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오픈AI의 챗GPT가 몇 초만에 ‘자동 생성’하는 ‘마법 같은’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는 AI 시대의 저작권에 관해 다양한 논쟁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논쟁에 빠진 게 하나 있다, 바로 우리들! (⏰16분)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21]
AI 시대의 저작권:
지브리와 오픈AI 그리고 우리들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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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4월 18일(월) 밤에서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개인적으로 오픈AI vs. 지브리 논란에서 가장 아쉽게 느낀 점은 모든 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최종 심급에서 그 문화의 궁극적 주체자이자 비평가이며 생산자인 ‘평범한 소비자’, 그러니 엔드 유저, 그러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 우리 자신이 이 논의의 구경꾼으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만이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명성(인격권)과 저작물의 물적 가치(저작재산권)를 지키지만, 그것은 과학과 지식 그리고 예술, 그러니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발전하고 진흥하기 위한 더 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보호와 활용이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저작권과 저작권자는 문화의 ‘향유자’인 ‘우리들’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우선 교통정리.
- 오픈AI는 법적으로는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 하지만 오픈AI와 지브리 사이에 ‘새로운 협약’ 필요성은 크다.
- 오픈AI와 지브리 사이의 저작권 논의와 별개로 향유자의 권리는 존중돼야 마땅하다.
현 저작권법 체계에서 오픈AI가 지브리풍(‘스타일’) 그림을 자동 생성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오픈AI가 지브리의 저작권을 침해한다고 해석할 여지는 매우 적다. 스타일은 ‘아이디어’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저작권법의 대전제는 구체적인 ‘표현’을 저작물로서 보호한다. 표현되지 않은 원리로서의 스타일(아이디어)은 보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행 저작권법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약 한 세기 전에 발터 벤야민이 영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 복제 시대를 맞아 우리는 예술을 완전히 ‘다르게’ 향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언한 것처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5), AI라는 한 시대를 규정하는 새로운 기술의 도래는 예술과 저작물을 향휴하는 방식의 변화는 물론이고, 그것을 둘러싸고 변화하는 생산과 재창작과 소비와 향유의 구조에 맞는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각설하고, AI 시대의 저작권, 그 새로운 합의의 필요성, ‘뉴딜’의 조건을 캡콜드(김낙호 교수)에게 물었다.
저작권법의 두 기둥
저작권을 ‘법’으로 만든 이유는 명확하다. 우선은 과학과 예술의 증진이다. 그런데 과학과 예술을 부흥하게 하려면 남들의 먼저 작업한 걸 축적하고 그걸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식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진흥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이 먼저 창작한 작품들을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첫 번째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런 창작에 보상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을 강조하면 저작권법의 균형이 깨진다. 보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명성에 관한 보장이다. 법적 용어로는 저작인격권이다. 또 하나는 창작물의 재산적 가치에 관한 존중과 보장이다. 법적 용어로는 저작재산권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저작물을 사용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기존 시대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창작 방식이 만들어진다면, 저작권법을 바꿔 나갈 필요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기존 창작물의 활용을 통한 문화 진흥과, 창작에 관한 보상이다. 그것은 저작권법의 두 기둥이다.
저작권법 해킹: 가령 미키마우스법
민노씨가 지적한 것처럼 저작권이 법으로 만들어진 바로 그 순간, 앤 여왕 시대부터 ‘상업적인 진영’에 의한 저작권법 해킹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걸 대표하는 게 저작권 존속기간의 연장이다. 월트디즈니의 상징인 ‘미키마우스’는 저작권법 해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작권의 존속 기간이 계속 늘어나곤 했던 미국 주도의 저작권법을 멸칭으로 ‘미키마우스법’이라고 부른다.

저작권법은 재생산자와 향유자에게는 무척 제한적인 ‘공정이용’ 개념으로 숨통만 틔어 놓고는, 저작권 존속기간을 계속 늘려왔다. 이런 저작권법 해킹은 기업화된 창작 혹은 창작자를 활용한 기업의 확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브리의 ‘고유한’ 스타일?
스튜디오 지브리도 대형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젊은 시절의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도해 차린 회사다. 이사오와 하야오, 즉 지브리의 ‘스타일’도 그 둘이 처음부터 새롭게 창조한 것이라기보다는 토에이나 신에이 같은 기존의 대형 스튜디오에서 축적된 스타일 ‘위에서’ 덧씌여진 것으로 봐야 한다.
가령, 우리에게도 유명한 명작 만화 시리즈인 이사오의 ‘빨강머리 앤’이나 하야오의 ‘미래 소년 코난’도 그런 대형 스튜디오의 작풍을 계승하고 진화시킨 것이고, 기존 스튜디오의 작품에 자신들만의 숙련된 노하우를 더하고 이어갔다고 봐야 한다. 거꾸로, 지브리에서 일하다가 독립해서 자기 작품을 만든 이들 역시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림체를 ‘가지고 갔다’.
그래서 ‘구름처럼 바람처럼’(1990) 같은 작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지브리 스타일’이 누구의 소유였던 적은 없다. 다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스타일을 완성도 높게 다듬어서 상징적으로 대표했을 뿐. 비유하면, 미술에 반 고흐 스타일이 있지만, 후기 인상주의 전체를 반 고흐가 소유한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스타일’ 카피지만 수익을 분배할 필요성
창작물의 활용과 창작물에 대한 보상이라는 두 가지 ‘기둥’ 요소는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긴장과 갈등 상태에 있기 쉽다. 지난 수십년 동안 그런 ‘조화’가 깨지면서 개별 창작자들이 소외되기도 하고, 향유자 대중이 소외되기도 했다. 명백하게 기업화한 창작자 집단이나 창작자 집단을 ‘관리’하는 기업만이 제도의 승리자라는 점은 비교적 명확하다.
지브리 스타일로 다시 돌아오자. 이것은 ‘스타일’ 카피라서 현행 제도의 관점에서 창작에 대한 보상 문제로도 접근하기는 어렵다. 그것보다는 동업자 마인드에서의 수익 분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지브리의 선행 행위(지브리가 만들어낸 특정한 이야기와 시각적 감성을 담은 애니메이션)가 없었다면 챗GPT의 스타일 모방과 전 세계적인 흥행(?)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익과 수익에 미친 지브리의 기여분을 계산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다. 지브리의 기여를 연간 2천만 달러로 계산한 한 컨설팅 업체를 소개한 기사도 있지만, 그 계산법을 얼마나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다만 명확한 건 있다.
- 지브리 스타일 놀이로 오픈AI는 얼마나 더 많은 유료 이용자 유입 효과를 거뒀는가.
- 그리고 얼마나 큰 홍보 효과를 누렸는가.
그 양이 매우 크다면, 지브리로 인해 얻은 추가 수익의 일부를 지브리 브랜드로 사실상 얻은 것이므로 지브리에 그 수익을 나눠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일일이 그 수익을 예측하고 산정하기가 어려우니까, 그 대신 우회적인 방법으로 찾은 게 학습 데이터 라이선스로서 거래하는 일이다. 출판으로 치면, 일종의 ‘매절’ 계약이랄까.

가령 월스트리트저널 등을 발행하는 뉴스 코프가 그런 경우다. 즉, 오픈AI가 뉴스 코프 산하 매체들의 기사 데이터를 구입한 것은 명백히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포스트 기사 같은 글 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그와 같은 이유, 목적에서 오픈AI가 지브리에 합리적인 대가를 제시하고, 기계 학습 데이터 접근권을 ‘라이선스’ 방식으로 거래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기계 학습이라는 우회로로 접근한 것이고, 지브리 경우에는 그런 과정마저 생략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소동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 언론, 가령 NHK 등이 오픈AI에 비판적인 논조로 보도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 오픈AI는 홍보든 새로운 가입자 증가든 뭐든 큰 이익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데, 현실 제도나 법적인 의무에서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의 ‘헛점’,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한 시대의 변화에 제도가 조금 뒤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은 늘상 벌어진다. 제도는 완전히 합의된 것에 관해서만 뒤따라 간다.
AI 시대의 ‘기계 학습 데이터 라이선스’
AI 시대의 ‘기계 학습 데이터 라이선스’에 관해서라면, 이제 그럴 시간이 됐다. 저작(인접)권의 범위 확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된 과정이기도 하다. 다만, AI라는 새로운 기술의 확산은 전 세계적인 변경을 필요로 할 정도의 규모라서 그런 변화의 규모 때문에 그것이 제도화하는 것에는 또 얼마나 걸릴진 알 수 없다.
그런 제도화 전에, 오픈AI는 뉴스 코프에 ‘도의적’ 접근을 시도했고, 지브리에는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다/못했다. 왜? 추론이지만 지브리 스타일 놀이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히트할 지 몰랐으니까. 샘 올트먼의 반응을 보면, 이런 ‘대박’을 전혀 예측하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뉴스 코프도 언론사들과 논란이 생기니까 ‘도의적’ 접근한 거고, 영화 ‘그녀(Her)’의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를 무단으로 썼던 일도 그런 오픈AI의 무신경함(?)에서 비롯한 일이다. 물론 요한슨이 항의하자 그 목소리 서비스는 결국 삭제했지만. ‘그녀’라는 영화에 관한 호감과 호의로 접근했다고는 하지만, 오픈AI는 그런 법적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조직의 규모를 생각하면 좀 어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법무팀의 영역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윤리팀’의 영역이기도 하다. 즉, 법무팀보다는 ‘윤리팀’의 역할이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빅테크 윤리팀은 대체로 취약하다. 페이스북의 다양한 사건사고는 말할 것도 없고, 가령 구글만 해도 이미 2020년에 석연치 않게 AI 윤리팀장을 해고했던 바 있고, 최근에는 사회적 다양성 경영 기획을 대거 접어버렸다.
개인적으로는 기업(오픈AI) 대 기업(지브리)이라는 관계에서 협상한다면, 제3 평가기관에서 ‘사후적으로’ 합의와 중재를 이끄는 방식이 가장 무난해 보인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토큰의 활용 방식이라든지 기술 요인들이 죄다 ‘기업 기밀’에 속하기 때문에, 그 자료를 제3기관에 제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다시 뉴스 코프의 절충적 합의(기계학습 데이터 제공 라이선스 체결)가 현실적 대안처럼 보인다.
지브리 스타일 대유행은 지브리 스타일을 진부하게 만든다?
AI에 의해 지브리 스타일을 너무 손쉽게 구현할 수 있으면 오리지널의 독창성이 사라진다는 식으로 느낄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선 일본 만화 문화의 2차 창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지적재산권 문제에서 지뢰밭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원본에 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제2차 창작을 했고, 그런 전통 때문에 원저작자들도 자신의 작품을 바탕으로 패러디하고 새롭게 해석해 창작하는 2차 창작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가령 하야오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었을 때(1984년)에도 이미 그런 2차 창작 문화가 활발하게 성장하는 시기였다. 당연히 하야오의 그림체를 고스란히 흉내낸 수위 높은 에로 동인지도 머지 않아 등장했고. 그런 정도로 완전히 비틀어진 방식의 2차 창작을 하려면, 하야오의 그림체를 매우 능숙하게 숙련한 상태여야 하고, 지브리의 이야기 방식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즉, 좋은 패러디는 오리지널에 대한 존중과 이해에 바탕하는 것이지 그저 ‘모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된 동인지에 대해서는 원본 창작자들이 원튼 말든 동인지를 묵인하고 이해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이런 존중의 과정 없이 ‘도장 찍듯’ 마구 원본 스타일을 생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무한 생성이 원본의 메시지에 대한 이해 없이 일상화한다면, 그런 행위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부에서 오픈AI가 우리 시대의 문화를 진부하게 할 것으로 비판하는 건, 그런 인공지능의 ‘표피성’에 대한 비판 취지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물론 민노씨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런 태도가 너무 억압적으로, 계몽적으로, 다수가 즐겁게 ‘지브리 스타일’ 놀이 하는데, 그걸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더 나아가 지브리 스타일로 플픽한 사람들은 ‘언팔’ ‘블록’하겠다고 하는 둥으로 합법적인 새로운 기술 문화의 향유 자체를 죄악시하는 태도는 딱히 건설적이지 않다. 이 또한 기술 현실에 맞추어 조금 달리 접근해야할 지점이다.
스틸컷 재현만으로 지브리의 ‘아우라’를 논할 수 있을까
애초에, 사람들이 놀이삼아 하는 그림들이 지브리의 본질을 제대로든 엉터리로든 모사하는 것인지 자체가 애매한 지점이다. 당장 하나의 스틸 컷이나 조악하게 재현된 동영상 클립만으로 지브리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품고 있는, 살아 있는 내러티브와 그 세계관이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 지브리의 특별함은 그 ‘그림체'(스타일)에 담겨 있는가? 아니면 지브리의 모든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하나의 작품’에 담겨 있는가?
너무 당연하게 정답은 후자다. 세상은 가혹하지만 살아라, 전쟁은 매혹시키지만 어리석은 고통이다, 성장을 회피하지 말아라, 이런 울림이 약간 둥그런 캐릭터 그림으로 재현이 되면 세상이 얼마나 쉽겠는가. ‘그림체’나 ‘스틸 컷’은 지브리의 철학과 방법론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작품에 관한 기억을 연결하는 ‘앵커 포인트’일 뿐이다.
우리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그 ‘좋아한다’에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구현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세계관, 특히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를 통해 형상화하기 그 동작에 관한 묘사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느낌, 그런 하나하나의 장면과 시퀀스 그리고 제스처 하나하나에 깃든 장인 정신과 그것에 관한 존경, 사랑스럽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와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 그런 이야기를 더 빛나게 하는 음악 등에 관한 총체적인 느낌이다. 그러니 그 스타일, 스틸 컷은,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앵커 포인트’일 뿐이다.



사실 사람들의 다소 과장된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챗GPT에 의해 생상된 이미지는 좀 많이 조악하다. AI에 의해 복사된 이미지나 짧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지브리의 원본과 비슷하다고 단언하는 것이 나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모방∙재현된 클립의 동선이나 레이아웃, 미장센의 수준을 보면 원본(지브리)에 전혀 못 미친다.
더불어 AI 관련한 하야오의 ‘발언’이 널리 퍼져 있는데, 거기에는 맥락에 관한 오해가 있다. 2016년 당시, AI 구현하는 회사에서 제품을 가져오면서 이상한 생물이 움직이는 기괴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상상력 이상의 동작을 구현할 수 있다고 자랑하자, 거기에 대해 반박한 말이 와전된 것이다. 하야오의 취지는 원래 이런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 장애인 친구가 있었는데, 팔 들어올리는 것, 악수 하는 것도 어려워 했다. 그 친구 생각을 하니, 이것을 재미있어 할 수가 없다. 이것을 만든 이는,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다. 생명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그러니까, AI라는 도구에 대한 막연한 악마화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시도하지 않는 접근에 대한 환멸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움직임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AI의 움직임에는 그 대상에 대한 이입이 없다. 왜 그런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지, 그 움직임에 어떤 존재의 이유가 담겨 있는지가 중요하다. 가령 ‘바람이 분다’에서 군중이 도망가는 단 4초짜리 장면이 있다.
그 4초짜리 피난 장면을 1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고민해서 만들어냈다. 그 군중 속 인간 한 명 한 명에 각자 존재와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작품’이라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인데, 그 깊이나 철학, 방법론을 AI가 재현하지는 못한다. 현행 AI는 사람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흉내 내는 것이지 사연을 고민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이라고 모두가 열심히 고민하며 창작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특이점 이후의 AI
지브리와 오픈AI가 기계학습 데이터 제공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어느 날 특이점 이후의 AI가 출현하면, 그때에는 지브리의 철학을 구현하는 AI가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그걸 우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인간과 자연, 사회에 관한 깊은 통찰이나 애정이 담긴 작품을 AI가 생성할 수 있다면, 그때는 그 작품의 ‘크리에이터’가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나는 크게 상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시대가 얼마나 가까이 왔을까라고 묻는다면, 가령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작품’을 근미래에 AI가 창작(생성)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얼척 없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창작과 인간에 관한 통찰과 이해는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다. 사람을 ‘더 잘 흉내’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인간에 관한 통찰은 더 어렵다는 거다. 즉 인간에 관한 모방의 깊이가 깊어지면서 인간의 통찰에 관한 재현은 더 어렵다는 걸 ‘동시에’ 보여준다. 인간의 뇌에 관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통찰이라는 게 훨씬 더 복잡한 문제라는 걸 알 게 되었듯이. ‘전격 Z작전’ 보던 옛날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2025년이나 되었는데도 마이클과 친구 먹는 키트는 없다.
바둑을 비롯해서 특정한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정답’이고, 인간은 인공지능을 마치 ‘스승처럼’ 학습∙참고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상상’이나 ‘통찰’의 영역이 아니라 ‘기능’의 영역이다. 종종 바둑의 수 하나를 우주에 비유하곤 했다. 인공지능 이전의 시대에 그 우주 만큼 드넓은 가능성의 수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둑기사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이었다. 그래서 바둑은 우주에도 비유되고, 자연에도 비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삶에 비유되었고, 그런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바둑이라는 미지의 가능성을 채워나갔다. 그러니까, 수 싸움의 가능성을 수학으로 곧바로 연산하기보다는 기세의 흐름과 공간적 상상력과 상대의 인격 등으로 매개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이라면 수백, 수천년 동안 학습해야 할 ‘기능’을 완전히 마스터했다. 그런 기능의 차원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에 뒤진다. 컴퓨팅 연산기술이 발전하면서 무한에 가깝다고 여겼던 ‘무한에 가까운 수’가 지금은 실시간으로 계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도 그 상황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최적의 수(정수)를 찾을 수 있게 됐다. 바둑을 통해 승부하는 두 기사의 상상력이 대결했던 과거를 이제는 인공지능이 실시간으로 분석한 ‘정수’와 ‘악수’로 그리고 그 확률로 대체됐다. 그리고 그 무한에 이르는 경우의 수에 ‘정수’를 제안하는 인공지능의 수를 인간이 배우고 있다.
그것은 진보일까? 인공지능의 놀라운 ‘기능’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바둑에서 인문학적 상상력, 그런 상상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능이라는 차원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훨씬 더 빨리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발견도 비슷하다. 단백질 결합 구조 같은 것도 결국은 연산과 패턴, 그래서 인간의 상상력보다는 컴퓨팅 연산 기능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분노의 포도’를 생성(창작)하기는 힘들까
하지만 민노씨가 좋아하는 ‘분노의 포도'(1939, 존 스타인벡)와 같은 작품은 특이점 이후의 인공지능이라도 창작(생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특정한 인간적인 맥락 안에서 ‘반응’으로서의 감정을 인공지능으로 공식화하려면, 사람의 상황에 관해 학습해야 하는데, 그런 학습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현재 인공지능은 결국은 ‘토큰’ 단위로 기존 문장이나 그림을 ‘통계적으로 결합’할 뿐이다. 그래서 어떤 게 더 자연스러운지를 선택하는 ‘응용 통계’일 뿐이다. 그러니 데이터 너머의 삶, 추상적인 무엇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다. 테드 창이 인공지능에 인격적인 메타포를 부여하지 말고 ‘응용 통계’라고 부르자고 했을 때 그 취지가 이런 경우에 아주 정확하게 부합한다.
인공지능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존재하는 어떤 실존적인 인간의 반응, 맥락이 아니라 그저 그런 조건들 속에서의 ‘응용 통계’에 불과하다. 그걸 뛰어넘으려면? 개별 인간의 삶의 경로, 어떤 시대에 살았고, 어떤 종류의 세금을 냈고, 어떤 공공서비스를 받았고, 어떤 범죄를 저질렀고, 누구와 사랑을 했고… 그런 모든 모든 인간의 데이터를 가지고, 국가 규모 아니 세계 규모로 학습한다면, 사람에 관한 정확한 통찰이 가능한 인공지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드라마 ‘웨스트 월드’에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더 적은 데이터’가 인조인간 구현의 키포인트였지만(물론 그 설정은 드라마적 상상력에 불과하다), 지금의 인공지능 모델은 그 정반대 모델이다. 추론 메커니즘을 좀 더 만들어내는 것, 그렇게 총체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았다.
지브리와 알 수 없는 엄숙주의
지브리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 챗GPT는 지브리의 아주 작은 조각, 하나의 움직임이나 장면의 분위기, 그 스타일만 ‘흐릿하게’ 모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오픈AI에 적대감을 표시하고, 재밌게 지브리 스타일 놀이 하는 다수 대중을 훈계하는 듯한 엄숙주의적 태도를 취할까. 이런 거부감은 왜 어떻게 생겼을까.
이들 일부 엄숙주의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오래 전부터 유행했던 심슨 캐릭터 생성기 같은 것도 맷 그레이닝(심슨의 크리에이터)에 대한 모욕이라고 해야 하는데,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심슨 패러디는 재밌게 즐겼으면서 왜 이제와서 유독 지브리만 문제인가.

창작가가 대체될까봐? 물론 ‘얄팍하게 대체’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빅테크의 대량생산에 대한 거부감 정도를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지브리의 완성도를 10이라고 했을 때, 지금 사람들은 그걸 살짝 그럴듯하게 연상만 시키는 것, 그러니까 2 정도 수준에서 놀랍다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대중의 즐거움을 보면서 굳이 정색해야할까. 아직 그럴 필요 없다.
인용 문화에 관하여
인용 문화라는 것은 피인용 작품이나 그 작가에 관한 계보를 읊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창작에 관한 기원, 자신의 창작의 재료에 관한 맥락을 쌓아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작품의 재료를 바꿔 볼 수도 있고, 새로운 창작과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삼는 거다. 일종의 ‘창작 재료 원산지 표시’랄까. 하다못해 식당 레시피와 재료에도 원산지 표시가 있는 것과 마찬 가지다.
그런 맥락에서 인공지능이 지브리 짤방을 생성했을 때, 그 짤방에 ‘해설’이 붙으면 좋겠다.
- 이 생성짤은 ‘이웃집 토토로'(1988)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 이 짤방은 후기 하야오 작품의 화풍을 모사한 것입니다.
그런 맥락, 인용이 있으면 그때 모사된 인공지능 짤방은 새로운 토론과 탐구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오픈AI가 그런 문화를 수용하고, 소비자들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반가운 소식은 구글 검색엔진은 제미나이가 언젠가부터 아주 소극적인 수준에서나마 ‘소스’를 표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용문화의 맥락에 가깝게 개선하고 있는 과정으로 보인다.

지브리 스타일 소동의 ‘생산적인’ 교훈
지브리 소동의 결론은 지브리 짤방 좀 만들었다고 향유자를 ‘문화의 적’으로 만들 게 아니라 이번 소동을 통해서 좀 더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할 수 있다고 사유의 지평을 좀 더 넓히는 것이다. 나는 더 풍성한 논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AI에 대한 경계심이 활짝 피는 오늘날보다 훨씬 예전인 2013년 즈음, 미국의 일간신문 시카고선타임즈에서는 이제 모두가 아이폰이라는 기기를 들고 다니니 사진 기자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모두 해고했다. 이제 아이폰이 색감 보정도 하고 화질도 선명하고 하니 누구나 그럴듯한 사진을 만들어올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결과는 물론, 사진 기자를 해고하지 않은 경쟁신문 시카고 트리뷴과의 선명한 품질 차이였다. 좋은 보도사진은 단순히 대충 관련 좀 있는 선명한 화질의 장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시각언어를 통해 감정을 자극하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니까.
지브리 스타일 소동을 열쇠 삼아, 많은 이들이 좋은 창작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좋은 애니메이션이라면, 왜 이 존재는 여기에서 이렇게 움직여야만 하는지 많은 고민과 철학이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기능’과 ‘효율성’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작품에 굳이 그런 고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고, 포기해버린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그런 노력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지브리는 이런 조악한 그림체 모방 정도로는 대체할 수 없어야 정상이다. 오히려 이런 모사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염려하는 그 태도가 불길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동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동작 하나하나에 담긴 대상에 대한 고민, 철학, 예술적인 노력에 관심을 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다보면 향유자로서의 눈높이도 올라가고 그 중에 누군가가 창작자로 나서며 지브리의 어깨를 딛고 더 깊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하는 선순환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