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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분석합니다. 이번 케이스는 ‘캔슬 컬처’ (약 15분).

사람을 취소할 수 있을까. 물건 구매를 취소하듯 혹은 계약을 취소하듯 사람을 취소한다고? 물론 이것은 비유다. 하지만 아주 강력한 비유다. 사람을 취소하다니,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군의 디지털 유저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이 과장된 비유는 자신의 권력을 과장하려는 허세일 수도 있다.

캔슬 컬처(이하 ‘취소 문화’와 혼용)는 무엇인가. 디지털 단두대는 또 뭔가. 사실 별것 아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언팔’. 그게 캔슬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겠지만, 캔슬 컬처는 인터넷 문화, 특히 소셜 미디어 문화의 산물이다. 최근 벌어진 ‘디지털 단두대’ 소동은 그런 취소 문화의 최근 경향, 그 일단을 보여준다. 하나씩 살펴보자.

인트로: 디지털 단두대

한 틱톡 크레이에이터(@ladyfromtheoutside)가 지난 5월 8일 한 동영상 게시물을 올렸다:

이제 사람들이 디지털 단두대(‘디지틴’)라고 부를 만한 일을 할 때입니다.

자신의 자원을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지 않는 유명인, 인플루언서, 부유한 사교계 인사들을 모두 차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했습니다. 이제 이를 되찾아 우리의 조회수, 좋아요, 댓글, 돈을 빼앗을 때입니다.

@ladyfromtheoutside (틱톡)

뉴욕타임스가 200만이라고 소개됐던 이 게시물 조회수는 현재 270만(2024.07.08.) 정도다. 물론 그래봤자 ‘디지털 단두대, 들어보셨나요?’라고 뉴욕 한복판에서 물어보면 ‘뭔 소리야?’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100명 중 95명쯤은 될 거다(아래 캡콜드 인터뷰 참조). 물론 ‘디지털 단두대 잘 알죠!’라고 말할 법한 5명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뉴스레터(뉴닉)가 두 차례 ‘디지털 단두대’를 소개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SBS 연합뉴스 등에서는 해외 단신으로 처리했다. 캔슬 컬처의 일종으로 평가받는 디지털 단두대에 관한 몇 가지 체크 포인트.

1.맥락!

디지털 단두대도 맥락이 있다. 유명인이 총출동하는 화려한 자선 패션쇼 ‘2024 멧 갈라'(5월 6일)을 앞두고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계획을 전하는 뉴스도 점점 더 빈번해졌다(4월 말). 가자지구의 참상에 관해 발언하라는 소셜 미디어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그때 마침 유명 모델 헤일리 칼릴은 [마리 앙투아네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2006)의 대사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Let Them Eat Cake)”라는 대사를 립싱크하는 동영상을 자신의 틱톡에 올렸다. 많은 이가 분노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앙투아네트를 처형한 단두대라는 상징을 불러왔다.

칼릴의 앙트와네트 코스프레 동영상(왼쪽)과 하루하루가 지옥인 가자의 참상을 대비한 SBS 관련 보도 영상.

2. 용어?

말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과잉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말은 그 자체로 욕망이라서 어떤 현실은 더 반영하고, 그럼으로써 또 다른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현실을 가리거나 지워버리기도 한다. 디지털 단두대는 현실을 더 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선동의 전략이기도 하다.

디지털 단두대라는 ‘화끈한 조어’는 마치 멧 갈라에서 자선이라는 선행마저 자신을 치장하는 악세서리처럼 소모하는 셀럽의 화려한 의상 같기도 하다. 심연을 바라보는 자는 주의해야 한다. 심연도 그 사람을 바라본다는 걸.

3. 효과??

칼릴은 동영상을 삭제하고 사과했지만, 칼릴의 소셜 팔로워 수는 멧 갈라를 전후로 1000만 명을 넘겼던 게 990만 명으로 줄었다. 1%씩이나? 아니면 겨우 1%밖에? 그게 5월 중순 상황이고, 2024년 7월 8일 현재 상황 기존 팔로워 수인 1000만 명을 회복했다. 틱톡 기준.

유명하다는 것만으로 큰돈을 벌고 많은 것을 누리는 극소수 ‘셀럽’이 전쟁의 참상을 외면하고 과시적인 ‘자선 파티’에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헛소리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을 ‘언팔’하는 행위에 ‘단두대’라는 극단적 상징을 부여하는 ‘사회적인 운동’은 호불호를 떠나 그 과시적인 자선 파티를 닮았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4. 케바케: 성급한 단정 금지!

다소 부정적으로 설명했지만, 분명한 건 있다. 캔슬 컬쳐는 이 시대의 문화이며, 그 문화 속에는 부정적 속성과 긍정적 속성이 모두 담겨 있다는 점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취소 문화를 그 시공간과 구체적 사건의 맥락을 거세한 채 일반적으로 옳다거나 일반적으로 옳지 않다거나 하는 이분법이나 선입견으로 대하는 것이다. 캔슬 컬처는 ‘더러운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사회적 행동이기도 하고, 더러운 세상을 ‘내 식대로’ 바꾸려는 독선적 욕망이기도 하다.

디지털 단두대 사례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사례조차도 전적으로 정당하거나 그 반대인 것은 아니다. 가자의 참상을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당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유명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세금, 그래서 유명세라고 하지만 그 세금 청구 방식은 정당해야 한다.

‘디지털 단두대’ 소동을 핑계삼아 캡콜드(김낙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에게 취소 문화의 의미와 쟁점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중심으로 물었다. 이하 질문과 답변을 정리했다.

캡:콜드케이스 [ep. 11]

당신을 취소합니다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 이 글은 2024.07.04.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으로 대체하거나 본문에 맥락화합니다.

캔슬 컬처 개요

캔슬 컬처(취소 문화) 정의와 유래


불특정 다수 대중이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 문화는 항상 그 시공간에 맞는 이름을 가졌던 것 같다. 중국에서 초기에 ‘인육수색’이라는 용어가 돌았을 때는 마치 사냥감을 수색하듯 사람을 끌어낸다는 함의가 강했다. 한국에서 ‘조리돌림’이라는 말을 썼을 때는, 누군가가 남긴 발언을 ‘박제’하고 뿌리는 식으로, 그러니까 디지털 광장에 세워 놓고 끌고 다니는 행위가 부각된 것이다. 요즘 시대에 와서, 특히 서양에서 ‘캔슬 컬처’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름 자체가 행동의 방식이다. 캔슬의 의미는 ‘철회, 취소’를 의미하고, 쉽게는 소셜미디어 ‘언팔'(언팔로우)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즉 지금 시대에 내세우는 응징 방식이 ‘캔슬’인 셈이다.

틱톡 유저 레이디프롬더아웃사이드(@ladyfromtheoutside)의 ‘선언'(?)처럼 당신의 영향력은 나의 팔로우로부터 나왔으니 그 영향력을 내가 회수하겠다는 거다. 사회적인 운동을 소비자 중심으로 본다. 보이콧(캔슬, 취소)으로 이 사람을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 거다. ‘평범한 소비자인 우리가 힘을 합쳐서’ 당신의 네트워킹을 통한 영향력을 줄이겠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맞춘 조리돌림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의 공개적 문제 제기 혹은 책임 추궁은 오래된 현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서동요’도 일종의 취소 문화로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권력의 위선을 여론으로 까발리는 형식이고, 심지어 사실관계 확인도 무시되고. 서양의 중세와 근세에는 토마토와 썩은 달걀을 광장에서 던지는 공개 망신 주기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20세기 말, 21세기에 들어서며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폭발적 현상으로 진화한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소셜 미디어 시대에야 비로소 대중적으로 부각된 미국보다 먼저 보편화된 감이 있는데, 2000년대 초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그것이다.

미투운동과 박근혜 하야


사안의 잘잘못을 정확하게 잘 가려낼 수 있다면야, 공개적 비난 결집하기는 훌륭한 사회운동 혹은 정치운동이 될 수 있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그런 측면이 있다. 탄핵을 촉발한 정유라(최순실의 딸) 입시비리와 삼성의 말 상납 등에 대해 사람들이 초기에 반응한 방식은, 캔슬 컬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본질적으로 같은 패턴이었다. 즉, 비판 대상 혹은 취소 상대를 지목하는 과정에서 자의적 속성이 반영되느냐 아니면 제도적인 검증이 가능하냐에 따라 그 행위에 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2016년 11월 19일, 사진 제공 옥토.
2017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침묵을 깬 사람들’

나아가 ‘미투운동‘도 캔슬 컬쳐의 패턴이 긍정적으로 발현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할리우드의 은폐된 성적 범죄, 성적 차별을 폭로하고 공개하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미투운동은 그 주요 대상자의 사법적 처벌로 이어졌는데, 하비 와인스틴이 대표적이다. 하비 와인스틴의 범죄는 너무도 명백한 반사회적 행위였기에, 비난의 대상을 정하는데 딱히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만큼 명백하지 않은 경우도 미투운동에 ‘편승’한 경우도 있었고, 그 중 상당수는 무고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반동(백래시)이 당연히 발생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미투운동의 공과를 산술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결국은 디테일이 중요하다. 가장 유의해야 하는 건 비판 대상을 자신의 사적인 기분이나 자의적 기준으로 정해선 안 된다는 거다. 특히 확증편향이 구조화한 좁은 네트워크에 의해 기준이 왜곡될 수 있다는 걸 유의해야 한다.

캔슬 ‘대상’의 한계


한편, 캔슬, 철회 혹은 취소라는 건 다중의 지지 대상이 된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 즉 그렇게 취소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대표적인 대상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이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기업인이나 임명직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그런 경우인데, 이들은 ‘캔슬’ 대상이 되기도 어렵다. 기업인이나 정치인, 고위 관료에게는 비판 방법론으로 매우 취약하다. 심지어 ‘꼰대들은 끄덕없더라’ 하는 냉소와 패배주의를 낳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극단적 코어 팬덤이 있는 경우에도 캔슬 컬처는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열혈 팬덤의 결속을 강화할 위험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학습된 무기력과 냉소만 부추길 위험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럼프나 머스크 팬덤 현상으로 볼 수 있다(참고: 머스크, 슈퍼히어로와 빌런 사이).

다른 듯, 닮은 트럼프와 머스크.

주요 사례

개똥녀 사건 (2005)


2005년 속칭 ‘개똥녀’ 사건을 나는 아주 상징적으로 본다. 당시는 싸이월드와 게시판의 시대였고, 그 공간들을 중심으로 지하철에서 개가 싼 똥을 안 치웠다는 한 젊은 여성의 현장 얼굴 사진을 뿌리는 대대적인 조리돌림 현상이 벌어졌다.

‘애견인의 무개념 실태’라는 글이 위 사진과 함께 2005년 6월 5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왔다. 이른바 ‘개똥녀’ 사건의 시작.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인육수색’이라고 부르는, 공분의 대상으로 삼는 개인의 신상을 까발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공격당하는 사람의 익명성을 파괴해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신상을 까발려서 실제 삶에 후환을 남기겠다는 폭력적 방식이었다.

비슷한 현상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물론 있었지만, 좀 더 늦게 소셜미디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부흥하고 대중적으로 누구나 참여하면서 그런 현상이 ‘폭발’했다. 그러면서 특정인의 개인 정보를 허가 없이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행위라는 의미로 ‘독싱'(doxxing; 신상털기)이라는 용어도 생겼다.

저스틴 사코 사건 (2013)


미국으로 보면 2013년 ‘저스틴 사코’ 사건이 상징적이다. 뉴욕타임스에서 긴 에세이로 쓰여져서 사람들 입에 회자했다. 사코는 홍보회사 직원이었다. 트위터에서 캐릭터를 구축한 요즘 개념으로는 인플루언서였는데, 좀 까칠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아프리카로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예의 그 까칠한 캐릭터로 소셜에 이렇게 올렸다:

저스틴 사코의 운명을 바꾼 경솔하고 부주의한 트윗. 반어적 유머였지만 그 맥락을 이해해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금 아프리카로 가는 중. 에이즈 안 걸렸으면! 농담임. 나는 백인”

무식한 제1세계 시민으로서 제3세계를 비웃는 캐릭터를 반어적 맥락에서 (자기 나름으로는 코믹하게) 재현한 것인데, 소셜에서는 난리가 났다. 소셜 시민의 분노가 폭발해 사코의 신상이 까발려지고, 그가 다니는 홍보회사에 항의가 폭주했다. 출장을 떠나는 비행 경로에서 장난스럽게 올린 소셜 게시물로 인해,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고당했다.

시사iN ‘분노한 남자들’ 사건 (2016)


무엇을 취소 대상으로 삼는가. 그 대상이 정말 중요하다.

가령 우리나라 사례로는 시사iN 구독 취소 사태가 있다. 시사인에서 한국 젊은 남성의 안티 패미니즘을 특집으로 다뤘는데, 그게 젊은 남성 독자의 불만을 촉발했다. 시사인 입장에서도 위협적으로 느낄만한 게, 구독 취소하겠다는 계층이 ‘친민주당계’가 좋아할 만한 기사들로 지난 몇 년 동안 축적되었던 구독자층이었기 때문이다. 시사인 구독 취소 운동(?) 사건은 철회 대상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무척 ‘자의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독자로서는 ‘젊은 남성인데 반페미니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있구나’ 그렇게 기사의 조사 내용을 사실관계 여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젊은 남성인데 나를 공격하는구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내용의 기사 발행하는 매체를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평가해서 공격하는 행태를 보여줬다.

그러니까, 사실 여부나 가치평가가 아니라 ‘나에 대한 공격’인가 아닌가가 기준이 됐다. 상식적이고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나 혹은 내가 포함된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인가 아닌가가 기준이 됐다. 다양한 주변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교차 검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다 끼리끼리 뭉쳐 있어서 비교하고 검토할 비교 집단이 없었다. 그러니까 자기 성찰의 환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스스로 판단 기준을 그르치기 쉬운 위험한 요소다. 한국은 게시판 문화가 발전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그런 분위기가 조성됐었고,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훨씬 더 강력해졌다.

최악의 사례: 개똥녀(2005) 타진요(2010) 집게 손(진행 중)


굳이 캔슬 컬쳐와 그 조상들 가운데 어떤 최악의 사례를 꼽아봐야 한다면, 역시 앞서 말한 개똥녀 사건을 꼽아야겠다. 우선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개인에 초점을 맞췄고, 거기에 더해 젊은 여성 전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대하기까지 했다.

‘타진요’ 사건도 떠오른다. 학력을 조작한 타블로라는 가수를 캔슬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주장을 위해 결국은 자신들이 근거를 조작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여기에 수많은 평범한 네티즌들이 편승했다. 평범하지만 동시에 무책임했던 그런 불특정다수의 편승행위에 대해서도 결코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최근까지도 기승을 부리는 집게 손 사냥도 있다(르노 신차 홍보 동영상 사건).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률, 그러니까 남자를 혐오하는 집단의 상징물을 사용한 기업은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거나 확산하는 것이므로 정의롭게 응징한다는 발상은 대단히 유치하다.

이 분들 다 남성 혐오인가요? 이미지 출처는 집게손가락의 보편성을 강조한 경향신문(2021. 5. 4)에서 재인용

그런데 그런 집단적 응징의 쾌감에 빠지면, 해당 표현이 정말 그런 사상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인지 자체는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대충 비슷한 모양새가 있어서 기세를 끌어올릴 정도면 되는 거다. 응징 자체가 목표인데 무엇을 응징하는지 뭐하러 열심히 고민하나. 게다가 시장 성과 하락을 두려워하는 기업들이 그걸 몇 번이고 받아들여버리는 경험이 쌓이니 더욱 자신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옳다는 확신편향만 쌓인다. 악순환이다.

캔슬 컬처와 당파성: 퓨리서치 조사(2021)

퓨리서치 조사, 미국과 한국의 공통점과 차이점


퓨리서치센터에서 내놓은 캔슬컬쳐 미국 여론조사는, ‘캔슬 컬처’에 관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말기인 2020년 상황이 반영된 조사인 만큼 더욱 그렇다.

캔슬 컬처에 관한 퓨리서치의 조사 에세이.

여론조사 결과를 이해하려면, 보수의 기본 마인드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공화당 지지자로 규정되는 보수층은, ‘기존’ 사회의 문화와 전통이 꽤 괜찮다는 인식을 지닌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있으려면, 그 기존 사회가 나에게 덜 불편해야 한다. 그와 반대로 무언가를 바꾸고 싶은 이들은, 나에게 그 사회가 불편한 것이었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 예전의 세상이 덜 불편했다는 것은, 나에게 ‘유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공화당 지지층인 중상층 백인 남성들이라면, 자신들이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성공은 구조적 요인 없는 자신의 노력 덕분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렇다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능력주의 성과주의 기존 질서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이 생기고. 그런데 캔슬 컬처는 성공한 무언가를 끌어내리는 성격이 강해서, 보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녀 문제에서 내가 무슨 기득권이냐고 말하는 남성들을 보면 미국 백인 남성의 인식을 연상시키는 느낌이 좀 있다. 남성이 기득권을 가지는 총체적인 사회적인 구조와 문화를 아우르면, 일시적인 생애 구간을 제외하고는 남성이 훨씬 더 여성보다 유리하다. 하지만 젊을 때는 성별로 인한 사회 구조적 이득을 아직 별로 못 누렸을 수도 있고 잠시나마 여성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구간이 발생하기도 하니, 남성으로서 누리고 싶은 기존 문화의 무언가에 대해 ‘캔슬’이 들어오는 듯하면 불편할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캔슬 컬처에 대한 백래시를 조사해도 미국과 비슷한 패턴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각 범주와 층위의 이름만 다른 식으로.

‘책임’이냐 vs. ‘검열’이냐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캔슬 컬처에 호의적인 쪽은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쪽은 ‘독선적 검열'(사적 제재)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그 중간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할 테고, 중간 지대의 회색에 가장 많은 이들이 분포할 수도 있다.

퓨리서치 ‘미국인과 캔슬컬처'(2021.05)에서 캡쳐 인용.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쪽과 검열(처벌)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대별된다.

미투운동은 비교적 그 경계가 선명했고, 법적 처벌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에 도덕적 단죄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소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시도할 수 있는 최후 수단으로서의 ‘도덕적 단죄’였다. 그게 열쇠가 되어 뒤늦게나마 법적 단죄가 이뤄진 경우도 있고.

불매운동도 비슷한 속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식으로 법적 단죄가 아닌 차원에서 도덕적 기준으로 실질적으로 그 대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정말 정당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과정인가 아니면 과도하고 자의적인 단죄(검열)인가는 그때그때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문제다. 효과의 차원에서는, 불매 운동으로 어떤 ‘부도덕한 가게’가 망하는 경우도 있고, 역풍이 불어서 열혈 팬덤만 더 강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결과가 더 쉽게 예상되는지를 따지는 것이 관건이다.

출구 없는 취소?


취소 문화가 조심해야 하는 중요한 지점은, 도덕적 엄숙주의와 과도한 엄벌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다. 이 위험성에 관해서는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참고: 이선균의 죽음, 과거 아니라 반복될 미래…그 모든 게 연결된 문제다).

가령 한국에서 한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했다고 치자. 법적 처벌 외에 해당 연예인이 아예 다른 행동도 못하도록 여론을 몰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무조건 평생 자신이 몸담았던 그 영역에서 영원히 쫓겨나야만 정의로운 결과일까. 그래서 잘못을 범한 어떤 연예인이 있다고 해도 그 행동, 반성 행위를 기준으로 한 복귀 경로, 절차가 필요하다 (참고: 연예인의 ‘패자부활전’…패자 부활의 공식 루트가 중요하다).

고(故) 이선균.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죄보다 죄지은 놈이 문제?


그런데 그런 출구가 어려운 것이, 취소 문화는 특정한 반사회적 행위나 비도덕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추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사회적인 행위, 제도 따위가 아니라 ‘사람 단위’로 캔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사람에 초점이 맞춰지면, 행위나 제도에 관한 이야기도 사라지고, 그 행위에서 벗어나 다시 갱생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위험성은 이런 태도가 내로남불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대상이 ‘행위’가 아니라 ‘사람’일 때는 내 맘에 드는 사람에게는 괜찮았던 문제가 나에게 밉보인 누군가에게는 잘못이 될 수도 있다.

미국식 내로남불


가령, 최근 미국 유명 대학교 총장들이 너도나도 잘린 사건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지 학생 시위에 대한 청문회에 끌려 나와서 입장을 증언해야 했다. 우익 공화당 의원들이 주도하는 유도 신문에 빠지며, 여러 총장들이 ‘정치적으로 안전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반유대주의로 몰리며 압박 속에서 사임을 하게 되었다.

대중적으로 폭발력 높은 떡밥을 뽑아내고 그것으로 열심히 조리돌림을 시켜서 해당 대학들의 기부 후원자들 등 지원 네트워크들로부터 끈이 떨어지게 만든 과정인데, 그야말로 캔슬 컬쳐 그 자체인 것이었다. 캔슬 컬쳐가 자유로운 의견을 묵살하는 것이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보수층이 오히려 최대한 적극적으로 캔슬 컬쳐를 써먹은 내로남불 되겠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일부 친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캠퍼스 내 건물을 점거하면서 시위가 가열되고 있다. ‘PBS 뉴스아워’ 유튜브 갈무리. 2024.04.30.

캡콜 가이드: 분노 경쟁 멈추고 3분만!

분노 경쟁을 멈출 때


우선 분노에 편승해서 스스로 분노의 스타가 되겠다고 경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더 널리 바이럴을 타도록, 더 기발하게 조롱해야지! 그런 가학적 문화를 해체해야 한다. 그런 경쟁을 줄이도록 플랫폼 서비스가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현실은 플랫폼 사업자가 그런 분노를 조장하고, 트래픽을 늘리는 방향으로 사태의 주범이자 공범 역할을 자임한다.

모범 사례…희망의 조각


그나마 희망을 찾아보면, 오래전 블로그 문화가 있었을 때 가장 중요했던 요소 중 하나가 ‘트랙백’이다(트랙백의 개념). 내가 이런 식 주장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각자의 공간이 있지만 토론 네트워크가 펼쳐지는, 천천히 다양한 관점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지금 생각해도 아주 놀라운 방법론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가능성을 내다버렸다.

그 트랙백 방식을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 재현할 수 있는가. 가령 원래 계획에서 꽤 후퇴한 얼룩소가 현재 상황에 맞게 글과 글을 묶을 수 있는 시도들을 했는데, 현실적으로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블로그 시대 토론을 심도 있는 방향으로 끌고 갔듯, 현재의 소셜 시대에도 그런 시도들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심도 있는 생각을 이끌어내는 장치를 실험할 수 있지 않을까.

가치 지향 vs. 돈 벌면 장땡


플랫폼 사업자도 너무 강한 독성을 너무 오래 띠게 되면 사업적으로 오히려 좋지 않다. 더 나은 대화의 방식을 고민할 시기다. 페이스북은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라는 악명을 떨쳤고, 그 대응책으로 오히려 검증된 뉴스 링크 노출을 줄이고, 일반 사용자 게시물 노출을 늘렸다. 트럼프 당선 이후 내세운 정책인데, 오히려 확증편향을 증폭시켰고, 제대로 된 뉴스 유통에만 타격을 주고, 자극적인 오정보를 확산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트래픽'(돈 벌면 장땡)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왜 분노를 부추기는가? 왜냐하면 분노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지 영상 플랫폼


현재의 지배적 소셜 미디어,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은 영상이나 이미지 플랫폼이다. 안타깝게도, 영상과 이미지는 글로 된 내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성적 납득보다는 정서적 공감대에 집중시킨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빠르고 강력하게 퍼진다. 이 사람을 빨리 조져버리고 싶다! 내가 더 강력하게 조져버리겠다! 그런 과정에서 바이럴이 되고… 무자비한 공격 앞으로가 득세한다. 합리적인 토론과 공감의 영역은 점점 더 축소한다.

해법


이런 환경이라서 해법을 찾기 어렵기도 하다. 새로운 사업적 영역을 실험해야 한다. 블로그의 트랙백 같은 형식을 현재에 되살릴 필요도 있다. 정책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지원 사업이라는 게 데이터베이스 지원, 몇몇 언론사를 찍어서 기사 제작비를 지원하는 것, 뭐 그런 식이 대부분인데, 좀 더 큰 차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체계적으로 연결된 열린 대화의 광장을 키울 수 있는 기술 프로토콜이나 사업모델에 대한 지원이라든지.

캔슬 컬쳐라는 온라인 문화는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당대의 도덕적 단죄 과정이 현재 미디어 환경에 맞게 진화한 것이다. 결국 이런 취소 문화도 공적 토론과 사회적 책임이 만족스럽게 전개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법의 방향성이라면, 효능감이 있는 공론장을 복원하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사안을 찬찬히 파악하고 깊게 생각하게 하는, 그렇게 하고 싶게 만드는 요인들을 대중에게 제공해야 한다.

캡콜 가이드: 딱 3분만!


만약 너무나 공분이 끓어오르는 내용을 접하게 되면, 우선 3분만 쉬어라. 긍정도 반박도 하지 말고. 감정마저 느끼지 말고. 당연히 어디에 공유도 하지 말고. 그렇게 한숨 돌린 다음에 다시 살펴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보니 어쩌면 그 정도로 열심히 조져야 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고, 혹은 오히려 냉정하고 철저하게 잘 조져야할 대상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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