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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주석이 여전히 중국의 비틀거리는 태양으로 서있던 1975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는 스웨덴 언어학자가 잠무카슈미르에 위치한 인도 북부의 오지를 방문했다. 히말라야 산맥과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 고원이 만나는 세상의 끝자락이었다. 그 지형과 기후로 인해 외지에서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이 곳에는 카슈미르 지역의 독특한 전통문화가 꽃을 피웠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언어학자로서 이 지역 현지인들의 언어를 조사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었다. 이곳의 이름은 라다크다.

호지는 라다크의 전통문화에서 서구사회에서는 볼 수 없던 인간애와 지속가능한 생활 양식을 발견했고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15년 뒤 상황이 바뀌었다. 잠무카슈미르는 영원한 앙숙인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분쟁지역이었다. 인도는 잠무카슈미르에서도 오지인 이 지역을 인도 본토와 긴밀히 통합할 전략적 필요성을 느꼈다. 이후 라다크에는 인도의 시장개방과 맞물려 외부 자본이 들어오게 되고, 고지대 농업과 목축에 의존하던 지역경제와 전통문화는 도시화된 생활과 관광업으로 영구적인 전환을 겪게 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책을 집필한다. 세계화로 지역의 전통이 파괴되고 사회가 갈수록 삭막해지는 지금,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라다크를 배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책의 이름은 바로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원제: Ancient Futures: Lessons from Ladakh for a Globalizing World)였다. 세상의 끝이라고 여겨지던 라다크는 그렇게 세계인들 사이에서 전례없는 유명세를 획득했다. 사라져가는 인류의 소중한 과거를 간직했던 장소로 말이다.

오래된 미래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전통사회로부터 배울 것은 분명 많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통사회에서의 삶은 혹독하고 거칠 수밖에 없다. 겨울이 되면 때때로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히말라야의 오지에서의 삶은 분명 지역공동체의 유대감을 발전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유대감을 얻기 위해 높은 영아사망률, 짧은 기대수명을 감수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라다크의 전통사회가 난방과 전기 등 산업사회 문명의 성취, 너무 자연스러워서 공기와 같이 느껴지는 마법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분명 더 폭력에 의해 죽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강력히 법을 집행할 중앙권력이 없는 사회는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나는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제목에만큼은 더없이 동의한다. 지금 라다크는 오래된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노르베리 호지가 생각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지만.

오래된 미래, ‘라다크’에서의 패싸움 

2017년 8월 15일, 인도 매체 더 프린트는 라다크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의 주인공은 각각 인도군과 중국군으로, 양측은 돌을 던지고 쇠몽둥이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그동안 라다크에서 이러한 종류의 충돌은 잦은 편이었다. 이유는 이 지역의 복잡한 영유권 문제에 있었다. 원래 라다크는 인도가 관할하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으로,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파키스탄과 분쟁을 겪고 있는 곳이다.

YouTube 동영상

한편 인도는 라다크 너머의 악사이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악사이친은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래로 중국에 귀속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라다크 양측의 중국군과 인도군은 관할권 문제를 놓고 사소한 다툼을 늘 겪어왔던 터였다. 하지만 이번 패싸움은 그 전과 비교했을 때 국제적으로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다. 인도의 동쪽 끝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대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6월에 부탄의 도카라 지역에서 중국이 건설하고 있던 도로였다. 이곳은 부탄과 인도의 시킴 주, 중국이 맞닿아 있는 요지다. 인도는 중국의 행보를 자국의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확실히 그럴 법 했다. 도카라를 거쳐 시킴을 지나면 실리구리 회랑이 나온다.

실리구리(Siliguri)는 네팔과 방글라데시 사이에 실같이 나있는, 폭이 20km 밖에 안 되는 좁은 회랑 지역이다. 지도를 보면 바로 느낌이 오겠지만, 이곳은 미얀마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통하는 동쪽의 아삼 지역과 인도의 본토를 이어주는 생명선이다. 만약 중국군이 도카라 도로를 통해 인도를 기습하여 실리구리 회랑을 틀어쥔다면 방글라데시 동쪽에서 인도의 영향력은 그대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도의 전략적 요충지 '실리구리'
인도의 전략적 요충지 ‘실리구리’

위기의식을 느낀 인도는 부탄의 요청이라는 명분 하에 도카라에 진입해 도로 건설 중단을 요구했다. 중국 측은 중국과 부탄 양자관계에 제3자인 인도가 개입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곧이어 국경 초소가 파괴되는 등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긴장은 중국과 인도의 국경지대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양국은 이제 수만 명의 군대와 전차, 전투기를 집결시키고 포격 훈련을 시작했다. 55년 전인 1962년에 있었던 중국-인도 국경 분쟁 이래로 전례가 없던 규모였다. 당시 라다크에서의 패싸움은 히말라야 반대편에서 진행되던 첨예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양국의 갈등이 진짜 무력 충돌로 번지지는 않았다. 중국은 당대회를 앞두고 있었고, 곧 푸젠성 샤먼에서 브릭스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다. 만약 정상회담 전에 군사적 긴장상태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불참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사태는 시진핑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줬을 것이고 그의 권력 공고화에도 나쁜 영향을 줬을 것이었다. 도카라가 분명 요충지긴 했지만 변경의 작은 도로를 두고 그 정도로까지 모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중국이 양보했고, 인도는 국경선 밖으로 철수하고 중국은 도로 건설을 중단하면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오래된 미래”에서 중화기가 동원된 혈전이 벌어지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패싸움은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익숙했던 과거로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라다크는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혹독한 비서구 전통 사회에 대한 낭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지간해서 인류가 그런 미래를 향해 갈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그것이 옳은 건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반면 거의 3세기만에 중국과 인도가 실질적인 강대국으로 국제무대에 복귀하고 있다는 사실은, 라다크가 보여주는 의심의 여지없는 오래된 미래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도광양회와 ‘신형 국제관계’ 사이에서 

지금까지 나는 덩샤오핑이 만들어놓은 여러 유산들이 어떻게 현대 중국을 변화시켰는지, 또 중국의 변화상이 덩샤오핑의 유산을 어떻게 바꾸어나갔는지 살펴보았다.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중국 공산당은 당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합목적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리고 공산당이 중국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늘 점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야하고 인민의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공산당은 경제 발전과 중화민족의 부흥과 같은 여러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정치적 안정을 위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경제발전은 놀랍도록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자 부패와 환경오염 등이 고개를 들었고, 기존의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을 부식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제 덩샤오핑의 유산은 중국에서 해결책의 일부였으나 점차 문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천량위 사건, 군부 이탈, 쓰촨 대지진, 멜라민 분유 파동, 원저우 고속철도와 보시라이 사태까지 위기가 차츰차츰 징후를 드러내자 중국 공산당은 여러 차례 대응에 나섰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덩샤오핑의 유산은 이제 빠른 속도로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이 지난 당대회 때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덩샤오핑의 유산,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도 이런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 중국은 도광양회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번 제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신형 국제관계’라는 용어를 들고 왔고, 그 이전 다보스 포럼에서는 중국이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책임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남중국해에서는 더 도전적으로 나오고 있으며, 일대일로 사업을 내세워 세계 각지에서 존재감을 점점 과시하고 있다.

마오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덩샤오핑(1976년 당시 모습)
덩샤오핑은 아직 중국이 서구 강대국과 맞서기엔 한참 멀었다고 판단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를 제창하며, ‘도광양회’를 백년 간 지속하라고 주문했다. (1976년 당시 모습)
이제 마오쩌둥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받은, 집단지도체제를 끝내고 1인 지도체제를 '시작'한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1953년생, 임기: 2012년 11월 ~ )
시진핑은 얼마 전 끝난 제19차 당대회에서 ‘신형 국제관계’를 언급하며 중국의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다. 이는 마치 덩샤오핑의 유훈인 ‘도광양회’를 폐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53년생, 임기: 2012년 11월 ~ )

많은 관찰자가 중국의 이런 공격적 행보를 보면서 의구심을 표했다. 왜 세계의 초강대국 미국에 편승하여 경제발전에 매진하는 기존 전략을 버리고 대결을 추구하는 것일까? 중국의 힘은 여전히 미국에 못 미치는데 너무 성급하게 도전하는 것 아닌가? 중국 지도부는 현명한 지도자 덩샤오핑의 유산을 이어받을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또 다른 설명은 중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함께 결부된다. 중국 경제는 점차 성장률이 떨어지고, 이는 사회적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하지만 사회적 불만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공산당이 용납할 수 없는 선택지다.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민족주의 선동을 하고 공격적인 외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은 잘 쳐줘야 반쪽짜리 설명이고, 중국의 복잡한 속내와 지도부 내부의 고민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물론 내부의 정치, 사회적 문제와 완전히 같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는 도광양회도 큰 틀에서는 덩샤오핑 체제가 변하면서 어쩔 수 없이 퇴장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도광양회로 형성해놓은 안정적인 대외 환경 덕택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중국의 성장은 그 자체로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문제들을 낳기 시작했다. 이 문제들은 기존의 도광양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고, 당 내부에서는 도광양회를 지속해야할지 아니면 다른 전략으로 갈아타야 할지를 두고 논쟁을 하며 갈팡질팡했다.

여기에 도광양회 전략에 충격을 주는 다른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끝내는 도광양회를 무대 뒤편으로 슬그머니 치우게 된 것이다. 결국,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시간의 실타래를 풀어가야 한다. 도광양회와 신형 국제관계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인가?

우선 도광양회가 최초로 도전 받았던 때로 돌아가보자.

너무나 상식적이었던 ‘도광양회’  

덩샤오핑이 죽기 1년 전 1996년. 골치 아픈 대만 해협에서 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만은 이제 막 민주화된 상태로, 장제스와 장징궈 부자의 오랜 독재 통치가 끝난 뒤 생기 넘치는 지도자인 리덩후이 총통이 집권 중인 상태였다. 리덩후이는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대만의 대외환경을 개선해보고자 노력했다.

리덩후이의 이런 야심은 중국이 상당히 위축된 상태라서 가능했다. 90년대 초의 중국은 여전히 천안문 사태로 타격받은 위신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남순강화와 이어지는 개혁파의 승리, 또 천안문에서 피를 묻히지 않은 지도자 장쩌민의 대두로 미·중관계는 그럭저럭 회복할 수 있었지만, 초기 밀월기는 이미 지나 있었던 것이다. 리덩후이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미국의 외교가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고 시도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미국에 입국부터 하는 것이었다. 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하나의 중국을 줄기차게 주장했기 때문에 대만 총통은 미국도 제대로 방문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은 미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 조건을 승낙했다. 그런데 대만 총통의 방미를 허용하면 비자를 발급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리덩후이 대만 총통은 비공식 방문이긴 하지만 1995년 6월 모교인 코넬 대학에 참석해 연설함으로써 미국과 외교가 단절된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대만 총통으로서 미국 땅을 밟았다.
리덩후이 대만 총통은 비공식 방문이긴 하지만 1995년 6월 모교인 코넬 대학에 참석해 연설함으로써 미국과 외교가 단절된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대만 총통으로서 미국 땅을 밟았다.

중국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덩후이는 미국 입국 허가를 받아내어 모교인 코넬대에서 연설하고 돌아온다(참조: 대만 이등휘 총통의 미국 방문 파장, 시사저널, 1995. 6. 15.). 중국은 당연하게도 격분했는데, 미국의 이런 행보에 어물쩍 넘어가면 대만이 아예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푸젠성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규모 미사일 훈련을 개시해 양국의 긴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중국의 군사도발에 대응하여 미국은 항공모함 전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미국의 항공모함은 특효약이었다. 중국은 아직 이 바다 위의 거대 요새와 그 호위대에 생채기조차 낼 무력을 갖추지 못한 터였다. 1991년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연합군에 의해 이라크 후세인의 군대가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하고 박살났을 때, 중국의 지도부도 미국의 압도적 무력을 똑똑히 보았다.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무력시위를 시작하자 중국 당국은 당초 문제를 없었던 일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만해협 양안의 긴장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은 미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광양회는 너무나 상식적인 판단으로 보였다.

미 항모의 무력시위는 중국을 작게 만들었다.
미 항모의 무력시위는 중국을 작게 만들었다.

떠오르는 민족주의

그러나 중국 상황은 분명 변하고 있었다. 같은 해, 쑹창이라는 기자가 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을 출간했다. 1989년 일본 경제 신화가 절정에 달해있을 때 출간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노리고 쓴 책이었다. 두 책은 모두 미국에 끌려다니지 말고 자국이 필요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에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얼마 안 있어 역사적인 홍콩 반환을 맞이하고 있었고, TV와 광장에서 매일매일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던 터였다. 대중적으로 민족주의 감정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의 저자들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든 미국의 말만을 좇는 ”미국 열병“이 중국을 휩쓸고 있다며 정신적 각성을 촉구했다.

당국은 이런 종류의 통제되지 않는 민족주의 열풍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도광양회 전략에 거스르는 내용을 주문하고 있었다. 안정적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대만해협 위기를 다시 만들어내라는 건 자살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당국이 이렇게 나약하게 나온다면 사람들은 불만의 화살을 당국 그 자신들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은 본디 미국인들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 나아가서는 중국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중국 인민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을 원했다.
중국 인민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을 원했다.

당국은 슬그머니 책을 판매대에서 내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곧이어 [중국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여전히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과 같은 유사 서적들이 계속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99년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나토군이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을 오폭하는 일이 있었다. 당국은 미국 측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사실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 비극적 실수를 잊어버리고 미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선을 하나라도 더 많이 출항시켜야 했다.

인터넷은 공산당 지도부의 소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확장된 인터넷 네트워크와 사적 생활에서 주어진 자유 덕분에 중국인들은 본격적으로 여론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여론, 이를테면 천안문 사태에 대한 여론은 사이버 세계에서도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수사를 공산당 선전부가 검열하는 건 굉장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 근거 자체가 민족주의에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청년들은 실제로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 것으로, 이전 선동가들의 저술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중국 정부는 국내의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미국과 서방에 고개를 숙이기는 힘들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광양회가 아직 버려질 때는 아니었다. 공산당이 인터넷 선동가들과 검열하기 까다로운 책들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아직은 말 그대로 까다로운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도광양회는 중국 경제 성장의 기둥과도 같은 기조였고 중국은 아직 덩샤오핑의 유산을 쉽사리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둥으로서 도광양회가 영원히 갈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이유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광양회라는 기둥 위에 놓인 중국 경제가 점점 커져 기둥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광양회는 대중 민족주의에 더해 다른 종류의 도전을 더 맞이해야만 했다.

역시 1996년, 장쩌민 주석은 아프리카 6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길에서 중국 기업인들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때 장쩌민이 중국 기업인들에게 한 말은 이후 중국의 해외 진출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바로 “저우추취(走出去)”였다.

자, 이제 밖으로 나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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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오래된 미래 

  1. ‘라다크’에서의 패싸움
  2. 헬싱키의 함정 
  3. 누가 인도양의 주인이 되는가
  4. 아베의 몸부림
  5. 힌두 민족주의가 삼킨 네루의 유산 
  6.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7. 한국, 자기부정과 과대망상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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