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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각운은 맞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금 청와대를 중심으로 이 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너무나 초현실적이긴 해도 각운을 맞추는 일들은 그래도 있다.

역사의 각운: 유라시아 대륙의 양편에서

1882년, 임오군란으로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당시 조선 황후 민자영은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고 지칭하는 한 무당 여인의 점을 보게 된다. 그 무당은 구체적인 날짜까지도 말해가며 황후가 환궁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고, 정확히 그 날에 환궁한다. 그리고 그 무당은 이후 궁에 합류하게 되어 진령군이라 칭해진다.

고종과 황후는 무당의 점에 휘둘려 국고를 탕진했으며 진령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되어 자신에 대한 비판의 상소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최태민과 그 뒤를 이은 최순실이 실세로 박근혜 대통령을 좌지우지한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과 어느 정도 각운은 맞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884년의 고종.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고종 최초의 사진.
1884년의 고종.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고종 최초의 사진.

그리고 맞춰볼 각운은 하나 더 있다. 그때는 진령군이 몰락하는 1894년, 그리고 장소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 황궁이었다. 니콜라이 로마노프는 두려워했다. 자신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예상보다 빨리 죽어 그가 나라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이는 확실하게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올랜도 파이지스라는 러시아사에 정통한 학자는 러시아의 차르 대신 영국의 왕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사람이라고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국정운영에 관한 어떠한 훈련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였다. 행정도, 군사도, 경제도, 외교도 모든 것이 그에게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그는 겨우 26세의 나이로 전 세계 육지의 6분의 1, 그것도 로마노프 왕조의 봉건적 질서와 더는 공존할 수 없는 사회적 변동과 급진적 요구들이 물밑에서 끓어오르는 대국을 맡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이 사람이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다.

“산드로의 남편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footnote]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의 남편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footnote], 내가 무얼 해야겠소? 나와 자네와 러시아의 모든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차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 결코, 차르가 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나는 통치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대신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네.”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75쪽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1911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1911년)

니콜라이 2세는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하고 차르가 되었다. 그는 제국이 마주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감도 없었다. 농촌의 빈곤, 불평등한 토지소유구조, 공업화와 노동계급의 소요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으며 공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전제정이 중요하다는 막연한 인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집도 세고 완고했기에 자신의 안위에 어떠한 해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비테 백작과 스톨리핀과 같은 걸출하고 유능한 인물이 나라를 잠시 맡아 이끌었지만, 그뿐이었다. 니콜라이는 차르 체제를 위협하는 어떤 변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러시아 제국은 그 상태로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을 맞이한 러시아 제국은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가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시에는 빵이 없었고 농촌에는 청년들이 빠져나갔다. 외국의 군사적 위협은 목전까지 들이닥쳤다. 니콜라이에게 이 모든 것들은 생각하기 싫은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직접 군을 지휘하겠다고 나섰지만, 상황은 계속 나빠만 졌다. 그리고 그사이에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제정 러시아를 파멸로 이끈 라스푸틴(1916년)
제정 러시아를 파멸로 이끈 라스푸틴(1916년)

어떤 괴승이 독일인 황후를 꼬드겨 나라 전체를 농단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 괴승의 이름은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그리고리 라스푸틴이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우리의 친구”라고 라스푸틴을 불렀다.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안정시켜줄 때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라스푸틴은 황후를 통해서 황제까지 장악하고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인사권을 쥐락펴락했다. 그 사이에도 제국 황실에 대한 신뢰, 러시아라는 국가에 대한 신뢰는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무당이자 목사, 자신을 미륵이라고 불렀으며 무소불위 독재자의 딸을 휘어잡아 엄청난 재산을 축재했다는 괴승. 최태민을 보면서 누구나 라스푸틴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뉴욕타임스도 이를 언급했다. 그리고 나는 궁금해진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우리는 최태민을 보면서 라스푸틴을 떠올린다. 그러나 진짜 각운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살펴봐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니콜라이 로마노프를 보아야만 한다. 이번에는 때는 2016년, 장소는 한국이다.

승려이자 목사이며 영생교를 창시한 최태민(1912년 ~ 1994년). 그의 '유산'은 최순실에게 이어진다.
승려이자 목사이며 영세교를 창시한 최태민(1912년 ~ 1994년). 그의 ‘유산’은 최순실에게 이어진다.

세상이 뒤집히다

우리는 가끔 전혀 이해도 할 수 없고, 감도 안 잡히는 문제와 맞닥뜨리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기존의 사고를 더욱 열심히 강화해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문제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지금 하던 사고방식의 구멍을 찾아내고 정보를 더 수집하고 논리적 연결고리를 더 탄탄하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 가지 일들은 그런 식으로 어쨌거나 이해할만한 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금의 설명 방식에 점차 부합하지 않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임계점을 넘어갈 때, 불현듯 그간의 모든 시도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사고의 방향성이 트인다.

그렇게 접근법을 바꾸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쉽게 설명된다. 그간의 미스터리들에 너덜너덜해졌던 논리적 연결고리가 다시 급속하게 짜 맞춰지기 시작한다. 과학혁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이번 박근혜 정권에서 잘 느끼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문제를 바라보는 접근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JTBC 보도로 최순실 게이트가 '의혹'이 아닌 '사실'로 확인되자 국민에게 사과하는 박근혜 대통령.
JTBC 보도로 최순실 게이트가 ‘의혹’이 아닌 ‘사실’로 확인되자 국민에게 사과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수많은 대외적·대내적 정책들이 수행되었다. 다른 모든 정권에서 그러했듯,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 역시 국민에게, 학자에게, 실무가에게 때로는 긍정적 평을, 때로는 부정적 평을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 대부분은 주로 복잡한 사회과학적 접근을 요구했다. 요컨대 여당이나 야당의 정치적 성향, 정부 각료들의 출신이나 사상, 또는 김정은 집권이나 중국의 부상, 특히 북핵 문제로 대표되는 대외환경의 변화 또는 2016년 초에 치러졌던 총선 결과로 상징되는 국민 정치의식의 변화 등을 토대로 박근혜 정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며 그 설명들로 국민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접근법은 엄밀한 의미의 사회과학적 접근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제 정책들에 대해서 간명한 설명은 이제 박근혜 개인의 심리분석을 통해서 가능해졌다. 과거를 돌아보면 그런 낌새들이 많았다. 박근혜는 야당 시절부터 계속해서 마치 자기 의지가 없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박근혜는 다른 정치가들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과 같은 역대 대통령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김무성이나 이정현, 문재인과 같은 동시대의 동료 의원들과도 다른 행태를 보인 것이다.

박근혜는 과연 누구였는가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치인들은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많으며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퍼뜨리려는 성향이 있다. 그들은 사회에 특정한 가치를 구현하고 구성원들에게서 그 합의를 얻어내고자 한다.

대통령 시절의 김영삼김영삼은 3당 야합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신한국당을 혁신하여 기존의 5공화국 세력을 몰아냈다. 평가를 어찌하건 간에 정부 이름에서부터 김영삼 개인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하였고 하나회를 없애며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는 등, 기존의 군부세력과 선을 긋고 자신만의 정치를 이끌어나갔다.

이는 김대중과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은 자신의 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일컬었고, 친미적인 행보를 보이며 IMF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대북정책에도 큰 변화를 주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스스로 평양 방문이라는 위험까지도 감수했다. 노무현 역시 이는 마찬가지다. 시민사회의 본격적인 대두에 걸맞게 그는 자신의 정부를 참여정부라 일컬으며 기존 민주당을 무너뜨리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아가 참여정부는 한미FTA를 체결하고, 로스쿨을 만들었으며, 한미동맹의 틀을 넘어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우는 등 역시 자신만의 국정철학을 완수해나갔다.

김대중 노무현

개별적인 평가는 별론으로 하고 이처럼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부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만의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라는 명칭은 이들이 근본적으로 신념형 정치가였음을 반영한다. 이에 비하면 이명박, 김무성, 문재인과 같은 정치인들은 비록 자신의 철학을 이전 지도자들보다 간명하게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정치인의 기본 역학에는 충실하다. 그들 역시 정치가로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 의견을 표출하며 동의를 구하고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SNS를 하는 것은 그것이 국민과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를 드러내고 국민에게 자신의 올바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근혜는 전혀 다르다. 박근혜는 자신의 철학을 나타내는 것에도, 자아를 표출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친이계와 친박계의 형성과정을 보자. 이명박은 대선 행보에 관심을 가졌을 때, 서울시장으로 활동하면서 쌓은 업적을 정신없이 홍보하고 자서전까지 내면서 자신이 왜 대통령에 적합한지를 열심히 타인에게 설득했다. 이명박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조차 없었다. 친이계는 그런 이명박의 활동을 통해 형성되었다.

Gobierno de Chile, CC BY 2.0 https://flic.kr/p/8TDij7
Gobierno de Chile, CC BY 2.0

그런데 이에 비해 친박계는 어떤가? 친박연대의 형성은 박근혜가 어떤 행동을 취함으로써 가능했던 게 아니다. 친박계는 오히려 그 반대의 과정을 거쳤다. 사람들이 박근혜의 행보를 보고 박근혜 주위에 결집한 것이 아니었다. 되려 박근혜가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당에서 탈당하였음에도 그냥 그의 정치적 가치를 본 타인들이 그를 일종의 마스코트처럼 떠받듦으로써 정치인 박근혜가 만들어졌다.

이 같은 박근혜식 전법(?)은 이전부터도 계속된 것이었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의 행적은 언제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정견을 정면으로 이야기하기를 회피했다. 그는 언제나 실무에서 유리된 것 같았다. 박근혜는 15대부터 19대까지 무려 5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그러나 그동안 그가 대표발의한 법안은 15개에 불과했다. 1년에 1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SNS의 이용조차도 그러했다. 문재인이나 다른 정치인이 SNS로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동안, 박근혜는 SNS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다른 정치인들도 SNS를 직접 관리하기보다 보좌관 등을 통해 관리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 때에도 일단은 자신이 직접 대중과의 소통에 임하는 형식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반해 박근혜의 SNS는 탈인격적인 모습을 보이며 마치 기업이나 정부부서의 홍보용 페이지처럼 운영된다. 박근혜는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하 作
이하 作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박근혜가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한다고도 말했다. 이 무위적 행동을 일컬어 ‘전략’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실패가 없었다. 다른 정치인들이 정책을 내놓고, 엄격한 국민의 평가와 반대 정당의 공격으로 이미지를 깎여나가는 동안, 실패하지 않는 박근혜에 대한 대중의 평가와 당의 기대치는 갈수록 높아졌다.

박근혜는 참여정부 동안 여의도에서 사실상 국가의 제2인자 자리를 차고앉았다. 그가 한 일은 참여정부에 대한 공격뿐이었고 스스로 무엇을 내놓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그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비록 17대 대선 중 당 내부 경선에서의 패배가 있었지만, 그러나 박근혜의 신비주의적 행동의 결과는 곧 나타났다. 18대 대선에서 다른 정치세력들이 대부분 이전의 약점에 발목이 잡혀 파탄에 빠짐에 따라 박근혜가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adsense]처음에는 좋아 보였다. 물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에 크게 실망한 사람도 있었지만, 박근혜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은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게 되었다. 박근혜는 대통령이면서도 뭔가 대통령이 아닌 것만 같았다. 정부가 실패할 때 역대 대통령들은 국민 앞에 사과하고 이를 바로잡겠다고 하였다.

민주화 이래의 역대 정부는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불만이 강해지면 대통령이 나서 최소한의 해명하거나 사과하는 등의 어떤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박근혜만큼은 달랐다. 그는 청와대 안에서 침묵하거나, 해외순방을 떠나거나, 간간이 말을 꺼낼 때도 제3자의 위치에 서서 평론하듯 할 뿐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왜 정책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왜 마치 정부의 실책을 남의 일 말하듯이 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왜 항상 붕 떠 있는 것만 같은가.

전술하였듯 많은 사람이 각종 정치적 이유를 말하였다. 누군가는 그가 결국은 박정희의 딸이라 유신정권의 전제적 국정운영에 영향을 받아 국민과의 소통이 미진한 것이 아니겠냐고 하였다. 또 누군가는 그가  권위주의적인 우파 출신이라 그렇다고 하였고, 또 누군가는 박근혜 정권이 친기업 반서민적 성향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가장 강경한 비판자들은 박근혜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뿐더러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아 반민주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서 그렇다고까지 하였다.

2014년 9월 16일 제40회 국무회의 모습 (출처: 청와대) http://www1.president.go.kr/news/media/photo.php?srh%5Bpage%5D=74&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7260
2014년 9월 16일 제40회 국무회의 모습 (출처: 청와대)

그러나 이전의 그의 행보를 보면 답은 간단하다. 박근혜는 대통령 이전에, 아예 정치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근혜는 국정철학이 없다. 신념도 없다. 나아가 정치인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 자체가 없다. 이를테면 김무성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가 다른 누군가, 이를테면 자신과 협력을 해나갈 동맹이나 측근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상식이다.

하지만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까지 가만히 용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명박은 친이계를 만들었고, 노무현도 고건 전 총리를 견제했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의 발목을 잡아가면서까지 대통령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반대다. 오히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돌보고 자기 대신 권력을 행사해주길 바란다. 박근혜는 정윤회나 최순실을 견제하지 않는다. 그는 이전부터 자신을 돌봐온 비선실세들에게 의지한다. 박근혜는 권력을 쥐여주어도 그다지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의 정치적 행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5선 의원으로 재직하는 약 20년의 기간 동안 박근혜가 국회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신비주의 전략 따위가 아니었다. 전략의 부재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정말로 수많은 정치적 이슈를 다루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사건 당시 유족들이 그에게 빌며 절을 했을 때, 박근혜가 보인 가장 첫 반응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하다못해 연출된 종류의 참담함이나 죄책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불쾌함과 당혹스러움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박근혜는 ‘대체 나에게 왜?’라고 되묻고 싶었을 것이다.

2014년 4월 2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세월호 사건'에 관해 '공무원 퇴출' 발언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2014년 4월 2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세월호 사건’에 관해 ‘공무원 퇴출’ 발언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자신이 최고 책임자인데도 마치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다는 듯 발언하는 소위 ‘유체이탈’ 발언의 한 사례.

당시의 정부대응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은 세월호 사건 당시 사라진 7시간에 대해서 물었다. 한시가 급한 그 시각, 박근혜는 대체 무엇을 했는가? 정부의 개입이 시급한 그때 청와대는 왜 침묵했는가?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응답은 없었다. 다른 정권들이라면 변명을 했을 것이지만 박근혜 정권은 침묵을 택했다. 세월호는 그냥 박근혜 개인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었을 뿐이다. 여타 정치적 이슈에 대한 태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는 어떤 이슈가 발생했을 때,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태안 유조선 사고 당시 노무현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는지를 살펴본다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것이다. 박근혜는 세상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백치란 말인가? 그렇진 않다. 박근혜도 사람이고, 그 역시 일반인들이 그렇듯 자신의 관심사는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정권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들이 어디에 권력을 행사하는지를 보면 된다. 박근혜 정권은, 박근혜 개인과 그를 감싼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박근혜 본인이 직접 나서서 관심을 보이는 사안들을 보라.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공격, 정윤회 게이트나 최순실 게이트, 김기춘과 같은 비선실세 공격에 대해서만큼은 정권이 가장 치졸한 수단을 써 가면서까지 권력을 행사한다. 언론사를 직접 압박하는 행위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결국, 이번에 박근혜가 행한 명목상 사과라는 그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피해, 이익집단의 조직적 항의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분쇄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던 사람이 갑자기 저자세로 나와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사과를 했다. 이로써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박근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안위이다. 박근혜는 세상의 공격이 두려운 것이다. 자신과 자신을 감싼 방패에 대해서만 그가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박근혜 정권이 언론이나 국회, 기타 국민 여론을 대할 때 보이는 태도는 권력자로서의 자신감과 오만함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받는 공격에 대해 지나치게 방어적이다 보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마치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함을 보이는 것만 같다.

9월 26일 공약 불이행을 사과하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 청와대 사이트 관련 자료 합성)
9월 26일 공약 불이행을 사과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사이트 관련 자료 합성)

이제 미래에 사태가 수습되었을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들이 될 것이다. 박근혜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 정권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결정적으로, 박근혜의 성장 과정은 어떠했으며 그 인격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직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질문들에 대답해 나갈수록 그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보다는 그 반대를 선호한다는 것은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결국, 박근혜는 능력의 유무 이전에, 통치의 의지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질문을, 그리고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박근혜가 권력욕도 없고, 정치신념도 없다면, 그렇다면 그는 왜 국회의원으로 살았으며 왜 당 대표까지 하였는가. 그는 왜 정치를 했으며 마침내 한국 정계의 정점인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는가.

최순실 게이트로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박근혜는 자신의 권력욕이 아니라, 그를 통해 권력과 부를 얻고 싶어 한 사람들에 의해 정치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 박근혜 정권이 보인 행보들을 잘 살펴보라. 박근혜가 여론을 묵살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던 것은, 그가 여론을 무시하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박근혜 정권은 여론을 정말로 두려워했고, 여론을 피하려 했고, 여론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에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규직 과호보' 발언이 있었던 2014년 11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http://www1.president.go.kr/activity/photo.php?srh%5Bpage%5D=2&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8569&srh%5Bdetail_no%5D=1004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규직 과호보’ 발언이 있었던 2014년 11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국정철학을 위해서 권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명박 정권도 자신들이 관심 가지는 사안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권력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박근혜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아마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 중 박근혜의 강력한 의지에 의한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그 개별 정책들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고, 관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는 그를 감싼 사람들에 의해서 눈과 귀를 막고 마치 아이처럼 돌봐졌다.

충격을 껴안고, 오판을 껴안고

많은 시민이 황당해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다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결국 전혀 준비도 안 되고 여과도 되지 않은 인물을 밀어 올려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던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신호는 줄곧 있었다.

지금 계속 재조명 받는 최태민 일가와 관련된 2000년대,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사들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전여옥이 박근혜에 대해 평했던 말들은 언제 보아도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적어도 박근혜와 한 번이라도 이야기했다면, 그리고 주변의 풍문을 들을 수 있는 위치의 정치인이라면 그가 정상적인 정치인이 아님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측근 정도라면, 단순히 독특한 사람을 넘어서 그가 니콜라이 2세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를 알면서도, 준비되지 않은 이를 올려보냈을 때 어떤 참사가 있을지에 대해 평가도 하지 않은 채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준 정치인들에 있다. 그들이 어떤 생각과 복안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가 명백하다면 그것은 무책임성이다. 가장 대통령으로 만들면 안 될 사람을, 단순히 자신의 협소하고 근시안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만들겠다고 모인 것이다.

새누리당

그러나 무책임한 것은 그런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다. 박근혜가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의 후광이 더욱 강해졌다는 건, 그런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박근혜를 믿고 제멋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시민들의 선택과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국가를 이끌 지도자를 뽑는데 실적을 보이지 않을수록 오히려 평이 올라간 현상은 사실 박근혜뿐이 아니다. 한 번도 정치판에 뛰어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고건, 안철수, 반기문, 그리고 앞으로도 나타날 또 다른 사람들. 이처럼 정치 행위를 하지 않고 아무런 검증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여론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반대로 이들이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시민들은 이들을 깎아내림에 주저함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정치인에게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가 가능하다는 환상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 다른 대통령들이 그러했듯,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내놓으면 그 정책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반드시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 시민들은 정치인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해줄 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막상 그 정책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은 이 신비주의적 정치인들이 실제로 정치판에서 자신의 정견을 내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그 정견이 불편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누군가가 때로는 자신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박근혜 정권의 탄생은, 박근혜 본인의 권력욕이나 독선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 정권은 그를 감싸고 이익을 얻으려 한 무책임한 측근과 정치인, 그리고 존재할 수도 없는 환상의 정치인을 기대한 국민의 합작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백일하에 드러났다. 환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충격만이 있었다. 2000년대부터 이어져 온 집단적 오판의 최종적 결과물은 박근혜 그 자체, 혹은 ‘최순실 게이트’다.

새누리당과 이정현 대표는 과연 국회를 지켰을까?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1071865.html
최순실 게이트를 숨기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박근혜 이후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나는 오늘 그 점이 문득 고민되었다. 누구나 그런 고민을 마음 한편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때가 오늘 친구들과 뉴스를 보며, 이 사건을 조롱하는 숱한 인터넷 게시글들을 볼 때 불현듯 찾아왔다. 모두가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그간 쌓여온 한국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비웃다가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2분도 채 안 된 것 같지만, 그 정적은 정말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들 ‘이제 과연 그다음은?’이라는 생각을 하고만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감정적인 흥분, 카타르시스, 해방감, 어이없음, 공포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는 언젠가 지나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모든 신뢰가 파괴되고 모든 상식을 이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어디서, 무엇부터, 어떻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가?

비 구름 어두운 하늘 우울 슬픔 절망

각운을 맞춰주는 역사는 다른 곳에 또 있을지도 모른다. MIT의 존 다우어는 [패배를 껴안고]라는 책에서 일본의 전후 시대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천황이 옥음방송을 통해 세상에 나오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 일본이 허탈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바로 ‘교다쓰’(‘절망’이나 ‘허탈’을 의미하는 전후 일본 사회를 대변하는 신조어) 상태였다. 그러나 항복 이전부터 일본인들은 서서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전쟁 혐오와 피로도가 서서히 고개를 빼 들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가 긴장감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나가와 현의 한 마을은 그다음날 낮잠부터 잤다. 전후 지도자들과 정부가 보여준 무능, 부정부패는 이런 심리상태를 더욱 부채질했다. 나라를 충심으로 지키자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누구보다 빨리 정부 물자를 착복한 사람들로 변신했다. 상이군인이 먹을 게 없어 범죄를 저지르고 있던 바로 그때 말이다. 일본인들은 심리적으로 붕괴해버렸다. 그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일본은 이제 어디로 갈까?

히가시쿠니노미야그 뒤 일본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그동안의 비상식적이고 광기에 찬 군부 정권에서는 나오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했다. 재벌과 군벌이 일본 국민을 농단했고, 특히 천황의 눈과 귀를 가로막았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천황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도조 히데키와 같은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전쟁 책임자들도 책임을 면해갔다. 대신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총리(사진)는 이렇게 말했다.

“군부와 공무원, 민간인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철저한 자기반성과 참회를 해야만 한다. 나는 1억 일본인들의 집단적 참회야말로 이 나라가 부활로 가는 첫걸음, 이 나라에 다시 총화를 가져오는 첫걸음이라 믿는다.”

가장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이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자 일반 사람들이 책임을 지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당시 어떤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은 농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승리하리라 믿었는데 패배로 끝났다. 우리는 전혀 개입한 적이 없는 일에 참회할 필요는 없다. 참회는 국민을 배신하고 속인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런 식으로 패전이 가져온 심리적인 공황상태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믿음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런 자기치유는 긍정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끝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과거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에도 참여했고, A급 전범 용의자로까지 올라갔던 기시 노부스케는 1957년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총리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1961년)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총리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1961년)

결국, 세상이 뒤집혔지만, 일본은 그다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일본 사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결국 책임 윤리의 실종과 견고한 사회의 보수성으로 이어졌다. 끝내 변화하는 세계에서 추격자의 지위를 벗어난 일본은 새로운 방향성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고, 책임 윤리의 실종과 정치적 견제기능의 마비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라는 또 다른 재앙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메이지 시대로 이어온 근대화의 신화가 일거에 무너진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겪은 충격은 당연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충격과 비교가 안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이런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경제, 정치, 외교 등을 막론하고 총체적 기능부전이 대내외적 위기를 초래했다. 다시 구성원들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누군가 새로이 비전을 제시하여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 파국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응분의 대가도 받아야 할 것이다. 사태가 수습되는 과정에서 우선 박근혜라는 재앙적 인물을 이용하려고 했던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가장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정치인들을, 그리고 박근혜를 선택한 국민이 다시 책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어떠한 가치관에 이끌려서, 그리고 자신들만의 신념으로 박근혜를 찍었으며 무책임한 자들에게 이 나라의 권력을 통째로 맡겨주었다. 물론 인간은 논리보다 감정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까지 왔으면, 적어도 자신들의 가치관을 조금 되돌아보고 시대에 맞게 수정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할 일은 더 이상 환상과 신화에 기대지 말고 책임성 있는 정치인을 선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비상식적으로 나가는 권력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기보다는 견제와 균형, 끝없는 재평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https://www.facebook.com/leepary
“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변했을까.

대한민국이 어떻게 나아가느냐는 나를 포함한 이 나라의 구성원이 이 충격을, 그리고 이 오판을 어떻게 껴안고 갈지에 달려있다. 그 방향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지고, 대가를 치를 사람은 대가를 치르고, 반성할 사람들은 반성한 뒤 이 위기를 또 다른 도약과 재생의 기회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시민들의 몫이다. 물론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하여튼 최순실 이후에도, 박근혜 이후에도 이 나라는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긴 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대한민국은 분명 ‘가능성의 나라’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난데없이 나타난 최순실이라는 ‘국민이 뽑지 않은 또 다른 대통령’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지만,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현대화를 달성해낸 나라다. 하지만 그 무수한 가능성이 어떻게 좁혀지든 간에 이 파국의 주인공들에게 합당한 자리는 이미 정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이 사건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람은 국민도 비선실세들도 아닌 박근혜 본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 아닌 대통령’ 말이다.

결국, 국민은 지난 4년 동안 국민이 뽑지 않은 대통령과 대통령 아닌 대통령에게 권력을 맡겼다. 이 참담한 실패를 ‘박근혜 이후’에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 실패의 기억을 통해 ‘가능성의 나라’가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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