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은 미국 뉴욕에서 젊은 직장인과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명상을 서비스하는 기업 ‘더 패스'(The Path)의 설립자 디나 카플란(Dina Kaplan)이 2014년 11월 미디엄에 올린 글입니다. 원작자인 카플란의 동의를 구해 번역했습니다. (필자)[/box]
[adsense] 최근 어느 점심식사 자리에서 친구 한 명이 한탄했다. “너무 바빠서” 뭔가를 차분히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볍게 웃었다.
점심 자리는 1시간 30분 정도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는 며칠 후 있을 저녁 모임의 메뉴를 고르느라 근처 레스토랑 쪽에 잠시 들렀다. 그러고 나서 친구는 어느 컨퍼런스에 관한 회의에 참석했다. 계획에 없던 참석이었다.
아 참! 그는 꽤 잘나가는 사업가다. 자기 사무실에 돌아갔을 때 시간은 4시 30분이었다. 점심을 먹겠다고 사무실을 나선 지 4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이날 그는 하루 일정을 꽉 채워 소화했다. 그는 바빴다. 하지만 이 친구가 바빴던 것은 본인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데 따른 결과였다. 뭔가를 읽을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이 ‘읽지 않기’였을 뿐이었다.
매일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관해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선다. 이런 선택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본인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 미리 한 가지만 말해두고 싶다. 어린 자녀가 있다거나 생계유지를 위해 여러 일을 병행하고 있는 경우라면, 오늘 내가 말하려는 내용은 당신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당신은 정말로 바쁜 것이다.
반면, 내가 아는 여러 사업가와 직장인들이 자신이 바라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바쁘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진정으로 자기 삶에서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바쁘다”는 것은 어느새 우리가 늘상 하는 말이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일에 대한 합당한 변명이 되어버렸다. 인정할 만한, 때로는 자랑까지 할 만한 이유인 것이다. 점심식사를 함께한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불교승 소걀 린포체가 설파한 개념인 ‘분주한 게으름’(Active Laziness)을 떠올렸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쌓아두고는 책임감에 짓눌리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린포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사실 ‘무책임감’이다.
첫 번째 스타트업을 운영할 때 나는 이 ‘무책임감’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점심식사에 참석해 1시간 30분씩 허비했다. 중요하지 않은 파트너 관계와 이사회에 참석해 수백 시간을 낭비했다. 뭔가를 ‘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느라, 무엇을 하고 그것을 ‘왜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떤 해에는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직원 수십 명의 의료보험 등록 서류를 직접 작성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지 못해서였다.
지금 되돌아보니 분명히 보인다. 당시 나는 생각을 요구하고 전략이 필요한 일에 내 힘을 쏟기 보다, 시답지 않은 일에 몰두하면서 나 자신을 “너무 바쁘게”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 들어맞는 말이 있다. ‘잡일’. 난 그저 잡일을 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이게 과연 자랑할만한 일일까?
이젠 ‘바쁘다’는 말에 대한 찬양을 멈출 때다.
바쁘다는 것은 삶의 기본 양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메일, 문자메시지 등 온갖 알림에 혹한다. 마치 어딘가에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당신이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과정은 도파민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진이 빠지게 하고 무척이나 공허한 일이다. ‘바쁨’의 매력은 위험하다. 당신 삶의 기본값이 ‘바쁨’이라면, 차분히 앉아서 생각을 가다듬고 내면의 진정한 감정을 알아차리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만일 모든 것이 ‘선택’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어떻게 시간을 쓰고, 누구에게 대답하고, 얼마나 많이 혹은 얼마나 조금 글을 쓸지 모두 선택을 한다면? 하루 목표 달성과 그저 다른 사람의 요구 들어주기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한다면? “아니요”라고 대답할 줄 알게 된다면, 그것도 꽤 자주 그렇게 할 줄 알게 된다면?
타인의 부탁을 받게 되면 자존심이 올라가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만약 이런 종류의 ‘인정’을 필요로 하거나 그런 욕구를 느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어떨까? 그 대신, 시간과 여유를 따로 떼어내 어떻게든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생산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바쁘지 않게’ 계속 유지해줄 것이다.
사람들은 ‘바쁨’과 ‘생산성’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리 브래프먼이 [카오스 명령] (The Chaos Imperative)에서 말했다시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부터 게임 동키 콩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위대한 발명들은 사실 자기 삶에서 공백을 확보한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당신이 아는 가장 잘나가는 사람한테, 아니, 엘론 머스크나 셰릴 샌드버그, 워런 버핏한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봤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그 정도 ‘급’이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바쁘죠.” 대다수 사람의 눈에 그들은 바쁘게만 보인다. 항상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도의 전략적 결정을 내리면서 말이다.
그들이 하는 일에서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은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자신의 통제권 아래에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둘째, 그들은 실제로 그런 통제권을 갖고 있다. 훌륭한 직원을 고용하고 심혈을 기울여 업무를 조율한 뒤, 자신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만 시간을 쓴다. 따라서 노력해볼 만한 것 아닌가?
“바쁘다”는 말은 일종의 자백이 되어야 한다. 자랑거리여선 안 된다.
소걀 린포체 같은 불교승에게 ‘바쁨’이란 곧 ‘게으름’이다. 시간을 어떻게 쓰고 어떤 버릇을 고칠지 전혀 고민하지 않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에 본인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해낼지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업무처리 속도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분산할지에 관해 투명해지고, 핵심이 아닌 것들에 “아니요”라고 말할 만큼 자신감을 갖춘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아마 매일 합리적인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편안하고 전략적이며, 동시에 꼼꼼해진 기분을 느낄 것이다. 허둥지둥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당신이 어느 회사 혹은 부서의 책임자라면, 업무 과정이 덜 바빠지도록 고민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처사다. 아마 의사소통을 효율화하거나 이메일 전송이 가능한 시간 정해두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더 오랜 시간 일하기보다, 합리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자.
그렇게 하기 위해선 마음가짐부터 바꿔야 한다. 바쁘다고 말하는 것, 좋다. 그런데 만약 ‘바쁨’이라는 게 언덕길을 겨우겨우 올라가는 소형차와 같은 의미라면? ‘좋다’는 게 지하철역 계단에서 유모차 끌어올리는 걸 도와주는 정도라면? 혹은 그저 책 한 권을 읽는 것이라면?
나는 명상을 무척 즐겨 한다. 이런 내게 사람들은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럴 때면 묻는다 “운동은 좀 하시나요?”
“그럼요.”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
1시간짜리 스피닝 수업에 일주일에 3번씩 참여한다면, 샤워 시간과 이동 시간까지 합해 4시간은 더 들어가는 셈이다. 만약 하루 정도는 수업 대신 야외에서 실제 자전거를 30분가량 탄다면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30분의 명상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다른 게 아니라 결정의 문제다. 명상 대신 스피닝 수업에 참여하기는 곧 정신적 운동보다 신체적 운동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결과다. 괜찮다. 이건 능동적 결정이다.
늘 “바쁘다”고 말하는 데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자. 하루 동안 모든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자. 모든 일을 ‘선택’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정말 중요한 일인지 혹은 하지 않아도 되거나 늘 하는 습관인지 적극적으로 ‘결정’하자.
다음 단계로, “바쁘다”고 자랑하기를 멈추자. 그러고 나서, 그날 해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 뒤 그것을 행동에 옮기자. 시간과 에너지를 당신이 진정 원하는 곳에 쓰자는 것이다.
다들 명상을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온갖 것들에 ‘좋아요’를 눌러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일 수 있다.
뭔가를 읽고 싶다면, 우선 이번 주에 하루 5분씩 시간을 확보해 보자. 다음 주엔 10분을 확보하자. 각자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하면 되지만, 반드시 실제로 실행해야만 한다. 아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당신이 삶의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누군가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본다면, “바쁘다”가 아니라 “아주 좋다”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잠시 멈춰서는 미소를 지어 보일 수도 있다. 당신에겐 따로 떼어낼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획한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기사이다.
이글을 읽는다느 건 바쁘지 않다는 증거.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바쁨으로 시간을 허비해 봐야지만, 그 다음 여유를 찾고 자신의 인생을 즐길수있다. 이런 글자로는 그 느낌을 배우고 알기 힘들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분주한 게으름..
내가 하는 일을 선택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
반성을 하게 되는 글이네요
“자기 삶에서 공백을 확보한 사람들”이 바로 위인이지요. 나이가 들고 보니 그 당시 왜 그렇게 바빴는지 그 바쁜 유형의 모양이 이래 저래 그려지네요. 인생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니까? 억만장자와의 비교는 당치도 않은 인생이었으니까요. 고원도사장, 좋은 글 올려주어 잘 읽었소.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공유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