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전철 1호선 남영역 일대 원룸 가격은 전세로 1억~1억5천만 원 정도다. 보증금을 5천만 원대로 내려 잡으면 월세가 50만 원쯤으로 설정된다. 투기 성지 강남과는 비교할 수 없어도, 서울 중심지답게 금싸라기 땅이다.
이렇게 값비싼 동네에 텅텅 빈 공간을 유지하는 건물이 있다. 불경기라 입주자가 없어서도 아니고, 조물주보다 무서운 악덕 건물주의 횡포 때문도 아니다. 이곳은 비워둬야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이 건물의 텅 빈 방에는 세입자 대신 역사(歷史)가 입주하고 있다.
이곳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이곳의 위치는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이라는 도로명 주소보다 ‘용산구 갈월동 98-8’이라는 옛 주소를 써야 어울릴 것 같다. 과거의 흔적과 상처를 구석구석 깊숙이 간직한 건물이라서 그렇다. 경찰청 인권센터라는 이름보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아무리 미화하고 부정하더라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과거로부터 도망할 수는 없다.
눈이 날리기 시작하는 1월 8일 오후,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이 검은색 벽돌 건물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안은 더욱 그랬다. 마치 유령의 집 같아서, 몇 가지 소품만 갖다두면 방탈출 업소로 써도 될 것 같았다.
이러한 인상은 어둡고 텅 비고 인적 끊긴 물리적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이 한때 사람을 끌어다 고문하고 죽이는 일이 벌어진 곳이라는 건물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인상이기도 하다.
경찰청의 전신인 치안본부 시절에 이곳은 대공 용의자를 구금하고 취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말이 대공 용의자이지, 실제로는 군사독재 정권을 지키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극렬히 탄압하는 공간이었다. 민주인사나 운동권 학생들이 이곳에 단골 손님으로 끌려와 고문을 받고 몸과 정신이 파괴된 뒤에야 문을 나섰다.
31년 전 1월 14일, 스물 두 살 대학생 박종철이 절명한 곳도 여기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잡혀 이곳으로 끌려온 뒤, 운동권 선배의 행적을 대라는 취조를 받다 고문으로 사망했다. 가로 120cm쯤 되는 욕조를 찬물로 채우고 머리를 처박는 물고문이었다.
박종철뿐만이 아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을 했던 김근태 전 의원도 이곳에서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이 건물에서 겪은 일을 수기로 써 [남영동]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것은 두드러진 사례일 뿐이다. 수많은 박종철, 김근태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았다. 다행히 죽지는 않아서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았을 뿐이다. 끌어와 학대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한 층을 다 털어 크고작은 취조실을 16개나 만드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근태 전 의원은 생전에 자신이 받은 고문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고문을 받았고, 자신은 그래도 보상을 받았으나 그들은 여전히 음지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건물이 간직한 어두운 과거는 지금도 실물 그대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취조실이 있는 5층, 그리고 그곳에 이르기 위한 나선형 철제 계단이다.
대공분실에는 각 층을 오르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엘리베이터가 두 대, 계단이 세 개 있다. 계단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일상용 계단, 건물 후문으로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 그리고 비상시에만 쓰고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 가파른 비상계단이다.
엘리베이터는 건물 규모에 비해 비좁은 편이다. 이것이 연행하는 혐의자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의 특성은 나선형 계단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중세 사원 종탑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비좁고 어둡고 위태해 보이는 나선형 계단이 현대식 건물에 있다는 것은 놀랍다. 이 계단은 발을 디딜 수 있는 각 단의 너비가 어른의 손 네 뼘 정도로 매우 비좁다. 각 층으로 구분된 천장이 없기 때문에 조명은 쪽창에서 들어오는 외부 빛에 의지해야 한다. 바닥은 철제라서 걸을 때 차가운 쇳소리가 난다.
이 계단이 연결하는 것은 1층과 5층뿐이다. 2~4층은 그냥 건너뛴다. 1층에는 사람을 잡아들여 건물 안으로 넣는 문이 있고, 5층에는 취조실이 있다. 말하자면 이 나선형 계단은 연행한 사람을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 상태에서 극단적인 공포로 밀어넣으며 고문실로 직행하게 만드는 지옥길인 셈이다.
5층에 있는 16개의 취조실 중 14개는 서너 평 크기다. 나머지 두 개는 더 널찍하다. 넓은 곳은 거물 인사를 취조하려는 용도였는지도 모른다. 김근태 전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비롯한 경찰관들로부터 전기고문을 받은 곳도 큰 방 중 하나다.
취조실들은 지금은 방 하나만 빼놓고 모두 텅 비어 있다. 세면대와 변기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세면대와 수도꼭지 등은 모두 신형이다. 2002년에 이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 내부 시설이 교체되었다.
그 시점 이전과 이후의 취조실 구조에는 수도꼭지 말고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각 방에 있던 욕조들이 사라진 것이다. 목욕을 하기에는 너무 작고 방 크기에 비해서는 너무 큰 이 욕조들은 외부인이 볼 때는 용도가 수상한 것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가 폭로된 뒤 은폐를 시도하다 결국 재판정에 나온 경찰 간부들은 이 욕조가 물을 담아 습도를 유지하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끌려온 수감자를 그렇게 살갑게 대접해 준 적은 별로 없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그때 모습을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단 하나의 방을 통해서다. 9호실, 이 방은 다른 방과는 정반대로 꽉 차 있다. 바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곳이다. 사건 당시 내부 구조가 유지되어 있고, 그 공간에 박종철을 추모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물품들이 놓여있다. 폭력과 고통, 야만과 반성, 살해와 추도가 네 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에 눅눅하게 뒤섞여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손꼽히는 김수근이다. 설계도면과 작업 지시서, 그에 따라 실제로 구현된 건물의 구조며 소품들 때문에, 많은 사람은 김수근이 치안본부(경찰청)로부터 용역을 받을 때부터 이 건물이 무슨 용도로 쓰일 것인지를 잘 알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 그러한 용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설계 작업물을 낸 것으로 평가한다.
5층 취조실 공간의 자세한 검토, 그리고 설계자 김수근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 예컨대 2017년 5월에 나온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김명식 지음) 같은 책에 잘 나와 있다.
조사 공간 밑인 4층은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하나는 ‘박종철 기념전시실’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교육 전시관’이다. 박종철 전시실에는 1987년 당시 사회 상황, 박종철이 썼던 편지와 보았던 책 같은 소품, 이 사건을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문건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다.
또다른 공간인 인권교육 전시관(위 사진)은 박종철 전시실보다 훨씬 크다. 이곳에는 인권에 관한 국제조약 같은 기초 사항도 전시물이 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열중하고 있는 일은 경찰이 얼마나 인권을 수호하는 존재인가를 알리는 것인 듯 보인다. 넓고 화려한 전시관은 ‘인권 수호’에 앞장서서 상을 받은 경찰관의 표창장과 훈장, 경찰의 관련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과 문건 따위로 가득 차 있다.
과거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 그리고 지금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나쁠 리 없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활개치던 시기에 받은 표창을 걸어놓고 ‘자랑스런 인권 경찰’ 같은 제목을 붙여둔 전시물 등은 이 건물이 실제로 수행하여 왔던 일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고 국민에게 개방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이다. 원래 수행하던 대공 수사 기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고문 건물이 인권센터가 된 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도 경찰의 인권 침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2009년 1월, 인권센터에서 멀지 않은 용산 4구역에서 철거민들을 무리하게 진압하여 참극을 빚은 이른바 용산 참사를 만든 것도 한국 경찰이었고, 같은 해 9월 쌍용자동차 사태 때 적군을 압살하는 군병력처럼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 것도 한국 경찰이었다. 노동 분규가 있는 곳마다 구사대가 폭력을 휘둘러도 뒷짐지고 구경하고 있는 것도 한국 경찰이었고, 2015년 가공할 위력을 가진 물대포를 마구 휘둘러 시위에 나선 국민을 살해한 것도 한국 경찰이었다.
대공분실이 인권센터로 바뀐 이후에 벌어진 이 같은 경찰의 인권 유린의 흑역사들은 화려한 전시관을 채운 ‘인권 경찰’ 구호를 무색케 한다. 건물의 이름이 바뀌었듯 경찰도 진정으로 바뀌었는가.
관람객 하루 12명에 불과
지난 월요일에 내가 이 전시관을 둘러볼 때 마주친 관람객은 10명 남짓이다. 평일 오후이긴 했지만, 나는 꽤 오래 머물러 있었으므로 관람객이 많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영화 [1987]로 인해 박종철 사건과 대공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경찰청 자체 집계에 띠르면, 2016년 한해 인권센터를 찾은 관람객은 월평균 358명에 불과했다. 하루 12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박종철의 기일이 있는 1월에 관람객이 집중되는 점을 고려하면, 1년의 거의 모든 기간에 이 금싸라기 땅의 육중한 건물은 그냥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건물이 담고 있는 상처와 반성의 메시지까지 함께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이것은 이 상징적인 공간의 운영 주체가 과거의 가해자인 경찰청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인권센터 곳곳에서 경찰은 반성과 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인권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국민과 함께 공유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광주항쟁 기념사업을 전두환 측이 벌이고 있는 격이랄까. 뿐만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정부 기관의 속성상, 집권하는 정권의 성격에 따라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지난 1월 2일,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이 건물과 관련한 국민 청원이 하나 올라왔다. ‘경찰이 운영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바꿔달라’는 것이다. 청원을 낸 박종철기념사업회 등은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권경찰로 거듭 태어난 경찰상을 과시하는 공간’으로 제한되기에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크다. 전면 개방되어 시민과 자라나는 청소년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전시 교육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 등은 이 공간이 박종철의 추모에서 그치지 않고 국가로부터 해를 입은 많은 사람의 고통과 수난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기획 전시, 행사, 고문치유센터 설치 등을 통해 한국에서 인권을 상징하는 메카로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국장은 “시민사회가 인권센터 운영을 맡아 다양한 인권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함으로써 이 공간이 진정한 인권 신장과 교육의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규모와 역사 모두에서 한국의 인권 메카가 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인권 수호와 교육에 뜨거운 관심을 가진 지금의 경찰청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듯싶다.
국가 폭력의 반성과 경계, 인권 수호는 문명적인 현대 국가로서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경찰의 고문센터가 인권센터로 바뀐 것이 상징하듯, 몇 십년을 거치며 상황은 상대적으로 개선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잠깐 한눈을 팔 때 민주적 가치와 제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도 생생히 경험했다.
시민의 힘으로 다져지는 단단한 인권의 보루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