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직접행동영등포당’의 창당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지역정당 운동은 이제 일정한 지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는 이미 몇몇 지역정당이 창당해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일부 광역자치단체 단위에서도 지역정당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지역정당 운동 내부에서 내년 총선을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이견이 돌출되었다. 총선에서 지역정당을 의제화하기 위해 이에 동의하는 광범위한 정치세력을 하나로 묶어 전국정당을 창당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정의당이 말하는 선거연합정당, 실질은 ‘총선용 가설정당’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내년 총선에 대비해서 5개 이상 ‘광역 지역정당’을 창당하고 형식적으로 중앙당을 만들어 정당등록을 한 후 후보 출마 등 사업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지역정당에 동의하는 정치세력을 모아 일종의 총선용 가설정당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물론 지역정당 운동을 하는 단위만으로는 이러한 총선용 가설정당을 만들기는 어려우니 양당 정치에 반대하여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정치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 연합하자는 주장도 빼지 않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분들은 이러한 ‘연대 연합’이야말로 새로운 제3정당 정치세력의 출현과 정치 대전환이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한편 지난 10월 31일, 정의당의 시도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는 민주노총을 위시한 노동 세력, 녹색당 등 생태 · 기후위기 대응 세력, 각 진보정당, 그리고 지역정당 등 제3의 정치세력까지 포괄하는 선거연합정당 추진안이 논의되었다. 정의당을 플랫폼으로 하여 각 정치세력이 함께 하는 선거연합정당을 만들어 공동으로 총선에 임한 후 선거가 끝나면 다시 각 당으로 원상복구 하자는 안으로 알려졌다.
정의당이 말하는 선거연합정당의 실질은 총선용 가설정당이다. 이 안은 6월의 정의당 전국위원회 결정과는 결을 달리한다. 당시 제출된 안은 총선용 가설정당이 아니라 제 정치세력과 합당을 통한 신당창당이었다. 즉 진보세력의 통합정당을 만들자는 것이 지난 전국위원회 결정의 핵심이라면 이번 시도당 연석회의에서 나온 연합정당은 총선 때 모였다가 그 후엔 각자도생의 길로 분할하자는 안이다.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가설정당 합류? 지역정당 운동 싹 죽이는 일!
눈여겨볼 부분은 정의당이 제안한 총선용 가설정당에 합류를 제안할 대상 중 지역정당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앞서 말했던 지역정당 운동의 한 지류가 주장하는 총선용 가설정당 창당 안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시기에 지역정당이 총선용 가설정당에 합류하는 것은 적절할 것인가?
지역정당 운동은 이제야 제 모습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정당 운동의 주축들이 총선을 대비한 연합정당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것은 지역정당 운동의 싹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선, 무엇보다도 가설정당 안에서 지역정당의 역할이 전혀 없다.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가설정당은 말 그대로 총선용일 뿐이다. 가설정당이 구성되고 총선을 지나 해산될 때까지 지역정당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기존 정당의 지역 조직인 당원협의회 또는 시도당의 역할에 준하는 선거운동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설정당의 정책 중 하나로 지역정당을 포함하는 정당법 개혁안이 설정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의제는 총선용 가설정당의 핵심 의제도 아니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핵심 의제로 부각될 사안도 아니다. 새로 만들어진 정당은 아무리 그 실질이 가설정당이라고 하더라도 유권자들 눈에는 전국정당 하나일 뿐이다. 그 당이 총선에서 제시하는 공약 중에 유권자들이 가장 관심이 큰 의제 안에는 결코 지역정당 사안이 포함될 수 없다.
쉽게 이야기하면, 지역구 선거에서 ‘이번에 이 당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 우리 동네에 지역정당이 생깁니다’라고 선전할 때 예상할 수 있는 유권자 반응은 ‘뜬금 없다’일 것이다. 지역정당 공약에 박수치며 환호하는 게 아니라 ‘이건 또 뭔 소리야?’라는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들, 한참 선거운동으로 바쁜데 유권자들에게 지역정당 설명하고 앉았을 시간이나 있을까?
선거 끝나도 마찬가지!
선거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총선 이후 선거용 가설정당에 참여한 지역정당은 어떻게 될까? 선거참여를 통해 힘을 받고 더욱 활발한 지역정당 운동을 할까? 그렇게 되긴커녕 정반대로 지역정당 운동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
각 정치세력을 포섭해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가설정당 안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건 뭘까? 그건 비례대표 순위다. 가설정당을 만들기 위해 ‘통 큰 단결’, ‘구동존이’(求同存異; 같은 것을 구하고, 다른 것은 놔둔다. 결국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동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 운운하겠지만, 결국 문제는 어떤 당의 후보를 당선권 안에 올려놓을 것이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저 가설정당의 구성 원리는 총선이 끝나면 각자도생의 판으로 갈라서는 것이고, 여기 참여한 각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는 다시 자당으로 분할할 때 의석 하나라도 만들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총선용 가설정당 안에서 지역구 후보 선출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논의되는 가설정당에 참여하는 각 정치세력은 지역적 거점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각 지역마다 경쟁력 있는 후보는 대강 그 윤곽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참여하는 정당들의 관심은 나중에 돌아갈 때 의석이 확보될 수 있느냐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순번 나누기가 잘 되면 아름답고 깔끔한 이별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난 경험을 반추해 볼 때, 오히려 또 서로 머리끄덩이 잡아 당기고 누구는 목에 깁스하고 돌아다니는 꼴사나운 경험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비례 국회의원 원하는 지역정당? 넌센스일 뿐
이 과정에서 총선용 가설정당에 참여한 지역정당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지역정당의 입장에서 국회의원 비례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지역정당이 가설정당 안에서 국회의원 비례의석을 요구하는 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지역에 한정된 정치활동을 전제하는 지역정당 본연의 틀과는 다른 전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지역정당에서 국회의원 비례의석을 요구하는 것도 넌센스려니와 만일 그것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가설정당의 해체 후 지역정당은 사라지고 ‘무소속 비례의원’이 남게 되는 희한한 상황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정당은 저 가설정당에 합류하는 의미가 없다. 가설정당에 참여한 전국정당들의 선거운동 뒤치다꺼리 하다가 돌아오는 것 뿐이다. 이렇게 총선을 치루고 난 후 다시 지역정당으로 돌아왔을 때, 지역정당 활동가들이 과연 본연의 지역정당 운동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까?
지역정당이 총선에 참여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지역정당 입장에서도 총선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 이벤트다. 당연히 총선에 개입하고 지역정당의 역할을 해야 한다. 총선과 같은 전국단위선거에 지역정당이 타 정당과 함께 활약할 수 있는 방안은 ‘우호정당’ 혹은 정당연합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총선용 가설정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전국정당의 지역구 선거를 공동으로 진행하게 된다. 지역정당과 전국정당은 동등한 선거협력체가 되며, 해당 지역에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고 총선 이후에도 연대와 연합에 기한 정치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호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지역에 지역정당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지역정당이 창당되어야 한다. 지역정당 운동은 여기에서 또다른 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역정당이 총선에 참여하는 과정은 지역정당을 창당하고, 선관위에 등록을 요구하고, 전국정당과 함께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지역정당은 선거법과 정당법에 저촉된다는 선관위의 제재를 받을 것이며 이에 대해 행정적 사법적 대응을 취하는 과정이 바로 지역정당 운동이자 선거운동이 된다.
이때 전국정당(혹은 가설정당)과 지역정당이 우호정당 내지 정당연합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양 당사자가 총선에서 선거연대를 선언하고, 서로의 이해를 조정하고, 이 이해조정의 내용을 공공연하게 선거운동의 의제로 표방해야 한다. 여기서 이해의 조정이란 예를 들어 가설정당에 참여한 정당들이 돌아오는 지방선거에서 특정 선거구에는 후보를 내지 않고 해당 지역정당의 후보를 지지하겠다든지, 단체장의 선거에서 마찬가지 내용의 협약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정치적 이해조정을 통해 우호관계가 성립한다.
이렇게 공동의 합의를 바탕으로 지역정당은 총선에서 우호정당의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운동에 동참한다. 지지선언이나 선거운동 참여는 물론이고, 후원금 조직 등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가설정당의 당원들과 함께 하는 거다. 물론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다른 정당들이 이러한 활동을 전개해 주어야 한다.
가상 사례: ‘전북당’ 창당했다 해보자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전라북도를 활동 영역으로 하는 가칭 ‘전북당’이 창당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다가오는 총선을 위해 만들어지는 어떤 가설정당이 이 전북당과 우호정당의 협약을 맺는다. 이 가설정당에는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진보당 등이 함께 하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정치세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자.
전북당은 다음 지방선거에서 특정 지역의 자치단체장 선거에 후보를 출마하기로 하며 가설정당에 참여하는 각 정당은 해당 선거에 지역정당 후보가 출마하기로 한 자치단체장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기로 협약한다. 전북당은 총선에서 가설정당의 우호정당으로서 선거운동을 하되 다음 지선에서는 가설정당에 참여했던 각 정당들이 전북당의 선거운동에 동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설정당은 자신들의 지역적 조직화가 미진한 전북에서 효과적인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고, 지역정당인 전북당은 차후 지방선거에서 지역에 특화된 자신들의 정치를 펼칠 기회를 확보하게 된다.
총선 과정에서 만들어질지도 모를 가설정당과 지역정당 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게 가장 적절하다. 반면 총선용 가설정당에 지역정당이 합류해서 가설정당의 일원으로 활동한다는 건 지역정당 운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장 총선에서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인해 총선이 끝나면 해체될 가설정당에 지역정당이 참여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지속성도 담보할 수 없고 확장성을 도모할 수도 없다. 오히려 지역정당 운동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전국정당과 같은 위치에서 존재감을 보일 수 있을 때 총선 참여도 의미가 있다.
지역정당 운동이 전국정당 총선 참여 과정의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