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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인터뷰 28.] 샤넬이 거부했다가 결국 수용한 ‘감정노동’, 감정노동의 핵심 고리인 ‘돌봄노동’의 문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노동과 인간. (12분)

왜 샤넬은 동종 다수 업체가 넉넉하게 합의한 사안, 그것도 노조의 “소박하기 짝이 없는” ‘감정노동수당 월 2만 원과 감정노동휴가 연 1일’을 홀로 거절했을까. 인터뷰의 화두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인터뷰 직후 샤넬코리아는 노동자의 ‘감정노동’ 요구를 수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질문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 17년 동안이나 샤넬은 ‘감정노동’을 부인했을까. 현장에 잠깐이라도 눈길을 보낸다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왜 굳이 외면했을까.

쉬운 답은 샤넬을 바보 취급하거나 악마화하는 것이다. 샤넬 본사는 물론이고 샤넬코리아를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시대착오적 블랙 기업으로 단정하면서 샤넬코리아 노동자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일견 정의롭게 보이지만, 현장 노동을 둘러싼 모순을 단순화해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발견하기보다는 정신승리에 도취하는 방식이 되기 쉽다. 그 방식으로는 인간을 위한 노동 시장의 진보를 이뤄내기 힘들다.

이 문제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 번 취재를 청했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 회신도 없었던 샤넬코리아 교섭위원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협상의 룰에 충실했을 테고, 샤넬 본사의 입장도 그런 협상 전략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샤넬도 그리고 샤넬코리아도 막무가내로 ‘감정노동은 무조건 싫어!’라는 식으로 감정노동을 보이콧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왜 17년 동안 샤넬은 감정노동을 거부했을까. 그리고 드디어 감정노동을 받아들인 샤넬코리아 사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이상헌 박사에게 샤넬코리아를 둘러싼 ‘감정노동’의 문제를 물었고, 이상헌 박사는 감정노동의 맥락과 함의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28]

샤넬의 판도자 상자

질문 정리: 민노

안내 알림

이 글은 2024년 9월 6일(금)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맥락화하거나 소제목으로 표시하고,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상징적 요구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샤넬코리아 노조가 감정노동수당 월 2만 원과 감정노동휴가 연 1일을 정말 말 그대로 ‘상징적으로’ 요구했다는 점이었다. 그게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노사 교섭이라는 게 당연히 서로 실질적 이익을 얻기 위해 요구 조건을 내걸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감정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주장하기보다는 그 상징적 가치를 인정받으려 했다는 게 독특한 점이다. 백면노조(백화점면제점판매서비스노조)의 요구 사항은 경제적으로는 노동자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노씨 지적처럼 상징적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징적 조치는 그 자체로 현장의 감정노동을 완화하거나 감정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해법은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상징적인 조치인데, 그렇다고 상징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고, 실질적인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봐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선 따로 이야기하자.

‘감정노동자보호법’, 사업자 의지에 좌우된다

한편, 감정노동을 제도적으로 규정한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 등, 일명 ‘감정노동자보호법’)은 감정노동행위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긴 하다. 물론 처벌 조항이 없어서 아쉬운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처벌 조항이 없어서 효과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최근 커피샵, 편의점, 식당 할 것 없이 이 규정이 꽤 효과를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즉, 사업주가 의지만 있다면, 이 조항을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다. 가령, 가게 입구에 해당 조항을 예쁜 캠페인 포스터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전시하면, 손님이 종업원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을 거다. 이번 여름휴가에서 한국에 왔을 때, 실제로 그런 가게를 본 적도 있다.

감정노동자보호법(제41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확실히 있다. 하지만 이 법 조항 외에는 실효적인 규정이나 제도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사업주의 자발성에 기댄 조항이라는 것, 그러니까 사업주의 의지에 따라 그 효과가 좌우된다는 한계는 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주시 포스터 (2019)

다국적 기업의 현지화 혹은 ‘한국화’


샤넬코리아 문제는 한국에 들어오는 다국적 기업의 일반적인 이야기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 기업이 자국 노동자와 관계 맺는 방식은 이들이 한국 노동자와 한국에서 관계 맺는 방식과 아주 다르다. 가령 유명한 프랑스의 유통 기업이 있다고 하면, 프랑스에서는 노동권은 아주 두텁게 보호하는데, 같은 기업이 한국으로 넘어오면 그런 게 사라진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화’랄까. 현지화랄까.

감정노동자가 느끼는 감정노동의 강도 내지는 밀도는 다국적 기업 본국(?) 노동자가 느끼는 그것과 차이가 있다. 프랑스 백화점에서 샤넬 물건을 파는 노동자와 한국 백화점에서 샤넬 물건을 파는 노동자가 느끼는 감정노동의 강도는 매우 크게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이 샤넬 본사에는 꽤 중요한 시장임에도 그렇다.

샤넬 등 다국적 기업의 ‘이중성’ 혹은 ‘기회주의적 속성’

그런데 여기에는 역설적인 의미가 있는데, 한국이 샤넬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기 때문에(2023년 샤넬코리아의 한국 시장 매출은 약 1.8조 원이고, 본사에 2975억 원을 배당금으로 보냈다) 한국 소비자에게 특화해서(‘한국화’) 감정노동 이슈가 발생해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즉, 한국에서는 한국 소비자의 기대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소비재를 파는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 오면 한국 소비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회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이번 협상 내용을 봐도, 크게 금전이 들지 않고, 별 이슈가 되지도 않는 내용임에도 그걸 문제 삼아서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일 만큼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물론 결국 감정노동을 수용하긴 했지만). 이런 이중성, 기회주의적 속성은 다국적 기업의 일반적인 속성이랄까 패턴이다. 노조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단체협상을 기피하는… 그런 건 아주 일반적이고, 본국에서는 당연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문제도 한국에서는 거부하거나 버티는 경우가 많다.

샤넬의 판도라 상자


샤넬코리아는 ‘고객응대’라는 문구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감정노동’이라는 문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었다(참고: 매일노동뉴스, 샤넬엔 ‘감정노동자’는 없고 ‘고객응대 노동자’만 있다?, 2024.09.04.). 물론 결국 감정노동을 수용했지만 말이다.

고객응대 vs. 감정노동

‘고객응대’와 ‘감정노동’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감정노동이 문제 되는 이유는 일상적인 업무에 필요한 감정 이상으로 불필요한 감정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을 말한다. 모든 형태의 노동에서도 문제 되지만, 특히 서비스업에서 소비자의 높은 기대가 반영된 상황에서 노동자가 상식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감수해야 하는 감정노동이 문제 되는 거다. 그래서 샤넬 노조는 우선 그 감정노동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고객응대’는 앞서 설명한 감정노동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나 비정상적인 감정’이라는 ‘비정상적 노동 환경 혹은 그런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다. 즉, 고객응대는 아주 정상적인 노동을 전제한다. 비정상적인 것을 전제한 개념이 아니다.

사치품을 사는 (한국) 소비자의 심리, 이 순간의 주인공은 나야, 나!

짐작이긴 하지만, 서비스 노동자의 지위를 높이면, 소비자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샤넬 같은 기업이 했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일부 소비자의 정서는 비싼 돈을 쓰면서 명품을 사는 경우에는 본인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오늘 명품샵의 주인공은 나야 나!

그런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기업이나 소비자는 노동자가 노동자이길 바라는 게 아니라 주인공(공주, 여왕, 왕, 왕자님)을 위한 하녀 혹은 시종이기를 원할 수 있다. 즉, 노동자성이 발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기업은 그런 소비자의 특수한 니즈에 필요한 상황(서비스)을 제공하려는 측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샤넬이 고객응대는 긍정하면서 감정노동을 거부했다면, 그것은 명백하다. 감정노동 자체를 인정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감정노동을 인정하는 순간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샤넬이 파는 물건의 특성과 상황을 생각해 보자. 꽤 고가의 제품을 꽤 까다로운 소비자를 상대로 백화점이나 면세점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판다. 그런 재화와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더욱더 감정노동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걸 인정하면 그것 자체가 아니라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다른 문제들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의 ‘줄줄이 비엔나’

노동자 입장에서 우선 따져봐야 할 문제는 자신의 월급 수준에서 용인할 수 있는 감정노동의 수준이다. 자신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선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을 때 그 피해를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추억의 줄줄이 비엔나.

감정노동이 힘든 이유가 뭐냐면, 감정이 상처받는 건 육체가 피곤한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다.

A. 한 시간 야근하더라도 그만큼의 피로는 육체적인 것이라서 쉬면 회복할 수 있다.
B. 그런데 어떤 진상 손님에게 욕까지 들었다면, 그건 하루 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회복이 힘들고, 기업 입장에서는 그 회복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크게 든다. 그래서 감정노동은 ‘예방’;이 중요하다. 즉, 그런 상황이 생겼을 때 즉각 관리자가 적절히 개입해서 그 상황을 중단하고, 적당한 조치를 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상담과 치료 등을 제공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런 디테일이 감정노동에서는 아주 중요해진다. 단순히 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다. 예방과 즉각적 조치, 이 두 가지 개념이 중요하다.

결국 산업재해까지 연결되는 문제

감정노동을 인정하면, 그리고 감정노동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기업 입장에서는 그저 감정노동 수당 월 2만 원이나 연휴가 하루 더 주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금전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시스템적으로도 꽤 규모 있는 투자와 노력이 필요해질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감정노동을 인정하면, 종국에서는 감정노동이 과잉 지속 상태에서 노동자의 건강 상태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른 육체적인 악영향으로 인한 산업재해까지 연결해서 문제 될 수 있다.

감정노동이 ‘더’ 어려운 두 가지 이유


젠더 이슈와 결합한 감정노동

첫 번째는 대부분 감정노동자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노사관계라는 게 아직은 위계적이고 권위적 관습이 강하다. 거기에 감정노동에 관한 요구와 기대까지 더해진 상태다. 한국은 감정노동에 관한 요구가 큰 사회적인 분위기가 현장에 이미 충분히 반영된 상태다. 거기에 젠더(여성)가 결합하면, 안 그래도 힘든 게 더 힘들다. 감정노동 문제는 젠더 이슈와 결합해서 더 힘들어지는 측면이 있고, 또 여성 중심의 노조가 일반적으로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도 문제의 어려움을 가중한다.

감정노동을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여겨야 하는 건,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정신적인 건강 문제가 점점 더 가장 중요한 노동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미흡하게 바라보는 측면이 있지만, 정신적인 건강 문제로 노동문제를 바라볼 때 감정노동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보다는 ‘젠더와 건강’이라는 좀 더 큰 단위에서 감정노동을 다루는 경향이 외국, 특히 유럽에서는 강하다.

물론 유럽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손님은 왕’ 같은 관념이나 관습은 거의 없다. 아무리 비싼 고가의 상품을 사는 경우에도 불만이 있으면 ‘매니저 불러달라’ 정도에 그친다. 아무튼 감정노동은 감정노동에 한정하지 않는 노동자의 정신적 건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추세다.

고객만족(CS)교육과 ‘이모셔널 스킬’ 차이

모든 노동이 서비스화하면서, 일의 감정적 요소를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이모셔널 스킬’(Emotional Skills;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서비스 방법론으로 활용하는 것)의 문제로 보기도 한다. 즉, 감정노동은 그 서비스화의 부정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고, 노동자의 역량이라는 관점에서는 이모셔널 스킬, 그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거다.

일에 감정적인 요소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건 비단 소비자와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감정적인 문제는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원만한 직장 생활을 위해서는 이모셔널 스킬을 고양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이모셔널 스킬은 일반적로는 ‘소셜 스킬’의 일부로 본다. 즉, 노동자의 상황 대응 능력 차원에서 보기도 하고, 업무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스킬로서 훨씬 더 포괄적인 접근도 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감정적으로 컨트롤이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자의 역량을 키우자는 게 ‘이모셔널 스킬’이라면, ‘고객 만족’은 그 포인트가 노동자가 아니라 ‘고객'(소비자)에게 있다. 이모셔널 스킬의 주체가 노동자라면, 고객만족의 주체는 고객이다. 아무리 정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해도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면 그 서비스는 실패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하면서 본인의 감정과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가. 그래서 양자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모셔널 스킬은 고객이 부당한 요구를 했을 때도 노동자 본인을 보호하면서 그 요구를 컨트롤하거나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거나 고객이 기분 나쁘지 않게, 자신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냐는 능동적인 문제 해결 역량이기도 하다. 이렇게 CS 교육과 이모셔널 스킬은 서로 관점과 주체, 보호하려는 대상에서 완전히 다른, 정반대에 가까운 개념이다.

화두는 돌봄노동에서의 감정노동


그런데 감정노동이 특히 문제 되는 건 고급 브랜드 소비재 판매 시장이라기보다는 돌봄노동이다. 원래 감정노동이 정책적으로도 아카데미에서도 문제가 됐던 건 ‘돌봄노동’이었다.

이제 고도화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족의) 돌봄마저도 상품화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가족 내에서 감정적인 문제는 여성 중심으로 그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위계화된 방식, 젠더화된 방식이 돌봄노동의 상품화에서도 그대로 옮겨왔다.

그리고 돌봄노동의 상업적 측면만 생각하는 근시적인 관점이 많은데, 돌봄노동에서 상업적 관점만큼 중요한 건 돌봄노동은 서로 개인적이고 밀접한 인간 관계를 만들어내는 노동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개인적인 인간 관계가 생기고 커지면서 그런 감정적 요소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않으면 안그래도 힘든데 더 힘든 노동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돌봄노동의 어려운 점이 하나 더 있는데, 돌봄노동은 제한된 공간에서 프라이빗하게 벌어지는 노동이기 때문에 젠더(여성) 문제, 개인적 인간 관계의 문제에 더해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거기에 제도적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계약 형태가 대부분이라서,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필리핀 가사 도우미 같은 경우에는 서울시가 관리한다고 하지만).

돌봄노동은 아주 특별한 노동이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관계적이며 대부분 공개되지 않은 공간에서 이뤄진다.
양극단의 위험… 스스로 무너지거나 밖으로 폭주하거나

이런 상황에서 돌봄노동자가 스스로 감정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고, 반대로 고용주에게 아주 감정적이고 공격적일 수 있는 양극단의 가능성이 있다. 가령, 고용주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가족 같아서 더 배려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 무리한 부탁을 할 수도 있고, 돌봄노동자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가족 같아서 더 배려를 기대했는데, 외려 그 반대로 자신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느껴서 감정적으로 더 폭력적으로 폭주할 수도 있다.

돌봄 노동은 수백수천 정도이 아니라 최소한 수십만 명의 수요가 필요한 대규모 영역의 문제라서 더 심각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이런 심리적인 문제, 젠더 문제와 주관적 관계성 그리고 프라이빗한 성격의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정신적 건강 문제와 양극단으로 폭주할 위험을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가령, 자신의 가족이 서비스를 받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사회적 규범, 도덕적 가이드가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그런 기준이 비교적 잘 지켜지는 편이다. 물론 어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등, 인권 측면에서 사회적 가이드가 그런대로 잘 지켜지는 편이다.

지금 당장 이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고, 그런 인권적 기준을 스스로 내재화,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 결국 제도와 사회적인 도덕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고, 가장 중요한 그 개인이다. 서비스나 재화를 구입하는 거지 사람을 사는 게 아니다. 지켜야 할 룰이 있어야 한다.

포괄적 접근으로 ‘레퍼런스’ 마련해야


노동법만으로는 안 된다. 포괄적인 정책 논의가 필요하다. 돌봄노동과 관련해서는 꼭 법적 규제 대상은 아니고, 서비스 제공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법 규범만으로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모호하다.

정책적인 논의, 지원은 국회 차원에서 법으로도 논의해도 좋겠지만, 여러 부처가 함께 모여서 좀 더 큰 단위에서 논의하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누가 갑질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주차요원을 무릎 꿇렸다 같은 개별적 에피소드 단위로 접근할 게 아니다. 그런 뉴스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이고 정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백화점 모녀 갑질 사건 (2015)

이 문제는 돌봄노동과 결합해서 굉장히 큰 사회적 화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 차원에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노동부에서 나온 ‘감정노동 종사자 건강보호 가이드'(2023) 정도 수준이 아니라 ‘레퍼런스급’으로 뭔가 나와서 사회 전체에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카페에 캠페인 포스터를 붙이고, 대대적으로 공익광고도 내고, 그 레퍼런스를 참고해 돌봄노동 상황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도 있어야 하고, 사업체 차원이든 소비자나 노동자 차원이든 논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한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 ‘내재화’

끝으로 한번 더 ‘내재화’를 강조하고 싶은데, 이런 문제는 스스로 개인의 차원에서 내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최종적인 목표이어야 한다. 감정노동이든 돌봄노동이든 아주 개인적이고, 정서적이며, 일상적인 감정 문제다. 그 사람, 그게 소비자든 노동자든, 그 마음 속에 내재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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