그나마 가장 잘 알려진 단어가 태아산재인지라 태아산재, 태아산재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아산재법, 없었던 게 놀랍고 있어서 놀라운 법

태아산재법2022년 1월 11일에 공포되었지만, 태아산재는 그 이전에도 존재해 왔으며, 사실 태아산재의 가능성을 알 수 있는 언어도 이미 우리 주변에 있었다. 화학물질에 대해서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분이라면, 아마도 CMR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을 것이다. 유해위험성을 구분할 때 가장 기본적인 분류인 CMR이란 발암성, 생식세포변이원성, 생식독성을 의미한다. 당연히 생식독성 물질, 생식세포변이원성 물질에 노출되면 자녀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생식독성 물질: 생식기능, 생식능력 또는 태아의 발생 발육에 유해한 영향을 주는 물질이다.
  • 생식세포변이원성 물질: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는 사람의 생식세포에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을 의미한다(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별표 18).

예방과 보상의 관계에서 보자면, 태아산재법은 애초에 없는 것이 이상한 법이었다. 어떤 직업병이 발생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서 산업안전보건법을 통해 예방은 하지만, 정작 노출되어 피해가 발생하면 산재보험법에서는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도 대다수가 이러한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일터의 위험으로 내 아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매우 부족한 상황을 감안하면, 태아산재법은 어떻게 보면 있는 것이 놀라운 법이기도 하다.

산재보험, 직업병의 영역은 피해 당사자의 문제제기를 통한 사회적 인식 확장을 통해서 확대되어 왔다. 골병이었던 병이 근골격계 질환이 되고, 개인의 불운이었던 암이 직업성 암이 되어 온 과정을 떠올려 보자. 태아산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터의 위험으로 아이의 건강이 손상되는 일은 이전에도 존재해 왔고, 그와 관련한 제도적인 언어도 이미 있었다. 하지만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피해는 태아산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2020년 4월 29일 대법원은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간호사들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은 것에 관해 산업재해을 인정했다. (출처: 헤드라인제주)

태아산재법의 탄생 배경: 제주의료원 간호사와 전자산업 노동자

태아산재법의 배경에서는 제주의료원 투쟁을 빼놓을 수 없다. 제주의료원에서 2009년에 임신한 15명의 간호사 5명이 유산을 하였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건강손상 없이 태어난 자녀는 15명 중 6명으로, 당시 임신한 경우 중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제주의료원에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노동조합을 통해 피해 간호사들은 발병 정황만 보더라도 직업병임이 분명해 보이는 유산과 선천성 심장질환에 대해 산재로 신청하였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유산만을 산재로 인정하고, 자녀의 건강손상에 대해서는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산재보험법에 따르면, 노동자 본인의 건강손상만 보상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녀가 태어나지 않은 유산까지는 노동자 본인의 문제로 볼 수 있지만, 자녀가 태어난 이상 자녀의 건강손상은 노동자 본인의 문제가 아니므로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주의료원 간호사 자녀의 건강손상이 업무로 인한 것이라는 점은 ‘비교적’ 빠르게 인정되었다(1심 판결 서울행정법원 2014구단50654 2014.12.19.). 인력충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보통 간호사들이 수행하지 않는 환자들의 의약품을 분쇄하는 작업까지 간호사들이 수행한 2009~2010년 시기의 유산, 선천성기형 발생률이 눈에 띄게 높았기 때문이다. (왜 그 시기가 특히 문제가 되었는지는 당시의 제주의료원 상황을 쭉 설명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거기까지는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다. 다만 그 뒷이야기도 살펴볼 만한 이야기이니 관심이 있는 분은 기사 등을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제주의료원 간호사의 업무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을 산재라고 부르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난 지 10년이 지난 2020년에서야 대법원은 이를 산재라 부를 수 있다고 정리하였다(대법원 2016두41071 2020.4.29.).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이 노동자 본인의 건강손상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지만, 임신 중 건강손상이 발생한 태아는 엄마와 한 몸(본성상 단일체)이므로 자녀의 건강손상을 엄마 노동자 본인의 산재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노동자 본인의 산재만을 고려하여 설계된 산재보험법 규정상 태아산재의 경우 여전히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태아산재에 대해서 어떻게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 어떤 급여들을 적용받을 수 있는지 등등. 그렇기에 태아산재법 제정이 주요한 후속 과제로 제기되었다. 다만,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고 그것만으로 자동으로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설사 대법원 판결이 있은 이후라도 제도를 만드는 추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와 국회가 먼저 나서서 법을 만드는 그런 이상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반올림은 2021년에 제주의료원에 이어 두 번째로 태아산재를 신청하였다. 그간 전자산업 직업병은 직업성 암(대표적으로 백혈병)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생식독성 피해도 많았다. 반도체 등 전자산업에서는 수많은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그 화학물질들 중 일부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다른 일부는 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서는 생식독성 피해가 확인되었고, 그 주범으로 지목된 화학물질은 사용이 금지되었다. 다만 그 화학물질은 한국에서는 사용되어 생식독성 피해가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전자산업에서 유산과 생리불순이 특히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연구로 드러났다.

반올림이 만난 직업병 피해자들생리불순, 유산, 불임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해 왔고, 그중 일부 피해자들은 아이가 아픈 상태로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들의 피해가 어떻게 인정되고 보호받으면 좋을까 생각하던 중 두 가지 상황이 발생해 산재신청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나는 좋은 상황으로, 제주의료원 간호사에 대하여 태아산재 인정 판결이 있었다. 이에 반올림은 대법원 판결 후속작업으로 태아산재법이 제정되면 산재신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하나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정부와 국회는 스스로 나서서 태아산재법을 제정할 의지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태아산재법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태아산재법을 만들기 위해 반올림은 2021년 초에 피해자들과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신청을 진행하였다.

산재 신청을 한 후 2021년 말까지 연내에 태아산재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외쳤으나,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법은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주요 법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연말에 태아산재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그대로 제정되었다. 제정된 태아산재법은 뒤에서 다루겠지만, 내용적으로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병 영역의 출발점으로서 큰 의미가 있었다. 어느 교수님의 말씀처럼 산재도 안 되는데 예방이 될 리는 없다. 태아산재법은 우리 사회가 업무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어떻게 보호하고 예방해야 할지 고민하겠다는 선언이(어야 한)다.

태아산재법의 내용: 자녀의 건강손상도 산재보험으로 보호된다… 단, 일부는 빼고

태아산재법 이전의 산재보험법은 노동자 본인(과 그 유족)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산재보험의 시작인 요양급여(주로 치료비)를 보면, “근로자가” 업무상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하며(산재보험법 제40조), “근로자(수급권자)”의 청구에 따라 지급한다(산재보험법 제36조). 즉 건강손상의 대상도, 보험급여의 대상도, 청구권자도 일하는 사람 노동자 본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아산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노동자가 아니라 그 아이의 건강손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강 손상의 대상이 아이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은 건강손상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 본인이므로, 보험급여의 대상 및 청구권자 또한 아이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규정하려면 새로운 법조문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91조의12이다.

여기서 문제는 91조의12가 “임신 중인 근로자”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만 반영했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도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어머니의 업무만이 자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일터의 위험으로 인해서도 자녀의 건강손상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아버지 부분을 태아산재법에서 배제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태아산재가 어머니 사례(제주의료원)로 가장 먼저 알려졌고, 태아산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아버지로 인한 경우가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법 제정 과정에서 어머니의 유해요인 노출만이 담기는 한계가 있었다.

엄마인 여성뿐만 아니라 아빠인 남성의 일터의 위험으로부터도 자녀의 건강 손상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신 중인 근로자”로 태아산재법의 요건을 제한한 것은 문제다.

태아산재의 경우 전체 보험급여 중 요양급여, 장해급여, 간병급여, 장례비, 직업재활급여가 적용되도록 규정되었다(산재보험법 제36조). 따라서 휴업급여(상병보상연금), 유족급여지급되지 않는다. 휴업급여, 유족급여, 상병보상연금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결과도 아쉽지만, 그 이유가 매우 아쉽다. 해당 급여가 적용되지 않은 이유를 요약하면 건강손상을 입은 태아는 노동자·생계부양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단기적인 시각이다. 자녀가 건강손상을 입은 시점은 태아겠지만, 언제까지나 태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자라서 그 자녀는 노동자·생계부양자가 될 수 있다. 그때 질병이 악화되거나 재발하는 경우, 장해급여로는 보호되기 어렵고 위의 급여들이 필요하다.

또한, 태아산재법은 태아산재법 연구에서 추가로 제안된 급여인 부모돌봄 휴업급여도 반영하지 않았다. 부모돌봄 휴업급여의 경우 건강손상이 있는 아이에 대한 돌봄의 필요성으로 부모가 휴업하는 경우 부모의 소득감소를 보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급여는 태아산재의 경우 부모의 돌봄 필요가 크다는 점을 감안하여 제안되었으나, 육아휴직 등 기존 제도들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법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행령의 문제: 연구 부족 상황…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산재보험은 이것이 산재라고 판단되는 경우에 보상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산재보험법과 그 하위 규정에는 어떤 경우를 산재로 볼 것인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태아산재도 이 경우를 산재라고 볼 것인지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을 위한 인정기준도 필요하다. 태아산재법은 관련성 있는 유해인자를 시행령에서 규정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인정기준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정 기준은 의학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태아산재의 경우는 의학적인 기준에 의한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학 연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동물 연구가 일부 있을 뿐,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는 없으니 우연히 문제로 드러난 경우를 대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데, 본인의 직업병보다 아이의 건강 손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훨씬 어려운 문제이고, 연구하려고 하더라도 노동자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그 아이의 데이터까지 필요하니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통상 의학적인 연구가 가이드라인의 기준이 되지만, 태아산재법의 경우에는 의학적인 연구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더불어 노동자 본인과 배우자, 그 아이의 데이터까지 필요해 연구의 난도도 매우 높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엄밀한 의학적인 잣대를 적용한다면 태아산재의 인정기준은 당연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태아산재에서는 다른 기준이 필요했다. 연구가 너무 없는 상황이니 그보다는 넓게 이 정도 선까지는 인정한다고 정해야 했다. 사실, 태아산재법은 애초에 이렇게 사회적으로 일정하게 정한 기준을 적용하여 판단하는 것을 염두하고 만든 법이었다. 그러니 노동자 본인의 산재와는 달리 상당인과관계를 요구하지도 않고, 시행령에서 구체적인 인정기준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해요인에 노출될 때 인정할지만을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부는 연구가 없다는 태아산재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의학적 연구가 부족하고 특히 인간 역학연구는 더더욱 부족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간 역학연구가 있는 것만을 인정한다는 기준을 적용하였다. 그 결과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확인한 1,484가지 화학물질 중 시행령에는 단 17개 물질만이 담겼다. 제주의료원 사건에서 법원이 산재 인정 근거로 제시한 과로, 스트레스, 교대근무도 시행령에는 담기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이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의학적 근거가 있는 유해요인을 시행령에 담은 것이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고용노동부 또한 태아산재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아서 의학적인 근거를 기준으로 하면 시행령이 협소하게 나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고용노동부는 시행령을 협소하게 만들기 위해 의학적 기준을 동원하였을 뿐이다.

태아산재법 시행령에서 배제된 수백 수천 가지 유해요인 중 2세에게 무해하다고 증명된 것은 없다. 오히려 배제된 유해요인들은 모두 부모의 생식기능과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아무 근거도 없이 이들 대부분은 태아산재를 일으키는 유해인자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협소해진 시행령이 말하는 메시지이다. 의학적 연구가 없지만, 연구가 있는 것만 인정된다는 규정을 보고 누가 태아산재를 신청하고, 누가 태아산재를 인정하겠는가? 사실상 노동부의 시행령은 산재 피해자와 조력하는 대리인에게는 산재신청을 하지 말라는 것이며, 산재 판정하는 전문가에게는 산재인정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떤 경우 무엇을 하기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노동부는 태아산재에서는 다른 인정기준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지 않음으로써, 태아산재법을 사실상 무력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주무부처 고용노동부, 도대체 무슨 일을 했나? 

고용노동부의 시행령에 대응하다 보니, 협소하게 규정된 시행령을 정당화하는 맥락은 이런 것 같다. 산재는 인과성을 판단해야 하는데 연구가 없는 태아산재가 산재 영역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적절치 않으며, 시행령은 예시적인 규정일 뿐이니 실제 판정에서 의학적인 기준보다 더 넓게 판단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다. 태아산재법은 누가 잘못된 선심을 써서 이것도 산재로 포함하자고 해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집단적으로 생식독성 피해를 겪은 제주의료원 간호사와 전자산업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직업병으로 의심하고 문제제기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복지가 아니라 산재로 들어온 것이다.

또한, 시행령은 예시적인 규정이지만, 단순한 예시는 아니다. 시행령은 노동부가 제시하는 산재인정 가이드라인이다. 가이드라인 바깥에 있어도 인정되는 경우가 물론 있지만, 그렇게 인정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다. 왜 산재로 인정되어야 하는지 그 근거들을 피해자 측이 일일이 찾아서 제시해야 하고, 그렇게 하더라도 시행령에 없으니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태아산재법이 만들어진 지도 벌써 10달이 지났는데,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그간 한 일이라곤 무엇인가? 시행령을 협소하게 만들어서 산재신청조차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 것뿐이다. 정말로 고용노동부가 해야 했던 일은 일터의 위험으로 자녀의 건강손상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알리고, 가능한 많은 피해자들이 산재신청을 통해 태아산재법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용노동부는 자기 소관 법이 만들어졌는데도 그 법을 충실히 이행하기는커녕 무력화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고용노동부의 협소한 시행령안은 본인들의 의지가 그만큼 협소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 실제로 위험이 협소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태아산재법은 자녀의 건강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유해인자에 노출되어서 자녀의 건강손상이 초래되었다면 산재로 보호하겠다는 법이다. 법의 취지에 맞으려면 고용노동부가 말하는 단 몇 가지 유해요인이 아니라 자녀의 건강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유해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현재 국회에는 고용노동부의 시행령 정치를 막기 위해 유해요인을 넓게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태아산재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2022.9.30. 우원식의원 대표발의 산재보험법 일부개정안). 국회는 이 개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켜 국회가 만든 법을 누더기로 만든 고용노동부의 행태를 엄중히 꾸짖어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만든 시행령이 곧바로 폐기되는 수모를 겪기 전에 현재 시행령안을 폐기하고 올바른 시행령안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태아산재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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