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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 사회의 화두는 과거청산이었다. 국가 폭력의 진상을 드러내고, 피해자를 구제하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 마련이 민주화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특히 재판을 통한 과거청산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이는 사법부가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위법, 부당한 공권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권력의 조작, 은폐에 대한 진실규명을 방해하거나 가담했기 때문이다. 과거사 사건의 특징은 대개 다음과 같다.

  1. 위법하고, 현저하게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발생.
  2. 사망, 상해, 실종 등 중대한 인권침해 결과를 초래.
  3. 공권력에 의한 사건 조작 또는 은폐와 진실규명 방해.
국가(중앙정보부)가 조작하고, 대법원이 승인한 '사법살인' 인민혁명당 사건. 대법원에 의해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울부짖는 가족들. 사형 판결 확정 18시간 만인 1975년 4월 9일에 형이 집행되었다.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국가(중앙정보부)가 조작하고, 대법원이 승인한 ‘사법살인’ 인민혁명당 조작 사건. 대법원에 의해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울부짖는 가족들. 8명의 피해자에게는 사형 판결 확정 18시간 만인 1975년 4월 9일에 형이 집행되었다.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그런데도 국가에 그 책임이 있는 범죄 피해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법원을 통한 제대로 된 보상과 과거청산을 가로막는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1. 까다로운 재심의 요건: 우선, 다시 재판을 받기 위한 재심 조건이 극히 까다롭다. 이는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재심이라는 것은 형법 교과서에 이론으로나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2. 소멸시효: 피해자(와 가족)가 법률적으로 규정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을 지나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소멸시효의 완성이다. 참고로, 국가를 상대로 책임(손해배상)을 묻기 위해서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

유엔총회가 채택한 ‘지침’[footnote]「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인권침해와 국제인도주의법의 중대한 위반행위 피해자를 위한 구제 및 배상을 위한 기본 원칙과 지침」[/footnote]은 ①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민사적 손해배상청구에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고, ② 정부가 중대한 인권침해의 진실을 은폐한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거나 정부가 그 사실을 공식으로 인정한 때로부터 시효가 진행된다는 중요한 원칙을 천명하였다.

유엔 UN

국가 책임을 인정한 사법부

하급심의 태도

법원은 2003년 ‘수지 김 사건’ 판결에서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였다. 1987년 한국 여성 수지 김이 살해되자 국가안전기획부가 사건 진상을 은폐하고, 오히려 수지 김을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하였다.

뒤늦게 진실이 규명되어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법원은 국가가 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 조작하다가 이제 와서 진실을 알지 못했던 유족들에게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상 또는 형평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후 법원은 ‘최종길 교수’ 사건 등에서 소멸시효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였다. 법원은 형사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이 판결 확정일로부터 3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OhLizz, CC BY
OhLizz, CC BY

대법원의 과거청산

대법원은 2010년 12월 16일 긴급조치 제1호에 대하여 위헌, 무효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형사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고, 2011년 6월 30일에는 울산보도연맹 사건에서 사법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대법원은 울산보도연맹 사건에서, 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박탈하여 채권자 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② 지금까지 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었는데, 뒤늦게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된 유족들에게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한다고 하면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였다.

과거청산에 제동을 건 대법원 판결 

1. ‘과잉배상’ 판결 (2011)

대법원이 2011년 1월 13일 처음으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재심 무죄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청구 사건을 판결했는데, 이 판결은 그 당시 잇따른 과거사 사건의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과잉배상’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자 기산점을 기존의 법리와 다르게 사실심 변론종결일로 변경하는 판결을 하였다. 이 판결은 ‘장기간의 세월’, ‘통화가치의 상당한 변동’이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동원하여 굳이 기존 법리까지 무시해가면서 손해 범위를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Hans Splinter, CC BY https://flic.kr/p/7acLp9
Hans Splinter, CC BY

2. ‘진도군 민간인 희생 사건’ 판결 (2013)  

그런데 더 나아가 대법원은 2013년 5월 16일 진도군 민간인 희생사건에서 국가의 법적 책임을 상당히 제한하는 소멸시효 법리를 만들어 적용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통한 민주화에 역행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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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민간인 희생 국가배상청구 사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들에 있어서 국가의 소멸시효항변이 권리남용에 해당하기 위한 요건:

과거사정리법에 의한 진실규명신청이 있었고, 정리위원회도 망인들을 희생자로 확인 또는 추정하는 결정을 한 경우, 망인들의 유족인 원고들로서는 그 결정에 기초하여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할 경우 피고가 적어도 소멸시효의 완성을 들어 권리소멸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신뢰를 가질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가 원고들에 대하여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할 것이어서 이는 허용될 수 없다.

위 권리행사의 ‘상당한 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상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 단기간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별 사건에서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어 그 기간을 연장하여 인정하는 것이 부득이한 경우에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경우 그 기간은 아무리 길어도 민법 제766조 제1항이 규정한 단기소멸시효기간인 3년을 넘을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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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민간인 희생 사건에서 대법원은 국가가 사건을 조작 또는 자료를 은폐했거나, 전쟁과 같은 국가 위난의 시기에 국가권력이 폭력을 비호하거나 묵인하여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정이 소멸시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19년 전 사건이다. 그래서 증인 확보가 어렵다.

즉,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당시에 무조건 소송을 제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국가가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립하여 진실규명을 한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니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결정한 사건에 대해서만 시효를 문제 삼지 않고 국가책임을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6개월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사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피해자도 무죄판결 확정일 또는 형사보상결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지만 국가책임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하급심은 무죄 판결을 받고 3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는데, 대법원이 제멋대로 그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급심 판결만 믿고 소송 준비로 6개월 이상의 시간을 보낸 피해자들은 자의적인 대법원 판결 때문에 국가 책임도 묻지 못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 6개월이 왜 나왔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대법원
대법원

대법원은 2012년 이후 유독 과거사 사건에서만 자의적으로 권리구제의 기준을 변경하거나, 합리적인 설명도 없이 기존의 대법원 판결과 상반된 법리로 국가의 책임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려왔다.

겸허하게 과거를 반성하고, 진지하게 피해자의 인권에 귀를 기울이며, 공권력의 위법 행위에 대해 당당하게 책임을 묻는 사법부의 모습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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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퇴임을 앞둔 양승태 대법원장에 관해서는 여러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특히 법원 내 연구모임에 대한 외압이나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을 계기로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 권한과 법원행정처에 대한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평가 기준은 바로 ‘판결’입니다. 대법원의 역할은 법과 양심에 따른 올바른 판결로 분쟁을 해결하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과연 양승태 대법원장은 판결로써 그러한 역할을 다하였는지, ‘양승태 대법원’의 주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평가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칼럼을 시작으로 총 7회에 걸쳐 ‘판결비평칼럼-양승태 대법원장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대법원을 평가하고, 향후 새롭게 임명될 대법원장의 요건과 이후 대법원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제시해보려 합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1. 2009년 6월,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 교사들은 정말 유죄였나 (곽노현) 
  2. 문재인의 탈원전 ‘공론화’ vs. 제주 해군기지 ‘날치기’ (김필성) 
  3. ‘시효’ 뒤에 숨은 국가배상책임 (이상희)
  4. 신속하고 잔인하게 – 쌍용차 대법원 판결 회고 (김태욱) 

¶ 이번 칼럼의 필자는 이상희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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