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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과거 일본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큰 파문이 일었던 저작권 분쟁 비화를 소개합니다. 국내 창작 콘텐츠업계가 반면교사로 참고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창작자의 권리가 올바르게 보호받고, 활발한 미디어 믹스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필자 주)

  1. 우주전함 야마토: 니시자키 요시노부의 잔꾀 (상) / 승자와 패자 (하)
  2. 울트라맨: 가문의 영광과 비극 (상) / 국제 분쟁 된 울트라 재판 (하)
  3. 파이브 스타 스토리: 저작권 때문에 환골탈태한 FSS (상) / 탐욕에서 시작된 FSS의 비극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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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맨] 시리즈는 [고질라], [파워 레인저, スーパー戦隊]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특촬 콘텐츠이다. 1966년에 방영된 첫 번째 타이틀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일본 내에서만 40여 편이 넘는 시리즈가 제작, 방영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의 수많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에 거대한 영감을 제공해 왔다.

수많은 일본 문화 콘텐츠에 지대한 영감을 제공한 [울트라맨]
수많은 일본 문화 콘텐츠에 지대한 영감을 제공한 [울트라맨]
그러나 이처럼 오랜 기간 장수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슈퍼 히어로 자리를 지켜 온 [울트라맨]이지만, 일찍이 해외 시장을 개척해 냈던 [파워 레인저]나 [고질라]에 비해서 국제적 위상은 낮은 편이다.

오늘의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울트라맨] 보다 후발 캐릭터들이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째서 울트라급의 이 슈퍼 캐릭터께서 해외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계신 것인지?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난번에 소개한 [우주전함 야마토]를 능가하는 저작권 분쟁의 실타래가 꼬이고 꼬여서 완전히 엉켜 버린 비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을 넘어 태국에서 발생한 황당한 소송이었다.

‘고질라’ 창조한 특촬의 신(神) 쓰부라야 에이지

[울트라맨]을 제작한 쓰부라야 프로덕션은 오늘날 일본식 특수촬영(特殊撮影, 이하 ‘특촬’) 기법을 창조해낸 특촬의 하느님 쓰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가 설립한 회사이다.

일찍이 그는 일본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줄이고 대신에(부족한 예산을 극복하기 위해) 미니어처 세트를 활용한 특수촬영 방식의 합성영화가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아날로그 효과들을 고안해 낸다.

특히 교과서적으로 카메라를 돌리던 기존 영화계의 촬영감독들과 크게 반목하면서도 아무도 본적이 없는 앵글과 말도 안 되는 고속촬영 등으로 놀라운 장면들을 담아내게 되는데, 그 결실이 바로 1954년작 [고질라]를 통해 입증된다.

현재까지 28편의 시리즈가 제작되었으며 헐리우드판 2편이 제작되고 있는 괴수 영화의 대명사 [고질라]. 쓰부라야 에이지의 특촬 기술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
현재까지 28편의 시리즈가 제작되었으며 할리우드판 2편이 제작되고 있는 괴수 영화의 대명사 [고질라]. 쓰부라야 에이지의 특촬 기술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
[고질라] 1탄은 당시 1,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사회 현상으로 확산했고, 속편들이 계속해서 제작된다. 쓰부라야 에이지는 이 시리즈의 특수기술 감독을 맡는 한편 토호 영화사 산하의 특수 기술 연구소를 설립해 지속적인 특촬 연구를 해나간다.

장남 하지메, [울트라맨]을 급조하다

그리고 마침내 1963년, 쓰부라야 에이지는 토호 영화사로부터 출자를 받아 오늘날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모체가 되는 쓰부라야 특기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당시 쓰부라야 에이지의 장남인 하지메는 TBS 방송국의 PD로 근무 중이었고 차남인 노보루는 후지 TV의 PD로 재직중이었는데, 차남 노보루가 아버지의 독립과 때를 같이 해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특촬 기술을 활용한 SF 드라마 [WOO]의 기획안을 방송국에 올린다.

그러나 이 기획이 중도에 취소되면서 고가의 특수장비들을 주문해 놓고 제작 준비를 하고 있었던 쓰부라야 프로덕션은 난관에 부닥친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장남 하지메가 아버지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급조한 기획안을 TBS 방송국에 올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이후 50여 년 동안 지구를 지켜내는 [울트라맨] 시리즈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울트라맨] 세계관의 기틀 마련한 [울트라 Q]
[울트라맨] 세계관의 기틀 마련한 [울트라 Q]

큰 별이 지다

[울트라 Q, 1966]에 이어서 [울트라맨, 1966], [울트라 세븐, 1967]이 연이어 대성공을 거두자 쓰부라야 에이지의 이름은 일본을 넘어 서구권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할리우드의 유명한 감독들이 그를 만나러 일본에 찾아오는 한편, 비틀즈가 출연했던 미국의 인기 토크쇼 [에드 설리번 쇼]에서 출연을 요청에 이른다.

그렇게 되자 치솟는 그의 명성과 비례한 제작 의뢰가 쏟아져 들어오게 되는데, 문제는 경영자적 마인드보다는 크리에이터적 기질이 강했던 쓰부라야 에이지는 그것들을 무리해서라도 모두 소화해 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미쓰비시 미래관 영상을 제작하던 도중 누적된 과로로 쓰러지게 되고, 불과 한 달 만에 그에 따른 협심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너무나 엄청난 별이 하나 져버린 것이었다.

쓰부라야 에이지의 생전 모습
쓰부라야 에이지(1901~1970)의 생전 모습

장남 하지메, 명성과 함께 채무까지 남기고 요절하다

1970년 2월, 쓰부라야 에이지의 죽음으로 경영 공백 상태에 놓인 쓰부라야 프로덕션을 잇기 위해 장남인 하지메가 TBS 방송국을 사직하고, 2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개구리의 자식은 개구리’라는 일본 속담처럼 하지메 역시 경영자 보다는 창작자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버지 에이지는 [울트라 Q] 제작 당시 6개월짜리 방송분을 만들기 위해 무려 2년의 제작기간을 투입 했고, 이후에도 작품의 수지타산보다는 오로지 퀄리티를 최우선으로 회사를 운영했기 때문에 경영 상태가 매우 나쁠 수밖에 없었는데(만들면 만들수록 적자가 늘어나는 구조), 하지메 역시 똑같은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는 취임과 함께 공백기가 있었던 [울트라맨]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돌아온 울트라맨, 1971]을 시작으로 [울트라맨 A, 1972], [울트라맨 타로, 1973], [울트라맨 레오, 1974]까지 새로운 시리즈를 연속으로 제작한다.

돌아온 울트라맨
하지메는 아버지 에이지의 장인정신으로 이어받았지만, 그 때문에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진: 돌아온 울트라맨)

그리고 이것이 제2의 괴수 붐을 일으켜 관련 상품 시장을 거대화시키기에 이르는데, 정작 시장의 이윤을 쓸어간 것은 후발 주자인 토에이와 반다이가 제작한 [가면 라이더]와 [파워 레인저] 시리즈였다.

사업가적 수완보다는 장인정신만으로 [울트라맨]을 만들던 쓰부라야 프로덕션은 명성과는 반비례한 채무가 늘어갈 뿐이었고, 결국 그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 여파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이은 장남 하지메는 불과 3년 만에 41세라는 이른 나이에 뇌혈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차남 노보루, 울트라맨의 전성기를 이끌다

이렇게 되자 이번엔 차남 노보루가 후지 TV를 사직하고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3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장을 맡게 된 노보루는 아버지도 형도 천재 연출가였기 때문에 자신은 작품적으로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하고 대신 사업적 영역에 주력해 회사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소신을 밝힌다.

가장 먼저 노보루는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서는 토호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쓰부라야 프로덕션은 토호 영화사의 출자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그러다보니 회사 내에 토호 출신의 퇴역 관리들이 임원으로 들어와 앉아서 회사를 암화시키고 있는 측면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노보루는 쓰부라야 엔터프라이즈라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 그곳에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주식 45.5%를 매각한 뒤 자신의 보유 주식 15%를 합쳐서 확고한 의사결정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와 함께 조금 늦었지만 [가면라이더]와 [파워 레인저]에게 빼앗긴 머천다이징 상품 제작에 박차를 가해 [울트라맨] 관련 상품들을 봇물처럼 쏟아내며,  당시 한국 최고의 실력파 애니메이터였던 김대중 감독(훗날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감독)에게 [울트라맨]의 SD 버전 애니메이션 [울트라맨 키즈]를 제작하게 하고 이것을 활용한 테마파크 ‘울트라맨 키즈랜드’를 개장한다.

울트라맨 키즈 랜드
울트라맨 키즈

또한 [울트라맨]의 세계 진출에도 박차를 가하며 해외 합작 프로젝트들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울트라맨 USA], [울트라맨 파워드] 등과 같은 작품들도 제작하게 된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3대 사장 쓰부라야 노보루가 재임했던 1973년부터 1995년까지를 [울트라맨]의 전성기로 회고 하고 있다.

노보루 사후, 태국에서 날아온 황당한 계약서

사건의 시작은 3대 사장 쓰부라야 노보루가 세상을 떠난 1995년 말에 발생한다. 당시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경영권은 노보루의 장남 카즈오에게 승계되었는데, 돌연 태국인 솜포테 상두안차이(Sompote Sangduanchai)라는 사람이 선대 사장(노보루)과 맺은 계약서가 있다며 [울트라맨]의 해외 판권(일본 이외 국가)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해 온 것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이때의 초기 대응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 무렵 쓰부라야 프로덕션에는 더 큰 분쟁의 징후가 싹트고 있었다. 대개 자수성가형 기업들이 3대째에 무너지는 경향들이 비일비재한데, 이유는 뻔하다. 3대째까지 내려오는 동안 회사 일에 관여하는 가족의 수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족벌간 주식 따먹기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남 하지메의 자손과 차남 노보루의 자손들 사이에서 경영권 싸움이 일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이 무렵 선라이즈와 남코를 먹어치운 반다이가 다음 타겟으로 쓰부라야 프로덕션을 노리게 되면서 내부 임원중 한 명이 반다이와 결탁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일으키려던 시도가 적발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진흙탕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울트라맨 가문의 경영권 싸움에 연이은 솜포테의 급습

그러는 사이 [울트라맨]의 해외 판권을 차지하려는 솜포테는 착실하게 만반의 준비를 해가고 있었다.

본래 솜포테는 태국 영상 제작업체 차이요(CHAIYO) 프로덕션의 대표로 회사를 차리기 전에 일본에서 유학했고, 그 과정에서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설립자 쓰부라야 에이지로부터 특촬기술을 사사한다.

태국으로 돌아간 솜포테는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특촬 기술을 이용한 합작영화 [쟌보그 A & 자이언트]를 제작해 개봉했고, 반응이 좋자 쓰부라야 프로덕션에 다시 제안해서 만들게 되는 두 번째 합작품이 훗날 울트라 가문의 흑역사가 되는 전설의 괴작 [울트라 6형제 vs 괴수군단, 1974]이다.

울트라 6형제 vs. 괴수군단
울트라 가문의 흑역사 [울트라 6형제 vs. 괴수군단]
[울트라맨] 초기 시리즈에 나오는 6형제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이 합세하여 우주 괴수를 무찌르는 이 기괴한 작품은 일각에서는 무판권으로 제작된 일명 짝퉁 영화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당시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3대 사장 노보루의 세계화 노선과 부합되어 정식 계약으로 제작한 합작 영화가 맞다.

문제는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인 1976년 3월에 일본 이외 국가들에 [울트라맨]의 6개 시리즈에 대한 독점권을 자신이 갖는 계약을 노보루 사장과 맺었다’고 노보루 사장이 죽은 직후(1995년)에 솜포테가 주장한 것이었다.

[box type=”info”] [예고] 저작권 분쟁 비화 2: 울트라맨 편은국제 분쟁이 된 울트라 재판 (하)으로 이어집니다.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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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ㅎ어릴때 집에 비디오가없어서 잘못봤던 울트라맨이었는데 이렇게보니 또다르게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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