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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지난 6월 21일 조선일보는 범죄 기사를 게재하면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조국 전 장관의 가족 이미지 삽화를 게재했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의 악의적 보도와 실수에 의한 오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국언론정보학회는 문제의 본질과 원인, 법·윤리적 책임 등을 짚어보기 위해 긴급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 악의적 보도와 실수 사이: 언론 윤리 회복을 위한 긴급 토론회 (동영상 링크)
  • 7월 22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토론회는 세 개의 발제와 네 개의 토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슬로우뉴스는 이 중에서 세 개의 발제를 정리해 독자와 공유합니다. 발제 부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송현주 (한림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보수 언론의 적대 문화와 격분 산업
  2. 정미정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 악의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
  3. 채영길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실수와 신화(Myth): 조선일보의 실수(Mistake)의 의미

이 글은 채영길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의 발제를 정리한 글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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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화[footnote]이 글에서 신화(Myth)는 기호학적 상징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화‘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분류, 즉, 말 그대로 ‘신화’를 의미한다.[/footnote]가 그러하듯이 신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서 현재로 소환된다. 그래서 신화가 된다는 것은 존재의 영속성을 부여받기에 영광스러운 찬송이지만, 한편으로는 신화가 된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가 이제는 현재에서 과거로 물러남을 확정하는 퇴행적인 시간적 사건이기도 하다.

신화는 기껏해야 현재의 의미 맥락 속에 소환될 뿐이다. 현재가 선택해야만 부활하는 시간 의존적 사건이기에 신화는 화려하지만, 현재에 의해 갇히고 타율적이다. 나는 이번 조선일보 성매매 일러스트 사고[footnote]중앙일보 등 언론들은 이를 ‘조국 부녀’ 일러스트라고 호칭하고 있다. 언론인-검사-정치인 부정 뇌물 사건을 ‘가짜 수산업자’ 로비 사건으로 호명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언론들은 언론 권력과 공모 상태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는 가해자 은폐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반복한다.[/footnote]라는 조선일보의 실수(들)를 담론적 맥락속에서 진지하게 재구성하고 이 실수의 의미를 조선일보의 담론 권력이 이제는 과거의 신화의 자리로 물러나는 징후일 수 있다고 조금은 과도한 가정을 해 본다. 그런데 이 추정의 목적은 그것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있지 않으며 실수라고 규정한 이 사고가 점유하고 있는 담론의 맥락을 논의하는데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담론의 영역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97)[footnote]Butler, J. 1997. The Pscyhic Life of Power: Theoreies in Subjection. 강경덕·김세서리아 역. 서울: 그린비[/footnote]에 의하면 담론은 세 개의 영역(domain)간의 긴장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1. 첫째는 말할 수 있는 영역(domain of speakable)
  2. 둘째는 말할 수 없는 영역(domain of unspeakable)
  3. 셋째는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domain of unsignifiable)
주디스 버틀러(1956~현재, 사진은 2013년 모습, 퍼블릭 도메인) 퀴어(동성애자) 이론의 창시자이자 페미니즘 이론자로서 최근(2020) '대산문화' 여름호 인터뷰에서 한국 특유(?)의 페미니즘인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생물학적 여성만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로 인정하는 페미니스트)를 반대하면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조: 한국일보)
주디스 버틀러(1956~현재, 사진은 2013년 모습, 퍼블릭 도메인)와 그의 책 ‘권력의 정신적 삶: 예속화의 이론들'(1997)의 한국어 번역본(2019) 모습. 주디스 버틀러 버클리대 교수는 퀴어(동성애자) 이론의 창시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젠더 트러블’)로 명성이 높다. 최근(2020) ‘대산문화’ 여름호 인터뷰에서 한국 특유(?)의 페미니즘 흐름인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생물학적 여성만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로 인정하는 페미니스트)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조: 한국일보)

‘말할 수 있는 영역’은 당연히 지배적인 담론의 영역으로 사회의 헤게모니를 가진 이들이 늘 선호하고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담론 영역이다. ‘말할 수 없는 영역’은 그 반대로 반헤게모니, 저항의, 반란의 의식에 의해 형성되는 부정의 담론 영역이다. 당연히 헤게모니적 담론 권력자들이 혐오하고 배제하며 차별하려는 담론 영역이다.

세 번째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이 흥미로운데 이 영역은 지배적 담론 권력이나 저항의 담론 세력의 ‘의식’ 너머에 있는 담론 영역으로 헤게모니적 긴장이 사회에서 가시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담론의 회색지대이다. 일종의 주류 사회에서 부정되는 담론 공간이자 하나의 ‘무의식’적인, 혹은 의식이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담론 영역이다.

조선일보 입장에서 담론의 세 영역을 분류하면 이렇다.

  1. 자본가를 위한 자유시장주의, 권위적 보수주의, 극우반공주의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이고,
  2. 사회 개입적 시장 규제주의, 평등주의는 말할 수 없는 영역이며,
  3.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저급하고 천박한 극우적이고 반지성적이며 전체주의적 담, 사회가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소외시키고자 하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종종 드러나는 담론의 영역일 것이다. 통속적으로 일반화하자면, 일베적 담론 영역이다.

조선일보도 언론사의 품위를 위해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경계를 긋고, 표면적으로는 외면하고자 —명시적일지라도— 하는 담론의 외곽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버틀러에 의하면 이 언어 밖의 영역이 바로 정체성이 재구성되고자 할 때에 요긴하게 사용되는 담론들이 존재하는데, 즉,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재조직되려면 이 영역의 담론들이 동원된다. 바로 인정하기 싫거나 부정하고픈 사고로서의 담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실수(Mistake)’는 그러한 요긴한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실수(mis-take)무엇을 취하는 행위가 오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오인은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이 말할 수 있는 영역으로 불쑥 끼어 들 때 발생한다. 이 때 실수는 헤게모니를 가진 주체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 확장하려는 담론 전략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이 ‘실수적’ 담론 실천은 ‘오인’으로 ‘take’될 수 있으나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이 오인들은 결국 ‘말할 수 있는 영역’(domain of speakable) 내부로 침투하면서 결국 말할 수 있는 영역과 말할 수 없는 영역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버틀러는 재클린 로즈(페미니즘 학자)를 인용하면서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의식적으로 소외시키려는 영역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면서 —“꿈으로 실수로”, “상상계의 작동을 특징짓는 미끄러짐(slips)과 틈(gaps)”으로— 말할 수 있는 영역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연적’ 담론 실천의 “반복”(repeatition)이라는 전략에 의해 주류적 담론으로 정식화된다. 주류적 담론의 정식화 방법은 단순히 ‘말할 수 있는 영역’이나 ‘말할 수 없는 영역’을 반복적으로 호명하고 훈육하는 방식 외에 아예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영역을 반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의미 없는 영역' 일베
조선일보와 일베.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의미화될 없는 영역’인 일베(담론)를 의미화하고, 주류적 담론으로 정식화하는 방법은 ‘우연적’ 담론 실천의 반복이다. ‘실수'(mistake)는 이를 실현하는 요긴한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담론 구조의 균열

나는 조선일보가 ‘의미화 될 수 없는 영역‘ 밖의 담론이 말할 수 있는 담론 영역 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실수’라는 것들이 조선일보의 어떠한 정체성의 변화 징후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흔히 이야기 하듯이 무의식의 드러남이라든지 조선일보의 이념적 적대 행위의 의도치 않게 우연히 도발이라는 충동적으로 정식화된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수가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이 말할 수 있는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담론 주체의 정체를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실수의 ‘담론적 실천의 의미’가 일시적 사고가 아니라 조선일보가 지금껏 장악해온 헤게모니적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이제는 신화가 되고 ,대안적인 영역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상태, 즉, 담론 권력의 침식이 본격화하는 것의 징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근거로서 한국 사회의 지배적 담론 구조의 분화가 있겠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보수적 담론 구조가 분화되고 있는데, 조선일보가 추구해온 기존의 ‘말할 수 있는 영역’ —정치경제적으로는 독과점적 자유시장주의, 사회문화적으로는 권위적 보수주의— 은 헤게모니적 담론으로서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고, 조선일보가 공격하는 ‘말할 수 없는 영역’ —정치경제적으로 사회 개입적 시장주의와 사회문화적 자유주의적 다원주의— 의 권력 집단도 불안하지만, 정치적으로 지속적이며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을 부정하고 도전하고 있는 형국이다. 2021년 3월5일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조선일보 101주년 창간 기념사에서 현재 조선일보가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이 가짜뉴스라고 공격한 뉴욕타임즈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날의 정치 권력은 자기들에게 불편한 뉴스를 ‘나쁜 뉴스’ ‘가짜 뉴스’라고 몰아붙이면서,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 등을 가하는 법안들을 ‘언론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입법하려 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로 위장한 이념단체들과 권력의 편에 선 매체들을 동원해, 진실을 수호하려는 언론들에게 ‘적폐’이자 ‘말살되어야 할 악(惡)’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언론의 자유마저 이념과 진영논리로 오염시켜 흔들어대는 참으로 부도덕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시도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위험한 징조이며 자칫 ‘민주주의의 종언’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footnote]통상 조선일보 창간 기념사는 조선미디어의 온라인 게시판에 저장되어 공개되지만, 올 해 창간 기념사는 삭제한 것인지 애초에 올리지 않은 것인지 찾을 수가 없다. 이에 내가 인용한 기념사는 다른 온라인 소스를 통해 찾은 기념사 파일을 참조하였다.[/footnote]

조선일보가 뉴욕타임즈와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는 ’논란‘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일보 창간 기념사는 기존에 조선일보의 ‘말할 수 있는 영역’이 가짜뉴스로 부정되며 그동안 조선일 보에 의해 ‘말할 수 없는 영역’의 담론 주체들로 규정된 담론 주체들에 의해 이제는 자신들이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몰려 들어 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언론 시장과 담론의 권력을 반추하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어쨓든, 기존의 담론 영역에 대한 독과점적 헤게모니는 심대히 도전받고 있는 형국인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이 전통적 담론 대결 전선에서는 또 다른 균열이 발생하고 그 균열이 점증하고 있는데 ‘의미화될 수 없는 영역'(반지성주의, 원초적 능력주의, 전통 회고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반동적 전체주의)이 주류 담론 속으로 급속히 확산하는 상황이 기존의 견고한 헤게모니적 담론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총체적인 기존의 지배적 담론 구조의 변동을 사회학자들은 위험사회로 부르기도 하고 정치철학자들은 액체 혹은 후기 근대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언론학자들은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로 부르고 있지만, 그것의 호칭이야 어떻든, 이 전반적인 담론 구조의 흔들림에서 조선일보의 보수적 담론 헤게모니도 예전과 같지 않아 보이며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안정적인 담론으로도, 독점적인 주류 담론으로도 더 이상 보이지는 않는다.

아래 기사가 보여주는 사실은 국민의 안전이라는 공통의 가치도, 진실의 의미도, 담론적 헤게모니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서라면 유보될 수 있다는 반지성적 급진적 이념의 담론, 즉 ‘의미화할 수 없는 영역’의 담론들이 이제는 예외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일보

실제 조선일보의 헤게모니적 담론의 생산과 확산이 기존의 지배적 담론에 의존하여 실현되고 있지도 않는 듯 하다. 기존의 담론 생산 과정이 생산 시스템의 타락속에서 ‘실수’는 오인된 Mis것으로 받아들임 Take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구조화된 타락된 시스템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 비록 조선일보는 디지털 뉴스 생산 시스템의 문제를 일시적인 오작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시스템의 수리를 통해 교정하고자 하지만 디지털 뉴스 생산체계의 근원적 문제점들에 의해 이는 낙관적이지 않다. 흔들림 속에서 ’실수‘가 담론의 도메인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우연도 아니며 일시적 사고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말할 수 있는 영역‘의 변화의 징후라는 ’사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성매매 일러스트 사고의 경과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를 우를 살펴보자. 조선일보가 1개면을 할애해 ‘일러스트 논란’에 대한 사과문에서 이번 사고의 경과와 문제 그리고 향후 대책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적시되어 있다.[footnote]김효실 기자. 2021. 6.30. 한겨레. 『조선일보가 1개면을 털어 ‘일러스트 논란’ 사과문을 실었다.』[/footnote]

한 면을 다 털어서 사과문과 재발 대책을 발표한 조선일보.
한 면을 다 털어서 사과문과 재발 대책을 발표한 조선일보.
  • 21일 새벽 5시 온라인 기사 송고
  • 6시반 일러스트 삽입(1시간 정도 검색, 결정, 편집): 디지털 뉴스 작업
  • 오전9시 동료로부터 조국, 조민 연상 시킨다 지적
  • 일러스트 교체
  • 오후 4시19분 조선 페북 기사 링크 게재 확인(동료 기자의 제보)
  • SNS 담당자에게 연락 일러스트 교체

위 경과는 이번 일러스트 논란을 해당 기자가 해명한 것인데, 우리는 이 해명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먼저, 조선일보의 데스킹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사의 문제에 대해 동료기자가 최초 제보했으며 12시간이 경과한 후 조선 페북 기사 문제 역시 동료 기자가 제보하여 문제가 파악되고 있다. 데스크의 부재 혹은 조선일보에 의하면 책임에 소홀한 문제는 ‘말할 수 있는 영역’의 담론이 이제는 더 이상 오롯이 진실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이 해명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조선일보가 분명 1인 미디어 기업도 아닐텐데, 기자 개인은 디지털화된 데이터베이스와 기사 송고 시스템 이외에는 직업적인 소통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말할 수 있는 영역’은 기자 개인의 고유한 사적인 인식 수준, 가치 수준, 그리고 미학적 수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셋째, 조선일보의 경우 ‘의미화할 수 없는 영역’조차 이 개인의 ‘고유한’ 정신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가 된 기사를 쓴 기자는 기사의 제목을 “먼저 씻으세요, 성매매 유인해 지갑 턴 3인조”으로 뽑았는데, 본문 역시 ‘의미화할 수 없는 영역’의 글에서 발견되는 글쓰기와 유사하다.

“지난해 7월 울산의 한 모텔방. 여성 A(20)씨는 채팅 앱으로 만난 50대 남성에게 “먼저 씻으라”고 했다. 욕실문이 닫히고 샤워기 물 소리가 들리자 A씨는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남성의 옷을 뒤져 현금 35만원과 신분증, 신용카드가 든 지갑을 챙겼다. 이후 조용히 객실문을 닫고 쏜살같이 모텔 밖으로 나왔다. 모텔 부근에는 친구인 21세 남성 2명이 차에서 대기 중이었다.”

일러스트만이 사고가 아닌 기사 자체가 사고라고 할 수 있는데, 해당 기자는 이 기사 이후에도 유사한 방식의 글쓰기로 작성한 기사를 계속 송고하고 있다.

또다른 문제는 이러한 담론 생산 방식이 우연이 아닌 시스템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과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일러스트 사고의 경우 “지면에 텍스트만 나간 기사가 그대로 온라인에 게재되면 주목도가 떨어지고, 잘 노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자들이 나중에 관련 사진이나 일러스트를 덧붙일 때가 종종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담론의 대결 전선이 개인의 사적 취향과 회사의 상업적 이해 타산에 의해 상당 부분 타락한 전선들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미 조선일보가 일러스트를 사용함에 있어 “윤리위 규정 3조1항: 과거에 촬영한 자료 사진이나 영상을 사용할 경우 과거 이미지임을 표시한다”가 있음에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내부의 담론 생산 원칙이 형식화된 것이 정식화된 상태로, 이의 개선과 원칙 확립은 이미 희화화되는 양상이다.

신화가 되어가는 조선일보

조선일보의 권력은 언론의 상징적 담론 권력에서 나온다. 그 권력은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보수우파의 ‘말할 수 있는 영역’을 획정하고, 그 밖에 있는 담론은 말할 수 없거나 말할 필요가 없는 의미화 될 수 없는 영역으로 추방해 왔다. 하지만 그런 조선일보의 담론 권력은 이제 점차 과거의 영광으로 회자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무의식적 실수가 의식의 자리 곁에 위치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퇴행하고, 오히려 이제는 상투적 수법이 되어 버린 상태이다.

일러스트 사고를 둘러싼 담론 생산 과정과 내부 시스템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역’과의 헤게모니 대결, 그리고 더 나아가 담론 영역 밖에 있던 의식과 가치와 표현이 조선일보 내에서 체계적으로 구현되면서 강화하는 담론 영역의 균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러스트 사고는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이번 조선일보 자체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김영란법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1면 제목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은 "기자의 한숨, 기득권의 비명"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숨기고, 왜곡한다.
김영란법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1면 제목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은 ‘기자의 한숨, 기득권의 비명’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숨기고, 왜곡한다.

우연적이 아닌 반복적인 이 균열들은 한국 사회에서 ‘1등 신문’이자 기자가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1위이고 시장 점유율에서 1위인 조선일보의 위상과 권위가 이제는 신화의 자리로 들어서고 있는 징후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과도한 추정’은 계몽적 진보에 뿌리를 둔 저널리즘이 더는 개인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식과 판단을 사회적으로 분업화하는 역할을 독과점적으로 수행하는데 한계를 보이는 오늘날 언론 생태계의 위태로움을 배경으로 한다면 그리 과도하지도 않을 수 있다. 실제로 계몽적인 진보적 이념은 그 자체로 신화의 근본 원리, 즉 주관적인 것을 자연에 투사하면서 스스로를 신화적 형상에 기초하고 있다.[footnote]Adorno & Horkheimer, 2001, Adorno, T. W., & Horkheimer, M. 2001. Dialektik der Aufklarung; Philosophische Fragmente,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철학적 단상. 서울: 문학과 지성사[/footnote].

이제 이 시대에서 계몽적 언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신화적 지위가 진정 신화가 되어 스스로 과거로 후퇴하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고루하고 권위적인 담론 영역도 신화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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