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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누가 인도양의 주인이 되는가‘에서 이어집니다. 

 

2014년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은 주최국 정상인 시진핑이 각국 정상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을 맺었다. 한 순간만 빼고 말이다. 바로 일본의 아베 신조와 악수할 때였다. 다른 지도자들과는 서로 미소를 지으며 편하게 사진을 찍은 반면 아베와 시진핑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악수”라고 이야기했다.

2014년 11월 10일, 어색한 표정의 아베와 더 어색한 표정의 시진핑 (출처: ⓒAP Photo, 김경훈)
2014년 11월 10일 베이징 APEC 정상회담에서 만난 아베와 시진핑. 어색한 표정의 아베와 더 어색한 표정의 시진핑 (출처: ⓒAP Photo, 김경훈)

이 악수 일화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경제대국 간에 흐르는 냉랭한 공기를 아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처음부터 이런 긴장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두 국가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전쟁을 치루긴 했어도, 또 그 과거사와 영토 문제를 두고 아직까지 으르렁대고 있긴 해도 말이다.

다시 만난 중국과 일본

중·일 전쟁과 그 이후의 공산화로 끊어졌던 양국 관계는 1970년대에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이 때만 해도 중·일 관계는 아주 좋았다. 이는 두 나라가 당시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의 위협에 맞서 마오쩌둥은 미국과 일본과 손을 잡고자 문을 열었다.

일본도 소련의 위협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전쟁의 상처를 딛고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다시 복귀하고자 했었기에 중국을 끌어안아야 했다. 곧이어 1973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은 두 나라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원유 공급선을 다변화할 필요성을 느낀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다칭유전의 석유를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덕택에 중국은 당장 급한 외화를 받아올 수 있었다.

마오쩌둥 사후,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중국은 일본의 제자를 자처했다. 덩샤오핑은 일본에 국빈 방문하여 중국 지도자 최초로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덩샤오핑의 방일은 여러 일화들을 남기면서 훈훈하게 끝났다. 아시아 최고 제철기업인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는 자신이 과거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중국에서 철광석을 수입했었던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덩샤오핑에 협력해주겠다고 했다.

덩샤오핑은 일본의 간판기업 중 하나인 마쓰시타 전기(현재 파나소닉)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만나 그를 “관리의 신”이라 추켜세우며 중국에도 전자공장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신칸센을 타본 덩샤오핑은 그 속도에 감탄하면서도 일본 같은 작은 나라보다는 중국 같은 큰 나라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기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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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고노스케(왼쪽)와 덩샤오핑(오른쪽)

지나간 옛시대

하지만 덩샤오핑이 은퇴하고 장쩌민이 중국을 넘겨받자, 양국의 밀월관계는 금새 끝나고 말았다. 양측을 묶어주던 공동의 안보 위협인 소련은 이제 사라졌다. 동시에 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일본의 절대적 우위는 중국의 가파른 부상과 일본의 침체로 점점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흐름은 덩샤오핑 시대인 1980년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80년대 일본의 경제는 불패신화를 거듭했고, 미국은 일본 성공의 비결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반면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이제야 막 발걸음을 뗀 것으로 보였고, 천안문의 학살로 나라가 얼어붙었을 땐 이후 전망마저도 불확실했다.

그러나 21세기 벽두가 되자 진짜 모습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일본의 불패신화는 버블에 기댄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1990년대 일본은 버블 붕괴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혼미함이라는 말은 90년대 일본과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과거 자민당 정치는 부패 스캔들로 몸살을 알았고, 숱한 단명 총리들이 연달아 집권하면서 잠깐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이 때 개혁이 잠깐 진행됐지만, 자민당-관료-게이레츠 중심의 철의 삼각형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 정치 리더십이 부재한 가운데 사회는 방향을 잃고 방황했다. 1995년에는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테러, 한신 대지진과 같은 재난들이 연달아 일어나 침체와 아노미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일본은 끝도 없이 추락했다.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사건 (1995)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사건 (1995)

반면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 잠깐의 경색기간을 거친 뒤 남순강화로 다시 날아올랐다. 두 나라 세력비의 변화는 곧 점진적인 관계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중·일 관계 개선의 주역이었던 덩샤오핑과 일본의 총리들인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가 모두 은퇴한 상황에서 후세대 정치인들은 과거에 크게 구애 받지 않았다.

그 대신 덩샤오핑의 후임인 장쩌민은 더 먼 과거에 많이 구애 받았다. 1997년에 중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난징의 강간]이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되며 새삼 중·일 전쟁 시기의 과거사들이 재조명 받기 시작했고, 중국 여론은 다시 끓고 있었다. 다음 해 장쩌민은 일본에 과거사 사죄를 요구해왔다. 적어도 한국에게 해준 사죄 표현을 중국에게도 똑같이 해주지 않는다면 중·일 공동선언에 서명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중국은 과거의 학살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일념을 담아 난징에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을 건립했다. 당연히 일본의 반응은 싸늘했다. 일본은 아직 중국을 후진적이고 가난한 나라로 여겨 무시하고 있었고, 여전히 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버블 붕괴의 여파로 일본이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어떤 나라도 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을 따라잡기엔 한참 멀었다. 과거사를 둘러싼 문제에서 구태여 중국의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난징(南京)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
난징(南京)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

떠오르는 중국, 발이 묶인 일본

2000년대가 되고 야심 넘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집권하게 되자 양국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기존의 자민당 정치문화를 바꾸고 총리실에 권한을 집중했으며 우정민영화로 대변되는 시장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 노선은 국가 경제에 대한 막강한 관리 권한을 갖고 있는 전통적 관료 기득권과 그에 연계된 자민당 파벌들의 이익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대신 고이즈미는 외교 정책에서는 기존 보수파와 발을 맞추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당연히 중국 정부와 대중 여론은 야스쿠니 참배에 격분했다. 중국은 계속 힘을 키우고, 일본은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와중에 양국 관계는 점점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2001년 전쟁범죄자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고이즈미
2001년 전쟁범죄자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고이즈미

2010년은 뒤바뀐 양국의 위치를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해였다. 고이즈미 시절 회복하는 듯한 일본 경제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중국 경제는 경제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성장을 거듭했다. 중국은 2007년에 이미 독일을 제쳐 세계 제3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마침내 2010년에는 GDP가 5조 달러를 돌파하면서, 중국은 1980년대 말 이래로 내내 부동의 2위를 차지하던 일본을 추월했다. 뒤집힌 GDP 순위는 국력 면에서 드디어 중국이 일본을 추월했다는 부동의 증거였다. 이제 아시아의 제1 강대국은 150년 만에 다시 중국의 몫이 되었다. 1990년 이래로 약 20년 간 동아시아의 물밑에서 진행되어온 변화는 이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동아시아 공동체”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런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2009년 자민당에게서 정권을 빼앗고 집권한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변화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맞춰 일본의 대외정책에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보기에 미국에 종속적인 외교노선은 더 자주적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오키나와 지역주민의 숙원이었던 후텐마 미군 기지의 이전을 변화의 시금석으로 삼고자 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저지른 대민범죄, 소음과 생활 상의 여러 불편, 재산권 침해 등으로 미군기지 문제는 항상 이 지역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하토야마는 후텐마 문제의 해결을 상징적인 이슈로 끌어올려 미국 의존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깔끔히 매듭지어 “동아시아 공동체”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해야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은 채 추모하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http://www.vop.co.kr/A00000922136.html
2015년 8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하토야마 총리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명예 퇴진한 바 있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그러나 하토야마와 그 뒤를 이은 간 나오토 총리의 대외정책은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결과는 재앙으로 끝났다. 미국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지지부진한 기지 이전에 불만을 갖고 항의시위에 나섰다. 일본의 전통적 보수파는 왜 구태여 문제를 들쑤셔서 미·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냐고 하토야마를 비판했다.

일본의 진보파는 하토야마 정부가 미국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실망했다. 민주당 정부는 양쪽에서 끼어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했고 하토야마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후텐마 기지 문제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중국과 분쟁 중인 작은 섬들에서 나왔다.

센카쿠 대지진

대만 섬과 오키나와 제도 사이에 위치한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釣魚島)는 중·일 양국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소재다. 센카쿠 열도는 무인도와 암초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인근 해역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원, 자국의 해군력을 투사하고 상대방의 해군전력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가치, 그리고 양국의 자존심 등이 얽혀서 단순한 무인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센카쿠

모든 영토 분쟁이 으레 그렇듯이 양국의 주장은 크게 엇갈린다. 중국은 명나라 시대 이래로 이 지역은 중국의 소유였으나 청일전쟁 때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은 그저 무주지를 선점한 것이라고 응수하고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센카쿠 열도를 계속 점유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면서 이 지역은 오키나와와 함께 미국 관할로 잠시 편입되었다. 이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현재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고, 중국과 대만은 일본은 센카쿠 열도(그들 입장에서는 댜오위다오)를 점유할 권리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중·일의 밀월기에는 센카쿠 열도라는 단어 자체가 크게 떠오를 일이 없었다. 덩샤오핑은 방일 당시 일본 측에 “이 문제는 후손들보고 해결하라고 합시다”라고 하며 센카쿠 열도 문제를 뒤로 잠시 미루어두었다. 양국의 국력이 위아래로 교차하고, 중국에서 대중 민족주의가 끓어오르는 순간이 되자 덩샤오핑의 말은 말 그대로 뒤로 미루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다. 센카쿠 열도 분쟁은 그야말로 폭발한 것이다.

2015년 5월 11일 일본 기자클럽이 덩샤오핑이 방일 당시 센카쿠와 관련한 덩샤오핑의 녹음 파일(1978년 10월 25일 기록된 약 1시간 6분 분량의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덩은 당시 부총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기자회견에서 "센카쿠 문제와 관련해 현상 유지하고 그 해결을 후세로 미루자"고 제안했다. 사진은 그 당시 기자회견 모습.(출처 :관차저왕; 觀察者網, 2015. 2. 12.)
2015년 5월 11일 일본 기자클럽이 덩샤오핑 방일 당시 센카쿠와 관련한 덩의 녹음 파일(1978년 10월 25일 기록된 약 1시간 6분 분량의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덩은 당시 부총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기자회견에서 “센카쿠 문제와 관련해 현상 유지하고 그 해결을 후세로 미루자”고 제안했다. 위 사진은 그 기자회견 당시의 모습.(출처 :관차저왕; 觀察者網, 2015. 2. 12.)

2010년 9월 7일, 센카쿠 열도 해상을 순찰하던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은 중국의 어선이 조업하는 현장을 발견했다. 이 해역이 일본 관할임을 밝힌 해상보안청은 당장 해역을 나가라고 경고했으나 중국 어선은 이를 무시하고 조업을 계속했다. 해상보안청은 공무집행 방해를 이유로 즉시 어선을 나포하여 오키나와 현의 이시가키 섬으로 연행하였다.

중국은 센카쿠 열도, 아니 댜오위다오가 정당한 중국의 영토이며 중국 어선은 이곳에서 조업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오히려 섬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었다. 섬을 실효 지배하는 일본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중국 측에서는 중국인 선장을 돌려보내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묵묵부답으로 나왔다. 중국은 주중 일본 대사를 무려 5번이나 소환하여 강한 항의를 했다.

양국 분위기가 격화되는 가운데 공산당에 불만을 가진 ‘분청(憤靑. 분노한 청년의 줄임말)’[footnote] 분청은 ‘분노한 청년’의 준말로, 극단적 애국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1990년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긍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은 주로 비꼬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조롱할 때는 분(憤; 분노할 분) 대신 발음이 같은 ‘똥 분'(糞)자를 쓰기도 한다.[/footnote]들은 자발적으로 시위와 가두행진을 조직하고 있었다.

비타민을 끊었을 때

마침내 2010년 9월 21일, 중국 정부는 일본에 희토류(希土類; rare earth) 수출을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첨단산업의 비타민”이라고 불리는 희토류를 일본은 절대적으로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희토류 공급이 중단된다면 일본의 유수의 전자기업들은 막대한 타격을 볼 것이었다. 희토류에 굴복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중국 선장을 석방하기로 했다. 중국은 자신들이 얻을 것을 얻었다며 만족할법도 했지만,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분쟁은 계속됐다.

"1992년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 는 말과 함께 희토류 산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 및 글 출처: 삼성물산 '상사인의 세상이야기', 희귀하지 않은 흙, 희토류에 대한 중국의 전략 중에서) http://blog.samsungcnt.com/136
“1992년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 는 말과 함께 희토류 산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 일부 및 글 출처: 삼성물산 ‘상사인의 세상이야기’, “희귀하지 않은 흙, 희토류에 대한 중국의 전략” 중에서)

하지만 대치 국면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10월에 중국 전역에서 자발적 반일시위가 조직되는 것에 모자라 일본기업 불매운동과 습격이 있었다. 후진타오는 화들짝 놀라 시위를 통제하고자 했으나 당국의 노력은 먹히지 않았다. 마침내 반일시위대 사이에서 “빈부격차 완화하라”, “부정부패 퇴치하라” 등의 공산당 비판 문구까지 등장하자 이 긴장 국면에서 더 이상 재미를 보기 힘들어졌음이 드러났다. 중국은 다시 대중 민족주의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보다 훨씬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일본은 이제 중국이 단순히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가 아니며, 일본에 실질적 위협을 줄 수 있는 강대국이라는 것을 굴욕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미국과 맞서고 아시아 국가들에 손을 내민 민주당 정부의 미숙함도 깨달았다. 민주당 정부는 실제로 미숙하긴 했지만 억울한 면도 있었다. 운도 그들을 따라주지 않았다. 2011년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이어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민주당 책임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진과 원전 사고에 민주당의 대처는 어쨌든 갈팡질팡이었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본인들의 신뢰는 그렇게 사라졌다. 결국, 2012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민주당 정부는 짧은 정권교체 기간을 뒤로 하고 다시 정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아베와 헌법 문제

2007년에 허무하게 무너졌던 아베 신조 총리가 이번엔 제2차 아베 내각으로 돌아왔다. 아베 총리는 과거 민주당이 벌여놓은 실수를 바로잡겠다는 듯 공세적인 외교를 펼쳤다. 주변국의 반발을 아랑곳하지 않고 야스쿠니 참배를 재개했으며, 미국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아베의 가장 중대한 목표는 ‘평화헌법’의 개정이었다. 전후 일본 헌법이 평화헌법으로 불리게 된 데는 미국의 공이 컸다. 향후 일본이 다시 미국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은 독자적 군대를 가질 수 없고 국제문제의 해결로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불허된다는 조항을 넣은 것이다.

이는 현재 일본 헌법 제9조로 명문화돼 있고, 일본 보수파에게 눈엣가시로 남아있다. 보수파가 보기에 애초에 이 조항은 일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물린 재갈에 불과했다. 만약 계속 독자적 군대를 가질 수 없다면 일본은 불구로 남을 것이었다.

자위대
자위대

그렇지만 일본이 굉장히 보수적인 국가였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헌법에 대한 보수파의 시각은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 전후 일본인 상당수는 평화의 상징으로서 헌법 제9조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헌법은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실수와 만행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아니면 일부 사람들(혹은 대부분)에게는 그저 이제는 더이상 바깥의 일에 얽히기 싫은 피로감을 반영했다

그 의도가 어쨌든 평화헌법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호헌세력을 형성했고 개헌을 저지해왔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고 탈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결정적으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이 변동하게 되자 개헌론자의 주장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사막의 폭풍

걸프 전쟁은 전환점이었다. 199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미국은 다국적 연합군을 조직해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후세인의 군대를 철저히 박살냈다. 사실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 연합군이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은 후세인의 이라크군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능력이 있었다. 1990년의 1차 이라크 전쟁은 2003년에 실패한 2차 이라크 전쟁과 같지 않았고, 미군은 지역을 점령하고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이라크군을 분쇄해버리면 끝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폭풍 작전 중 불타는 유정을 배경으로 편대비행하는 미 공군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6A, F-15E 와 F-15C
사막의 폭풍 작전 중 불타는 유정을 배경으로 편대비행하는 미 공군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6A, F-15E 와 F-15C

그럼에도 미국이 다국적군을 굳이 조직한 이유는 탈냉전을 맞이하여 새롭게 정의될 미국의 역할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이 사라진 세계에서 초강대국으로서 리더십을 보여줘야 했고,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는 자세도 보여주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냉전 이후에 스스로가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질문은 이랬다:

“탈냉전 시대의 안보 환경에서 일본은 국제 사회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가?”

이제 일본에서도 걸프 전쟁은 단순히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의 의미를 넘어섰다. 탈냉전 시대 일본이 맡을 마땅한 역할을 평가할 첫 시험대로 등장했던 것이다. 자민당 보수파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파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병 시도는 결국 평화헌법에 가로막혔다. 호헌파에 따르면 일본은 더이상 해외에서 군사활동을 벌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태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많은 일본인이 화들짝 놀랐다. 사실 평화헌법을 쥐어준 것이 바로 그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신 걸프 전쟁에 사용된 막대한 전비를 상당수 부담하게 되었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일본을 두고 국제적 문제에 나서서 책임질 역량이 없고, 대신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하는 속물 국가라고 비웃었다(아마 어디서 많이 본 비웃음일 것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처럼 아베가 평화헌법에 배치된다는 비판도 불사하면서 안보법을 개정하고, 또 최종적으로는 그 평화헌법마저도 개헌하려는 데는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이나 ‘침략 야욕’과는 전혀 다른 동기가 있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경제대국이자 해양 강국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던 시대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일본은 자국보다 더 강력해진 중국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것인지 아니면 주먹을 꽉 쥐고 경계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또, 미국의 충성스러운 파트너로서, 그 국력에 어울리지 않기에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종속적인 위치를 어떻게 바꿔나갈지 고민했다. 미국과 소련의 극한대립이라는 냉전시대의 환경에서는 그런 종속적 태도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탈냉전, 다자주의 시대에도 미국의 번견 역할을 고수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져갔다.

민주당 내각은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모습을 보이고 ‘근린제국’에 악수를 청하면서 변화를 꾀했다. 민주당은 일본을 진정한 의미에서 ‘정상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역내에서 국력에 걸맞는 책임을 지며 지역 협력과 공동 번영을 주도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국가였다. 하지만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는 미국과 중국 양쪽에서 동시에 불신을 샀고, 민주당 특유의 미숙한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국내의 반응은 싸늘했다. 야심찬 동아시아 공동체 비전의 결과는 처참했다.

아베는 민주당의 비전을 뒤집었다. 일본은 중국의 위협에 맞서 미국과 더 가깝게 밀착해야 했다. 헌법을 바꿔 군사적인 자율성을 획득하면 국력에 걸맞는 존재감도 더 쉽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일본은 ‘정상국가’가 될 수 있었다.

아베 신조
아베 신조

민주당이 생각하는 정상국가와는 많이 다른 형태긴 하지만, 그것은 아베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베가 보기에 일본이 손을 먼저 내밀기에는 중국은 너무 위험한 존재였다. 한때 민주당을 이어 받은 민주진보당의 대표였고, 이후 고이케 유리코의 희망의 당으로 들어간 마에하라 세이지도 디테일은 달랐지만, 기본 입장은 비슷했다.

중국의 위협에 맞서 일본은 군사적 대비를 해야 했고, 헌법 개정은 그 시작이 될 터였다. 다만 마에하라는 한국과 같은 국가들을 공동전선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반면 아베는 ‘특정 주변국’의 반발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부활인가 쇠락을 뒤집기 위한 몸부림인가

요컨대 아베의 개헌 시도와 재무장 시도는 한국 진보파 일각에서 우려하는 ‘전쟁 가능한 국가’,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우려는 과거 일본의 국력이 상승일로에 있어 해외로 세력을 확장할 때 당한 피해로 인해 생긴 것이다.

그러나 2017년, 일본의 국력은 성장하고 있지 않고, 세력은 축소되면 축소되고 있지 확장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의 일본은 설령 헌법을 바꾸고 재무장을 한다고 해도 한국 하나도 제대로 위협하기 힘들 것이다. 현재 일본을 둘러싼 안보 논의에 반영되고 있는 것은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상대적 퇴조에 따른 위기의식이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과거 일본의 위협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중국이 더 가까우면 가깝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는, 아무리 잘 봐주어도 부활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일본만으로 지금 중국의 기세에 대항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설령 중국의 기세가 꺾여도 일본만으로는 가망이 없다. 이미 중국의 GDP는 일본의 2배가 넘는다. 일본은 그래서 더더욱 오바마의 아시아 귀환 정책에 희망을 걸었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은 TPP의 철회로 이어져 아베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제 중국과 미국을 향한 아베의 대외정책은 양쪽에서 위협받고 있다. 중국의 위협은 2010년 이래로 상수였고, 그 국력은 계속 성장 중이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미국의 철수는 유사시에 실현 가능한 변수로 다가오고 있다. 사면초가나 다름 없었다. 2009년부터 2011년 사이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기에, 민주당식 해결책은 적어도 당분간 가능한 대안은 아니었다.

중국은 미국에 얻어낼 게 아직은 훨씬 더 많다.
아베의 대외정책은 중국과 미국, 양쪽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게 있어서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중국에 맞서 시소의 균형을 맞춰 줄 새로운 협력자를,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아시아 본토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조건은 이미 위에서 제시했다. 중국과 대항해서도 꿀리지 않는 덩치가 있는 나라, 인도양에서의 해상활동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나라, 민주주의라는 면에서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나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역적 차원에서의 야심이 확실히 있는 나라, 인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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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누가 인도양의 주인이 되는가
  4. 아베의 몸부림
  5. 힌두 민족주의가 삼킨 네루의 유산 
  6.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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