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에서 이어집니다.
라다크의 산골자락에서 인도양과 아프리카의 사바나까지 이어진 이 여정이 허황되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한국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라고 물어올 수 있다. 한국은 미국, 중국 사이에 껴있는 약소국이며 북한의 핵 위협에 상시적으로 노출된 국가다.
앞서 지역 국가들이 중국과 인도의 구심력에 대항해 자체 구심력을 형성하는 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는데, 사실 한국이 바로 그 지역 국가인 것이다. 강대국 사이의 지역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나 강대국이 자신에 대해 취하는 행동에 민감하게,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해야만 했다. 자국이 속한 지역을 넘어서 세계의 모습을 그려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동시에 자국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너무 의식하다보니, 자국이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을 뛰어넘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외교인식은 언제나 강대국 옆에서 위축된 자존감과 근거 없는 자신감 둘 사이에서 움직였다.
자기부정과 과대망상 사이에서
보수 진영의 대외인식을 살펴보자. 이들은 언제나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그것이 현실’이라는 주문을 읊으며 한국의 대외전략을 결정했다. 중국의 현실적 위협에 맞서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여타 문제는 더는 거론하지 않고, 한미동맹을 붙잡는 것이 최선이며, 북한과 함께 협력한다는 것은 치기 어린 이상론으로 치부했다.
여기에는 중국이 패권주의적 모습을 보여줄 때 한국이 균형추로 붙잡을 나라는 미국과 일본 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되물어보자. 왜 그렇다면 방중 당시 중국이 자국의 막강한 국력으로 횡포를 부렸을 때 그대로 수긍하지 않고 분개한 것인가?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왜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이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약소국’으로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인가?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현실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강대국에 압도당한 한국인이 보여주는 자기부정과 과대망상을 섞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현실인식이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국제 무역 구조와 절대 떨어져서 살 수 없는 한국은 국수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중국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힘만 믿고 횡포를 부리는 중국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같은 논리는 일본에 적용되어야 한다. 한일 공조가 그동안 계속 이루어지지 못한 책임이 어디에 있냐는 것은 지난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겠지만, 나는 일본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전제는 과거에도 온전한 사실이었던 적이 없으며 현재는 더 더욱 그렇다.
멜로스(아테네가 멸망시킨 중립국)를 멸망시키면서 투키디데스[footnote]고대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고,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말을 남겼다. [/footnote]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멜로스인들이 대의명분을 주장하며 저항한 사실 자체가 현실은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힘의 논리는 현실의 일부다. 그것이 현실의 전부였으면 멜로스인이 왜 멸망을 선택했겠는가?
심지어 침팬지에게도 공정성에 관한 관념은 있고, ‘자연상태’라는 수렵채집사회는 힘 센 남성의 권력을 끝없이 억제했다. 농경이 시작되고, 제국이 탄생해 권력이 전례 없이 커졌을 때도 인간은 대의명분과 도덕을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류의 주요 종교와 사상이 일제이 등장한 기원전 900년~ (기원전) 200년에 이르는 ‘축의 시대(Axial Age)'[footnote]’축의 시대(Axial Age)는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그의 책 [역사의 기원과 목표; 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 1949)]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footnote]를 빛낸 고전 사상들이었다.
현대 자유주의는 국가의 막강한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지 고민하면서 탄생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보다 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더 강력하다 하더라도, 그 힘에 걸맞는 책임의식과 성숙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엄청난 힘을 구축했지만, 자발적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나라들이 없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이치다. 그런 이유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비판하고, 이제 일본보다 강력해진 중국에 적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기부정과 과대망상의 혼합된 결과물이다.
진보의 함정
그러나 보수진영이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붕괴하고, 집권 역량을 보여주는 유일한 집단이 진보진영이기 때문에, 나는 현 집권세력의 대외인식에 더 무거운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실 전통적 진보진영의 대외인식에도 강대국에 압도당한 나라들이 흔히 보이는 자기부정과 과대망상을 공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 민주화,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수십년 동안 싸워댔지만, 두 진영은 모두 진보와 보수 이전에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주지하다시피 일본에, 나중에는 일본마저 굴복시킨 미국에 압도되었다. 이들이 보기에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며 자국의 경제적, 안보적 이익에 따라 주변국의 자주를 위협하는 미국은 불의의 나라였다. 특히 냉전 질서 하에서 한국 군부정권의 안전을 위해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을 허가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사례들은 계속 나왔다. 미국은 가증스러운 친일파를 남겨두어 남한의 통치 엘리트로 재활용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철저히 몰아낸 것처럼 보이는 중국, 북한과는 너무 대비되는 행보였다. 또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 청년들의 피까지 요구했다. 한국 진보 진영을 만들어낸 광주 학살에 분개하는 노래인 ‘오월의 노래’는 진보 진영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본질을 드러낸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이 구절에서 알게 모르게 피가 끓는다면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냉전의 자장권에서 성장해온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 또 다른 냉전 논리
문재인 대통령이 실제 본인의 세계관에 큰 영향력을 줬다고 평하기도 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이하 ‘전논’)는 ‘미국에 압도 당한 진보’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전논’은 보수 진영에서 유포한 ‘냉전 세계관’에 최초로 반기를 든 책 중 하나였다. 무려 그 유신시대였으니 말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한국인이 피를 흘린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사실 독립운동가와 더 가까우며, 중공을 적대 세력으로 무조건 간주해야할 이유도 없으며, 군사대국화로 일본의 부상을 우려했다. 이런 세계관은 진보 지식인들을 사로잡았고 진보 진영의 대외정책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현 대통령이 인정하듯이 말이다). 많은 이에게 ‘전논’은 구태의 냉전 논리를 극복한 탈냉전 시대의 지침서로 다가왔다.
하지만 ‘전논’을 비롯한 80년대 진보 진영의 세계관은 절대 탈냉전 세계관이 아니었다. 그저 냉전 세계관을 반대로 뒤집은 것에 불과했다. 중국과 북한에 압도당한 한국의 보수가 미국과 일본 앞에서 도의를 뒤틀었듯이, 진보 진영은 그 모습을 거꾸로 연출했다.
미국과 일본에 압도당한 한국의 진보는 소련이 붕괴한 뒤 중국과 북한을 잠재적 우방으로 여겼다. 확실히 중국과의 무역은 한국을 또다시 번영으로 이끌었다(물론 한중수교를 이룬 건 노태우 대통령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진보 진영의 교묘한 자기부정과 인지부조화가 숨어있다.
한국의 진보는 분명 독재자들에 맞서 자유와 인권을 외쳤다. 미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를 외쳤다. 그러나 자국 권위주의 정부의 인권탄압과 식민지 일본의 만행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중국이나 북한의 폭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단적으로 리영희 본인은 [8억인과의 대화] (1977)에서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늘 구설에 오르곤 했다.
나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요덕수용소에 비할 때 박정희와 전두환의 폭력은 ‘애들 장난’이었다는 점을 리영희를 비롯한 ‘전논’ 세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늘 궁금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들은 미국에 압도당하여 중국과 북한 앞에서 자기부정으로 도의를 뒤튼 것이다. 이것이 냉전 세계관이 아니면 무엇이 냉전 세계관인가?
‘균형외교’라는 신화
일부 사람들은 명청 교체기를 예시로 들기도 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분 대신 실리를 추구한 현명한 사례로 추켜세워졌다. 대신 과거의 의리에 메여 굴욕을 감내한 인조는 한국사에서 가장 어리석은 군주가 되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전통적 우방이자 미래의 초강대국인 중국에 고개를 숙이는 ‘실리 외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평가를 굳이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서는 실리를 주장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내정간섭이라는 면에서 중국은 일본이나 미국보다 한 술 더 뜨는데 말이다.
대표적으로 제3국이 달라이 라마를 공식 행사에 초청하고 대만과 협력할 때 중국은 전 세계에 걸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이에 대처한다. 상시적으로 인권이 무시되고, 언론 자유도 없는 일당독재 국가의 우산 밑에 들어가는 것이 실리인가? 뭐, 실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리를 추구하느니 차라리 ‘멜로스인의 어리석음’[footnote]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 스파르타에 밀린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는 내부 관심을 분산하기 위해 섬나라이자 중립국인 멜로스를 침략하기로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아테네는 사절단을 멜로스에 파견하여 멜로스 의회 의원들과 협상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멜로스의 대화’다. 이 대화에서 멜로스는 아테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아테네에 굴복하는 편을 선택하지 않고, 스파르타의 도움을 기대하며 결과적으로) ‘멸망’을 택한다.[/footnote]을 다시 범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자국의 역할에 대한 과대망상이라는 점에서도 진보와 보수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쌍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들고 왔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추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주변국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균형자론은 수천년 간 외부 세력에 압도당해온 한국인의 비현실적 꿈에 불과했다. 근거 없는 과대망상이라는 점에서는 중국과 모든 관계를 끊고 미국의 후견국으로 들어가 ‘저 더러운 짱개’들을 내려다보기를 고대하는 보수 진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작년 북핵 위기 떄 추미애는 한국이 ‘한반도 운전대’를 단단히 잡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미 대화를 주도하겠다고 말했다. 추미애 자신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미애의 발언을 바라보며 이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은근히 많았을 것이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면 한반도 운전대를 쥐고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과 중국이며 한국은 조수석에 있으면 다행이다.
탈냉전으로의 전환 vs. 냉전의 ‘마지막 지식인’
내가 굳이 두 시각을 냉전의 유산이라고 모두 비판한 이유는 이들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을 뿐이다. 북한의 적화 야욕을 막기 위해서는 한-미-일 국제 분업구조에 참여해야 했고, 무리해서라도 중화학공업을 건설해야 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권위주의 정권의 존재의 정당성을 흔들어야 했다. 경제성장을 성공시킨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역사를 뒤집어야 했다.
다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북한은 적화 야욕을 불태우는 대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실패국가로 전락했다. 박근혜는 냉전이 낳은 진보 세력인 통진당을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냉전 권위주의의 마지막 존립 근거마저 없애버렸다.
냉전은 끝났다. 그리고 한국에서 냉전의 유산도 끝났다(북한의 존재는 예외로 하자). 그 대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탈냉전 시대의 ‘오래된 미래’다. 지금 세계를 만든 힘은 미국의 전함과 소련의 전차가 아니다. 미국과 소련이 생산한 전함과 전차, 폭격기와 보병 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즉 냉전을 만들었다.
반면 80년대 이후 시작된 세계를 만든 힘은 보이지 않는 힘인 세계화와 정보혁명이다. 2017년의 세계는 덩샤오핑과 만모한 싱,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 고르바초프와 헬무트 콜이 만든 세계이고, 동시에 빌 게이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팀 버너스-리, 이건희와 리옌훙이 만든 세계다. 끝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간 수많은 제3세계 농민들이 만든 세계이기도 하고 그 꿈이 좌절당했을 때 목숨마저 버려가며 분노한 전사들이 만든 세계다.
그렇게 세계화와 정보혁명은 무서운 기세로 유라시아의 지리를 통합하고 있고 국제 무대에서 아시아 각국의 존재감을 더해주고 있으며, 세계 각지로 번영과 폭력을 이끄는 힘을 전달한다. 바로 그 중심에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과 인도다.
시대는 진정으로 전환을 맞이하고 있으며 진정한 21세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리영희가 ‘전논’을 썼을 때 그 책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저작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논’을 썼을 때는 세계화와 정보혁명이 막 진행되고 있던 차였다. 대다수 인간이 가지는 필연적 한계로 인해 그는 시대의 전환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탈냉전의 첫 지식인이 아니라 냉전의 마지막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반복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외전략은 냉전논리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제국주의와 냉전을 거치면서 한국은 강대국들에게 또 다시 압도당했었고, 이 공포가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의 대외관을 형성했다.
막강한 미국, 떠오르는 중국, 과거의 지배자 일본에 치이면서 백년을 생활해온 한국인들은 언제나 자국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중심’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자기인식도 그 중심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었다. 베이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도쿄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탈냉전과 ‘오래된 미래’가 도래했다고 해도 이 현실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한령(限韓令; 중국의 한류 금지령), 미국이 방조한 위안부 합의 파행으로 한국은 다시 강대국들에게 압도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인식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은 여전히 주변 강대국에 비하면 목소리를 낼 공간도 부족하고 그래본 경험도 없다.
하지만 변화 속에 불변이 있는 것처럼 불변 속에도 변화는 있다.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와 식민지의 유산, 분단과 군부독재, 그리고 IMF의 구조조정을 모두 거쳐 1인당 GDP 3만 달러의 민주국가로 우뚝 섰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이 냉전 시대의 한국과 갖는 본질적인 차이다.
주변과 주변이 만날 때
80년대 이후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수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면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도국들은 주변국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기 시작했다. 냉전 시대 이 지역의 모든 국가들은 같은 지역 내의 다른 중심과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서유럽의 식민 모국과 미국, 혹은 소련이라는 중심에만 엮이고자 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고속철도와 컨테이너 항만, 초고속 인터넷으로 이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에 소중심을 형성하고자 하며 역동적으로 뉴델리, 베이징, 도쿄와 연결되고자 한다. 뉴델리와 베이징은 서로 악수를 하면서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방식으로 교류와 견제를 이어간다. 베트남,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이란… 어느 나라라고 할 게 없다.
중요한 것은 각지의 주변들이 새로운 소중심으로 떠오르고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에도 더 연결 되기에 매력적인 나라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아니다. 이 나라들은 이 지역에서 언제나 상존하는 힘이었다. 유라시아와 인도양 세계의 국가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나라들로부터 자율성을 얻는 것이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 이유로 탈소비에트 유라시아 공간에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했다. 중국과 인도는 가장 거대한 중심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으나, 사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엮이는 것은 아니다. 너무 거대한 중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연결 선을 이으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이 두 거대 국가들이 새로운 주인 행세를 할까봐 불안해하는 것이다. 일본은 애초부터 개방적인 국가가 아니었고 더하여 제국주의 경험에 대해서 껄끄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코리아 모델 만들기
이 모든 결격 사유에서 벗어난 국가는 하나 밖에 없었다. 바로 한국이다. 현재 한국은 강대국에 압도당하고 있지만, 동시에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나라들에 떠오르는 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아직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럴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처음에 많은 사람이 정부의 무리한 한류 지원책을 조롱했다. 또 한국 단체 관광객들은 수많은 지역에서 추태를 벌였으며, 한국으로 온 많은 외국계 노동자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화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만개한 한국의 문화적 역량은 저개발국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선진화된 경제와 역동적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들이 중국과 인도가 치열한 전략적 경쟁을 벌일 지정학적 무대들이다. 당장 중국부터 한류의 문화적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않은가?
이처럼 한국이 가지는 ‘모델로서의 가치’는 전 세계에 거의 전무후무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쟁력을 실제로 활용하려면 세계관을 바꿔야 한다.
우선 강대국에 압도되었던 그 강렬한 감정을 버릴 필요가 있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엄청난 규모는 언제나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두 나라에 한국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신화는 버려야 한다. 두 나라 중 어느 하나 없이 한국이 생존할 수 있다는 자만도 버려야 한다. 이런 인식은 모두 한국이 겪은 19세기와 20세기의 경험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대는 지나갔으니 압도적 과거를 털고 일어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중국과 미국이 갖는 압도적 힘과 영향력을 인정하되, 그 사이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대할 길은 자국의 소프트파워를 세계로 확대해나가는 길 밖에 없다. 물론 말만 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점은 인정한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할 때 한국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할 것이다.
동시에 북핵 문제는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렇지만 더 나은 다른 선택지가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국은 하기에 따라서 신냉전의 전쟁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신냉전의 가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중국의 부상을 바라보며 ‘한국의 핀란드화’를 두려워한다. 소련에게 끝없이 내정간섭을 받았던 냉전시대 핀란드의 운명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는 핀란드도 있지만, 오스트리아도 있다. 서로 간 연락이 차단 된 철의 장막 양편에서 중요한 협력은 오스트리아를 매개로 펼쳐졌다. 지금 푸틴의 강력한 무기가 된 유럽 수출용 가스관도 소련이 오스트리아에 깔기 시작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 새롭게 볼 때
이는 몹시 어려운 과업이 될 것이고, 당연하게도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일관되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위해서는 중심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에 이런 가치관이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 대신 보이는 것은 ‘전논’에서 묻어나오는 세계관이다. 애석하게도 ‘전논’은 20세기를 끝내는 책이지 21세기를 시작하는 책이 아니다.
한국이 신냉전의 가교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자기규정부터 먼저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거를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 워싱턴 컨센서스(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질서)는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어준다는 신화를 유포했다.
그러나 박정희와 중국 공산당이 보여준 바는 그와 달랐다. 공자의 말을 비틀어보자면, 산업화 없는 민주화는 위태롭고, 민주화 없는 산업화는 공허하다. 한국인은 자국의 과거, 그리고 과오 또한 모두 인정해야 하고, 그러자면 과거의 내부 대결적 세계관을 점차 버려야 한다.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동시에 필요한 것은 이제 중심만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시야를 넓히는 일이다. 물론 중심을 바라보지 않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문제는 그동안 한국이 중심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언제나 중심과 자신의 관계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중국이 바라본 한국, 일본이 바라본 한국, 미국이 바라본 한국, 러시아가 바라본 한국만이 진정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에서 학교 폭력을 당하는 학생이 일진 눈치만 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중심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배우는 것이다. 중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바라보는 중국과 세계,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의 시야를 배워야한다.
한반도 국가들의 역사를 바라볼 때도 이런 무지는 두드러진다. 고조선 멸망을 한 제국의 흉노 공략과 남방 무역 장악을 위한 광범위한 세계 전략의 일부로 이해하는 상식적인 내용,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일부로 러일 전쟁을 바라보거나 스탈린의 지정학적 구상과 한국 전쟁을 연결하는 이야기는 전혀 교육되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연재한 중국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일본과 인도의 변화에 대한 글은 중심의 시각 그 자체를 이해하고 대비하자는 바람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주변이면서 주변을 무시해온 한국
이제 한국은 중심 밖으로 시야를 트면서 주변, 경계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박근혜가 청년들을 다 중동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조롱받은 아프리카 순방도 전적으로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당연히 G7 회담을 빠지고 아프리카를 간 것은 문제였지만, 아프리카에 간 것 자체는 잘 한 것이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눌려 살은 한국인은 늘 주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진보고 보수고 가릴 것이 없다. 강경화 장관이 감비아 외무장관과 회담을 했을 때 한국 인터넷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조롱 분위기는 이 문제에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남의 진영에서 주변을 중시하면 그 때 욕을 하는 것 뿐이다.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진보 진영은 감비아와의 회담을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절반만 타당하다 할 수 있다. 감비아는 힘 없는 아프리카의 소국이지만, 2017년 민주화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나라기도 하다. 한국을 선망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다. 장차 성장 지역으로 각광 받는 아프리카로 한국이 진출하고자 할 때 민주화 경험을 공유하는 나라들은 소중한 자산이 되어줄 수 있다. 이들 나라의 시민사회는 중국의 진출을 경제적 침탈과 권위주의 옹호로 직결시키기 때문이다(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험을 공유하기를 목말라 하는 주변 지역으로 뻗어나간다면, 역으로 우리가 주변 지역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 된다. 미국이 대다수 지역에서 하지 않은 일이 바로 그 이해였다. 정확히는 미국 지역학계는 이해한 사실을 정책 결정자들은 전혀 공유하지 않았다. 21세기 미국의 수렁이 된 이라크 전쟁을 벌인 데는 전통적 순니파와 시아파, 쿠르드의 갈등에 대한 무지가 자리한다.
반대로 중국 당국은 지역에 대해 철저한 이해 뒤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중국의 지역학에 대한 이해가 중국의 국익을 위해 전적으로 활용되고 따라서 효율적 수탈의 도구로만 이용되는 경향도 있다는 점이다.
할 수 있는 일 잘하기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기 위해 한국은 이 중간에 설 필요가 있다. 만약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 없이 진출을 시작하면 다른 모든 나라가 그랬듯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지고보면 냉전이 끝나고 한국에 반미주의가 확산된 것도 한국의 정서에 대한 미국의 몰이해 때문이었다.
몰이해는 필연적으로 오만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코리아 모델’은 매력을 금세 상실해 다른 수많은 모델과 다를 바 없는 실망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더하여 지역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국적인 아량을 보일 필요가 있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수익성이 아직 높지 않은 곳으로, 단기적 접근법을 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장기적 윈-윈을 염두해 두고 초기 단계의 손실을 감내할 정치적 의지만 갖춘다면 이 지역은 한국을 믿고 따를 것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가지는 미국에 대한 선망이 무제한에 가까운 미국의 원조와 초기 투자를 그 뿌리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한국은 미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자 지역적 강국으로 발돋움해 미국에 큰 이익을 주고 있지 않은가. 파키스탄을 경제적 배후지로 만드는 중국은 벌써부터 파키스탄을 중국의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고 있고, 파키스탄의 자생적 산업 발전을 고사시킨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이 선택할 길은 지역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장기적 협력에 대한 안목을 결합한 정치적 의지다.
‘지루한 세계’의 종언, 한국의 좌표는?
이제 이 기나긴 연재를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경고한 ‘지루한 세계’, 그러니 “거대한 역사적 투쟁은 사라지고 오로지 부분적인 사건들로만 가득찬 세계,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매우 권태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세계”(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적어도 트럼프의 당선으로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라다크에서의 패싸움도 마찬가지다. 국제면을 보자면 흥미롭지 않은 장소가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본능적으로 권력에 민감하다보니 권력 경쟁과 세력 균형을 위한 싸움을 흥미롭지 않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흥미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두려움도 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 지역 강대국의 패권주의화를 두려워 한다. 그리고 미국의 많은 이들도 패권전환 시의 군사적, 정치적 충돌을 우려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은 세계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인과 인도네시아인들도 그렇다.
오래된 미래가 종국적으로 어떻게 끝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어떻게 시작될 지는 이처럼 명확하다. 자신감을 얻은 국민은 밖으로 뻗어나가고자 할 것이고, 위협을 느끼는 국민은 그 힘의 차단을 모색할 것이다.
촛불혁명과 박근혜 탄핵, 명예로운 정권교체로 한국인은 지금 누구보다 자신감에 차 있는 상태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의 강렬한 기억들은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다. 그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 나는 내가 어느 정도 그런 세대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상처받은 자존감에서 나온 것이 뻔히 보이는 (보수와 진보가 공히 공유하는) 민족주의적 선전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많은 기성 세대들은 ‘헬조선’이라는 단어에서 청년들이 살기 힘든 한국의 현실을 읽었다. 그러나 그 청년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헬조선의 본질에는 현실과 괴리된 민족주의적 과장과 집단주의적 동원에 대한 반발이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시야
내 친구들은 일본 여행을 가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고, 중국의 횡포에는 분개하며, 미국에 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여기서부터 출발 지점을 삼으면 어떨까.
앞으로 중국의 횡포에는 분개하면서도 그 가운데 이익을 찾고자 때에 따라서는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굳이 먼저 숙이고 들어갈 것은 없지만, 문화적 교류를 시작으로 다시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세계경찰로서 미국의 힘과 위상, 역할을 존중하되 미국이 아시아에서 뒤로 물러나는 사태는 언제든지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은 이상적 현실주의와 현실적 이상주의를 조화시켜야 한다.
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부심이라는 ‘이상’을 국익 추구와 연계해야 한다. 중국과 인도가 벌이는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소프트파워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상 추구에는 유연함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마저도 양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현재 민주주의의 이상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중국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다.
‘가장 위험한 시대’를 사는 ‘가장 강력한’ 한국인에게
미국의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는 중국과 인도의 부상, 미국의 상대적 퇴조, 기후변화가 만들어내는 저위도, 건조지역의 생태적 위기, 끝간데 모르고 발전하는 파괴적 기술들이 합쳐져 우리 시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시대”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한반도 역사의 위험한 시기를 숱하게 넘겨왔다. 그러나 강력한 외부세력에 언제나 휩쓸렸던 한국인들은 중심을 지켜야할 때 지키지 못했고 융통성을 보여야할 땐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 경제적 위상과 그 힘의 크기가 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중국과 인도 사이의 관계는 기후변화와 기술발전과 맞물려 어느 때보다 위험해지고 있지만, 한국의 국력은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힌 이래로 가장 강력하다. 바로 이 점이 차이다. 이처럼 위험과 능력이 모두 엄청났던 시기는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맞닦드린 위험과 자신의 능력, 이 모두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우선 적어도 그런 눈이라도 있어야 이 흥미로운 시대에 압도당하지 않고 재밌게 관전이라도 수 있지 않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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