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학교폭력의 해법을 찾아서

솔루션 저널리즘은 문제에 더 깊숙이 뛰어들고 문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그 과정을 추적하고 해법을 모색하자는 제안입니다. 한 칼에 매듭을 자르는 해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들고 있는 많은 문제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우선순위, 기회비용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문제 중심의 접근에서 해결 지향의 접근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슬로우뉴스의 솔루션 저널리즘 프로젝트, 첫 번째 기획으로 학교폭력의 해법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 여는 글: 학폭의 함정, ‘더 글로리’를 넘어서
– 박연진 대학 못 가게 만드는 것,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결말인가.
– 못 본 척하는 친구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 “내 새끼 운명을 건 전쟁”, 학폭위가 해법이 될 수 없는 이유.
– “너는 그래도 우리의 좋은 친구야”- 회복적 정의와 회복적 생활교육
– ‘학교폭력’이라는 말이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 윤석열 정부가 학폭 피해자 시설을 폐쇄했다
– “교사가 학생에게 전화 한 통 못 거는 현실”
– 두 개의 마을: 학교폭력 취재 두 달 소회
– “학폭위 갔으니까 입 다물어” … 시장이 된 학폭, 변호사들만 신났다
– “‘은따’로 겪었던 절망, 물리적인 폭력이 전부가 아니에요”
– “교사의 재량과 권한 강화, 학교가 문제 해결 주체로 나서야 한다.”
“처벌 중심의 학폭위, 가해자의 반성도 피해자의 회복도 없었다.”

연일 주호민 작가의 재판 이야기가 화두다.

우리는 기자들의 기사로 전달 받는게 전부라서 사실 정확한 팩트를 체크하기엔 현재로선 무리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학교 안에 중재기관이 없고 학생들의 과잉 행동을 통제할 정책이 없다. 교사도 학생도 모두 ‘안전’하지 못한 시스템이란 이야기다.

교사는 한 명인데 과잉 행동을 하는 학생이 안전을 위협할 때 모두를 보호할 만한 프로토콜이 없다. 중재도 책임도 모두 교사 한 명이 지게 돼 있는 구멍난 시스템이 문제의 원인이다.

캐나다는 학교마다 과잉 행동에 대한 중재 담당자가 있고, 그 책임자는 최종적으로 교장이 된다. 학생들의 안전과 인권에도 진심이지만 교사를 포함한 교직원들의 안전과 인권에도 단호하다. 교장 또한 책임만 지는 게 아니라 심사숙고한 절차에 따른 결정이라면 처벌하는 권위도 확고히 보장된다.

모든 학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일했던 캐나다 학교에서는 과잉 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에는 게이트 키퍼라는 제도를 이용하고 있었다. 교사는 다른 학생들과 수업을 계속 진행하고, 과잉 행동을 한 학생은 몇 차례 경고에도 행동이 고쳐지지 않으면 게이트 키퍼에 의해 분리된다. 그 후에 필요한 건 전문화된 (다른) 중재자 교사 또는 팀이다. 벌써 여기까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교사 한 명이 모든 걸 다 짊어지고 가는 구조가 아니다.

교사 한 명이 모든 걸 책임지는 구조가 문제의 원인이다.

최소 교사 두 명과 한 명의 게이트 키퍼가 함께 분담해서 각자의 일을 한다. 게이트 키퍼는 자원봉사자일 때도 있고, 인턴들일 때도 있고, 학교나 교육청에서 정식 고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중재에서조차 해결이 되지 않으면(때론 이 과정이 생략 되기도 하고 중재자가 담임이 될때도 있을수는 있다), 교장 선생님이 분리시켜 데려간다. 그리고 학부모 면담을 진행한다. 캐나다는 법적으로 학생의 과잉 행동에는 일시적으로 정학을 내릴 수 있고, 영구적으로 퇴학을 시킬 수도 있다.

나는 담임 한 명이 이 모든 걸 감당해 내야 하는 한국의 학교 정책과 제도가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고 있다고 본다. 비용 때문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안전에 대한 프로토콜을 위한 데 쓰라고 있는게 세금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주호민씨에게 고소당한 교사의 입장도 애처롭다.

하지만, 주호민씨의 아이의 행동문제가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학폭’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이야기 하고 싶다. 장애에 의해 야기 될 수 있는 (우리가 인지 해야 할) 과잉 행동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아이에게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고 주호민씨가 밝혔고, 돌발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아이가 바지를 내린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모르는 우리는 우선은 함부로 말하는걸 삼가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또한 아이의 행동을 나무라는 뜻에서 했더라도 ‘친구를 사귈 수 없을거야’라는 말을 한 건 그 교사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명백한 가스라이팅에 속하는 폭력적 중재다. 아이가 잘못한 행동을 했다면 그 잘못을 지적하면 된다. 너는 친구들에게 버림 받을 거라는 규정은 행동 콘트롤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아이는 사회적 약자(vulnerable) 속에서도 minor(절대적 약자)인데, 더군다나 장애를 가진 아이의 신상 정보가 이토록 널리 까발려진 것과 장애 자체에 대한 도 넘은 혐오 발언들은 이유불문 옳지 않다.

안전이 첫 번째 원칙이어야 한다.

나는 캐나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치료사로 일하고 있고, 내 클라이언트들은 장애가 있는 분이 대부분이다. 간혹 아니 어쩌다 종종 과격한 행동 장애를 동반한 클라이언트들과 일을 하게 될 때도 있는데, 수많은 트레이닝과 오랜 경험을 거쳤어도 통제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걸 학폭처럼 연관시키지 않는다. 전두엽의 이상으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장애에 의한 과잉행동’으로 인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는 명확한 프로토콜이 있다. 치료 행위를 계속 이어가지 않는다.

무조건 ‘안전’이 제 1원칙이고, 그 안전에는 내 클라이언트와 더불어 치료사인 ‘나’도 반드시 포함된다. 일방적으로 한쪽의 안전 우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화로 해결되지 않을 때는 치료도 학교에서처럼 게이트 키퍼와 중재자(나의 경우 치료 총괄 디렉터)가 등장한다. 이조차 해결이 안될땐 ‘경찰’을 부르는 프로토콜이 준비돼 있다. 학교와 비슷하다.

캐나다처럼 학교 내 경찰(때론 은퇴하신 경찰이나 보안관)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에 효과가 크다. 담임 교사와 동료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신속한 중재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트레이닝 하나를 한국도 이젠 의무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비폭력 위험 상황 중재(Nonviolent Crisis Intervention) 트레이닝이다.

캐나다는 클라이언트나 학생들(vulnerable)의 과잉 행동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이 프로토콜을 따른다. 나와 내 클라이언트, 교사와 학생들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이런 중재 트레이닝은 캐나다처럼 최소 2년에 한 번씩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나 또한 이 트레이닝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글을 마무리 지으며 드는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 피해자들만 있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장애 혐오가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를 양육하는 주호민씨도 자폐 아동 당사자도 그리고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했던 특수 학급 선생님도 피해자다.

사실상 가해자인, 시스템과 교육부 그리고 정부는 쏙 빠져 있고, 언제나 피해자들만이 서로 사법부에만 의존해서 싸워 나가는 현실이 너무 아프다.

모두가 안전해지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계속해서 가장 안전한 모델을 찾아 도입하고, 쉐이핑해 가면서 정착시켜야 한다.

교사의 인권도 학생의 인권도 모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관련 글

10 댓글

  1. 앞뒤맥락을 모르고 학부모가 녹음한 녹음 내용만 듣고
    쓴글이네요 다시 취재하세요 인터넷 기사 제목만 대충 보고
    뇌피셜도 기사 쓰지 마시구요

    매일신문도 직접 발로 뛰며 그 학교 학부모들 인터뷰 땄는데
    이렇게 편하게 발뻗고 앉아 양비론 기사 쓰면 좋습니까?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떠들어대느라 속시끄러웠는데 제 생각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네요

  3. 결국 자기 애를 이해해주고, 줄 안 그이게 막아준 설리반을 고소한 주호민도 피해자이며, 주호민이 선생님을 고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한(?) 윤석열 정부가 가해자요, 죄인인가요? 당신같은 교사들을 더 어렵게 만든 정서적 아동학대를 추가한 개정안을 만든 것은 문재인 때요, 180석아닌가요?
    제시해준 정책은 시사점이 크나, 본인의 기사에 섞여있는 본심이 한 쪽으로 무겁게 기울여져 있어보입니다. 역겹네요.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