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의 북라이딩] 그를 떠난 이후 후회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헤어진 중증 장애인 애인을 기억하는 그의 방식. (⏳3분)

연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그냥 소설인 줄 알았어요. 제목 희한한 ‘우는 나와 우는 우는'(2025). ‘우’와 헤어진 그녀의 고백을 따라가다가 뒤늦게 알았습니다. 소설이 아니라 하은빈 작가가 직접 털어놓은 에세이였어요. 서른의 은빈은 스무 살의 은빈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한동안 네가 살면서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우를 사랑하는 일이겠지만, 우를 떠난 시간이 우를 만났던 시간을 따라잡게 되면서, 네가 살면서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우를 떠난 것을 후회하는 일이 될 거야.”
하은빈, 우는 나와 우는 우는 (2025)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프롤로그에서 은빈은 우를 떠난 이후 후회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이 기록은 헤어진 연인을 기억하는 그의 방식이죠. 우는 근육병을 앓는 중증 장애인. 비장애인 은빈은 우와 함께 하는 삶이 요구하는 헌신에 질려 어느 순간 도망쳤다고 합니다. 둘이 한껏 웃고 신났던 둘을 담은 다큐였는데 다시 보니 전형적으로 불쌍했다는 그는 그럼에도 눈부셨던 시간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우와 보낸 시간은 뜨거운 볕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비춰주고 있다. 내 안에서 나고 자란 것들은 모조리 그 빛을 쬐었다.”(17쪽)
같은 책. 이하 생략.
하은빈 작가의 언어는 유려하게 흘러가요. 문장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고, 글보다 그의 사유에 감탄했어요. 자신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 끝없이 묻는 이만 들여다볼 수 있는 심연. 파고드는 끈기와 냉정함이 없는 저는 절대 가보지 못할 깊은 곳을 은빈은 샅샅이 탐색해요.

사랑에 빠진 순간들에 관한 기록
사랑에 빠진 순간을 기억하나요? 이렇게 기록해 봤더라면.
“서로의 이야기 창고가 꽤나 흥미롭다는 사실을 발견한 두 사람은 실없는 농담부터 선뜻 꺼내기 어려운 비밀 이야기까지 다채롭게 주고받다가 각자의 내면에서 끝없는 이야기가 화수분처럼 솟아 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계절과 계절을 잇는 길이 낙엽길에서 눈길로 변하듯 나란히 사랑에 빠졌다. 비가 올 때 우산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좋아하고, 같이 아는 노래들이 늘어나 좋아하고, 이따금 서로에게 서운해도 서로로 인해 마음 아플 일이 생긴다는 것에서 변태같이 또 좋아했다. 우와 나는 여느 연인들이 그러하듯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만끽했으나, 사실은 여느 사랑이 그러하듯 크게 특별할 것도 극적일 것도 없는 사랑을 했다.” (33쪽)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는 이제 다 잊어버렸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웃을 일이 다시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은 알겠다. 좋다는 말에 인색했던 나와 달리 우는 세상의 많은 것을 아낌없이 좋아했다. 나는 세상에 좋아하는 게 별로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좋다”고 말하던 우만은 좋았다. 그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오래, 가장 많이, 가장 깊이 좋아한 무엇이다.”(49쪽)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 온전히 사랑에 집중한 이의 기록
은빈에게 장애인의 애인은 다른 일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역할이었어요. 돌봄을 온전히 떠맡았던 시간은 서글퍼요. 돈이 있었다면, 타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힘들었을까요? 돌봄이 필요한 중증 장애인은 애인이든 배우자이든 헌신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관계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돌봄은 다르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니. 비엔날레를 보러 며칠이나 광주에 묵을 수 있다니. 후미지고 가파른 곳에 있는 식당과 카페에 들어갈 수 있다니. 지하철을 탔는데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니. 하루가 내 것이고 미래가 내 것이라니. 꿈을 갖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니. 내 삶이 오로지 나만을 기다리고 있다니… 호흡기도 전동휠체어도 없이 홀가분해진 몸의 나를 세계는 하루하루 포근히 안아주었다. 몰라보도록 따스하고 정겹고 너그러운 세계였다. 나는 그 세계를 아낌없이 용서하였고 매일매일 새로이 화해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에 번번이 깊숙이 상처받았다.” (96쪽)

몇 년 전부터 사랑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투덜거리곤 했어요. ‘콜미바이유어네임’의 ‘그해 여름 손님’이나 박상영 작가님 ‘대도시의 사랑법’ 뜨거운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무렵에는 더 이상 보통의 이성애자들 사랑 이야기는 씨가 말랐나 싶었고요. 오랜만에 만난 사랑 기록이 소설도 아닌 자전적 에세이였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이란 것이 사랑이 시들한 시대를 드러내는 것일까요? 이렇게 이성적으로 돌아보기에는 온전히 사랑에 집중한 이의 기록은 그 자체로 묵직합니다.
“사실 우와 있을 때에 나는 매일매일이 실로 천진하고 순정하게 즐거웠다. 그래서 내게도 무언가를 견딜 수 있는 한계치가 있으며 어느 순간 그 지점을 넘어서 버렸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렇게 불명확하고 죽은 문장밖에 쓸 수가 없는 것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를 떠나고 나는 많은 것을 잊었다.” (180쪽)
꼭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