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희 스토리 3.] 장애인 이동권 사단법인 ‘무의’ 홍윤희(이사장)가 말하는 장애와 인간. 오늘 주제는 미디어와 장애. (약 15분)
이 글은 2024년 7월 2일 인터뷰를 정리한 글입니다. 인터뷰 초고를 인터뷰이 홍윤희(이사장)가 퇴고했고, 편집자가 다시 정리했습니다. 가독 편의를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맥락화했고,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유럽에서 ‘정상’이라는 단어는 1840년 이후에야 인간의 특성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전에 정상(normal)이란 예컨대 목수가 수직이나 직각을 나타낼 때 쓰는 기술 용어였다.
사라 헨드렌,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영어 2020, 한글 2023.
우연을 필연으로 믿는 순간 인간의 불행은 싹튼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키 (‘십계’ ‘삼색’을 만든 폴란드 영화감독)
낯설고 열등하며 불완전한
많은 사람이 장애를 낯설다고 생각하고, 드러내 표현하지는 않지만 열등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예를 들면 휠체어를 타면 갈 수 있는 곳들이 제한되니까 장애를 비극과 연결시키고, 신체 기능을 회복하면 기적으로 표현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아이가 장애를 가지기 전에는 그런 인식이 특별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아이가 소아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고 있던 초기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척과 통화했던 기억을 아직 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우리 가족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려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요지였어요. 화가 났던 기억이 나요.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제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떠올린 건 성경에 그려진 장애에 대한 묘사였어요. 믿음의 대가로 장애를 고침받는 장면들이라든지, 장애가 인간의 죄 때문에 생긴 벌이라는 묘사 말이죠.
아이가 7살 때 대형 교회를 다녔어요. 장애 때문에 어린이집 입학을 6~7번 거절당한 적이 있던 아이에게 교회 주말 성경학교는 드물게 또래와 어울릴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었죠. 휠체어 탄 아이가 동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어울릴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요.
엄마, 예수님이 내 다리를 고쳐줄 수 있어?
어느 날 아이가 참석한 어린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예수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이야기, 눈먼 자 눈 뜨게 했다는 성경 부분을 인용하는 설교 내용이 나왔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장애도 고쳐지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주제죠. 그 설교를 듣고 너무 당황스러운 거예요.
아이가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더럭 겁이 났어요. ‘예수님이 내 다리를 고쳐줄 수 있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아이가 걸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만으로 장애를 없앨 수 있다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대여섯 살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말도 안 되고요.
설교했던 전도사를 찾아갔어요. 일단은 ‘앉은뱅이’라는 비하적인 단어를 하반신마비 아이가 듣게 되어 속상했다고 말했어요. 성경에 적혀 있더라도 단어를 순화하던지, 아니면 장애를 다룬 부분은 적어도 아이들 예배에서는 다루지 않는 걸로 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어요. 또, ‘예수님을 믿으면 걸을 수 있는 거냐’고 아이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무 말 못 하시더라고요. 앞으로 조심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물론 구약성경에서는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등 차별적인 인식이 드러나나, 신약에서는 그런 구약의 장애관을 전복시켰다는 분석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성경에서 장애를 ‘치유 대상’으로 보는 것은 장애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경은 수천 년 동안 전 세계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줬어요. 성경 안의 장애 인식이 기독교 문화권에 퍼져 있던 게 당연한 거죠. 이렇게 장애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공기처럼 일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우리 주변의 드라마, 영화 등 텍스트를 다시 보게 됐어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한 상태
장애 인권운동의 역사가 한국에 비해 긴 서구권에서는 장애인을 미디어에서 어떻게 다루는지(장애인 대표성: Representation of people with disabilities)가 미디어 비평의 소재로 자주 등장해요. 요즘 제가 대중문화 컨텐츠를 볼 때는 장애 당사자를 단순히 등장시키느냐 마느냐보다 장애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특히 장애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한 상태’로 다루는지 아닌지를 주로 보게 되더라고요.
대중문화에서는 장애가 죄에 대한 벌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송혜교 주연의 드라마 [더 글로리] (2022)를 보면 학폭 피해자인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들에게 차례로 복수하는데 가해자 중 일부가 장애를 갖게 되거나 죽어요. 재준은 눈이 멀고 그 때문에 결국 죽게 되죠. 혜정은 목소리를 잃고요. 저는 좀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다른 가해자인 연진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과 장애를 갖게 되는 게 같은 레벨에서 다뤄지니까요. 장애를 ‘징벌’의 결과로 보는 전개는 스토리상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에요”
가족 내에 누군가가 병이나 장애가 생겼을 때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거나 자책하지 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소아암 진단을 받았어요.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소아암 전문의에게 울먹이듯 질문했던 기억이 있어요. 유전적인 요인인 거냐, 임신 말기에 먹었던 탄 고기 때문이냐, 커피 때문이냐 등등 집요하게 물었어요. 그 때 선생님이 하신 말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 어떤 것도 원인이 아니라고요. 그저 운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요. 그때 그 선생님이 ‘어머니가 이랬기 때문에 아이 병이 생겼다’고 말했다면 병뿐 아니라 그 후 아이가 갖게 된 장애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렸겠지요.
벌도 극복 대상도 아니다
우리 아이는 병으로 시작해 장애로 이어진 케이스에요. 장애가 병처럼 치료나 극복 대상이 아니라는 개념은 주변에 아이의 장애에 관해 해명하거나 답변해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으며 서서히 잡혀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얘가 언제 걸을 수 있다고 하니?”라는 가족의 질문이라든지, “나중에는 걸을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것이니 희망을 가져라”는 이야기라든지.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장애아를 주신 것이다” 이 말은 처음에 들었을 때 너무 화가 났던 기억이 나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장애아의 경우는 그 말이 더 맞아요. 그런데 온 마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필요한 돌봄이나 사회적 지지를 누군가는 많이 받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그렇게 받지 못하잖아요. ‘무의’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아이를 위한 희생’으로 보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은 좀 달라요.
사실 저는 운이 좋았어요
저는 상대적으로 상황이 좋았어요. 소아암 병동에서 엄마가 출근하는 집이 저뿐이었어요. 주변에 돌봄 자원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회사에서도 계속 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애라는 미지의 영역에 떨어졌지만 상대적으로 잘 버텼어요.
저는 운이 좋았고 그 운을 다르게 쓰고 싶었어요. 무의 일을 하면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을 받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 보고 싶었어요.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장애 인식이 사회적 압박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요.
[일타스캔들]의 장애 묘사, 왜 문제일까
전도연이 나오는 드라마 [일타스캔들] (2023)에서의 장애 묘사에 대해서는 미디어오늘에 기고문을 쓴 적도 있어요. 주인공(전도연) 동생이 자폐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 설정으로 나오는데요. 동생이 어느 날 오해를 받아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돼요.
이 남동생은 동네 카페에서 와플을 잘 굽는 알바생이 구워주는 와플을 먹고 누나의 반찬가게로 출근하는 게 일상 루틴으로 굳어졌어요. 그런데 알바생과 같이 근무하던 남자친구가 그걸 스토킹으로 오해해서 결국 유치장에 가게 돼요. 남동생이 폭력을 쓴 것도 아닌데 발달장애인이 유치장에 갇히게 되는 것 자체가 부당해요. 극적 설정이라고 해도 지나친 왜곡이죠.
수사를 받는 발달장애인의 권리는 장애인차별금지법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보장되어 있다. 드라마처럼 발달장애인에게 수갑을 채우고 유치장에 구금하는 건 오히려 경찰의 인권침해 소지가 높다. 발달장애인에게 수갑을 채워 연행하는 경찰의 행동에 대해서는 인권위가 몇 차례나 시정 권고를 했다.
2021년에는 발달장애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게 위협적이라며 신고가 들어온 건에 대해 경찰이 해당 장애인을 뒷수갑을 채워 연행한 사건에서 인권위는 ‘발달장애인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라며 경찰청에 권고했다.
2022년 11월에도 인권위는 발달장애인이 절도사건 혐의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해당 장애인이 믿을 수 있는 조력자나 발달장애 이해가 높은 전담수사관 없이 일반 수사를 한 사건을 두고 경찰청장에 발달장애인 조사 준칙뿐만 아니라 조사를 하는 직원 교육, 전담 사법경찰관 확대를 권고한 바 있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일반 시청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 발달장애인은 저렇게 오해를 사는 행동도 고소의 대상이 되는구나’ ‘발달장애인은 수갑 채워서 유치장에 넣어도 되는구나’로 잘못 생각하게 된다.
홍윤희, ‘일타 스캔들’ 장애 묘사, 유감입니다, 미디어오늘 2023.02.02.
그런데 누나(전도연)가 경찰서에 와서 계속 죄송하다고 잘 보살피겠다고 용서를 구해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주인공의 당찬 캐릭터와도 동떨어져 있어요. 결국, 장애를 주인공이 처한 ‘딱한 처지를 극대화’하는 장치로만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를 극복한 사랑?
장애에 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있어 중요한 선결 조건 중 하나는 장애 당사자의 대중매체 노출을 늘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위라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박위 님과 같은 인플루언서들의 매체 노출이 늘어나는 건 바람직해요. 다만 박위 님을 ‘장애 극복의 아이콘’으로 미디어에서 (특히 비장애인들이)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장애를 극복한다는 말 자체가 애매한 데다가 말 자체에 ‘장애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어요.
게다가 장애 당사자들은 개개인마다 장애 종류, 정도, 처한 조건이 다 달라요. 당사자 본인이 특정한 스토리를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은 괜찮지만 ‘저 사람이 해냈으니 너도 할 수 있어!’ 이런 말을 비장애인이 장애 당사자에게 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어요. 열심히 운동하면 일어나서 걸을 수 있다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저도 아이가 걸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해서 강화외골격(엑소스켈러턴)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연구하는 연구원분께서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아이처럼 고관절이 불안정한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누군가가 열심히 운동해서 장애를 극복했대. 어떤 기술이 나왔으니 너도 장애를 극복할 수 있어. 이런 말은 개별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폭력적일 수 있어요.
특히 박위 님 열애-결혼 기사의 헤드라인은 ‘장애 극복하고 결혼 골인’이라는 주제가 대부분인데요(참고 기사). 장애인은 연애나 결혼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깔려 있는 문구예요.
표준어인 ‘수어’를 AI 기술로 극복하자는 광고
광고는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특히 장애를 소재로 할 때 장애인이 대상화되지 않는지 보게 돼요.
모 통신사 광고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엄마가 AI기술을 통해 목소리를 재연하여 가족들에게 말을 전한다는 컨셉이 있었어요. 감동적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청각장애인 사이에서는 정작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동일한 위상을 가진 표준어인데 기술을 통해서 목소리를 재연하는 대신 가족들이 수어를 배우는 쪽으로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다른 광고에서는 휠체어 탄 초등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궁궐에 갔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좌절했다가 AR기술을 통해 건물 내부를 볼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 나와요. 휠체어로 갈 수 없으면 경사로를 놓으면 될 텐데. 친구들과 함께 구경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을 혼자 AR기술을 보면서 해소한다는 것 자체가 두 광고 모두 기술이 주인공이고 장애는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쓰였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인 것이죠.
‘영감 포르노’를 넘어서
‘장애 극복 서사’가 불편한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장애인들의 극복 스토리가 비장애인들의 ‘영감(inspiration)’을 불러일으키는 목적으로 쓰인다는 것인데요. 이를 ‘영감 포르노(inspiration porn)’이라고 불러요. 스텔라 영이라는 호주 희극배우가 TED 강연에서 이야기한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장애인도 저 정도로 열심히 하는데 나도 노력해야겠다’는 식으로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컨텐츠를 뜻해요.
김진영 씨의 도전, 그 결과 아닌 과정
그렇다면 ‘영감 포르노’를 피할 수 있는 장애인 기사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실 것 같아요.
202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시각장애인 김진영 씨에 대한 기사입니다.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직접 진영 씨에게 전화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죠. 일반적으로 장애인이 여기에서는 진영 씨의 개인적인 극복 스토리에 포커스를 맞추는 대신 그가 변호사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법무부와 계속 실랑이를 벌이면서 ‘시각장애인이 변호사 시험을 볼 때 이런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를 요구하고 얻어내는 과정이 기사에 담겼어요.
후배 시각장애인들은 진영 씨의 선례를 따라갈 수 있게 됐죠. 그런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기사에서 독자들이 영감을 받는다면 변호사시험을 보기 위해 싸운 ‘그 과정’에 있는 거죠. ‘장애인이 변호사가 됐네?’ 하는 그 결과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에겐 너무 특별한 영화 [말아톤] (2005)
영화 [말아톤] (2005)는 저에게는 특별한 영화예요. 자폐 스펙트럼 마라토너와 어머니의 실화에 기반했죠. 19년 전 영화인데도 장애를 다룬 영화가 흔히 빠질 수 있는 자폐인 아들에게 엄격하게 마라톤을 시키던 엄마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아들의 의지를 인정하고 손을 놓을 수 있게 된다는 플롯이 인상적이죠. 영화 홍보를 하던 조승우에 대한 일화가 있어요.
기자간담회에서 기자가 ‘자폐아 흉내 좀 내보라’라고 했는데, 조 배우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하죠. 자폐를 희화화하지 말라는 의미였어요. 당시는 인종이나 장애를 너무 쉽게 희화화하던 시절이죠. 정윤철 감독은 자폐인을 닫혀 있다는 “자폐”라고 표현하는 대신, 스스로가 나름대로 열려 있다는 의미로 “자개”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앞서 있는 생각이죠. 장애 당사자가 등장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는 영화에요. 이 영화랑은 개인적으로도 좀 인연이 있어요. 이 영화 개봉 시기에 임신 중이었고 조승우 배우를 매우 좋아해서 배우 무대인사만 세 번 찾아갔었어요. 아이의 장애를 겪으면서 이 영화가 더 와닿았죠.
[우리들의 블루스] (2022) 속 정은혜 씨
장애 당사자가 출연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2022)도 기억나요. 발달장애인 당사자로 화가인 정은혜 씨가 직접 출연했는데 드라마 방영 전 1년 동안 교류하면서 라포(정서적 교감)를 쌓아가며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장애 당사자를 드라마에 녹여 내는, 장애를 주인공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 자연스럽게 드라마의 배역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은혜 씨의 캐릭터가 시설에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캐릭터 관계들을 통해서 탈시설 문제를 살짝 드러내기도 하고요. 장애를 주제로 다루려고 하는 작가의 태도와 방법론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장애 취재의 6가지 준칙
작년(2023) 말 한국언론진흥재단 요청으로 장애인 보도 실천법 강연 영상을 녹화한 적이 있어요. 그때 호주 NGO인 미디어 다양성 호주라는 곳에서 나온 핸드북 첫 번째 원칙이 인상적이었죠. 장애와 관련이 없는 기사를 쓸 때도 장애가 있는 취재원을 활용하라는 내용이었어요. 장애인들을 장애 이슈에서만 취재원으로 다루잖아요. 다양한 취재원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죠.
- 장애 취재 핸드북(Disability Reporting Handbook).
- NGO인 ‘미디어 다양성 호주'(Media Diversity Australia)가 2021년 제정하고 2022년에 개정.
- 포함하라(Include): 당사자 취재 없이 쓰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 / 당사자를 반드시 포함하고, 장애 이슈가 아닌 다른 취재를 하는 경우에도 장애인 취재원을 활용하라. 장애와 관련 없는 주제의 행사에도 장애 패널을 포함해라.
- 물어보라(Ask): 취재 전 ‘어떻게 부르면 좋은가’ 문의하라. 장애 유형에 따라 적절한 편의를 제공하라 (예. 청각장애인의 경우 수어통역, 문자통역, 서면 인터뷰 등 적절한 방식을 먼저 물어보라)
- 피하라(Avoid): ‘영감 포르노’를 피하라. 섣부르게 장애인의 능력을 지레짐작하거나, 장애/비장애 비교 또는 장애끼리 비교하는 것을 피하라.
- 준비하라(Prepare): 질문, 편의 사항을 미리 준비하라. 어떤 경우엔 인터뷰에 어떤 편의 사항이 필요한지 인터뷰 당사자인 장애인이 모를 수도 있으니 이 경우에는 편의 사항을 알아봐 미리 제안하라.
- 존중하라(Respect): 장애인의 보장구, 안내견 등을 존중하라.
- 공유하라(Review): 인터뷰 후 인터뷰 경험을 동료 기자들과 공유하라. 가능하다면 인터뷰 당사자에게 결과물을 공유하여 잘못 표현된 곳이 없는지 체크한다.
이 강의 마지막에 기자들에게 남긴 부탁이 있었어요.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장애를 취재하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장애는 흥미롭고 다양하며 많이 배울 수 있는 영역이니 많이 취재해 주시면 좋겠다. 장애는 사람에 따라 장애가 다 다르고, 사람 수만큼 무지개처럼 다양하다고 했잖아요. 장애 취재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지만 직접 부딪혀 취재를 해보시라. 그러면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국기자협회 인권준칙 중 장애인 인권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와요. ‘장애인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다’가 그것이죠.
제3장 장애인 인권
1.언론은 장애인이 자존감과 존엄성, 인격권을 무시당한다고 느낄 수 있는 보도를 하지 않는다.
가.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표현에 주의한다.
나. 통상적으로 쓰이는 말 중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는 관용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다. 장애 유형과 장애 상태를 지나치게 부각하지 않는다.
라. 장애인을 보장구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수동적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
마. 동정 어린 시각이나 사회의 이질적 존재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한다.
바. 장애를 질병으로 묘사하거나 연상시킬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2. 언론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데 적극 나선다.
가. 장애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 ‘미담 보도’의 경우 장애인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다.
다. 장애인을 인터뷰하거나 언론에 노출할 경우 반드시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한다.
라. 장애인을 위한 제도 개선과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장애가 미디어에서 노출될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삶의 요소 중 하나로 나오는 것이 중요해요.
EBS [모여라 딩동댕] 휠체어 탄 ‘하늘이’
장애를 중심에 두는 대신 등장인물이 그저 휠체어를 탈 뿐인 드라마나 영화들도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는 건 고무적이에요. 장애인이 그냥 하나의 등장인물로 나오는 시대에는 더 다양한 장애 서사가 필요하기는 하겠죠. 일상에서 장애를 보여주고 일상의 다채로움 중 하나로 장애가 스며드는 것. 비극이나 죄와 벌 사이에 불편하게 위치하던 장애의 이미지들을 미래에는 평범함이란 이미지로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자주 이야기하는 사례가 EBS의 [모여라 딩동댕]이에요. 2021년에 휠체어를 타는 캐릭터인 ‘하늘이’가 나왔는데 캐릭터 중 하나일 뿐이에요. 장애를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려고 만든 캐릭터가 아니란 거죠. 미국 [세서미 스트리트]는 50년 전인 1975년부터 발달장애 캐릭터를 만들었고요. 세서미 스트리트에는 자폐 스펙트럼 캐릭터나 다양한 장애 캐릭터가 있어요. 작가 중 한 명이 자녀가 장애가 있었어요.
휠체어 탄 라이언 챌린지
무의가 2019년 휠체어 탄 라이언 챌린지 인스타 캠페인을 한 것도 그런 취지였어요. 라이언이 인쇄된 상품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300개가 모이면 카카오에 진짜로 휠체어 탄 라이언 이모티콘을 출시해 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죠. 그런데 캠페인을 하면서 사람들의 손 그림이 쌓이고, 특히 아이들이 휠체어 탄 라이언을 그린 그림도 하나둘씩 올라왔죠. 부모가 아이에게 그려보라고 해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너무 소중했어요.
엄마로서의 체험… 흑백은 별로예요
이렇게 말했지만, 제가 정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로서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지금은 장애에 관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흑백으로 이야기하는 게 좀 별로예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설득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중간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고, 위선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너는 아웃이야… 이런 태도가 비극을 만드는 것 같아요. 얼마나 많이 손잡고 갈 수 있느냐에 따라 결론이 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