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폴리시] 환율 헤지 안 하면 해외 주식 이익 실현할 때 엄청난 손실 불가피… 수급 불균형이 문제, 환율 개입 아니라 환율 안정이 핵심. (⏳5분)
“젊은 사람들이 하도 해외 투자를 많이 해서 왜 이렇게 하냐고 물었더니 ‘쿨하잖아요’라고 답하더라. 정말 깜짝 놀랐다. (해외 주식 투자가) 무슨 유행처럼 막 커지고 있는데 걱정이 된다.”
이창용(한국은행 총재). 2025.11.27.
이창용(한국은행 총재) 발언이 입 도마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서 “1500원대 환율에 우려는 없느냐”는 로이터 기자 질문에 답하다가 논란을 샀다. 고환율 장기화 책임을 젊은층 중심의 *‘서학개미’*에 돌리는 것으로 비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 서학개미:
해외 주식, 특히 미국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한국의 개인 투자자를 지칭하는 주식 시장 속어. ‘서학’(西學)은 서양 학문이나 문물을 뜻한다.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동학개미’에 대응하는 표현이다.
서학개미 탓에 환율 급등, 틀린 말일까.
- 100%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국 주식 투자액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환율이 1500원대를 향해 가파르게 오르던 지난 10월과 11월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각각 68억 5499만 달러, 59억 3442만 달러로 역대 최대 수준이었다.
- 지난 10월 무역수지 흑자(수출액-수입액)가 60억 5700만 달러 규모(관세청)라는 걸 감안하면, 외국에서 벌어들인 외화보다 주식 투자로 나간 외화가 더 많은 것이다.

왜 비판이 나왔나.
- 일부 기자들은 이창용 발언에 비판이 나오는 이유를 기명 칼럼으로 짚었다.
- 서울경제 기자 한동훈은 “개인 투자자들이 미국 주식을 사는 것은 ‘멋져 보여서’가 아니라 미국 기업의 성장성에 대한 믿음이 크기 때문”이라며 “국내 주식의 펀더멘털 매력이 떨어지는 본질적 문제를 제쳐두고 해외 투자 행태 자체를 비난하고 환율 급등 주범으로 모는 것은 비판 받을 만하다”고 지적했다.
- 이데일리 기자 원다연은 “금융 당국자들은 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는 서학개미를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이들이 돌아올 만한 시장 환경을 만드는 데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고 충고했다.
- 정치권도 비판했다. 최수진(국민의힘 원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문제를 개인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왜 국민이 국내보다 해외 시장을 선택하게 됐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비판했다.
- 경제 유튜버 ‘슈카’도 “국민연금도 돈 벌자고 해외 주식을 늘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금융감독원장 이찬진, 한국은행 총재 이창용, 부총리 구윤철, 금융위원장 이억원. 사진=기획재정부.
“오죽하면…” 서학개미에 공감 표한 금감원장.
- 이찬진(금융감독원장) 발언은 이창용과 온도 차를 보였다. 1일 기자간담회에서 “오죽하면 청년들이 해외 투자를 하겠느냐는 생각에 정서적으로 공감한다”며 서학개미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 이찬진은 “서학개미 인구 분포는 골고루 퍼져 있어 청년층 비중은 생각보다 작다. 40~50대 비중이 높다”면서 “이분들이 위험을 인식하고 투자 판단을 하는지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 개미 달래기와 별개로 정부는 해외 주식 투자 열기를 억누르고자 한다. 내년 1월까지 증권사의 해외 주식 판매 실태를 점검한다. 수출 기업 환전 및 해외 투자 현황 파악에도 나섰다. 이찬진은 금감원이 이달부터 증권사를 대상으로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 적정성을 점검키로 한 데 대해 “해외 주식 투자를 직접적으로 규제한다는 차원은 전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창용 발언, 크게 보면 달리 보인다.
- 이창용 발언 일부를 지나치게 부각한 면도 있다. 이창용은 지난 27일 환율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지적을 했다. ‘유행’ 발언보다 더 중요한 그의 발언을 요약·정리했다.
- 첫째, 너무 한 방향으로 환율의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내국인의 해외 주식 투자가 주도하고 있는데 다른 국가 통화와 달리 원화 가치만 떨어지고 있다. 유독 원·달러 환율만 상승하고 있다.
- 둘째, 고환율이지만 과거와 달리 외환시장에 불안은 없다. 예전엔 환율이 1400원을 넘어가면 금융 안정을 걱정했다. 은행들의 *외화 LCR*에 문제가 생기거나 외채 부담으로 금융 위기에 직면하는 등 과거 금융 위기와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CDS* 프리미엄 등 외환 안정성 지표에도 문제가 없다.
- 셋째, 환율로 인해 위너(winner)와 루저(loser)가 발생하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환율이 높은 수준으로 계속 유지되면 수출업체는 이익을 보지만, 내수업체는 손해를 본다. 해외 자산에 투자한 이들은 높은 수익을 얻지만 고환율로 인한 고물가는 저소득층에 피해를 끼친다.
- 넷째, 레버리지를 활용해 해외 주식에 ‘빚투’한 개인 투자자들에게 묻고 싶다. 리스크 관리 제대로 하고 있나? 지금이야 원화 가치 절하 국면(환율 상승)이라 원화로 찍힌 해외 주식의 장부가가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훗날 매도할 땐 환율 변동으로 수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AI 주식 등 해외 자산에 버블 이야기도 많은 만큼 위험 관리가 중요하다.
📌 외화 LCR(Liquidity Coverage Ratio,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
은행의 외화유동성 충격에 대한 대응 능력을 측정하는 지표. 고(高)유동성자산을 1개월 순현금유출로 나눈 비율. 금융위기 시 자금 인출 사태와 같은 심각한 유동성 악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 비율이 높을수록 은행이 당국 지원 없이도 자체적으로 오래 견딜 수 있다.
📌 CDS(Credit Default Swap, 신용부도스왑):
채권을 발행한 기업이나 국가가 부도날 경우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금융파생상품.
외환시장 ‘공룡’ 국민연금 어찌할까.
-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점이 있다. 국민연금이다.
- 지난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 투자 규모는 508.2조 원이다. 기금적립금의 37.3%를 차지하고 있다.
- 이찬진은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공룡이 됐기 때문에 해외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젠 외환시장에서도 공룡이 돼 버렸다”고 했다. 즉, “국민연금이 환율을 결정하는 주류가 돼 버린 상황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여부보다 중요한 사안이라는 게 이찬진 생각이다.
- 최근 정부는 국민연금 수익성과 외환시장 안정이 조화를 이루는 ‘뉴 프레임워크’(New Framework) 논의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언론 다수는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환율을 방어한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노후 자산을 환율 방어 도구로 사용한다는 비판이다.

수정 불가피한 환 헤지 전략.
- 국민연금 기금의 생애주기상, 적립기에는 해외 투자가 확대되어 환율 상승 압력이 증대된다. 해외 자산을 매입하려면 갖고 있는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야 하기 때문에 원화 가치는 떨어진다.
- 반면, 기금이 감소하는 국면에서는 해외 자산 매각 과정에서 환율 하락 압력이 증대된다. 해외 자산을 매각하면 외환시장에 달러가 늘어 원화 가치는 상승한다. 안정적 자금 운용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환 리스크’ 관리가 필수적이다.
- 국민연금은 2022년 말 *전략적 환 헤지 제도*를 도입했다. 환 헤지 발동 조건은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언론 보도 및 증권사 보고서 등을 통해 ‘전략적 환 헤지 발동선은 환율 1480원 안팎’이라는 분석이 공유돼 왔다.
- 이창용은 “해외 자산에 헤지를 언제부터 할지, 또 헤지를 언제 풀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정한 대외비 규칙이 있지만, 패가 다 까인 상태”라며 “신축성과 전략적 모호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 내부에서 환 헤지 발동 조건을 더 모호하게,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재량권을 더 부여하는 식으로 규칙을 개정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또 다른 논쟁적 이슈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 헤지 제도:
원·달러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해외 투자 자산 중 최대 10%까지 환 헤지를 시행하는 제도. 여기에 더해 국민연금은 재량에 따라 해외 자산의 5%까지는 ‘전술적 환 헤지’도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