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sense]”민노씨 페이스북 해킹당했어요?”
지난 2015년 1월 29일(목) 저녁 지인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무슨 소리지?’ 바로 모바일을 통해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분명히 좀 전까지는 로그인 상태였는데, 비로그인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로그인을 시도했다. 할 수 없었다.
내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란다.
그렇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쫓겨났다.
페이스북에서 쫓겨난 사연과 함께 페이스북 실명정책에 관한 취재 과정을 짧게 정리한다.
페이스북에서 쫓겨나다
어떤 사전 통보도 없이, 어떤 해명 절차도 없이 나는 페이스북에서 쫓겨났다. 쫓겨나면 아래 캡처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래 ‘노모뎀’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실명’이라는 이유로 페이스북에서 쫓겨났다. (당시로선 볼 수 없었지만, 왜냐하면 로그인 자체가 안 되니까, 나중에 계정을 회복된 후에 확인한 모습.)

이하 페이스북 측에 이메일로 전달한 사건 개요 및 공식적인 질의 사항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옮긴다.
사건 경과
페이스북 이용자명: 민노씨 (minoci)
- 지난주 금요일(2015.1.30. 오후) 지인의 문자를 받고 제 페이스북 계정이 불능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고: 이메일로는 “1.30.오후”라고 적었지만, 이는 착오로 잘못 표시된 날짜. 실제로는 1.29. 오후에 계정 불능 상태에 빠짐.)
- 모바일을 통해 확인하니 계정은 비로긴 상태로 변경되어 있었고, 다시 로긴을 시도하니 “실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안내 페이지로 이동하더군요.
- 이에 “민노씨”라는 사용자 명을 “민(성)” “노(이름)”으로 바꾸고 다시 로긴해서 하루 정도 사용했습니다.
- 토요일(2015.1.31. 이하 모두 같은 날 상황) “민노”라는 이용자명을 사용한 계정마저 비로긴 + 불능상태에 빠졌습니다.
- 이에 페이스북 체크포인트 페이지에 “민노”라는 이름을 다시 남기고, “파일”을 첨부하여 “제출”했습니다. (파일 = 한글 위키백과 “민노씨” 표제어 캡처 이미지 파일)
- 같은 날 기존 계정(“민노씨”)으로는 더는 활동이 불가능해진바, 다른 다른 이메일 ID로 임시 계정으로 임시계정을 만들고자 시도했지만, 다른 이메일임에도 임시계정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 이에 모바일번호를 ID로 “슬로우”라는 이름으로 임시 계정을 만들었습니다.
- “슬로우”라는 사용자 명으로 만든 임시계정마저 실명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위와 같은 비로긴+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 이에 “제갈 벅유”라는 이름으로 임시 변경하여 현재(2015. 2. 2. 오후)까지 사용 중입니다.
공식 문의 사항
계정이 중단되는 효과가 즉시 발생하는 중대한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 유저에게 어떤 통보도 없이 조치가 진행되는 점
- 해명 절차 역시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점
- 신고자에 의한 것인지 페북 자체의 모니터링 결과인지도 고지하지 않는 점
- 특히 이전에 썼던 게시물과 관련 대화, 진행 중인 그룹의 활동이 전면적으로 소급하여 무효화한 점
- 실명 인증 절차로 과도한 절차를 요구하는 점 (증명서 등을 파일로 이미지 제출 )
- 이왕 해왔던 페북 내에서의 활동에 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쫓겨나는 효과’가 즉시 발생하는 점 등에 관해 문의드리고, 이에 관한 페이스북의 공식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더불어 기존 계정의 빠른 회복과 사용을 요청합니다. (현재 “제출”한 양식에 관한 답변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이상입니다.
슬로우뉴스 편집장
민노 드림
페이스북 공식 입장,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1. 이메일 서면 답변

2. 페이스북 실명 정책의 취지는 뭔가? (전화 통화)
페이스북 홍보 담당자와 여러 차례에 걸쳐 통화했고, 공식답변을 위해 기다려달라는 요청을 수용해 3일을 기다렸지만, 아래와 같은 대화로 끝났다. 다만, 앞으로도 페이스북의 공식 입장은 반론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환영한다.
페이스북: 아시는 것처럼 페이스북은 실명을 우선하는 정책이다.
민노: 그렇다면 페북 실명 정책의 취지는 뭔가?
페이스북: 편집장님이 한번 생각해보시라. 실명을 쓰는 소셜서비스와 비실명을 쓰는 소셜서비스… 차이가 있지 않겠나? (실명이 더 투명하고 안전하다는 취지로 반문한 것으로 보임.)
민노: 우리나라에서 1) 사용자의 신분 확인을 국가가 기업에 강요하는 인터넷실명제는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2) 최진실법 도입 논란과 관련해 인터넷 게시판 실명 정책에 관한 사회과학적 실증 연구(우지숙 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는 실명제 효과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논문은 두 가지 효과를 이야기한다. 실명제는 1) 악플 축소 효과는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2) 사용자의 표현의 자유는 심대하게 위축된다(게시물과 댓글 수 급감). 그것이 내가 아는 한도에서 온라인 실명 정책에 관한 사회과학 실증 연구다. (참고: 우지숙,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의 효과에 관한 실증 연구’, 행정논총 제48권1호)
페이스북: 회사의 정책이기 때문에 내가 더는 이야기할 수 없다. (……)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게 기사에 쓰셔도 어쩔 수 없다. (……) 그런데 우지숙 교수 연구는 한국 상황 아닌가. 글로벌 서비스로서의 페이스북과 한국적 상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우지숙 교수가 글로벌한 상황을 조사한 것은 아니지 않나.
민노: (이에 대해 답변하려고 하자, “글로벌 콜이 와서 다시 전화드리겠다. 정말 미안하다.”하면서 전화 끊음. 그리고 지금 이 시각, 2월 6일 오후 5시까지 연락이 오지 않음.)

페이스북 실명 정책, 법적으로는 문제없나
페이스북 실명 정책이 가지는 법적 문제에 관해 법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김보라미 변호사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페이스북 사용자 아이디를 오프라인 아이디와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용자의 ‘표현의 자유’에 속한 것이다. 실명을 강제하는 페이스북 정책은 사용자의 일반적인 행동자유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다. 더불어 이런 약관이 페이스북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실명 정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합하는 방법인지도 의문이다.
시리아나 이라크 등에서는 정부에 비판적인 활동가의 익명(필명) 페이스북 활동을 제지하기 위해 정부가 이들을 비실명 사용자라고 페이스북에 신고하고, 계정을 중단하는 등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반대파를 제약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된 바 있다.
이은우 변호사 (법무법인 ‘지향’)
페이스북이 국내에서 사업하려면 국내법을 지켜야 한다. 기업이 서비스하기 위해 사용자 정보를 수집하는 데 있어 그 개인정보는 서비스에 필요한 범위에서 최소한으로만 수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최소 수집의 원칙’)
사용자가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서비스 제공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 만약 기업이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국내법의 규정을 적용하면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다. 이는 국내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원칙이다.
잘 사용하던 서비스를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로그인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서비스를 사용함에 있어 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를 페이스북 측에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페이스북이라는 서비스를 사용함에 있어서 사용자가 반드시 실명을 사용해야 할 이유를 페이스북 측에서 증명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법리적으로도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익명성에 관하여
페이스북은 “항상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는 상태에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단순히 ‘실명을 까면’ 그 사람을 알게 될까? 실명을 알면 그 사람과 좀 더 인간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다이버시티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box type=”info”]
– ‘민노’가 본명이 아닌 것으로 안다. 필명도 그렇고 개인정보를 잘 노출하지 않던데 이유가 뭔가?
제가 익명성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죠.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선입견에 빠져요. 그 사람의 목소리, 외모 등은 제가 결정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은 상당 부분 태어난 조건에 의해 결정되죠. 나머지 5~10% 때문에 인간이 대단히 특별한 존재고, 단 한 명도 같은 사람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럼에도 이미 우리는 결정된 존재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결과론적으로 그런 반복적인 인식이 차별과 선입견을 갖게 하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그러니까 어떤 기호라는 게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입견을 줄 것인가는 한 번쯤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요. 단순하게 호기심을 충족할 순 있겠죠. 하지만 학벌의 차이로 인해 내가 변하는 건 아닌데 상대방은 나를 다르게 봅니다. 그 정보가 그만큼 중요한 정보인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정보는 오히려 진정한 시그널을 가로막는 노이즈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익명이야말로 일종의 무기란 겁니다. 익명성을 무기로 해서 가식으로부터 숨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더 인간적인 세상을 꿈꿀 수 있다면 그 익명이라는 갑옷 속에 숨어야 해요. 오히려 익명성 안에서 인간적인 부분이 살아나기 쉬울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자기가 성취한 사회적 지표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속성들이 너무 많이 노출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어요.
– 민노씨는 네트워크가 넓으니까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할 거 같다.
그때그때 달라요. 저라고 왜 만나기 싫은 사람이 없겠어요. 대부분의 경우에 블로그의 어떤 글이 축적적으로 영감을 주고, 지속적으로 글을 통해서 사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런 과정들에서 그 사람을 알게 되고 친해지죠.
제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하나 있어요. 온라인상에서 비겁하게 숨지 말고 당당하게 얼굴까고 만나자, 일종의 현피뜨자는 건데요 얼굴을 까고 만나는 게 선입견을 없앨 수 있는 인간적인 만남인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기 쉽잖아요. 하지만 얼굴이야말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그렇게 생긴 게 아니거든요. 외모라는 것 자체도 엄청난 선입견이에요. 내가 여자거나 남자이고 싶어서 혹은 게이나 레즈비언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죠. 그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선입견을 제공해요.
글은 비교적 그런 영향을 덜 받죠. 물론 거기에 그 사람의 실존이, 사회적인 아이덴티티가 반영될 수밖에 없겠지만, 즉각적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의 선입견을 주진 않아요. 그래서 인간적으로 우리 직접 만나서 보자는 말만큼 무식한 게 없어요. 사람의 지위나 권력관계가, 시각적인 어떤 모습이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에센스라고 할까요, 블로그는 텍스트 대 텍스트로 인간 대 인간의 대화를 나눠왔다고 생각해요. 이게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는 거죠.
인간은 뭔가 선입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돼요. 예쁜 여자한테 더 잘해주고 싶고 권력자에게는 쿨하고 싶지만 잘 안되죠. 블로그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도 한 번 더 걸러내죠.
김문수가 했던 행위가 우리나라의 계급성을 드러나는 표본이 아닐까 싶어요. ‘나 도지사요. 당신 누군가’ 얼마나 천박해요. 그 사람들은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대단히 이중적이죠.
– 다이버시티 – [HARD] 슬로우뉴스호 선장 민노씨 (불량푸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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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은 실명 원칙이라고?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이른바 ‘현실 세계’라는 오프라인은 ‘실명 원칙’이라는 착각이다. 오프라인 역시 기본적으론 익명성에 바탕해 작동한다. 당신이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상인은 당신에게 신분증과 이름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이 길을 걸을 때 가슴에 주민증을 붙일 필요는 없으며, 이마에 실명을 쓰고 다닐 이유도 전혀 없다.
오프라인에서도 실명이 필요한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가령, 공적인 행정 업무와 큰 재산상의 거래 등에 국한한다. 오프라인 역시 대부분 실명 원칙이 아니라 익명 원칙이며, 누구도 자신의 개인 정보를 합당한 이유가 없는 한 강요받지 않는다.
페이스북이라는 서비스를 사용함에 있어 실명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앞서 이은우 변호사가 지적한 것처럼, 그 실명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를 페이스북에서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스스로 실명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럼 왜 페이스북은 실명을 고집하는 걸까?
페이스북의 사업적 비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있지 않다. 사용자의 호기심과 취향, 관심사를 계량화하는 것, 그래서 광고와 연결하는 것에 페이스북의 사업적 비전은 존재한다.
본질에서 페이스북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이 매트릭스 속의 삶을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노예로 사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 속에서 인간은 기계를 위한 전력원으로 역할한다.
즉, 페이스북의 궁극적인 운동원리는 사용자의 오프라인 표지와 관심사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봄으로써 그 사람을 상품 마케팅과 기업 브랜딩에 최적화된 자료로 만드는 데 있다. (‘인간’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

나는 이것이 악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한다. 페이스북은 기업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자에게 유익하고, 편리한 공간을 제공한다. 10억 명이 넘는 사용자는 그 편리와 유익, 무엇보다도 집적 이익을 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거대한 페이스북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실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모호한 이유로 존재의 이름을 지우거나, 내쫓아서는 안 된다.
추신.
나는 취재과정을 통해 박탈당했던 원래 계정을 회복했다.
만약에 내가 슬로우뉴스 편집장으로서 취재하지 않고, 그저 일반 사용자로서 페이스북에 문의하고, 항의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현재 ‘민노’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내 페이스북 이름의 존재 자체가 페이스북 실명 정책의 일관성 없음을 방증한다. 왜 내 필명은 허용했나.
자기 스스로 선택한 이름을 아직 되찾지 못한 많은 페이스북 사용자(노모뎀, 문백, 소셜홀릭, 자유육식연맹총재 등등)들이 하루빨리 자신이 선택한 이름을 온전히 되찾기 바란다. 그분들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