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 이 글은 ‘헬싱키의 함정 ‘에서 이어집니다.

 

후진타오 시대가 끝나가며,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의 대외 전략은 틀을 갖추어 나갔다. 중국은 대중의 민족주의 열기를 만족시켜주어야 했다. 그래야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다. 또 자국의 자원수요를 맞추기 위해 공급망을 각지로 뻗어야 했다. 그래야 중국의 거대한 산업을 돌리고 십억이 넘는 인구의 엄청난 자원 수요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중국은 말라카 해협을 우회하는 다른 공급 통로들을 모색해야 했다. 필요하다면 항만이나 철도 같은 인프라를 대신 지어줄 수도 있었다. 끝으로 분쟁 지역의 중국인을 자력으로 보호하고 인도양에서의 해적활동을 퇴치하기 위한 투사 능력을 갖춰야 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국제사회에서 정당성과 정의의 사실상 유일한 원천이자, 세계 모든 바다에서 절대적인 지배자인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사실 도전이 맞았다.

중국 미국

바야흐로 중국의 모든 움직임은 ‘중국식 개발모델의 수출’로 종합되고 있었다. 중국은 그동안에도 자원을 사가며 인프라를 지어주는 식의 교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더 적극적으로 인프라를 지어주면서 각국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사업들을 연계하고 통합하는 계획들이 생겨났다. 이 계획은 각국의 경제 성장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경제가 성장한 국가들은 중국의 물건을 더 많이 사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어찌보면 마셜플랜의 재현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중국은 미국보다 훨씬 더 이해타산을 따졌고, 잡음도 그에 비례해서 많이 생겼다.

아프리카에서 인프라 사업은 때로 졸속으로 처리되었고, 부실공사가 속출했으며, 현지 인력을 숙련된 기술인력으로 훈련시킨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채 중국에서 건너온 엔지니어들이 일자리를 차지했다. 각국의 법정임금은 제대로 준수되지 않았고, 기업 간부들은 뇌물을 써서 현지의 유력자들을 매수했다. 해외 자산 매수와 관련한 부패도 엄청났다.

하지만 대서양에 면한 세네갈에서 콩고와 에티오피아, 케냐를 거쳐 파키스탄과 미얀마, 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거대한 경제 회랑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모든 곳에서 중국은 철도를 부설하고 항만을 확장하며 석유와 철광석, 보크사이트와 리튬 매장지들을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철도와 항만으로 자원들이 실려나가 중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공산당이 이런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미리 계획해서 큰 그림을 그렸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3억을 다스리는 그들은 대외정책 말고도 관장할 업무와 정치적 음모가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다. 대신 변화하는 중국과 중국을 둘러싼 국제환경에 대응하여 펼친 임기응변식 정책이 누적되자 확실히 하나의 그림으로 모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자신감을 얻은 중국은 이제 ‘다르푸르 사태’(수단 독재자 알 바시르의 푸르족 학살. 중국은 수단의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학살을 묵인하거나 사실상 지원했다고 비판받았다. 2편 참조) 때처럼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대신 훨씬 더 뻔뻔해졌다.

비공식적인 곳에서 중국은 서구식 민주주의에 기반한 개발정책을 대놓고 조롱했다.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은 실질적인 경제성장에 도움이 될 교량과 고속도로를 짓는 동안 미국이 하는 것은 투표 감시 인력을 가르치는 것밖에는 없다는 식이었다. 대신 미국이 여성교육 확대, 에이즈 및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 좋은 거버넌스를 위한 반부패 정책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은 외면했다. 중국에 있어서 허울뿐인 민주주의보다 중요한 것은 당장 먹을 수 있는 밥이었고, 말라리아 예방 프로그램보다 중요한 것은 아플 때 갈 수 있는 병원과 병원까지 이어주는 튼튼한 도로였다.

중국 아프리카

하나의 띠, 하나의 길

그리고 시진핑이 집권하게 되자, 중국의 모호한 대전략은 마침내 공식화되었다. 취임 첫 해인 2013년 9월, 시진핑은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실크로드 경제벨트’ 사업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달인 10월에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사업을 이야기했다. 2014년이 되자 이 두 사업은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라는 이름으로 합쳐진다.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편집)

일대일로의 등장으로 마침내 도광양회는 현실의 정책기조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수십개국을 한 데 묶는 야심찬 사업은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것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다. 일대일로는 중국 지도부가 처한 딜레마 바깥에서 자신들의 야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공산당다운 비전이었다.

중국 지도부는 확실히 자국 소프트파워에서 민주주의나 반부패와 같이 전통적인 영역은 전혀 경쟁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 문화도, 중국어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세계 각지에서 접한 반중 시위는 중국은 일단 사랑받지 못하며 차후에 그럴 매력 또한 갖추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이 갖춘 무형의 매력보다는 유형의 성과물에 집중했다.

인프라는 사람들의 눈에 아주 잘 보였고, 그래서 확실했다. 상하이와 선전의 상전벽해는 이미 서울이라는 세계적 도시를 만들어본 우리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지 날리는 시골길에 아직도 우마차가 오가는 혼잡한 도시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상하이와 선전의 야경은 기적이다. 중국은 숱한 개도국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협력하면 그런 도시를 가질 수 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상하이, 기적의 도시
상하이, 기적의 도시

계산기를 두드리는 중국

물론 공산당이 자선사업가가 아닌 이상 수백억 원짜리 교량이나 고속도로가 공짜는 아니었다. 베이징의 전략가들은 이런 인프라 중심의 경제 협력은 중국 국내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중국이 2008년 경제위기를 극복한 것은 국내외에서 찬사를 받았을지언정 문제를 전부 없앤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한 쪽을 틀어막자 다른 쪽이 부풀어 올랐다.

경기부양자금을 가장 많이 받은 이들은 이번에도 거대 국영기업들이었다. 국영기업들은 정부 투자에 힘입어 끝없이 생산능력을 확충해갔다. 중국 전역에 인프라를 지어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수익성 높은 인프라 사업처는 중국 내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자금은 남아도는데 더 투자할 곳은 없었고, 생산 물량은 과잉되기 시작했다. 과거 덩샤오핑은 철강이 부족해서 골머리를 썩혔다. 그러나 이제는 철강이 남아돌아서 문제였다. 철강을 아무리 열심히 생산해도 사줄 곳이 없던 것이다.

철강

중국 제조업 설비가동률은 70%로 곤두박질쳤다.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미인가 제철소와 공장들까지 포함되면 더 낮아질 수치였다. 투자처를 잃은 국영기업은 저리로 국영은행에서 대출 받은 자금을 고리로 민간기업에 대출해주고 있었다. 이윤율은 낮아져갔다. 원자바오와 리커창이 구조 조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국영기업 문제는 그림자 금융으로 번져나가 시한폭탄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진핑 정부는 공급측 개혁과 내수 중심 성장을 외치면서 해결하고자 했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일대일로는 한계에 몰린 국영기업들의 공급과잉을 해결해줄 수익성 높은 투자처를 찾기 위한 계획이기도 했다.

호마는 바람따라 북을 그리고

그렇게 일대일로는 중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지정학적 딜레마를 해결해줄 초거대 사업으로 떠올랐다. 육상의 실크로드는 신장에서 뻗어져나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캅카스, 러시아로 흘러들어가 유럽까지 이어진다. 이 거대한 지역은 엄청난 양의 천연가스와 석유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미 중국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으로부터 파이프라인을 놓아 막대한 규모의 천연가스를 수입하고 있었다.

중국은 추가적으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송유관과 가스 파이프를 건설해주고 교통과 물류 인프라도 같이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다.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을 피해가는 이와 같은 공급망은 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동안 중국의 성장에 경계심을 갖던 러시아도 자발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러시아는 자국의 태평양 연안 지역에 대해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그동안 중국과의 협력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극동 지역 러시아의 인구는 소련이 해체된 이후 거의 반토막이 나서 6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흑룡강을 건너가면 나오는 동북삼성의 인구는 무려 1억에 가까웠고, 하얼빈 도시 하나의 인구만 해도 극동 지역 전체의 인구보다 많은 천만명에 육박했다. 러시아는 중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 황화시키는 것을 우려했었다. 러시아의 몇몇 논자는 심지어 한국인의 이민을 받아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

하지만 2014년 크림 반도를 침공하고 유럽과 미국이 대러시아 경제 제재를 감행했을 때, 푸틴에게 선택지는 사라졌다. 석유와 천연가스 판매에 의존하던 러시아에 있어서 경제 제재와 같이 찾아온 유가 폭락은 더 쓰라렸다. 이제 러시아는 자국의 천연가스를 중국에 판매하고 급한 돈이나마 벌어야 했고, 극동 지역의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한 협력을 부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2014년 러시아는 2019년부터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할 3천km 길이의 거대한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계약했다. 파이프라인의 이름은 상징적이게도 ‘시베리아의 힘(Sila Sibiri)’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름은 ‘중국의 힘(Sila Kitaya)’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미국의 엄청난 에너지 수요가 북쪽 캐나다의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중국의 구심력은 과거 구 소련 지역의 국가들을 에너지를 빌미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출처: www.umwelt-energie-report.de http://www.umwelt-energie-report.de/wp-content/uploads/2015/02/24.02.15-Bild-Gazprom-f%C3%BCr-China-Artikel.jpg
출처: www.umwelt-energie-report.de

월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

바다에서 전개되는 일들은 육상에서의 일보다 더 중요했다. 중국이 말라카 함정을 뚫기 위해서는(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돌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바다에서 우회로를 개척해야 했다. 현대 컨테이너 선박이 보여주는 대량 운송에서의 효율성은 다른 어떤 교통수단도 쫓아갈 수 없다. 따라서 해상에서 미국이 갖는 절대적 우위에 맞서 육상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결국, 중국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또 다른 공급로를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다에서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온전히 참여한다면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이나 일본은 말라카 해협을 통하는 에너지 수송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미국 덕분에 별 걱정 없이 경제를 운영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건 공산당 입장에서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중국은 그로티우스 이래 이어지는 자유해 이론 대신 류화칭 제독의 유지를 선택했다. 중국 항공모함의 아버지라 불리는 류화칭 제독은 해군 사령원(사령관)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을 맡은 권력의 최고 핵심 중 하나였다. 그의 사상적 스승은 19세기 미국의 해군 전략가 앨프리드 머핸과 소련 해군의 전설인 고르시코프 제독이었다. 류화칭은 앨프리드 머핸의 저서인 [역사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과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의 저서인 [국가의 해양력]을 평생의 교재로 삼았다.

1980년대 해군사령원 재직 시절의 류화칭(왼쪽 맨 앞쪽)
1980년대 해군사령원 재직 시절의 류화칭(왼쪽 맨 앞쪽)

앨프리드 머핸은 영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바다에서 영국이 보여준 압도적 우위가 영국 패권의 근간에 있다고 주장했다. 머핸은 무역로를 보호하고 국가 바깥의 경제적 기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해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국가 역량이 필수라는 지금의 상식을 최초로 개념화했다. 이후에 소련 레닌그라드에 있는 보로실로프 해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간 류화칭은 고르시코프 밑에서 수학했다.

고르시코프 제독은 [국가의 해양력]에서 소련은 비록 대륙국가지만, 세계적 강대국으로서 힘을 행사하기 위해선 어디서든 작전 가능한 해군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류화칭은 고르시코프를 보며 육군 중심의 대륙 국가인 중국도 대양 해군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 고르시코프가 낙후된 소련의 소규모 해군을 현대화된 대규모 함대로 바꾸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왼쪽),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오른쪽) https://ko.wikipedia.org/wiki/%EC%95%A8%ED%94%84%EB%A6%AC%EB%93%9C_%EC%84%B8%EC%9D%B4%EC%96%B4_%EB%A8%B8%ED%95%B8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B%A5%B4%EA%B2%8C%EC%9D%B4_%EA%B3%A0%EB%A5%B4%EC%8B%9C%EC%BD%94%ED%94%84
류화칭 제독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왼쪽),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오른쪽)

류화칭은 머핸과 고르시코프, 이 두 전략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뒤 중국의 해상 전략을 총설계했다. 그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도련’이라는 개념을 창시하고, 반접근 지역거부(A2/AD) 전략을 공식화했다. 류화칭은 또한 중국 해군을 2020년까지 원해에서도 작전 가능한 해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류화칭 본인이 주로 활약하던 시대인 80년대에는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류화칭 제독은 열렬한 머핸주의자의 면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었다. 중국은 점차 대양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인도양 각지에 접근할 역량을 축적하고 있다. 물론 중국 해군은 여전히 미국의 절대적 우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미국의 국방예산 규모는 여전히 상상을 초월하고, 중국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기술, 자본, 인력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해양 전력 강화와 일대일로 사업은 말라카 함정을 돌파하기 위해 한 폭으로 포개지고 있다. 류화칭의 뜻은 이제 파키스탄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제국의 최전선, 파키스탄

파키스탄은 영국 식민당국이 인도 제국에서 물러나면서 종교 갈등으로 탄생한 나라다.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영국 식민당국은 인도를 둘로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북서쪽의 땅과 갠지스강 하구의 벵갈 지역의 땅을 쪼개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에 학살된 인구는 최대 200만명까지 추정되기도 한다.

델리에서 힌두교도들은 무슬림을 죽였고 서펀자브에서 무슬림들이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를 죽였고, 동펀자브에서는 반대의 일들이 펼쳐졌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1천 400만 명가량의 인구가 국경 양편으로 이동했다고 추정된다. 이후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과 방글라데시 독립 등의 문제를 두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그보다 훨씬 많은 국경분쟁을 겪었다.

냉전시대 중국과 소련의 기묘한 경쟁관계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은 1962년 인도와 국경분쟁을 겪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인도를 지원해주었다. 인도의 지도자 자와할랄 네루는 소련을 모델로 삼고 과거 식민 모국이었던 영국과 그 후견국인 미국과 결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
구글 지도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요청으로 피까지 흘렸던 중국은 소련의 이런 태도를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파키스탄에 접근해 소련-인도에 대한 균형추로 삼고자 했다. 인도가 핵을 개발하자 파키스탄도 핵을 개발했는데, 기초 과학 기반도 별로 없던 파키스탄이 핵을 개발한 데는 중국의 기술지원이 결정적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과 파키스탄의 인연은 물류와 인프라 개발을 빌미로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은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구를 본격적인 인도양 물류 거점으로 개발하고자 했다. 말라카 해협 한참 전에 나오는 이곳을 중국에 연결시켜 중앙아시아, 신장과 통합하는 계획이었다.

호르무즈를 나와 중국으로 들어오는 석유의 운송도 더 안전하게 관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파키스탄은 그러나 국가 자체가 너무 낙후해 있었다. 중국은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사업을 개시해 신장 지역의 끄트머리에 있는 카스와 인도양에 면한 과다르까지 잇는 인프라 사업들을 하나로 묶었다. 여기에는 고속도로, 가스관, 철도가 포함된다.

인도양을 감싸다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미얀마가 있다. 중국은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구의 임대권을 99년 기한으로 사들였고, 방글라데시에서도 여러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미얀마는 동쪽의 파키스탄이라고 할만하다. 중국은 일찍부터 미얀마 군부 정권의 오랜 후원자였고,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 미얀마 정부를 두둔하면서 아웅산 수치 정부와도 밀월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미얀마의 수도 랑곤에서 남서쪽 윈난성의 수도 쿤밍까지 이어지는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여 올해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파이프라인 지대를 따라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파키스탄에서 서쪽으로 가면 이란이 나온다. 중국은 경제 제재가 해제된 이란에 빠르게 진출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철도와 고속도로 사업을 벌이려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아프리카가 있다. 아프리카는 중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대륙이기도 하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처럼, 이번에도 중국의 주무기는 철도였다. 중국은 70년대 아프리카에서 소련과 경쟁을 벌일 때 당시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이어주는 타자라(TAZARA) 철도를 건설해주기도 했다.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잇는 타자라 열차 (출처: tazarasite.com) https://tazarasite.com/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잇는 타자라 열차 (출처: tazarasite.com)

과거 영국은 아프리카의 자원을 값싸게 가져가기 위해서 건설비가 적게 드는 협궤 철도를 건설했는데, 오랜 기간 시설이 보수되지 않아 노후하고 제대로 운영이 안 되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중국이 제시한 표준궤 철도 노선들은 더욱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 중 현재 일대일로와 연결되는 핵심 사업은 인도양 연안과 내륙의 동아프리카 각국을 새로운 표준궤 철도로 연결시키려는 프로젝트다. 에티오피아의 유일한 외항인 지부티와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연결시키는 700km 구간의 철도와 케냐의 외항 몸바사와 수도 나이로비를 연결시키는 500km 구간의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들 철도는 내륙을 가로질러 우간다, 르완다, 남수단을 거쳐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늑대 전사가 보여주는 것

이렇게 인도양 전역에서 펼쳐지는 중국의 화려한 행보들은 영화 한 편에서 종합됐다. 2017년 개봉한 [전랑 2]가 주인공이다. 2016년 개봉한 [전랑]은 조잡한 중국군 홍보영화로 배우 오경이 감독이자 주연을 맡았었다. 1편에서 그저 소소한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전랑은 후속편에서는 중국 영화 중 전무후무한 흥행 성적을 거둔 메가히트작으로 떠올랐다. 전년도 주성치 감독의 [미인어]가 개봉했을 때 5억 달러로 중국 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갱신했었는데, [전랑 2]는 단숨에 8억 6천만 달러를 벌어들여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랑2]는 중국 인민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희대의 히트작이다.
[전랑2]는 중국 인민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희대의 메가히트작이다.
미국의 [람보]와 한국의 [태양의 후예]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전랑 2]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ox type=”info”]인도양에 접한 아프리카의 모 국가에서 에볼라를 떠올리게 하는 전염병 라말라 방역 작업에 나서는 중국 보건당국과 반군과 정부군의 치열한 내전에서 피해를 보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등장한다.

그런 와중에 반군은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용병을 고용하여 중국인들을 계속 학살하고 피난민들은 중국 대사관으로 도피하지만, 중국 해군은 유엔 허가 없이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 오경이 분한 특수부대 ‘전랑’의 전직 요원인 렁펑이 뛰어들어 화려한 액션씬을 보여주며 사태를 해결한다. [/box]

당연하게도 이 영화의 내용은 뻔한 민족주의적 수사로 가득 차있다. 선례를 제공해준 [람보]나 [태양의 후예]와 마찬가지로 전랑도 ‘국뽕’물이다. 나는 이 영화를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예고편만 봐도 작품성은 익히 예상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적 가치와 별개로 이 영화가 중요한 점은 바로 ‘국뽕’에 있다.

중국군이 지원해준 전랑은 당연하게도 중국이 현재 어떤 대외문제에 관심이 많은지를 홍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인을 범한 자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벤다”는 반고의 구절을 캐치프레이즈로 건 이 영화는 민족주의 정서를 대놓고 자극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나아가 인도양 전역에서 점차 군사적 역할도 확대해나가겠다는 의지는 이제 대중의 여론으로도 뒷받침 될 가능성이 크다.

일대일로의 좌초?

일대일로 사업에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대일로 사업으로 인한 추가적인 수요 창출이 그리 크지 않다는 분석이 현재로서는 지배적이다. 또한, 중국 당국의 고압적 태도, 지지부진한 현지인 고용,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실제 건설비, 현지의 정치적 반발과 맞물려 중국이 자랑하는 수많은 고속철 수주들이 연달아 취소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 사업은 현지의 복잡한 토지수용 문제로 공사가 지지부진하며 중국의 지분이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가득하다. 일대일로의 가장 중요한 협력국인 파키스탄에서는 디아메르-바샤 댐 건설을 둘러싼 현지인들의 반발 끝에 건설이 좌초되기도 했었다.

중국이 화급히 진화에 나서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프로젝트에 속한 대부분의 사업은 진행하기로 합의되었지만, 다른 공사들이 디아메르-바샤 댐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현재 고속철은 타이에서도 난항을 겪고 있고, 베네수엘라에서는 유가 폭락과 정권불안으로 잠정 중단인 상태이며, 리비아에서는 아랍의 봄과 그 이후 이어진 내전으로 사실상 취소되었다.

중국
일대일로는 난항을 겪고 있지만, 중국의 세계 진출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로 뻗어나고자 하는 중국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번 당대회 때 일대일로는 당장에 삽입되었다. 시진핑이 2022년에 물러나더라도 그 후계자들이 일대일로를 이어가게끔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한 트럼프의 의지는 그리 확고하지 않은 듯 하다.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선언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입지는 다시 한 번 손상을 입었다.

장군은 베이징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가

얼마 전 짐바브웨에서 벌어진 사태는 시진핑 2기, 그리고 그 너머에 인도양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는 민족 해방 게릴라 활동을 통해 국민영웅으로 떠올랐고, 1980년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다른 아프리카의 독립투사들의 전철을 밟아 독재자가 되었고, 37년 째 짐바브웨를 다스리며 기행을 이어갔다. 이미 90대의 고령인 그는 자신이 최소 100세까지 권력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41세 연하인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에게 정권을 물려주려고 게릴라 시절 동지들, 특히 부통령 에머슨 음난가그와를 숙청한 일이 화근이 되었다. 2017년 11월, 콘스탄틴 치웬가 장군이 나서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마침내 기나긴 무가베의 통치는 종식되었다.

(왼쪽부터) 독재자 무가베, 그의 아내 그레이스,
(왼쪽부터) 짐바브웨의 독재자 무가베, 그의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의 철권 통치를 끝장낸 콘스탄틴 치웬가 장군.

수상쩍은 점은 치웬가 장군이 쿠데타 나흘 전인 11월 10일에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창완취안 국방부장과 만났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쿠데타, 그것도 무가베 같은 철권통치자를 몰아내는 쿠데타에 앞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중국은 통상적인 군사 교류의 일환이었다고 논란을 일축했지만, 현재 짐바브웨의 대통령 음난가그와(’17년 11월 24일 취임)가 일찍부터 짐바브웨 내부의 친중파였다는 점 때문에 의혹은 가시지 않고 있다.

현재 무가베가 일찍부터 짐바브웨에 들어와 있는 중국 투자자본을 몰아내고 국유화를 시도한 것에 대해 쿠데타를 묵인 혹은 지원해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돌고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이제 중국은 다르푸르 사태처럼 방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자국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사실 한국에 행한 사드 보복을 통해 우리는 이 추상적인 ‘영향력 사용’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지를 피부로 느꼈다.

경쟁자의 경쟁자

이런 영향력 과시는 분명 주변국들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축적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미국조차도 서유럽과 아시아에서 처음 영향력을 확대할 때 현지 지식인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반발에 직면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업이든 처음 추진할 때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미숙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그 출발지점의 수준도 워낙 낮았고, 국제사회의 규범에 너무 오랜 세월 격리되어 있었기에 미숙함의 정도는 훨씬 더 심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막대한 자금력은 현실이며, 인도양 연안과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은 당장의 자금과 인프라가 급한 것도 현실이다. 중국이 앞으로 실패 사례들에서 교훈을 얻어 대외투자 노하우를 축적하고 관행을 개선해간다면 일대일로가 갖는 반발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연관 국가들은 중국의 인프라 투자 공세를 이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돈 중국 위안

유라시아와 인도양 국가들은 새로운 성장지대로 떠오르고 있으나 인프라와 제도는 기존의 성장지역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일대일로가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들은 어찌되었든 필요한 일이다. 사업 자체에 대한 반발은 일대일로를 진정으로 좌초시킬 수 없다. 그렇기에 일대일로의 진짜 위협은 다른 데 있다고 봐야한다.

그 위협은 바로 개발 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경쟁자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미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한 일들을 반복하면 된다. 아프리카는 냉전이 끝난 이후 IMF와 미국과 유럽 조언가들의 말을 듣는 것에 질려 있었다. 양복을 빼입은 백인 사업가들은 아프리카의 실질적인 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만 뽑아가며 옛주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럴 때 중국이 등장하여 진짜로 아프리카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지는 댐, 도로, 철도, 교량을 지어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대안’은 언제나 매력적인 법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은 새로운 대안을 열렬히 환영했다. 물론 이것이 중국이 말하는 대로 ‘윈-윈’이 될지 아니면 그저 새로운 수탈자의 등장일지는 지켜보아야 할 문제였다. 그렇게 시간이 차츰 지나자, 많은 아프리카 사람에게서 중국의 정체가 결국 후자인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중국이 결국 아프리카의 새로운 수탈자는 아닌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
중국이 결국 아프리카의 새로운 수탈자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다시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대안이었다. 중국의 개발 방식은 확실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화끈한 추진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눈에 확 들어오는 결과물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현지 지역민의 이익을 때때로 굉장히 심각하게 침해했고, 밀려들어오는 중국인 이주 물결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은 현지의 인기 있는 디자인을 무단으로 베껴가서 훨씬 싼 값에 생산해 수출품으로 들여오기도 했고, 심지어 길거리 노점 좌판까지 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중국과 감히 경쟁에 나설 것인가?

미국의 후퇴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미국일 것이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미국은 아시아-아프리카의 인프라 개발이라는 거대 사업을 다 떠맡기에는 너무 신경 쓸 것이 많았다. 국내 사정도 혼란했다. 사실 미국은 자국의 낙후한 인프라부터 먼저 보수해야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2011년 오바마 행정부는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를 외치면서 중동에서 빠져나오고, 진짜 전략적 핵심 무대로 떠오르는 아시아 태평양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이제 권력과 부의 중심이 동아시아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석유 문제와 복잡한 종교, 민족 갈등으로 혼란에 빠진 중동과 다르게 아시아에서는 소비시장과 중산층이 부상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태평양 연안 경제는 어디서나 발달한 제조업과 활기찬 IT 혁신산업을 자랑했다. 그러나 부시 정부의 유산은 오바마의 발목을 계속 잡았다. 질질 끄는 시리아 문제와 이란 핵 협상으로 인해 그가 가시적으로 아시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바마는 미국의 세계 전략의 중심 지역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출처: POSTNITO.CZ) http://postnito.cz/the-pivot-to-asia/
오바마는 미국의 세계 전략의 중심 지역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중동 문제에 발이 묶여 아시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출처: POSTNITO.CZ)

트럼프 행정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미국인들은 자유무역에서 빠져나와 미국에서 제조업 일자리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중국에 맞서 야심차게 제시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미국이 빠지면서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그 사이 중국은 미소를 지으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들고 나왔다.

트럼프가 중국에 어떤 식으로 무역보복에 들어갈지 걱정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말이다. 트럼프는 전지구적인 공감대를 얻은 얼마 안 되는 사안인 환경과 기후 변화에 있어서도 미국의 체면을 구겨주었다. 오바마와 시진핑이 주도한 파리 기후협정에 자발적으로 탈퇴한 것이다. 환경파괴의 주범인 공산당이 미국의 자발적 후퇴 덕분에 갑자기 환경의 수호자로 떠오르는 역설적 순간이었다.

맞수

중국에 맞설 진정한 경쟁자는 결국 아시아에서만 나와야 했다. 아시아 각국은 중국의 부상 덕분에 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보았다. 그들은 중국에 투자했고,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하여 큰 이익을 봤다. 그러나 경제적 의존이 점점 심해지자 장밋빛 기대는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중국과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도 나름의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중국이 창출하는 부에 편승하여 경제적 기회를 잡으면서 동시에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꽉 잡고 있어야 했다. 중국이 부상하고 경제협력 관계가 경제적 의존 관계로 변한 상황에서 이러한 줄타기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이 보여주는 태도와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 대만 민진당 정권에 대한 보복은 모두 중국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중국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국가들은 아프리카뿐만이 아니었다. 아시아 국가들도 미국이 빠져나갈 공간을 채울 새로운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공을 맡을 국가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국에 제대로 맞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중국에 맞서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에 맞서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로 거대한 중국 경제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경제규모를 갖춰야 했다. 만약 경제보복이 들어올 경우 못해도 중국의 코를 깰 정도는 되어야 했다.

둘째로 바다에서 의욕적으로 힘을 축적하고 있는 류화칭의 해군에 맞설 해상력이 필요했다. 특히 대양에서 작전 가능한 능력은 필수였다.

셋째로 국가 자체가 야심을 갖춰야 했다. 미국과 소련처럼 세계적 야심을 갖출 필요는 없었지만, 과거 먼로 독트린을 선포하던 시절의 미국이나 현재의 중국처럼 지역적인 야심은 필요했다. 자국이 속한 지역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 그리고 마땅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사명감이 없는 국가는 정치적으로 모험과 갈등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도전할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여야만 했다. 러시아나 이란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는 오히려 미국과 유럽의 압력에 대응해 중국 편에 붙는 것이 유리했다. 중국은 자국의 정치문제를 가지고 시끄러운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약진하는 공산당 독재국가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국가는 아시아에서 딱 둘이 있다. 이 국가들은 단독으로 중국에 맞설 힘이 있지는 않았다. 이미 중국은 10조 달러가 넘는 GDP를 자랑하며 독보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하지만 두 국가가 힘을 합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고래로 합종과 연횡, 즉 세력균형은 전략의 기본 아니었던가. 거기에 중국의 부상을 아주 고깝게 보는 미국이 참여한다면? 중국 공산당은 자국이 빠른 속도로 부상함에 따라 생기는 문제들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서 의도치 않게 체제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상에 불안감을 느끼는 주변국들의 여러 임기응변들이 모이자 경쟁 구도의 반대편도 완성되어갔다. 2017년이 되자 이 두 그림은 더 큰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졌다. 누구도 계획을 세워서 진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인도양과 그 연안 지역은 이제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전략적 경쟁무대로 떠오르고 있었다.

선수들은 이제 다 정해졌다. 누구나 지금쯤 짐작하고 있겠듯이, 그 주인공들은 아시아의 전통적 강대국이었던 일본과 새롭게 떠오르는 강대국인 인도였다.

인도 일본

(계속) 

[divide style=”2″]

[box type=”info”]

중국과 오래된 미래 

  1. ‘라다크’에서의 패싸움
  2. 헬싱키의 함정 
  3. 누가 인도양의 주인이 되는가
  4. 아베의 몸부림
  5. 힌두 민족주의가 삼킨 네루의 유산 
  6.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7. 한국, 자기부정과 과대망상을 넘어서

[/box]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