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라다크에서의 패싸움’에서 이어집니다.
1996년, 장쩌민 주석은 아프리카 6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길에서 중국 기업인들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때 장쩌민이 중국 기업인들에게 한 말은 이후 중국의 해외 진출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바로 “저우추취(走出去)”였다.
자, 이제 밖으로 나가자!
남순강화로 전면적 개혁개방이 선포된 지 4년이 지난 때, 세계가 중국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세계가 주는 기회를 잡았다. 문제는 언제나 불균형이었다. 일반 인민보다 특권을 가진 당원이, 그리고 더 높은 ‘꽌시'(關係; 직역하면 ‘관계’, 우리말 ‘인맥’, ‘연줄’ 정도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산업 단위로 보자면 이런 특혜의 중심에는 수많은 국영기업이 있었다. 중국의 국영기업, 국영은행들은 당국이 제공해주는 값싼 신용과 우대조치를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 국영기업들은 중국 국내의 투자를 주도하면서 공룡과도 같이 성장해나갔다.
그런 와중에 장쩌민은 이제 세계가 중국으로 왔으니 중국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이들 국가대표(National Champion)들은 세계무대에서 뛰어야 했다. 그것이 ‘저우추취’의 의미였다.
잠 못 이루는 제국
장쩌민의 저우추취는 필연적으로 전략적인 문제와 연결되었다. 중국 정부는 미국과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미국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냉전의 역사에서 배운대로 미국은 동구권을 무너트리고 제3세계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정부를 심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이는 소련과 중국도 열심히 하던 일이다. 북한에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으니 말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시작된 위기의식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계속 커져만 갔다. 중국을 둘러싼 나라들의 지도를 보면 중국 정부가 미국에 대해 갖는 불안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더 직관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북쪽엔 자본주의로 고통스런 이행을 겪고 있는 러시아가 있었다. 고르바초프 시절에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 위협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여전히 러시아는 쉽사리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1960년대에는 국경 지대를 놓고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고, 소련 붕괴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기술적으로 수준 높은 군대와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
동쪽으로 돌리면 남한과 일본, 대만이 나온다. 이 세 나라에는 모두 미군 기지가 있고 서쪽의 중국에 비하면 훨씬 더 부유했으며 첨단 군사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태평양은 중국 입장에서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았다. 남쪽에는 인도와 베트남이 있는데 모두 국경 지대에서 무력충돌을 겪었던 나라들이었다. 베트남은 중국이 소련과 한참 적대관계일 때 소련에게 해군기지를 임대해주고 중국이 후견하던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려 중국과 전쟁까지 벌였었다.
허기진 제국
문제는 이런 대중국 포위망이 미국의 절대적인 해상에서의 우위와 만났을 때 초래되는 결과였다. 중국은 세계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대국이었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수의 인민에게 제공할 식량과 에너지를 구하는 일은 확실히 문제였다. 중국 땅은 거대했지만, 국토 절반 이상은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는 척박한 곳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인구는 너무 많아 식량 수급을 위해서는 수입이 필수였다.
물론 수입을 하지 않더라도 대약진운동 때와 같은 기아 상태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영양분만 제공하는 것으로 인민의 정치적 충성을 사는 시대는 한참 전에 지나갔다. 새로운 중국식 사회계약에 필요한 것은 부족함 없는 쌀과 고기였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도시화되자 이전과 같은 단조로운 곡물과 채소 중심의 식량 소비도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구식 식생활과 소비문화의 출현은 식단에 있어서 변화무쌍한 유행과 무엇보다 육류 소비의 가파른 증가를 야기했다. 그리고 가축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곡물을 소비한다. 이 모든 것을 중국 땅에 의존하는 것은 수자원과 환경의 재앙을 의미했다.
식량 안보 문제는 물론 1990년대에는 곧바로 가시화되지 않았다. 중국은 아직도 도시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너지는 곧바로 막막해졌다. 발전량의 상당수를 책임지는 석탄은 괜찮았다. 중국은 세계 제1의 석탄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내연기관을 굴러가게 할 석유는 확실히 문제였다. 70년대만 해도 중국은 다칭 유전을 통해 석유를 자급했었고, 석유파동으로 고통 받는 일본에 석유를 빌미로 접근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중국이 석유를 자급할 수 있던 때는 딱 이 시기까지였다. 곧이어 중국의 산업발전이 폭발하게 되었을 때, 중국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동의 탄화수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가가 되었다. 식량과 석유를 필두로 점차 수많은 광물, 목재, 그리고 어족 자원까지 중국은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제국의 식도, 말라카
중국 지도부는 이제 국제적 무역 네트워크 속에서 자국이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지 인식해가기 시작했다. 바다로 뻗어나가는 수출길이 막히고 해외투자가 중단되면 실업이 고개를 들 것이고 국내의 엄청난 혼란이 야기될 것이었다. 그러나 수입길이 막힌다면? 그것은 훨씬 더 곤란한 문제였다. 당장 교통과 산업이 마비되고 건설이 중단되며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킬 것이었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는 굉장히 극단적인 것이고 실현가능성도 ‘제로’에 가깝지만, 지도부는 늘 유사시를 생각해야만 했다. 만약 미국이 서쪽에서 오는 모든 물동량이 통과하는 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을 틀어막는다면 중국으로서는 말라죽는 것밖에는 기대할 게 없었다. 그리고 말라카 해협 양편에 있는 일련의 국가들 중 중국에 전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중국의 출근길을 가득 채우던 자전거 행렬은 자동차들로 바뀌고 있었다. 석유 수입량은 중국 경제를 다룰 때 늘 등장하듯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 기세는 지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였다. 바로 공급망을 다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국영기업들은 정부의 전략적인 지원 하에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저우추취의 의미였다. 이들은 우선적으로는 자신들의 수익을 생각했다. 공산당 산하의 국영기업이지만, 어쨌든 기업은 기업이었고, 근본적으로는 사업에 손해가 나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 감당 가능한 손해의 상하한선은 정부가 보장하고 또 조정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국영기업은 넘치는 돈으로 석유, 광물, 목재, 어족자원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직 다른 나라들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비교적 적게 걸려 있는 아프리카였다. 자원을 노리는 국영기업 사업가들에 이어 중국 국영 건설사들이 아프리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국 기업들은 자원을 가져가는 대신에, 자금과 기술 역량의 한계로 건설 불가능한 인프라를 지어주겠다고 제시했다. 아프리카 각국 정부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 뒤로는 고국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수많은 중국인이 신천지를 찾아 떠나갔다.
세 힘의 균형점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제 중국 지도부는 대외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야 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 덩샤오핑의 ‘유훈’과도 같음)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아직까지는 쉬웠다.
미국은 막강한 힘으로 국제 질서에 안정성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중국이 구태여 불안정을 제공할 이유도, 실익도 없었고 무엇보다 능력이 없었다. 또 중국은 냉전시대 내내 수십년 간 비동맹 노선을 견지하였고, 국경 지대 너머의 갈등에 휘말리지 않는 대외정책의 기조는 이미 익숙했다.
반면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초강대국 지위를 내려놓는 것으로 고통스러운 비용을 치러야 했다(어떤 면에서는 시리아에서 아직까지도 치르고 있다). 중국은 때때로 대만해협에서 군사적 긴장 국면을 조성했지만, 중국 지도부 입장에서 대만 문제는 ‘국내문제’였다. 미국만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으면 되었다. 이런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과거 적대국이었던 한국, 일본, 대만 자본도 열심히 중국 동부 해안에 투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반대편에서 당기는 힘이 세지고 있었다. 당국은 대중 민족주의가 끓어오지 않도록 적당히 민족주의적 열기에 맞춰야만 했다. 민족주의는 중국인들이 지방정부 차원이 아닌 중앙정부 차원에 불만을 표출하고 해소할 유일한 창구였기에 당국의 적절한 대응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었다. 때때로 말 뿐이기는 해도 “No”라고 말하는 모습을 연출해줘야 했던 것이다.
동시에 공산당은 국영기업을 앞세워 식량과 에너지 공급망 확보를 위해 점차 해외에서 적극적 행보를 시작했다. 시대는 100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세계가 중국으로 왔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문을 걸어잠그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대처했다. 그러나 쇄국은 빈곤과 후진성만 가져다주었다.
마침내 덩샤오핑이 중국의 문을 다시 열었을 때, 세계는 다시 중국으로 왔다. 이번에 다른 점이 있었다. 개방의 파도를 타 부유해진 중국도 세계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점차 세 가지 차원의 힘(미국의 힘, 민족주의, 중국 자본의 세계 진출)이 하나로 맞물리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은 모습을 갖춰나갔다.
테러와의 전쟁과 화평굴기
2000년에서 2004년까지 이어진 부시 행정부 1기 때는 균형을 잡는 것이 비교적 쉬웠다. 집권하자마자 터진 9.11은 중국 입장에서는 최고의 호재였다. 테러와의 전쟁을 결의한 미국은 중동에 집중하면서 아시아의 일은 관심사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다. 중국은 자국과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이 들어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테러를 빌미로 위구르 무슬림들을 억압할 명분이 생긴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중국이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일들은 거의 백악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에서도 수렁에 빠졌고, 푸틴의 러시아가 높은 유가로 기지개를 켜며 미국에 다시 대들기 시작하자, 중국에 거의 신경쓰지 못했다.
당시 중국에게 있어 주된 문제 원인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역사 문제로 한국과 중국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이다. 반일시위들이 이어졌으나 그 수위는 충분히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었고 오히려 민족주의 열풍으로 당국이 재미를 보기도 했다. 다만, 중국의 경제가 놀라운 성장을 이어가자 외국의 논자들이 서서히 중국 위협론을 언급하시 시작했다는 점은 위험신호였다. 국력이 성장한 중국이 세계 안정에 위협을 끼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제공해주는 여러 우대조치들을 끊고 견제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당은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2003년 10월, 중앙당교 상무부장인 정비젠은 보아오 포럼에서 “화평굴기”(和平屈起; 평화적으로 ‘굴기'(우뚝 섬)하겠다는 뜻)라는 슬로건을 대외정책 기조로 제시했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해도 그 과정과 결과는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화평굴기를 바로 채택하여 도광양회 대신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실상 같았다. 다만 중국의 국력만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심지어 얼마 안 가 후진타오는 이마저도 바깥에 공격적으로 비칠 수 있다며 화평굴기를 “화평발전”으로 바꿔 말했다. 덩샤오핑이 지정한 후진타오는 진정으로 덩샤오핑의 충실한 후계자였다.
올림픽이 깨우쳐준 ‘진실’
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평화가 언제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이라크의 수렁에 발이 묶여 있었다 하더라도 중국의 성장은 너무나 엄청난 규모여서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국제 질서에서 이익만 취하며 어떤 부담도 지려고 하지 않고, 자국 내에서 끝없는 인권 유린과 탄압을 저지르는 공산당을 해외에서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런 가운데 2008년은 또 다시 후진타오 시대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해 여름에 열릴 베이징 올림픽을 맞이하여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이룩한 위업을 과시하고자 했다. 공산당은 베이징을 현대적 도시로 보이게 하고자 화장실 개량 사업을 실시했고, 택시기사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 개막식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복귀했음을 입증해주는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했다.
곧이어 발생한 두 사건으로 공산당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세계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치룰 것으로 생각한 올림픽은 도리어 세계인들이 중국에 대해 얼마나 불신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를 공산당에게 깨우쳐주었다.
2008년 3월에 불거진 티베트 문제로 시작해 서구 각지에서 반중 시위대가 조직되었다. 시위대들은 베이징으로 향하는 성화봉송대가 만나는 곳마다 등장하였고 성화를 끄고 때로는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찍은 사진과 영상은 중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특히 파리에서 있었던 반중 시위대와의 충돌은 극적이었다. 여성 장애인 펜싱 선수인 진징(金晶)이 휠체어를 탄 몸으로 시위대로부터 성화를 지켜낸 것이다. 그는 순식간에 중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진징에게는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국주의자들의 격렬한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9년 베오그라드 오폭으로 잠깐 붙었던 불이 이번에는 훨씬 더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중국 대륙 각지에서 맞불 시위가 일어나 성화 봉송을 방해한 국가들을 성토했다. 시위대들은 프랑스 국기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그려 넣고 거리를 행진하며 까르푸 매장 불매 운동을 개시했다.
진징은 까르푸 매장 불매운동은 결국 까르푸에 고용된 중국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제를 촉구했다. 시위대는 어제의 영웅을 하루 만에 매국노로 몰아 붙이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야말로 세계 각지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이 뛰쳐나와 자국을 변호했다. 그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중국인들은 인터넷 자경대에 의해 신상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사태가 계속되면 반중 시위대는 더욱 커질 것이었고, 애국주의자들의 시위대는 그에 맞서 더더욱 커져 악순환만 이어질 것으로 보였다. 당은 빠르게 개입할 필요를 느꼈다. 과열된 애국주의 사이트들이 선제적으로 폐쇄되었다. 공들인 올림픽이 망가지고, 도광양회가 손상받는 것을 감수할 간부는 누구도 없었다(당시 올림픽준비위원회 의장이 바로 시진핑이었다).
사태는 점차 가라앉고,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치러졌으나, 공산당은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기존까지 가지고 있던 관념을 모두 뒤집어야 했다. 중국 대중의 민족주의 열풍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동시에 서구인이 가지는 중국에 대한 혐오감과 불안감, 두려움 등 부정적 감정의 크기 역시 그랬다.
드러난 중국의 맨얼굴
사실 4월에 일어난 성화 봉송을 둘러싼 사태는 시작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그 전에도 올림픽을 두고 홍역을 겪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이번 사건의 주무대는 인도양 건너 북아프리카의 수단이었는데, 그 자체가 국제적으로 뻗어나간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까지 수단은 남수단과 갈라지기 전이었고, 남쪽의 기독교를 믿는 흑인들과 북쪽의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끼리 수십년 째 갈등하고 있었다.[footnote]기나긴 내전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2011년 남수단은 끝내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혼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footnote]
동시에 수단 서부에서는 흑인계 무슬림인 푸르족과 아랍계 무슬림끼리도 토지 문제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이슬람에 기반한 통치를 선언하며 권좌에 오른 수단의 독재자 오마르 바시르는 아랍 민병대의 편을 들며 푸르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초지와 석유 매장지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국제사회가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다르푸르 사태의 참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2003년부터 시작된 다르푸르 학살의 희생자 수는 가파르게 늘어나며 국제사회의 무능력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UN에 따르면 다르푸르에서 학살된 사람의 수는 30만 명이었고, 난민으로 떠돌게 된 사람들은 최소 250만 명이었다(비교를 위해 언급하자면 7년간의 시리아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이 50만 명이다).
국제사회는 강대국들과 UN의 무능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5년에 소집된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수단에 대한 경제제재안이 올라왔다. 그러나 제재는 실행되지 못했다.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 다음 해에 안보리가 다시 소집되어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번에까지 거부권을 행사하기에는 보는 이목이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중국은 불간섭과 비개입 원칙을 들어 기권을 선택했다. 비동맹 시절부터 이어져온 전통에 따라 상관 없는 타국의 일에 개입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실 누구나 그 속 뜻을 알고 있었다. 이미 수단 석유의 3분의 2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중국이 수단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무기가 다르푸르에서 학살에 사용된다는 증거도 나오고 있었다.
2007년에는 마침내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수단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단 정부의 비인도적 행위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국제적 압력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중국을 가리켰다. 수단 정부가 설령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아도, 석유의 3분의 2를 수입해가는 중국이 요지부동이면 그 돈으로 마음껏 학살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제 다르푸르 위기를 끝내기 위해서는 중국의 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결정적인 상황이 되었다. 덩샤오핑 시대 이래로 30년 동안 이런 식으로 선택을 강요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중국은 실로 오랜만에 밖으로 나간 자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와 맞닥뜨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다.
책임의 딜레마
다르푸르 사태는 자연스레 다가오는 베이징 올림픽과 결부되었고, 그제서야 중국이 서서히 반응했다. 2008년 2월이 되자 부도덕한 정부가 주최하는 부도덕한 올림픽이라는 식의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미국 기업이 다르푸르에서 중국이 보여주는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올림픽 후원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베이징 올림픽 예술고문 직에서 사퇴했다. 이런 올림픽에 힘을 보태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중국 정부는 다시금 당혹스러워했다. 대체 올림픽과 아프리카 구석의 인권 유린이 어떤 관계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면 중국의 국력과 세계에서 갖는 위상이 그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더는 냉전시대 후진국의 전략인 불간섭과 비개입은 통하지 않았다. 요컨대 세계인은 중국에게 덩치에 합당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국제질서에 편승하여 성장을 이뤘으면 그에 걸맞는 도덕적 행동을 보이라는 얘기였다. 중국 정부는 마지못해 수단 측에 UN의 권고를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르푸르의 학살이 멈출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는 않았다.
2008년이 끝나갈 무렵,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대외 전략이 달라져야 함을 차츰 실감하고 있었다. 세계인은 중국이 자신의 국력에 걸맞게 책임을 다하는 대국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자긍심에 생채기가 난다고 생각되는 어떠한 외부의 목소리에도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둘 중 그 어느 것도 공산당이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은 인민과 세계인 모두 조용히 있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커져가는 중국의 존재감은 양측 모두에게 잔뜩 할 말을 만들어다 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중국의 경제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자원 수요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중국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특히 중국이 우선적으로 진입한 수단과 같은 국가들에서는 또 다른 문제들이 떠올랐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곳에 있는 중국인의 안전 문제가 새로이 떠오른 것이다. 다르푸르에서도 중국인들이 납치되어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 자국민 보호는 어찌되었든 정부의 가장 큰 존재 이유 중 하나다. 아무리 공산당이 인명을 경시한다고 해도 정말 해외 중국인의 안전을 손 놓고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천명한 불간섭 비개입 원칙을 지속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져갔다.
갑작스럽게 처하게 된 딜레마에 우선 한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완전히 편입되어 미국과 유럽이 요구하는 정도로 책임을 맡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려면 국제기구에 분담금도 더 많이 내고 온실가스 협약에서도 모범을 보이고, 각지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약해야 했다. 이는 대부분의 세계인은 환영했을 해결책이었지만 중국은 결코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첫째로, 중국은 아직도 너무 가난했다.
서구의 많은 평론가가 중국이 필요할 때만 대국 행세를 하고 막상 진짜 책임을 져야 할 때는 “우리들은 아직 개발도상국”이라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고 비판했다. 분명 이런 편의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적으로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의 선진국에 비해 훨씬 가난한 것도 너무 명백한 사실이었다. 중국이 여러 국제 합의에 있어서도 개발도상국의 표준을 따르는 것에 논리적 문제는 없었다. 중국 지도부는 자국이 당연하게 가져가는 것이라 생각되는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집안일에 신경쓰지 마라
둘째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은 거의 언제나 권력과 관계된다. 중국이 만약 미국과 유럽이 요구하는 대로 협력적으로 나올 경우, 정권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르푸르 사태와 더불어 중국은 2007년에 미얀마 군부 정권이 시민운동을 탄압한 것에 침묵했다. 미국과 유럽은 역시 중국이 권위주의 정권의 믿을만한 배후가 되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공산당과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식의 대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민주주의 정부는 대체로 여론을 빠르게 반영하기 때문에 국제적 개입이 필요할 정도의 인권유린이 발생하는 일이 드물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국제적 개입은 거의 대부분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규탄과 제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권위주의 정부였다.
확실히 중국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어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책임을 맡을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사람들은 미얀마 군부의 인권 탄압이 중국 공산당의 언론 검열과 폭력적인 시위 해산이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인지 질문했을 것이다.
다르푸르 사태나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분쟁에 중국이 목소리를 냈다면 사람들은 티베트와 위구르에서 중국이 자행하는 탄압도 해결하라고 촉구했을 것이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중국에 좋은 일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에는 확실히 해로운 일이었다. 중국에게 불간섭 비개입 원칙은 중국이 귀찮은 책임을 맡지 않게 해주면서도 자국에 대한 시끄러운 잔소리들을 차단할 수 있게 해주는 만능 무기였다.
소련이 마신 독배
역사적으로 선례도 명확하게 존재했다. 냉전 시대 소련 지도부는 동유럽의 위성국들이 국제적으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기본적으로 그 정권들이 붉은 군대의 무력에 결정적으로 의지하였기에 이는 당연했다. 56년 헝가리 위기와 68년 프라하의 봄 때 붉은 군대의 탱크에 맞서 미국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여전히 서방 진영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의 존립 자체를 의문시했다. 한편,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냉전의 무대에서 위축되었고, 막대한 돈을 소모했다. 긴장 완화, 즉 데탕트가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양 초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유럽에서 관련 논의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1975년 미국, 소련, 그리고 철의 장막 양편 유럽의 35개국 지도자들이 헬싱키에 모여 조약에 서명했다. 그 조약의 이름은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로 이후 헬싱키 협정으로 불리게 된다.
헬싱키 협정은 유럽 국가들의 동등한 주권을 인정하고 1945년 이래로 정해진 각국의 국경을 변경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내정에 대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들이 핵심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핵심인 것처럼 보였다. 동유럽의 국제적 지위에 불만이 가득했던 소련은 크게 만족했다. 이제 서방 국가들이 동유럽을 붉은 군대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으름장을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반면 미국에서 헬싱키 협정은 엄청난 반발로 이어졌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을 인정하는 것을 반공주의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비판자들은 키신저가 영토 보전, 내정불간섭, 주권 인정 등 굵직한 덩어리를 건내주는 대신 아무런 구속력 없는 “사상, 양심, 신앙,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자유 존중”, “평등한 권리와 인간의 자결권 보장”과 같은 조항만 삽입하고 끝낸 것에 분개했다. 사실 뼈 속까지 현실주의자였던 키신저에게 있어서도 그런 조항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헬싱키 협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드러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주권 인정이나 내정불간섭은 오히려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상주의로 가득찬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무시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구절들은 동유럽 국가들의 시민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가졌던 것이다. 소련이 헬싱키 협정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 인간의 자결권 보장에 동의했다면 마땅히 자국의 시민들에게도 진정한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했다.
물론 반체제 인사들이나 지식인들이 진짜로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공산당이 그런 요구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헬싱키 협정으로 촉발된 수많은 지하단체들은 동유럽 공산당 정권을 끊임없이 귀찮게 했다. 예컨대 소련에서는 ‘헬싱키 감시그룹’이 조직되어 공산당이 헬싱키 협정을 위반하는 사례들을 수집했고 가장 유명한 반체제 인사 사하로프 박사의 구명활동을 펼쳤다.
헬싱키의 함정
중국, 더 정확히는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소련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중국이 새로운 종류의 헬싱키 협정에 서명할 일은 없었겠지만, 만약 그들이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자 비슷하게 움직인다면 그 함의는 명백했다. 대서양 헌장 이래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자유와 인권이라는 상식이 중국 공산당마저도 침식시킬 우려가 있던 것이다. 헬싱키 협정은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이나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같은 자들에게 힘을 실어다 주었다.
중국이 미얀마 군부나 북한의 김정일에 대해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책임 있게” 행동한다면, 류샤오보나 아이웨이웨이가 자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었다. 다당제 하의 자유로운 선거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책임을 말이다. 그리고 공산당은 미국이 이런 요구를 쌍수를 들고 지원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위협적인 선례들은 너무나 많았다. 2011년 아랍의 봄은 공산당이 가만히 있어도 해외의 민주화 사례들이 자국의 “불온한 시민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둘러싼 소동들은 중국이 더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제 중국은 국제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는 문제에서는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떠오르는 대국으로서 자신들의 지위 자체가 손상을 받을 수 있었다.
더하여 중국에게 훗날 비수로 다가올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 두 가지가 양립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컨대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이라는 것은 미국 주도하의 자유주의적 규범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부터 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책임을 다할 수는 없었다.
공산당은 다시 진자의 양 끝에서 움직이며 해법을 찾아나섰다. 만약 원자바오의 개혁 노선이 승리했고, 중국이 점진적으로 자유화의 길을 걸었다면, 중국은 기존 국제사회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평안을 찾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는 중국 전반에 ‘미국 모델’에 대한 불신을 가득 심어주었다.
노선 투쟁의 결과 공산당은 당의 절대영도라는 원칙을 놓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보시라이가 선동하는 국수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나치게 갈등을 선동했을 때 중국이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너무 컸다. 중국은 미국보다 약했고 무엇보다 훨씬 더 취약한 위치에 있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이번에도 미국에 대놓고 도전하지 않으면서 미국에 끌려다니지 않는 균형점 위에서 줄타기를 시도했다.
베이징 컨센서스
당 지도부가 찾아낸 것은 기존의 이치 밖에 있는 제3의 해법이었다. 공산당은 자유주의 가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다. 이는 중국이 그간 자원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진출해온 유라시아 각국과 아프리카에서의 행보와 맞물렸다. 중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국의 많은 인사들이 자신의 개발 경험을 모방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치기어린 서유럽 좌파가 60년대에 판타지로 점철된 마오주의에 잠깐 심취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중국의 개발전략이 정말로 참신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모델’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과 대만, 더 전의 일본이 초석을 닦아놓은 발전국가 모델을 자신들의 사정에 맞게 개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의 선배들은 너무 고도로 발전한 선진국들이었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시작한 것은 수십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는 냉전과 보호무역의 시대로, 지금과는 정치경제적 환경이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중국은 탈냉전 세계화의 시대에 발전을 시작하여 엄청난 성과까지 낸 동아시아 국가였다. 베이징은 모델로 채택하기 쉬운 생생한 사례였고, 자신들의 모델을 수출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던 동아시아 삼국과는 다른 적극성도 보여주었다. 소위 ‘베이징 컨센서스'(중국식 발전 모델 혹은 경제 전략)가 점차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대안의 부재에서 불쾌한 대안으로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위상은 지지부진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진척과 겹치면서 더 선명해졌다. 냉전이 끝난 이래로 미국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세계 각국에 더 열심히 수출했다. 그러나 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러시아 모라토리엄,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경제난을 겪으면서 워싱턴 컨센서스의 위상은 빠르게 퇴색되었다.
당시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IMF 당국자들이 각국의 세밀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교조적으로 원조프로그램과 구조 개혁을 집행했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그들은 한국에 구조개혁을 너무 과도하게 밀어붙인 나머지, 일시적 위기를 겪고 있던 건전한 회사들마저 줄도산시켰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을 내려다보는 유명한 사진은 당시 미국과 서유럽의 당국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듯 했다(캉드쉬 본인은 “사진을 찍는지 몰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찍는 걸 몰랐기에 본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식량 보조금을 시장효율화를 위해 성급하게 폐지한 결과는 식량 위기와 이어지는 잔인한 화교 학살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여전히 미국이 절대적 힘과 위상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과 공산권의 붕괴로 대안도 사라졌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미국의 위상이 한 번 더 타격을 입었을 때,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다. 97년과 98년의 위기는 미국과 유럽을 직접 타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시 미국은 클린턴 시대의 호황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후 닷컴 버블이 터졌으나, 미국 경제는 금새 회복해 순항을 거듭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같은 이들은 미국과 유럽이 아시아를 주저앉히고, 서양의 지배를 영구히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하티르가 주장한 음모가 설령 사실이더라도 한 가지는 명확했다. 미국과 유럽이 못미더워도 그 바깥은 지옥이었다. 북한이나 쿠바 같은 나라가 되는 것이 선택지가 될 수는 없었다.
2008년은 달랐다.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심장인 미국이 직접적으로 휘청거렸다. 끝없는 실직자들의 행렬과 압류된 주택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런 종류의 음모론이 들어갈 여지를 주지 않았다. 대신 개발도상국들은 새로운 대안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대안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국가 주도로 엄청난 경기부양 예산을 집행하여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넘긴 것으로 보였다. 사실 그 이면에는 역시 엄청나게 증가한 기업 부채와 지방정부 부채, 부동산 과열과 부패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빈곤에 신음하고 있는 절박한 개도국 사람들에게 이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중국은 굉장히 불쾌한 강대국이지만, 자신의 발전에 무언가 해법, 그리고 그 해법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모든 이들에게 중국은 불쾌하고 부담스러운 나라였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아무리 불쾌하고 부담스러운 선택지라도 선택 자체가 봉쇄당하는 상황보다는 낫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체제 경쟁의 유령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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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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