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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 체류하던 교민을 격리 수용할 시설의 후보지 주민들 중 일부가 해당 사실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이 한동안 줄을 이었었다. 다행히 교민 수용이 확정되고 반대하시던 이들도 뜻을 철회하여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가해지던 날선 비판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준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같은 나라 사람이라느니 동포라느니 하는 거창한 개념을 첨가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자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행위에 있어 인류애에 기초한 협조가 일어나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행위가 집행됨에 있어 이해관계나 기본권이 다소간 침해당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지역민 일부의 반대 역시 마냥 덮어놓고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에서는 철저한 검역을 거쳐 안전하게 교민들을 수송하고 치료하겠지만, 실제로 해당 시설 근처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안감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관심과 배려라는 것은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불안감이 클 수록 관심과 배려에 할당될 심리적 여유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때문에 적극적 행위로써 반대의사를 표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는 그 행위의 이면에 있는 '불안'을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는 그 행위의 이면에 있는 ‘불안’을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불안’과 ‘갈등’ 조정자: 정치와 언론 

사실 그래서, 교민의 격리 수용 후보지 인근 주민의 격한 반발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느 정도는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일이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행위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갖는 인류애의 크기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보다 클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이 같은 일을 포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강요할 수도 없는 일임은 더욱 분명하다.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수록 지나치게 격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은 결국 두 거대 주체의 역할이 된다. 실제 정치 행위를 하는 정치권과 정보와 메세지를 전달하는 언론이다. 방역 당국의 노력이야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니 다들 모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과연 메신저의 역할을 담당한 언론은 쓸모없는 갈등의 불씨를 키우는 일 이외에는 정작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도 사람들은 대부분 언론을 통해 정보를 접한다. 때문에 정확한 정보의 전달로 지역민의 과도한 불안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언론이고, 지역민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며 많은 지역민들이 모두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의 전달로 지역민에 관한 지나친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것 역시 언론이다. 그러나 과연 이 시점에서 어떠한 보도가 이러한 목적으로 행해졌는지는 통 알 수가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병명 문제를 문재인 정부의 '중국 예속' 문제로 변질시키는 중앙일보 박보균 기자의 의견 기사.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 대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쓰는 이유는 국제 표준(2015년 WHO이 수립한 병명 및 원인체에 대한 명명 원칙) 때문이지 무슨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다.
병명 문제를 문재인 정부의 ‘중국 예속’ 논란으로 변질시키는 중앙일보 박보균 기자의 의견 기사.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 대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쓰는 이유는 국제 표준(2015년 WHO이 수립한 병명 및 원인체에 대한 명명 원칙) 때문이지 무슨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다.

‘우한 폐렴’ 고집하며 갈등 조장하는 조선과 중앙  

‘우한 폐렴’ 대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명명한 WHO의 원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우한 폐렴이라는 명명법을 사용하는 조선일보 등의 보도 행태와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이에 한 술 더 뜨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정치 체제가 어떻든, 중국의 방역 체계가 어떻든 중국인의 위생 관념이 어떻든 병명에 지역명을 넣지 않는 것은 국제 사회 모두가 참여하여 합의한 하나의 큰 규범과도 같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도 아닌, 그저 정해진 하나의 대원칙이나 누구나 수긍하는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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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보건기구(WHO)의 병명 및 병 원인체에 관한 명명 원칙 (2015) 

이에 관해서는 아래 뉴스톱의 기사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2015년 WHO에서는 새로 발병되는 병명과 병의 원인체에 대한 명명 원칙을 새로 수립했다. (중략) 질병 이름에서 피해야할 용어는 지리적 위치, 사람 이름, 동물 또는 음식의 종, 문화, 인구, 산업 또는 직업 등이며 과도한 공포를 유도하는 단어도 배제한다.”

출처: 뉴스톱, ‘우한 폐렴’이 아니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2019’다(더나은사회실험포럼, 2020. 1. 2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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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역명이 들어간 병명이 더욱 직관적이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제도권에 존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나 허용되는 것이지 제도권은 허울뿐인 ‘대중’의 핑계를 대기보다는 국제 사회의 규범을 따르는 것이 맞다. 언제부터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는 국제사회의 원칙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가?

언어의 활용에 있어 저잣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단속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제도권은 규범을 지키기 때문에 제도권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방역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와 국제기구의 명칭 사용 관련 지침을 그저 비웃고 이죽거리기 위해 ‘우한 폐렴’이라는 원칙에도 맞지 않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인이나 집단을 혐오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또한 부가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양산한다. 또한, 특정 집단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되었다면 그 집단이 쌓아 올린 데이터가 있고 이는 뭇 사람들에게 신뢰를 제공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과거로부터 제공된 신뢰는 특정 집단을 도매금으로 비판하는 것을 자제하게끔 하고 시민사회에서 건전한 담론이 형성되도록 한다.

그러나 최근 우리 언론을 지켜보면 볼수록 이 같은 신뢰가 갈수록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상파나 주요 일간지조차 수준 낮은 가짜뉴스의 덫을 피해 가지 못했다. “천안 반발에 결정 바꾼 정부…아산·진천 “우릴 우롱하나””(조선일보), “천안→아산·진천…정부 느닷없는 변심이 ‘우한 갈등’ 키웠다”(중앙일보)이라는 제목을 단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기사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해 보인다. 정부 여당을 공격하려는 그들의 정치적 의도는 지역 사회에 깊은 갈등의 골만 남긴 채 부수적으로는 폭발적 조회 수와 광고 수익이라는 이익을 제공했을 터이다.

이럴 바에야 언론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공동체의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장려하기는커녕 자신의 정파적 선호와 사적 이익을 위해 갈등을 조장한다면? 그런 언론을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고 합리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보다는 자신의 정파성을 관철하고 사적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공동체의 갈등을 조장한다면? 그런 언론을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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