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안내: 거의/전혀 없음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매우 고려합니다. 줄거리 설명은 거의/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극히 예민한’ 독자는 이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언제든 좋은 작품을 골라 볼 수 여유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간 낭비로 느끼는 작품도 어쩌면 의미 있는 시행착오일 수 있겠지만, 그런 실패조차도 많은 이들에게는 ‘사치’일 테고, 저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휴일이나 주말 동안 시간을 쪼개 본 작품, 영화나 드라마 중 독자와 꼭 나누고 싶은 ‘좋은 작품’의 경험을 나눕니다. 물론 저에게 좋은 작품이 여러분께 좋은 작품일 이유는 없고, 그 역도 성립합니다. 다만, 제 부족한 경험이나마 그걸 나눔으로써 좀 더 따뜻하고 열린 대화가 가능하길 바랄 뿐입니다.

이 글에서 별도 설명이 없는 이미지는 모두 ‘조명가게'(강풀 원작/각본, 김희원 연출, 2024, 디즈니플러스)에서 가져왔음을 알립니다.
0. 걸작

많은 드라마를 보지 못했지만, 올해 본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물론 둘 중 하나를 뽑아야 한다면, 시청자 연령대를 고려해, 1540에겐 ‘조명가게’를 40 이상에겐 ‘아무도’를 추천하고 싶다.

이런 뻔한 소재로 이토록 섬세한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가(강풀), 연출(김희원) 및 연기자와 스태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1. 뉴트로 신파(+ 미스터리 호러)

‘조명가게’는 기본적으로 신파극이다. 그런데 이 신파극은 하나도 촌스럽지 않다. 강풀은 식상하고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소재를 아주 섬세하고 세련된 이야기로 곧잘 만들어 낸다. 미스터리 스타일의 호러 설정은 자칫 단조롭고 뻔할 수 있는 드라마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아주 드물지만, 유머 감각(‘어, 반말하시네?’)도 아주 탁월하다. 시종일관 진지하면 시청자도 답답할 수 있는데, 유머는 그런 답답한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이완한다.

강풀 ‘드라마'(혹은 웹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하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거. 그리고 그 평범한 사람들이 그 ‘당대’의 모순과 질곡을 반영한다는 것. 이 어려운 작가적 미션을 ‘조명가게’에서도 훌륭한 수준으로 구현한다. 강풀은 천재, 맞는 듯.

아주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장치, 결과를 보면 피식할 수도 있지만, 보는 동안은 시청자에게 궁금증을 품게 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조명가게’에서는 대다수 등장인물이 그런 ‘비밀'(혹은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특히 김대명(선글라스)이 그런 인물이다.
2. 장애와 동성애 혹은 고독사

이어서 이야기하면, ‘조명가게’의 가장 큰 미덕은 티 나지 않게, 이런 표현이 다소 편견을 자극하지는 않을지 조심스럽지만 ‘PC스럽지’ 않게, 우리 시대의 도덕적 모순과 위선을 아주 효과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수준으로 ‘설득’한다. 이 드라마는 보고 있으면 장애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적어도 1 정도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아주 공익적이고 공공적이며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노인과 고독사의 문제를 미스터리 형사극 형태를 띤 퍼즐로 삽입한다.

물론 김설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비장애인의 편견은 폭력적인 수준의 ‘막장극’으로 설정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극적인 장면(막장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시어머니의 혐오)을 빼고는 어떤 인위적인 설정 없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홍윤희(‘무의’ 이사장)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라고 말한 것처럼(물론 홍 이사장의 취지와는 살짝 다르긴 하다), 그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별로 티 나지 않게 드러낸다.

물론 드라마의 주된 주제의식이 그런 장애와 동성애 혹은 고독사를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는 않아서 그 해법에는 대체로 무관심하며,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사랑과 휴머니즘이 제시되고 있긴 있지만(그걸 탓하긴 좀 어려울 것 같다), 혹은 현실의 혹독함에 대한 낭만적 저항과 절망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런 드라마들을 좀 더 많이 만들면 좋겠다.

“이거구나…” 조명가게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 중 하나.
‘블랙미러’ 시즌3, ‘샌 주니페로’ (2016). 블랙미러 시리즈 최고의 에피소드 중 하나. 미디어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블랙미러’ 시리즈에서도 예외적인 기술 낙관주의와 휴머니즘에 바탕한 희망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위 ‘조명가게’ 장면 속 의미와 살짝 겹쳐져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3. 이정은

이정은의 연기는 놀랍다기보다는 예상 가능한 수준으로 감동적이다. 물론 이정은이라는 배우에 관한 아주 높은 기대 수준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연기는 놀랍긴 하다. 그 연기자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그 수준을, ‘깜짝 놀랐지?!’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역시 이정은이구먼’ 하는 만족감으로 넉넉하게 충족한다. 나는 이정은을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연기자 중 한 명으로 생각한다.

더불어 이정은의 선구안도 칭찬할 만하다. 내가 올해 본 가장 뛰어난 두 한국 작품에 모두 출연하는 배우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 보여주는 시크한 매력이 좀 더 마음에 들긴 하지만, ‘조명가게’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거의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급이다. 다만 좀 더 다양한 역할에서 더 비정형화된 이미지로 이정은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무도’에서의 이정은 연기가 살짝 더 좋았던 이유도 그래서다.

‘갓정은’ 조명가게 입장이요~!
‘술래’ 이정은은 믿을 수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정말 훌륭하게 연기한다. 나는 ‘조명가게’도 좋지만, 이 쪽이 좀 더 좋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2024, 넷플릭스)
4. 김희원

김희원의 연출도 훌륭하다. 자칫 단순할 수 있는 스토리를 다양한 시각적 설정으로 보완한다. 가령, 빛(조명가게)과 어둠(골목)의 대비를 기반으로 흑백톤의 뿌연 골목과 병원의 형광색 사무 공간의 대비, ‘골목’의 섬세한 색온도 설정은 ‘빛’과 ‘어둠’이 이 드라마에서 어떤 의미인지, 주어진 환경과 의지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5. 기형도의 ‘전문가’

처음엔, 나는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걸 선호하는데, 기형도의 ‘전문가’가 떠올랐다. 2편이나 3편까지도 이게 기형도의 ‘전문가’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이게 웬 걸, 드라마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간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 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중략…) ​

어느 날 그가 유리 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기형도, ‘전문가’ 중에서
6. 와우아파트(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이태원 참사

‘조명가게’에는 명시적이진 않지만, 은유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사회적 참사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렇게 붕괴한 건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다. 그 틈 사이에 끼어 사람들은 생사를 오간다. 숨지고, 때론 살아남기도 하며, 살아서도 죽어서도 “미안합니다”라고 연신 눈물을 흘린다. 그건 마치 그 구조 자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가령 이태원 참사의 경우에 권한이 강하고 그래서 그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되었던 사람들(서울경찰청장과 용산구청장)은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고, 현장에 가까웠기 때문에 죄가 있다(용산경찰서장)는 이상한 제도적 ‘면죄부’의 위선을 씁쓸하게 떠올리게 한다.

명백한 행정 시스템의 결함으로 발생한 사회적 참사임에도 그 최고 책임자(당시 이상민 행안부장관)가 “(생략) 경찰 병력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수 없었다”는 따위의 소시오패스러운 ‘공식 발언’을 하는 게 대한민국이긴 하지만, 그리고 대개 권력에서 멀리 떨어지고, 현장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항상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자책을 강요당하긴 하지만…

물론 나는 약자가 도덕적으로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대체로 도덕적 위기 상황은 권력과 가까울수록 그리고 역으로 가난에 가까울수록 더 빈번하게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개체나 계층이나 계급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거나 그른 것은 아니고, 그런 상황을 좀 더 잘, 빈번하게 구성할 수 있는 조건들이 있을 뿐이다.

각설하고, ‘조명가게’는 한국적 감수성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아주 훌륭한 장르 드라마다. 그런데 그 장르적 컨셉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주하고 해체하며 재구성해서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을 더한다. 이번 연말연시, 8부작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자신 있게 추천한다. 나는 물론 디즈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7. 짝말 혹은 짝패

끝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짝패다. 이 드라마에는 다양한 짝패가 등장한다. 그건 마치 마르틴 부버의 영원한 걸작, ‘나와 너’에서 이야기하는 근원어로서의 ‘나와 너’와 같다. (마지막 15분은 ‘쿠키’로 봐얄 듯)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의 이중성에 따라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이라는 짝말이다.

(…중략…)

근원어는 존재를 기울여 말해진다.
‘너’라고 말할 때는 짝말 ‘나-너’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그것’이라고 말할 때는 짝말 ‘나-그것’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근원어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근원어 ‘나-그것’은 결코 온 존재를 기울여서 말할 수 없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1923), 표재명 옮김, 문예출판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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