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개헌의 의미는 매우 막중하다. 한국 헌법체계 자체가 견고한 경성헌법체계이기 때문이다. 한국헌법은 조문 하나라도 쉽게 바꾸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비슷한 경성헌법체계이지만, 선거제도의 개편과 같은 사안이나 기타 필요시 일정한 범주 안에서 입법과 같은 절차로 개헌이 가능한 독일이나 스위스하고 비교해도 한국의 헌법은 고치기가 영 까다롭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개헌이 사회적인 여파를 불러일으키는 건 헌법의 체계 때문만은 아니다. 굴곡진 한국 헌정사에는 중요한 시기마다 터진 사건으로서의 개헌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개헌 과정들이 미친 파장이 사회 전체에 깊은 내상을 입혔고, 아직도 치유되고 있지 않다.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하려고 개헌했고, 박정희가 영구집권하려고 개헌했다.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의 헌법은 번번이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니 한국에서 개헌이 논의될 때 통상적으로 그 저의는 의심받게 되며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87 헌법 체제, 그 긴 생명력의 뿌리
이전 헌법들과는 달리 현행 헌법은 주권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이었다. 제헌헌법을 비롯해 제8차 개정헌법까지 주권자들은 실질적으로 헌법의 생성과 이를 통한 헌정질서의 구축에 자신들의 의사를 가지고 개입하거나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 현행 헌법이 전 사회적으로 벌어진 주권자들의 저항과 개헌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소위 ‘87년 체제’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행 헌법이 지난 30년간의 생명력을 유지한 것은 주권자의 직접적인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헌헌법을 비롯해 8차 개정헌법까지 과거 9개의 헌법의 평균 수명은 4년 5개월 정도였다(장면정부 당시 부칙개정을 위해 이루어진 개헌을 빼더라도 평균 수명은 5년에 불과하다).
이 부분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헌 논란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개헌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개헌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헌법 조문을 정비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누군가? 어떤 방법으로 사건을 일으켰는가? 지난 개헌을 보더라도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개헌을 했는가’였다.
헌법 조문의 내용은 주체와 과정이 결정된 후에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즉 헌법을 개정하려면 조문을 어떤 내용으로 정비할 것이냐를 넘어 이 개헌이 누구에 의하여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느냐는 점을 살펴야 한다.
따라서 향후 진행될 개헌의 과정은 제헌 이래 8차 개헌까지처럼 주권자의 참여를 배제한 채 주권자의 의사를 참칭한 개헌을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더 나아가 87년 헌법개정, 즉 현행헌법을 만들던 과정처럼, 주권자들이 새로운 헌정질서에 대한 요청을 제출하고 새로운 헌법을 구성할 수 있는 판을 만들었으나 정작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배제되었던 모순적인 과오도 극복해야 했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비판되어왔던 소위 ‘87년 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터이니까.
‘촛불’은 개헌을 요구했는가
현재의 개헌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분명히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국민과 함께 하는 개헌을 강조해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주체와 과정의 측면에서 현재 개헌 논의는 87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누가 뭐라고 하든 촛불이 만든 정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광장의 촛불은 적폐의 청산을 요구하면서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었다. 당연히 촛불의 요구를 해결해야 할 책무를 지니게 되었으며, 촛불의 뜻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촛불이 요구하여 받아 안게 된 문재인 정부의 책무 중에 개헌이 들어 있는가?
잠깐 시계를 되돌려 2016년 연말부터 2017년 초까지의 상황을 살펴보자. 국정농단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박근혜 정권의 패악에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광장은 박근혜 탄핵과 적폐청산의 구호로 넘쳐났다. 그런데 그 와중에 촛불이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는지는 의문이다.
개인의 경험을 객관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던 광장 어느 곳에서도 헌법을 바꾸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촛불들은 목소리를 높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하며 헌정질서의 회복을 요구했다. 광장의 촛불은 헌법을 바꾸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있는 헌법을 제대로 지키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87년 광장이 ‘호헌철폐’와 ‘직선제 쟁취’의 구호로 덮였던 것과는 반대로,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후 2017년 광장에는 ‘헌정질서회복’의 요청이 넘실대고 있었다.
‘침묵’하는 여론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의 뜻’ 내지는 ‘국민의 뜻’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개헌을 몰아붙이고 있다. 물론 개헌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이다. 대선 당시 주요 대선후보들은 모두 개헌을 약속했다. 따라서 개헌은 당시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공약 이행의 차원에서 논의할 수밖에 없는 의제다.
여기서부터 고민이 생긴다.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대통령이 된 후 지켜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개헌이 과연 ‘촛불의 뜻’ 내지 ‘국민의 뜻’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만일 개헌이 ‘촛불의 뜻’이었다면, 그 많던 촛불은 이 개헌 국면에서 어찌 이리 조용한 것일까?
대통령이 어떤 명분을 갖다 붙이든, 국회가 무슨 말을 하든지 민의가 개헌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지금 개헌에 가장 절실한 당사자는 대통령이고, 다음으로 간절해보이는 주체는 여당이다. 개헌 논의의 주도권을 쥐지 못한 야당은 시큰둥하고, 야당 중에 가장 큰 야당은 몽니를 부리고 있다.
결국, 개헌안이 국회에서 만들어지거나 혹은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넘쳐난다. 이러한 회의론이 조장되는 이유는 개헌을 국민 여론이 주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여론은 개헌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간절함, ‘개혁의 출발점’
문재인 대통령의 간절함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가? 가장 큰 원인은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을 개혁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헌은 개혁의 출발점일 수도 있고, 종결점일 수도 있다.
우선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만한 수준의 개혁을 진행한 후 그 결과를 종합하거나 결과물의 양산을 전제로 하여 헌법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개혁의 일단을 완성하는 선언으로서 개헌이 가지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개혁의 결과를 종합하여 개헌을 한다는 건 그 때가 언제가 될지 가늠할 수가 없다. 거꾸로 소위 ‘적폐세력’들이 농간을 지속해서 개혁이 지속적으로 좌초된다면 개헌의 시기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헌법으로 기본적인 개혁의 방향을 확정해 놓은 후, 그 헌법의 이름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개혁의 출발점으로서 개헌이 가지는 의의다. 물론 이러한 개헌 역시 시대적 흐름과 민의의 요구가 잘 맞아 떨어질 때 가능하므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황을 고려할 때, 개혁에 대한 일련의 요청이 분출하고 있는 현재가 개헌을 할 수 있는 유리한 시점이라고 판단할 여지는 충분하다. 바로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을 통한 개혁이라는 로드맵을 설정하고 추진할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그동안의 정치 지형을 고려한다면, 빠른 개헌을 통해 더 효과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인다. 현재의 국회가 스스로 자성에 기반을 둔 입법을 통해 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관료집단도 마찬가지고, 민간 영역에서는 더더욱 갈 길이 멀게만 여겨진다. 이들에게 맡겨 놓는 한 개혁은 항구히 요원하고 개헌은 쿠데타가 나기 전에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적폐청산의 엄중한 책무를 부여받은 문재인 정부로서는 이러한 상태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것이므로 개헌을 함으로써 개혁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을 십분 참작하더라도 현재의 개헌 논란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개헌을 발의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지난 1년 동안 국회는 뭐했는가?”라며 개헌안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국회를 타박할 수 있겠지만,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똑같은 질문을 대통령에게도 할 수 있겠다. 지난 1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 밑불 때는 거 외에 뭘 했는가? 본격적으로 개헌을 요청하는 여론을 활발하게 조직화할 방법은 없었는가? 6월 지방선거에 맞춰 무리하게 끌고 나가기보다는 좀 더 장기적인 경로를 준비하면서, 오히려 더 광범위하고 폭넓게 현존 헌정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산하고 사회적 논란의 장을 늘려갈 수 없었는가?
주권자의 준비물
다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자. 개헌의 과정에는 법전 문구를 다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개헌이라는 중차대한 사건은 누가 어떻게 개헌을 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진다.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민의를 확인하는 절차를 무시한 채 개헌을 하는 건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독재를 연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목적으로 민의를 배제한 채 진행하는 개헌은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를 왜곡시켰으며 공화국을 가장한 전제국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헌법에서도 기본권은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악질적인 유신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하여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주체가 되어 민의를 배신하고 만들어낸 바로 그 유신헌법 체제하에서 국민들은 주권자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수시로 기본권을 침해당하며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렇게 볼 때, 법전에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는가를 중요시하는 많은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수준에 머물게 된다.
과도한 우려와는 달리, 적어도 박정희와 문재인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었지만 문재인은 지금보다 나은 헌법체계를 만들 것이라는 일반적 신뢰가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신뢰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주권자들의 주체적 요구가 헌법을 바꿔 보자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주권자들의 관심과 참여가 없는 개헌은 성공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개헌이 된다고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수준에서라면 현행 헌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 개헌과 함께 개선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현행 헌법을 개정할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현행 헌정질서 안에서 폐단을 누적시켜왔던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개헌이 될 것인가?
앞으로 두 달 정도 남은 개헌 일정을 고려할 때, 3월 26일 발의된 청와대 개헌안은 그 자체로는 국회를 통과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국회에서 합의된 개헌안이 나온다면 국회를 통과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기 위해서 정부와 여당은 야당이 납득하고 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야당의 이해가 반영된 개헌안으로 후퇴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혹시라도 국회에서 개헌안의 통과가 가능할 수 있다. 재적의원 3분의 2를 확보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일단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이 나온다면 국민투표에서는 아마도 무난하게 찬성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상으로만 본다면 30년 전 헌법보다는 개정안이 조금이라도 현실에 맞을 터이니 유권자들이 반대할 이유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통과된 개헌안이 향후 개혁의 출발점으로서 실효성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미 청와대 개헌안이 발의된 상태에서 주체와 과정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하자는 주장은 너무 늦은 주장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내용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 논의의 범주가 좁아지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용적으로 볼 때도 청와대의 개헌안은 문제가 심각하지만, 이 부분은 논외로 하자.
지금 중요한 건 청와대 개헌안이 사장되거나 혹은 이 안보다 훨씬 후퇴한 내용을 담은 국회 합의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되는 상황에 대한 대비이다. 개헌이 되지 않았을 때, 또는 개헌이 될지라도 그 내용이 현저하게 후퇴한 내용일 때 그 부담은 고스란히 현 정부가 지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개혁의 동력은 떨어지고, ‘적폐’의 청산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할 것이며, 오히려 반동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