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대는 멀리 있지 않다.
지난해(2015년)부터 미디어에서는 끔찍한 아동학대 사례를 연이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흔히 말하는 흉악범, ‘쫓아가면 안 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의 보호자, 심지어 친부모였다. 많은 이들이 아이가 가장 안전하고 행복해야 할 집에서 엄청난 폭력과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그럴 리가 없는, 그래서도 안 되는’ 친부모에 의한 학대에 또 한 번 분노했다.
그들을 마음 놓고 욕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 ‘저런 일은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동학대의 현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보통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어린이지만, 한편으로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관심에 벼랑 끝으로 몰리는 어린이 역시 아동학대의 피해자다.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이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 가사 속 어린이들은 걱정 없이 뛰어노는 천진한 모습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놀이터에서도 골목길에서도 까르르 웃는 어린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놀이터에서 사라진 어린이는 상가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태권도 학원에 갔다가 영어학원으로 숨 가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이다.
아동문학가이자 놀이터디자이너인 편해문 씨는 한국의 비뚤어진 교육열, 아이들을 ‘성공’ 시키려는 부모의 맹목적인 교육열이야말로 아동학대라고 일갈한다.
“아이들에게는 놀 권리가 있다. 아이들의 놀 권리는 생명권이다. 아이들은 학원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中. 2012년. 서울: 소나무.
아프리카 내전에 동원되어 어른도 견뎌내기 힘든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소년병을 보며 우리가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그들이 ‘아이다움’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죄악을 향하는 것이다. 아이다움, 어린이의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지 않는 것이 곧 아동학대라면, 이제 눈을 좀 더 크고 둘러본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아동학대’가 공기처럼 자리 잡고 있음이 보이리라.
‘자연스럽게’ 폭력이 되는 불안
영화 [4등] (정지우, 2016)은 그야말로 4등을 밥 먹듯이 하는 어린 수영선수 준호의 이야기다. 4등, 이면 결코 낮은 등수가 아니다. 그런데 준호의 엄마에게 4등은 꼴등이나 마찬가지, 아니 그보다 더 잔인한 등수다. 올림픽에서 경기가 마치고 나면 경기장에 설치되는 ‘영광의 포디움(시상대)’를 떠올려 보자. 그 어디도 4등의 자리는 없다.
4등은 그래서 언제라도 3등 안에 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고문 때문에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자리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잔인한 현실 앞에서 준호 엄마는 잔인한 체벌과 폭언을 서슴지 않는 광수라는 수영코치에게 아들을 맡긴다. 영화는 수십 년간 한국의 체육계에서 고질적으로 고발되어 온 엄청난 훈련을 빙자한 학대를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흔해서 더 슬픈 운동하는 아이의 자기와의 싸움과 체벌 이야기가 아니다. 경쟁과 낙오의 공포, 그 잔인함 앞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약한 어른’이 ‘아이를 위해서’라는 모성 혹은 부성의 이름이 새겨진 칼로 어떻게 아이의 몸과 영혼을 파괴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에 겁 먹은 ‘약한 어른’
한국 현실에서 교육 혹은 훈육이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계기는 사소하고 아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아이에게 행복을 알려주어야 할 어른들, 특히 부모가 그 행복을 앗아가려는 바깥세상에 겁을 먹고 ‘약한 어른’이 되는 시점이다.
영화 속 준호 엄마도 마찬가지다. 준호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아이가 낙오자가 될까 봐 벌써 겁을 먹고 안달한다. 아이 엄마는 급기야 “준호가 매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무서워.”하는 상황에 이른다.
돈을 받고 결과를 내야 하는 수영코치 광수 역시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지도자로서의 열의가 범벅되어 아이를 몰아붙인다. 자기 몸보다 큰 가방에 짓눌리다시피 한 채 한 손에 꼽기도 버거운 학원을 전전하게 하는 부모의 불안감은 언제든 ‘자연스럽게’ 아이를 독서실에 가두고, 떨어진 성적에 매를 들게 만들 수 있다.
‘감금’조차 교육열로 가려지는 사회
지금도 한국의 교육현장에서는 ‘사랑의 매’라는 미사여구로 체벌이 정당화되고 있고, 부모들은 교육과 훈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아동학대라고 인식하고 행동하지 못한 채 자행하고 있다.
특히 강남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집중 책상’은, 나무로 된 책상을 사방으로 막아 작은 감옥처럼 만들었다. 나에겐 ‘학부모의 필수 잇 아이템’이 아니라 ‘감금시설’로 보인다. 아이들에겐 ‘사도세자 책상’, ‘공부감옥’ 등으로 불린다.
더 끔찍한 것은 아이가 성공하게 하려면 공부가 필요하고, 공부가 잘되게 해 준다고 하니 이런 ‘감금시설’까지도 교육열의 발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어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아동학대는 우리 아이를 해치려는 ‘멀리 있는 나쁜 사람’에 의해서일 것이라고 막연히 안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위하려는 마음을 가진 부모든 선생님이든, 아이의 자유와 행복을 빼앗아서라도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면 그 누구든 아동폭력과 아동학대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지난 2010년 서울시교육청을 시작으로 한국의 교육현장에서는 명시적으로 체벌이 금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적 체벌’이라는 교묘한 말을 만들어가며 체벌은 유지되고 있다. 오히려 2014년 기준으로 학생 절반 가까이가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체벌을 포함한 폭력을 당하고 있다. (참조: 2014 전국 학생인권 실태 조사)
이 말의 위험은 따로 있다. 교육의 목적으로는 체벌이라는 수단이 정당해질 수 있다는 논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2014년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아동학대 및 아동폭력 신고율이 미진한 것 역시 가정 내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데, 이는 부모의 훈육이라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정 내 아동학대에 대해서 사회가 얼마나 둔감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약한 어른은 강한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린이날이 아니면 마음껏 뛰어노는 어린이로 있을 수 없는 아이들. 그런데도 아이들은 참 강하다. 영화는 약한 어른들에게 상처받고 멍든 자기 몸을 보고도 모른척하는 엄마를 알면서도 수영을 사랑하고,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며 용감하게 물속을 전진하는 ‘강한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끝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감당해내지도 못할 ‘연예인 스케줄’을 해내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놀고 싶어 하고, 그 삭막한 콘크리트 상가 학원가에서도 친구들을 사귀고 소리도 지르고 뛰어다닌다. 지치지도 않고 말이다.
아이지만, 아이라서 약하지는 않다. 아이들은 참 강하다. 세상이 주는 불안감에 떨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약한 어른을 향해 또다시 웃는 강함을 갖춘 아이들이다. 지금은 세상이 강요하는 경쟁과 낙오의 불안함에 무릎을 꿇었던 약한 어른들이 강한 아이에게 사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