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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라는 전자책 서비스가 있다. 여기에 최근 읽고 싶은 책이 하나 새로 올라왔다.

책 이름은 [생각해봤어?], 글쓴이는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이다. 사실 글을 쓴 것은 아니고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세 사람과 초대 손님이 나눈 이야기를 글로 정리한 것이다. 2015년 3월에 나온 책이다. 책을 읽으며, 이즈음의 진중권에 대한 나의 불편한 심정 때문에, 그가 나오는 대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첫 시작은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다.

“화려한 언변과 깊이 있는 지식, 거기에 더해 카메라에 잘 맞는 외모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논객.(중략)”

필시 웃자고 쓴 것이겠지만, ‘외모’ 대목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내 비뚤어진 심사가 끼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책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곧 지겨워졌다. 말을 정리한 책이니 어렵지 않았고, 내용도 좋았지만 새로운 것은 없었다. 말하자면 내가 몰랐던 것은 별로 없었고, 되짚어 볼 거리도 별로 없었다. 한마디로 나도 늘 그리 생각하고 있던 맞는 말이었다.

물론 진중권의 말에도 거슬리는 대목이 없었다. 표현 방법도 딱히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면서 당연히, 이즈음 어쩔 수없이 만나게 되는,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지난 5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변한 것은 그인가, 나인가, 혹은 그저 세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와 나는 원래부터 생각이 달랐지만, 그저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가? 바이러스 때문에 생긴, 주체 못할 시간이 내게 있기에, 별 쓸데없는 생각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다.

생각해봤어?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 EPUB ]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생각해봤어?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ㅣ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조국 사태

내게 진중권의 언행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이른바 ‘조국 사태’부터다. 그는 조국과 그의 부인 정겸심 교수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유시민이 끌려왔으며 한 묶음으로 김어준까지 엮여 들어갔다.

따지고보면 그가 쏟아내는 모든 비난의 근간은 ‘조국’이, 아니면 적어도 그의 부인인 ‘정경심’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확신이다. 그가 매주 한국일보에 쓰고 있는 칼럼 중에 지난 1월 16일자를 보면 그의 확신과 더불어 심정을 잘 알 수 있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서 교수가 자기 딸의 대학 입시를 위해 총장의 표창장을 위조했다. 그녀가 위조한 것은 표창장만이 아니었다. 딸과 아들의 상장과 수료증 일체를 위조하거나, 혹은 허위로 발급했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 이미 학교에는 그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것이 동양대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즉 사실(fact)이다.” (진중권, ‘대중의 꿈을 ‘사실’로 만드는 허구, 사실보다 큰 영향력’, 한국일보, 2020.1.16, 강조는 편집자, 이하 ‘진중권 한국일보 칼럼’)

더불어 만약 누군가 이 ‘사실’을 부정하고 또 다른 ‘사실’, 즉 부정행위가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대안적 사실’이 된다(나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이름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그 말이 어떻게 생긴 것까지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대안적 사실이란 한 마디로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말이다).

“하지만 학교 바깥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표창장은 진짜이고, 총장이 거짓말을 했으며, 그 배후에는 자유한국당과 검찰권력이 있다. 이들 적폐세력이 개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법무장관을 공격했으며, 정경심 교수는 그 더러운 음모의 순결한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학교 ‘밖’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사실, 즉 ‘대안적 사실’이다.” (진중권 한국일보 칼럼, 강조 편집자)

흥미로운 것은 그의 ‘유시민도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다.

유시민 씨는 이미 동양대 표창장이 위조임을 알았다. 내가 알렸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그가 취한 태도였다. 표창장이 실제로 가짜라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안적 사실’을 제작하여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아무 걱정 말라’고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진중권 한국일보 칼럼, 강조 편집자)

칼럼을 읽다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JTBC의 2020 신년토론의 한 장면이다. 기억나는 여러 장면이 있지만, 그 중 으뜸은 진중권의 이 대답이다.

“제가 아니까요.”

JTBC 신년토론 (2020. 1. 1.) 중에서
JTBC 신년토론 (2020. 1.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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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니까요”의 맥락

위 진술이 나온 토론 맥락은 아래와 같다(편집자).

정준희: 유희곤 기자의 그 취재가 사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진중권: 제가 만나서 확인했습니다.

정준희: 만나서 확인하면 사실이 됩니까?

진중권: 만나는 봤어요?

(중략)

진중권: 아니 최, 최성해 총장님이 말한 것을 갖다가 레거시 미디어들이 보도를 했구요. 디테일은 틀렸지만, 그분이 말한 실체, 표창장이 왜곡됐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준희: 왜곡됐다는 확인은 그것은 판결의 문제로 넘어갔기 때문에.

진중권: 판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준희: 어떻게 확신하시는데요?

진중권: 제가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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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표창장이 왜곡(위조)됐는지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진중권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보면 이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다. 아니까 아는 것이고, 확신이 드니까 확신하는 것이라는 이 간결함은 그 어떤 반론도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확고부동한 확신이 ‘내가 아는 것을 그에게 말했으니 그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라는 확신까지 이르는 데는 아무 장애물이 없다. 물론 이해는 잘 안 된다. ‘내가 말했으니 그도 알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둘 밖에 없다.

  1. 말한 내용이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고백이거나,
  2. 아니면 들은 사람이 말한 사람에게 무한의 신뢰를 갖고 있는 경우다.
  3. 굳이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아무 말이나 믿는 약간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도, 화자 진중권과 청자 유시민의 사이에서 적용시킬 수는 없다.

대화 불통 소통

진중권이 많이 배운 사람이고 영민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고, 나 또한 그가 확신을 가졌다면 무언가 그럴듯한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꽤 정성스럽게 그 믿음의 근거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난 거의 빈손으로 돌아와야했다.

내가 찾은 하나뿐인 그의 믿음의 받침대는, 그가 정경심 교수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일을 했다는 상황뿐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보건대 너무나 뻔한 일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정겸심 교수가 매우 사리사욕에 밝은 사람이라는 몇 가지 경험과 인상이 덧붙여진다.

지금 법정에서 그 피의행위의 진위에 대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그의 믿음은 좀처럼 흔들릴 기미가 없다. 흔들리기는커녕 그 믿음을 씨앗 삼아 열심히 줄기를 피우는 중이다. 그는 지금 문재인 정권의 모순과 부조리와 비도덕성을 부지런히 알리고 있다.

덧붙여 자신의 말을 부정하거나 혹은 조롱하는 사람들을 좀비로 칭하며, 생각이 없는 무리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그들은 모두 유시민과 김어준에 의해 선동 당한 줏대 없는 사람들로 몰아친다.

노무현 

정권 비판을 넘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도 막힘이 없다. 최근에는 좀비 이론의 확장판으로 대통령도 생각(나중에 ‘철학’이라는 고급진 단어로 바꾸었지만) 없는 사람이라는 그의 판단을 널리 알리고 있는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비판의 가늠자가 노무현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주 노무현을 소환한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아닙니다. 두 분은 애초에 지적 수준과 윤리적 지반이 다릅니다.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아닙니다. 노무현 정권을 계승한 정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두 정권은 아예 차원이 다릅니다. 철학과 이념이 서로 상반됩니다. 문재인은 노무현을 배반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신을 배반했습니다. 철저히, 아주 철저히.”
(진중권, 2020. 2. 5. 페이스북, 강조는 편집자) )

이 대목에서, 그를 이해해보려는 나의 노력은 고비를 맞는다. 그는, 지금 문재인을 비판하는 그 항목 그대로를 적용해 노무현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면 곧바로 ‘개혁의 적’이 된다. 비판의 근거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은 곧 개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3공 시절 반박(反朴)은 ‘북한’으로 통했고 참여정부에서 반노(反盧)는 ‘수구’로 통한다. 이게 정상인가?
(중략)
대통령은 왜 이 사이트를 즐겨 찾는가. 명색이 네티즌 대통령에, 이 사이트에 가면 언제나 대통령 찬가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사이트에서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조직적으로 삭제된다. …(중략) 이게 민주주의인가?” (진중권, ‘개혁 팔아 집권했으면 제발 개혁 좀 해라’, 신동아, 2004. 7. 28.)

이랬던 그가, 이제 와서 노무현 정신을 높이 사는 것을 보자니, 또 한 10년쯤 지나 그의 입에서 ‘문재인 정신’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출처 미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출처 미상)

유시민 

진중권과의 관계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경우의 백미는 역시 유시민이다. 난 사실 [노유진의 정치카페] 전에는 진중권과 유시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 글을 쓰느라 이것저것 뒤져보니, 그와 유시민은 사이 좋았던 시절이 별로 없었던 듯 싶다. 갈등은 대체로 진중권이 유시민을 비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나 2004년에 진중권이 유시민을 비난하면서 내뱉은 생리대 발언(아래 ‘박스’ 참고)은 차마 옮기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저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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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 발언의 맥락

한국일보 기사 ‘유시민과 진중권의 미운 정, 고운 정’(이정은, 2020. 1. 2.)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설전의 시작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사표 논쟁’이다. 당시 열린우리당 경기 고양시덕양구갑 후보로 나섰던 유 이사장은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권에 들어있지 않은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에 투표해달라”며 민주노동당에 던지는 표는 사표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를 두고 진 전 교수는 “유시민의 발언은 ‘공포정치’”라며 “위기에 처한 건 유시민 의원이고 혼자 뻘 짓 하게 냅둬도 된다”고 지적했다.

입씨름을 치열해지게 만든 것은 진 전 교수가 “유시민 의원은 남자인데 특이하게도 선거 때만 되면 입으로 생리를 한다”“앞으로 선거가 다가오면 남성용 생리대를 입에 차고 다니라”고 한 발언이다. 설전과 별개로 당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과반을 차지했고, 민주노동당도 10석을 얻어 원내 3당의 지위를 얻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한국일보, 강조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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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사람들이 딱 10년만에, 같이 유사 라디오인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나 같이 속 좁은 사람으로서는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어렵다. 대체 진중권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 사실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유시민의 속 마음이다. 대체 어떻게, 그 저질스럽고 독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 발설자와 매주 마주 앉아 2년이나 수다를 떨 수 있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용지식인'을 자처하는 유시민 작가 (출처: 창비, CC BY, 2016)
유시민 작가 (출처: 창비, CC BY, 2016)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진중권은 유시민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진중권이 무턱대고 처음부터 유시민을 비난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가 유시민을 비난했다고 처음 대대적으로 알려진 건 동아일보의 한 기사(동아일보 – 진중권, “조국 아들, 내 강의 들었다고 감상문 올려…아이디는 정경심, 김은지, 2019. 11. 15)였는데, 진중권은 그 기사에 대해 반론을 펼친다.

“진중권 교수는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기사가 교묘하게 무지막지하다”며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그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젊은이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유 작가의 대답은 이른바 ‘세대 담론’의 신빙성과 과학성을 문제 삼는 내용의 것이었고, 강연에서도 그렇게 전했다”고 반박했다. 무엇보다 진 교수는 “덮을 수 있데요”라는 말은 유 이사장의 발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강연에서 내가 한 발언은 ‘당시 내 눈에 유 작가는 표창장 위조의 사실 여부보다 법적으로 방어 가능하냐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고 밝힌 뒤 “그의 태도는 ‘법적 방어가 가능하면 윤리 문제는 덮자’는 얘기와 뭐가 다르냐는 취지의 발언이었고, 이는 그의 발언이 아니라 나의 발언이고,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 해석”이라고 밝혔다.” (미디어오늘, 진중권 “동아일보 기사, 교묘하게 무지막지”, 정철운, 2019. 11. 16. 중에서)

만약 이 수준에서 공방이 오갔다면, 나는 사실 누구 편을 들어야할지 살짝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진전될 수록 진중권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 달라진 태도의 진액이 앞에서 인용한 한국일보 칼럼이다.  두 글이 쓰여진 시간차이는 정확히 석 달이다. 같은 내용에 대한 그의 해석과 태도는 석 달 만에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대체 진중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실 진중권의 급격한 변침은 JTBC 신년토론 무렵에 이미 무르익은 것으로 보인다. 토론회에서 그는 두 번씩이나, 본인이 학교를 그만 다니게 된 사실을 언급하며 대단히 억울해한다. 그의 모습은 이미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 해석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담고도 나는 여전히 진중권이 밉거나 괘씸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평등과 공정의 가치를 믿고 있으며 나름 그 가치에 충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가치 기준이 자존심과 얼버무려질 때 생겨난다. 진중권이 유시민에 대해, 그리고 조국에 대해 나름 상식적인(처음에는) 비판을 하자, 사람들은 들고 일어났고, 그는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는 자존심까지 건드린 모양이다. 그는 아마도 억울했을 것이다.

흔히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존심은 결코 알량한 것만은 아니다. 진중권처럼 돈보다 이른바 ‘가오’가 더 중요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옳고 그름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자신과 주변 배 불리기 위해, 자존심 같은 것은 개를 주어 버린지 오래된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 자존심 때문에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매몰차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더구나 그의 주장이 그리 황당한 것만도 아니다.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이며, 그 배후에는 중국공산당이 있다는 헛소리가, 한때 국회의원이었고, 그 전에는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뉴스의 얼굴이었던 사람에게 나오는 판국이니, 그의 비판이나 신념에 설사 오류가 있다 한들 크게 분개하거나 한심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냉장고는 잘못이 없다 

정작 내 심사를 비틀어대는 것은, 그가 내는 목소리 그 자체가 아니다. 진중권은, 진실은 뒤로 한채 유시민과 김어준에게 끌려다니는 사람들의 생각없음을 한탄하지만, 소위 ‘주류 언론’의 그를 향한 환대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는 지금 주류 언론이 가장 주목하는 유명인이다. 진중권이 입술을 까닥이기만 해도 기사가 넘쳐난다. 아마도 대한민국 기자나 혹은 기자 흉내를 내는 사람 중에 그의 SNS를 따라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신문사 두 곳은 그를 위한 예약석을 따로 마련해놓았다.

어디 그 뿐인가, 몇몇 주류언론의 고참들은 진중권을 대놓고 칭송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별명은 ‘모두까기 인형’이다. 좌파 학자지만 좌파 진영도 거침없이 비판해서다.”(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진중권은 왜 페이스북을 닫았나, 2019. 11. 23)

“요즘 진중권의 글을 보는 낙으로 산다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렇다. 13일 한국일보에 쓴 ‘진중권의 트루스 오디세이-기득권이 된 운동권, 진보는 보수보다 더 뻔뻔했다’도 엄지척이다.”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 진중권은 왜 집권세력을 ‘자유주의세력’이라고 했나, 2020. 2. 13)

기성언론으로부터 그가 받는 대접은 거의 난세에 나타난 영웅 수준이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진중권도 기성언론에 대한 신뢰가 돈독하다. 그가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JTBC 신년토론의 주제가,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어에 대한 것이었고, 토론회에서 그는 초지일관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아마도 그건 전통매체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불신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기성언론에 대한 믿음은 조금 낯설다. 그는 이른바 안티조선운동의 핵심 멤버가 아니었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몇 달 전, 그는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를 “무지막지하다”며 비판하지 않았는가. 뉴미디어에 대한 불신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근원인 [노유진의 정치카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즈음, 세상과 연을 끊기 전에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재간이 없다. 유시민은 백색소음으로 여기라 충고하지만, 진중권과 기성언론의 의기투합은 거의 고성방가 수준이다. 누군가 냉장고에 마이크를 대고 확성기에 연결 해놓은 꼴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 냉장고는 잘못이 없다.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 뿐이다. 나처럼 소음에 짜증나고, 화나고,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이 손가락질 해야할 대상은, 냉장고가 아니라 거기에 확성기를 연결한 사람들이다.

냉장고는 죄가 없다.
냉장고는 죄가 없다.

그들은 원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본업이었지만, 이제 그 능력은 거의 잃은 듯 보인다. 그래서 맘에 드는 소리를 골라 크게 트는 것을 제 일로 여기고 있는 중이다. 소리란 생각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생각을 할 지적 능력도 모자라고, 그걸 메울 부지런함은 애당초 없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모여 확성기를 매단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는 중이다. 뽑아야 할 것은 냉장고 전원이 아니나 그 확성기 전원이다.

그리고 확성기를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진중권의 목소리가 가득 담긴 책 [생각해봤어?]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무리 밥벌이가 중요해도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고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P.S. 

진중권처럼, 보지도 듣지도 않고 내용을 꿰뚫는 재주는 없는지라, 이 글을 쓰면서 그의 목소리를 꽤 귀기울여 들어봐야했다. 상당히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고성방가에 시달리는 내 귀를 단련시켰다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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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다양한 의견과 비판, 기고를 환영합니다(editor@slownews.kr). 슬로우뉴스의 모든 글이, 아니 세상의 모든 글이 열린 공론장에서 합리적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이 점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이 글의 소재에 관한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감정적인 소모로 얼룩지지 않고,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 점은 독자들께서도 넉넉히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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