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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슬로우뉴스는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가 최근 주요 판결들을 소재로 진행 중인 ‘광장에 나온 판결’을 연재합니다. 이 연재가 일부 전문가의 관심사에만 머무는 판결과 그 의미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box]

김순이 씨(가명)는 얼마 전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아름다운 축복의 순간도 잠시. 안타깝게도 순이 씨가 출산한 아이는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순이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 갓난아이 베이비

선천성 심장질환 아이를 출산한 순이 씨

순이 씨가 일하는 일터의 작업 환경은 태아에게 유해한 요소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열악한 노동 환경에 순이 씨는 매일 노출됐습니다. 순이 씨는 자신이 출산한 아이가 선천성 심장질환이 가지고 태어난 이유도 그런 작업 환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이 씨는 제주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순이 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습니다. 공단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건은 법원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법원(서울고등법원)도 태아의 선천성 질환을 산재로 인정해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업무 환경과 갓난아이의 선천성 질환이 서로 무관했던 걸까요? 아니면 그 인과관계 ‘입증’에 실패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객관적인 제3의 기관(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역학조사한 결과, 업무 환경과 갓난아이의 선천성 질환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명됐습니다. 그런데도 왜 법원은 여성 노동자 순이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은 걸까요?

갓난아이 베이비 엄마 산모

현행 산재보험은 노동자 ‘본인’의 질병에 대해(서만) 적용되는데, 이미 출생한 자녀의 선천성 질병은 노동자 본인의 질병이 아니라는 것이 법원의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업무상 환경에 의해 장애를 입고 태어난 자녀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호를 하지 않겠다는 것일까요?

조영관 변호사(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상근변호사)가 이번 판결의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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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료원 간호사 산업재해 사건

쟁점:

  • 태아의 선천적 장애를 노동자(임산부)의 산업재해로 인정할 것인가?

판결:

  • 태아의 선천성 질환은 노동자 ‘본인’의 질병이 아니므로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 

사건번호와 담당 재판부:

  • 서울고등법원 2015누31307 요양급여신청반려처분취소(재판장 김용빈, 판사 김경환, 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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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했다.

법이라는 최소한, 그리고 판사의 ‘양심’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마땅히 지켜야 하는 원칙 중 최소한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한다는 뜻이다. 세상 모든 일을 빠짐없이 법으로 정해 둘 수 없기 때문이고, 뒤집어 생각해보면 법이 미처 정하지 못한 공백은 그 사회 구성원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상식적인 원칙에 따라 메워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법의 흠결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침해되는 때에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를 위해 우리 헌법은 법관에게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도록 하고 있다(헌법 제103조). 가장 정제된 법 규범에 의하여, 가장 논리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법관에게 양심이라는 뜨거운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정한 이유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양심에 따라 심판하는 것은 법관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법관들

아쉽게도 우리 법원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 해석에 매우 소극적이다. 강자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판결에서는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도 없는 추상적인 개념(신의성실, 사회 통념상 합리성, 관습 헌법)이 자주 사용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형식적인 법논리에 매여 정작 중요한 원칙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유행어에 빗대면, “뭣이 중헌지” 전혀 모르는 모양새다. 이번에 비평하는 판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산하면 산업재해, 태어나면 산재가 아니다? 

만약, 임신 중인 여성 노동자가 일터에서 일하다 업무상 유해요소에 노출되었고, 이로 인하여 태아가 유산되었다면 업무상재해로 인정되어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이 된다. 그런데 만약 태아가 사망하지 않고, 선천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경우라면 어떨까?

태아에게 발생한 질환이 출생 이후의 요인에 의한 후천적 질병이 아닌 선천성 질환이 분명하고, 그 발병 요인도 포태 중 업무상 유해요인에 의한 것임이 의학적으로 분명하다면, 태아의 선천적 질환 역시 ‘업무상 재해’에 준하여 치료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갓난아이 손 아이

2009년, 간호사들의 ‘집단’ 선천성 질환 아이 출산 

사안은 이렇다. 2009년 제주의료원 소속 간호사 중 15명이 임신했다. 그런데 그중 5명은 유산했고,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이 있는 아이를 출산하였다. 결국, 간호사의 근로 여건과 작업환경이 노사 간 쟁점이 되었고, 제주의료원은 2011년에 노사합의로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하였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역학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천성 심장질환의 발병원인과 메커니즘이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주의료원에서 임신 중에 근무하면서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 주야간 교대근무, 임산부와 태아에게 유해한 약물 등과 같은 작업환경상의 유해요소들에 일정 기간 지속적ㆍ복합적으로 노출된 후 선천성 심장질환이 있는 아이를 출산하였으므로, 이러한 선천성 심장질환의 발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넉넉히 추단할 수 있다.”

즉, 업무상 인과관계가 인정되었고, 이에 선천성 심장질환을 출산한 간호사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1심 법원은 업무에 기인한 태아의 건강손상도 산재보험의 대상이 되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으나, 항소심 법원은 이를 뒤집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였다.

법 판결 재판 판사 법원

참을 수 없는 판결의 가벼움: ‘기괴하고, 부끄러운’ 

항소심 법원은 산재보험은 “근로자 본인의 질병”을 적용대상으로 정하고 있으므로, 노동자의 자녀에게 발생한 선천성 질병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항소심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산 이후에는 어머니가 아닌 출산아가 지닌 선천성 질병으로 바뀌므로 그 업무상 재해는 원고(어머니)들과는 독립된 법인격체인 원고들의 자녀에 대한 질병”

“출산으로 모체와 출산아가 분리되는 이상 그 질병은 출산아가 지닌 것”

“산재보험법이 업무상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그 근로자가 요양급여를 청구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는 이상 원고들이 아닌 자녀(신생아)에게 보험급여의 수급권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

그래서 원고들에게는 수급권이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엄마 배 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는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던 질병이, 살아서 태어난 이후에는 독립된 법인격체인 신생아의 선천성 질병으로 바뀐다는 해석도 기괴하고 소름이 돋지만, 산재보험의 수급권이 신생아에게 있을 뿐 노동자인 산모에게 없으니 청구를 기각한다는 대목에서는 그 논리의 가벼움에 부끄러워 더는 읽을 수가 없다.

기괴 해골 공포
기괴하고 소름끼치는 항소심(고등법원) 판결문의 논리

태아가 산재보험을 청구하면 노동자가 아니라서 인정할 수 없다고 할 텐데 앞으로 임신한 여성 노동자는 출산을 앞두고 태아의 이름으로 산재보험에 가입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선천성 질환이라는 상처를 온몸으로 껴안고 태어난 것이 무슨 잘못이기에 공적인 보호를 배제하겠다는 것인가?

산재보험 제도가 정말 그런 것인가?

산재보험과 ‘모성보호’

산재보험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적 보험이다.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제36조 제2항). 우리 헌법이 모성권 보호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임신과 출산, 양육이라는 재생산 과정 없이 공동체가 존속할 수 없으므로 임신, 출산, 양육에 필요한 보호를 개인에게 전가하지 아니하고 공공영역에서 마련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 헌법은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선언(헌법 제32조 제4항)하고 있는데, 이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업무상 유해요소로부터 여성과 태아가 충분한 보호를 받아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모성보호와 여성근로에 대한 특별한 보호를 천명하고 있는 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기 위하여 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임신 중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내용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현대 산업보건학계에서 유산이나 불임, 2세의 선천성 질환과 같은 생식보건의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모성 여자 임산부 임신 사람 인간 인권 생명

생식 독성을 일으키는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이 적지 않을 뿐더러, 다양한 분야의 산업현장에 만연한 교대근무제가 노동자의 생식기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도 많다. 즉 생식 보건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능히 예상할 수 있는 ‘안전보건상의 위험’에 해당함에도,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는 그 위험에 적절히 대비하고 있지 못하다.

특히 ‘2세의 선천성 질환’ 문제에 대하여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않다. 매우 중대한 제도적 불비이고 입법의 흠결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우리 법원처럼 형식적인 해석을 하지는 않았다.

독일 법원(1977), 산모와 태아는 “본성상 단일체” 

독일의 경우가 좋은 예다. 1977년에 있었던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보자.

  1. 여성 노동자가 임신 중에 업무에 기인하여 태아에게 건강손상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선천성 장애아가 출생한 사건이다. → 순이 씨 사건과 같다.
  2. 당시 독일은 법제는 “산재보험에서 보험사고를 ‘업무상의 사유로 노동자에게 발생한 재해”라고만 규정하고 있었다(독일제국보험법; RVO 제539조 제1항)  → 우리나라 현행 법와 유사하다.
  3. 하지만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는 위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 장애아를 산재보험 급여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독일기본법 제20조 제1항의 사회국가원리를 구현함에 있어서 ‘본성상 단일체’[footnote]natürliche Einheit[/footnote]인 임신한 여성 노동자와 태아를 합리적 근거 없이 차별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4. 결국 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제국보험법 539조 1항은 독일기본법 제3조 제1항의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므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위헌 결정하였다.

이후, 입법부는 연방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를 반영한 독일사회법 제7권 제12조를 마련했다.[footnote]”임신 중 모(母)의 보험사고로 인한 태아의 건강손상도 보험사고에 해당하며, 그러한 한도 내에서 태아는 피보험자와 동일하다. 업무상 질병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모에게 업무상 질병을 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유해요소로 인하여 태아에게 건강손상이 발생하였다면 (비록 모에게는 업무상 질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는 보험사고로 본다.”[/footnote]

갓낫아이 임산부 엄마 베이비
유산하면 산업재해지만, 태어나면 “산모와는 별개의 법인격”이므로 산업재해가 아니다(우리나라 법원) vs. (산업재해 판단에서) 임산부와 태아는 “본성상 단일체”다(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임신한 여성 노동자의 업무에 따른 태아의 건강 손상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40년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두 나라 법원이 보여준 상반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산업재해 보상보험제도의 목적에 관해 우리 법원은 이렇게 말한다: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용자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게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토록 하는 것”(서울행정법원 2014. 11. 7. 선고 2011구단8751 판결 등)

이 사건 원고들의 자녀가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난 것은 제주의료원에서 발생한 안전보건상의 위험에 해당하고, 그러한 위험을 사용자나 노동자 어느 일방에게 전가하지 않고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분담토록 하는 것이 산업재해보상보험 제도의 목적에 충실한 해석이다.

앞으로 있을 대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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