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아주 친했던 어떤 친구가 있었다. 항상 내 의사를 존중하고 내 선택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친구였다. 함께 여학교를 다니던 어떤 시간 속에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이 친구 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단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친구였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말하는 문장은 대부분 의문문이었다. 또는 수락하는 말들이었다.
뭐 먹을래?
그럴까?
뭐가 좋겠어?…그래 그러자.
난 상관 없어.
알았어…
그 친구의 언어에 제안, 거절, 협상, 조정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나의 의사를 묻거나 내 의사에 긍정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앞에서만 내 의견을 물었고, 본인이 한 말도, 내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걸 깨닫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그게 편해서 그랬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나쁜 사람? 거절하면 나쁘다고 누가 그랬지? 그 친구가 맞추려 애쓰는 착함의 기준은 나와 상관 없는 본인의 상상이었다. 나중엔 내가 누구와 친한 건지도 혼란스러웠고, 우리가 정말 친한 건지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했던 모든 기억들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와의 우정이라는 것이 정말 그 친구의 내면에 있기는 할까? 악한 의도를 따지기 힘든 많은 거짓말과 감춰진 진실들이 드러나고, 본인이 자기 입으로 한 말을 스스로 기억 못하는 지경까지 갔을 때도 난 그 친구와의 우정을 끊고 싶지 않았었다.
수없이 많은 약속이 잊혀지고, 조롱하듯 같은 일이 반복되는데도 난 그 관계를 지속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우정에 중독되다
그 친구에겐 힘들었던 가정 환경이라는 것이 있었고, 우리 둘 사이에서 내가 겪은 ‘힘든 일’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일’로 취급됐다. 그 친구는 오랜 과거 속의 상처를 자꾸만 나에게 인식하게 했다. 난 그 친구가 정한 규칙 속에서 늘 ‘강자’였고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가족의 원조를 받는 것도, 학벌이 좋은 것도, 돈을 많이 받는 안정된 직장에 있는 것도 모두 그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언제나, 정말로 언제나 내게 와서 앓는 소리를 했다. 세상 모든 짐을 다 진 표정으로… 난 점점 지쳤고, 친구는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우린 서로를 굳건히 믿으려 했다.
혼자 서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관계는 약간의 위험을 전제한다. 익숙해진 순간 유지하고 싶어지고, 관계 유지의 욕구는 비싼 값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강자와 약자가 있을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까. 관계를 지속하지 말아야 겠다는 결정한 순간. 갑자기 내가 디딘 땅이 흔들린다.
나쁜 건지 아는데도 그 영향에 익숙해지는 것… 중독.
그 중독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상처의 책임
우린 무엇을 기반으로 이 멋진 성을 쌓은 거지? 네가 나에게 건낸 건축 재료들이 정말 건축 자재인 건 맞나? 기껏 다 지어놓고서야 그걸 궁금해 하다니… 내가 믿어줌으로써 저쪽은 너무 많은 거짓의 기회를 제공 받았다. 좀 더 일찍 내가 의문을 제기했다면 나았을까. 반석 같던 바닥은 바삭거리는 모래였다.
난 분명히 상처받았는데 상처입힌 것같은 이 찝찝함은 뭐지?
상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깨지는 경우, 배신감을 느끼게 한 존재의 무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한 사람의 배신이 세상 전체의 배신으로 느껴지고 앞으로 올 모든 시간과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배신을 한 그 대상에 대한 신뢰를 분노로 바꾸고 그 분노는 대부분 정당화된다. 상대가 욕을 먹을 합리적인 근거가 많을 수록 이 작업은 반복 확장되기 쉽다.
내 경우 역시 그랬다. 이 친구가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랬고, 그 외에도 때로는 어떤 개인에 대해 때로는 어떤 조직에 대해…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똑같은 배신감을 느끼는 상황을 겪으면서, 내가 그들의 믿음에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난 누군가를 그토록 믿었을까.
왜 그들은 나를 그토록 믿었을까.
도대체 왜 저들은 나를 믿으며 무슨 권리로 내가 어떠해야 한다고 결정했으며 어떤 근거로 그것을 강요하는가. 그들은 나를 알고 믿는 것인가. 믿고 싶은 것인가. 나는 믿음을 강요한 적이 없는데 왜 나는 그들을 배신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
난 그들의 믿음이, 믿음이 아닌 기대와 투사라는 심리적 폭력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나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규정하고 신뢰하고 그것을 통보하고 나중엔 평가했다. 그러니까 결국 나역시 오랜 시간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향해 그래왔던 것이다.
내 친구는 내가 의심 없이 믿는 바람에 그 믿음에 부응하느라 수도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 친구에겐 내가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해 넘겨짚고, 상상해서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수없이 말했지만,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달라고 수도 없이 말했지만, 지금 나에게 다시 묻는다.
정말… 그래도 그 친구를 좋아했을까?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믿음인지 사랑인지 방어인지 기만인지 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꾸만 묻게 된다.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그 믿음이 생긴건 아닌지…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워 ‘믿음’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내가 아닌 타인의 노력과 헌신이라면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믿음과 신뢰는 폭력이고 자기기만이다.
솔직한 모습을 보이고 선택권을 줬다면 그토록 열심히 모래 위에 집을 짓진 않았을 텐데… 난 여전히 거짓말을 버리지 못한 그 친구가 원망스럽지만 솔직한 모습의 그 친구의 모습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 내가 이해한 믿음이 아니었음을 이제서야 고백한다.
‘그 친구는 내 믿음 때문에 나를 속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어떤 시기를 거친 사람들은 ‘존재의 가벼움’을 갈망한다. 그것이 그들의 진중함을 증명한다.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들 모두가 얼마나 순진했던가, 모두가! 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믿었는데 그러기는커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련 경찰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 밀란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우리는 믿을 만한지 아닌지 점검해 보는 것을 귀찮아 한다. 그냥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거기에 책임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더해져서 결정자를 갈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미래가 되어 찾아올 지 생각하지 않는다. ‘결정자’를 믿고 순종함으로써 회피와 원망의 비상구를 마련하는 삶을 ‘믿음의 여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비겁하다.
믿음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믿음은 낯설어져야 한다.
왜 믿는지 모르는 믿음은 책임 전가다.
거짓말을 멈출 때
교실을 둘러보면 많은 ‘학생’들이 머릿속에 뉴런이 하나도 없는 로보트처럼 앉아있다가 뭔가를 경건하고 성실하게 받아적는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 세상 모두가 그랬고 그들 자신도 공범이다. 누군가 나의 미래를 나의 취향을 나의 사랑을 결정해 주기를 바라며 그 누군가는 완벽한 결정을 하는 흠없고 순전한 책임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이런 유치한 종교가 어디있단 말인가.
‘관계’가 무거움을 거쳐 가벼워지기를, 그래서 내가 무엇을 묻건 그에 대한 답을 할 때 ‘끝장’까지 염두에 두지 않기를… 너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할 때 그것이 그것으로 온전한 무게로만 전달되기를… ‘정답’을 고려한 나로서 나를 재단하지 않기를…
우정이니 사랑이니 가족이니… 듣기론 대단하다 들었고 믿기론 종교처럼 믿었으나 대부분의 시간에 그 믿음에 배신 당하고 상처받고 눌려 숨도 못 쉬고 가진 것 마져 놓쳐버린다. ‘믿음’의 욕구를 벗어던지고 ‘결정자’를 향한 손쉬운 순종도 버리고 이미 결정된 선함과 이미 합의한 옳음도 잊고 그것을 ‘학습당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무거운 ‘믿음을 위한 거짓말’은 멈출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