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머리를 자른 아이의 모습은 몹시 낯설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아이가 이제 내 곁을 떠나는구나. 예상치 못한 감정 때문에 조금 눈물이 났다. 나도 아이도 당황했다.

“아우! 딸 머리 잘랐다고 우는 엄마가 어딨어?”

그냥 조금 눈물이 났을 뿐이다. 내 것이라 여겼던 것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달픈 마음이라기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아이의 일상에서 나의 영역이 정범 줄어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달라진 딸의 모습에서 실제로 구체화되었을 때, 놀람과 당황스러움의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생각보다 아이의 존재는 내게 너무 컸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 문제에 관한 한 대단히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한술 더 떠 마치 초월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나의 눈물은 참으로 가엾고 안쓰럽다.

어느 훗날에 가엾고 안쓰러운 눈물을 또다시 흘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짐하고 다짐해도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이 마음이고 보면, 아이의 변화 앞에서 나는 또 당황하고 어찌할 바 몰라 조바심을 쳐 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흘리게 될 눈물은 부디 아이를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에 대한 연민이나 서글픔 때문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측은함의 눈물이면 좋겠다. 그 역시 가슴 아프긴 마찬가지겠으나 (마찬가지 정도가 아니라 더 하겠지만), 적어도 나에 대한 혼란한 감정 때문에 아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기회를 놓치게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물음, 부모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잘 모르겠다. 아이는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뿐이다.

2006년 3월

머리 헤어디자이너 헤어드레서 소녀 여사 사람

 

지금은, 아이가 피어싱을 하고 문신을 해도
나는 울지 않는다.
부모는 단련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성장할 뿐이다.
성장통도 있어서 가끔 괴롭고, 아프기도 하다.
아, 이를 어쩌나 아득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때, 중학교에 입학했던 딸이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한편 대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프다.
그러나 그때보다 조금 더 성장한 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서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
이 감정도 배신감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랬듯 이 아이도 앞으로
내가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이와 만날 때마다 낯설고 당황스럽고,
또 그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겠지.
지금은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과정에서
나도 아이와 같은 속도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2019년 3월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