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미디어에 비친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김은숙 작가의 ‘다 이루어질지니'(2025) (⌚8분)
한국 드라마 작가 김은숙은 지난 20년간 ‘감정의 언어’를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한 작가다. ‘파리의 연인'(2004)에서 시작된 ‘김은숙 문법’은 이후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더 글로리’를 거쳐 2025년 ‘다 이루어질지니’에 이르렀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사랑과 권력, 기억과 구원의 순환 구조를 취해왔고, 이는 한국형 멜로드라마가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이 브랜드의 정점이자 변곡점이다. ‘램프의 정령’이라는 판타지와 ‘감정이 사라진 인간’이라는 AI적 설정을 통해, 김은숙은 21세기 감정의 위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즉, 이 작품은 ‘사랑은 여전히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AI 시대에 감정은 여전히 인간적인가?’라는 새로운 언어로 다시 묻는다.
김은숙의 세계는 언제나 감정의 과잉으로 빛났다. 대사는 시처럼 운율을 가졌고, 사랑은 초월적 운명처럼 제시됐다. 김은숙은 ‘로맨스의 제국’을 세웠고, 한국 시청자는 그 감정의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울고 웃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제국이 흔들린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그 제국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태어난 김은숙의 자기해체 드라마다.

초월에서 역사로: ‘도깨비’와 ‘미스터 선샤인’
2016년의 ‘도깨비’는 김은숙 서사의 정점이었다. 불멸의 존재와 인간 여성의 사랑이라는 전형적 구조 속에서, 작가는 ‘기억과 시간의 중첩’을 시각화했다. 도깨비(공유)는 천 년을 살아도 망각하지 못하는 존재이고, 그의 불멸은 축복이 아닌 형벌이다. 그는 “기억이 남는 한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때 김은숙은 감정을 ‘시간의 지속’으로 정의했다. 사랑이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망각하지 못하는 기억의 형태다. ‘도깨비’의 사랑은 종교적이고 초월적이며, 감정의 무게가 기억의 깊이로 환산된다. 이 시기 김은숙의 낭만은 여전히 신화적이며, 감정은 초월의 언어로 기능했다.
‘미스터 션샤인'(2018)은 감정의 초월에서 역사로 이동한 작품이다. 불멸 대신 ‘민족’과 ‘기억’이 서사의 축을 이룬다. 조선의 노비 출신 유진 초이(이병헌)가 미군 장교로 귀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식민과 근대의 교차 속에서 사랑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드러낸다.
여기서 김은숙은 사랑을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한다. 유진과 애신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나라를 잃은 자들의 감정사다. 사랑은 더 이상 완성되지 않고, 기억으로만 남는다. ‘미스터 션샤인’의 대사 “나는 너의 조국이었기를 바랐다”는 개인적 감정이 집단의 역사로 전환되는 순간을 상징한다. 이로써 김은숙의 감정 서사는 불멸에서 기억으로, 초월에서 역사로 옮겨간다.
‘도깨비’는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죽음과 기억)을, ‘미스터 션샤인’은 공동체적 윤리(역사와 희생)를, ‘다 이루어질지니’는 기술 문명 속의 감정(기억의 소실과 복원)을 다룬다. 즉, 김은숙의 세계는 점점 감정의 사회학적 층위를 획득한다.


기억 이후의 감정: ‘다 이루어질지니’
‘다 이루어질지니’는 더 이상 불멸도 역사도 중심이 아니다. 이제 감정은 데이터화된 세계 속의 결핍으로 그려진다. 감정을 잃은 인간(수지)과 감정을 흉내 내는 정령(김우빈)의 만남은, AI 시대의 감정 윤리를 은유한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초월이 아니라 ‘복원’이다. 기가영*은 감정을 되찾아야 하고, 지니*는 인간성을 배워야 한다(*KT 스마트 스피커 ‘기가지니’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유머 혹은 PPL). ‘도깨비’가 신적 존재를 인간화했다면, ‘다 이루어질지니’는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만드는 이야기다. 이것은 감정이 ‘잃어버린 능력’이 된 시대의 자화상이다.
김은숙의 낭만은 더 이상 영원의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다. 디지털 시대의 윤리 선언처럼, 사랑은 이제 타고나는 감정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택되는, 그러니까 풀어서 설명하면, 보완해야 하는 인간적 결함이다.
김은숙의 대사는 오랫동안 ‘AI 같은 문체’로 불렸다. 특정 리듬, 대칭구조, 반복되는 은유(빛/어둠, 불멸/소멸, 선택/운명) 등은 일종의 코드처럼 작동한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그 코드가 스스로를 자각하는 최초의 작품이다. 즉, 김은숙은 자기 패턴을 드라마 속에서 주제화한다. 인간이 감정을 잃고, 정령이 감정을 학습한다는 설정은, 김은숙 자신이 만들어온 감정 서사를 스스로 복제하고 있다는 메타적 인식이다. 이는 ‘감정의 알고리즘화’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읽힌다.
감정이 자동화될수록, 감정의 진정성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다 이루어질지니’는 바로 그 질문을 던진다. AI는 인간의 말을 흉내 내지만, 인간은 감정을 흉내 낸다. 결국 진짜 감정이란, 그 ‘흉내의 실패’ 속에서만 드러난다.

‘기가영’ ― 감정 데이터 제로의 사이코패스
‘다 이루어질지니’의 주인공 기가영(수지)은 성공한 콘텐츠 기업의 CEO이자 스타 인플루언서다. 세련된 외모, 완벽한 언어, 냉정한 판단력. 그녀는 ‘모든 것을 이룬 여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 드라마는 그녀의 이면을 드러낸다. 가영은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사랑도, 슬픔도, 공감도 없다. 그녀는 감정을 관찰할 뿐, 경험하지 않는다. 기가영(Giga+0)이라는 작중 이름은 의도적이다.
김은숙은 이 인물을 사이코패스로 설정함으로써,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감정의 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녀가 20년간 써온 사랑의 문법 ― 설렘, 구원, 희생 ― 이 가영의 세계에서는 모두 기능하지 않는다. 이제 김은숙의 주인공은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가영은 감정의 빈 껍데기 속에서 산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을 데이터처럼 수집하고, 슬픔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녀가 운영하는 콘텐츠 기업은 ‘감정을 판매하는 플랫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이 없는 인물이 감정을 상품화한다. 이 지점에서 ‘다 이루어질지니’는 단순한 심리 스릴러가 아니라 플랫폼 자본주의의 정서적 풍경화로 변한다. 김은숙은 기가영을 통해 이렇게 묻는 거 같다:
‘감정이 데이터가 된 감정 경제의 시대,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까?’

이 질문은 김은숙 드라마의 역사적 궤적을 뒤집는다. 이전의 그녀가 감정의 힘을 믿었다면, 이제는 감정의 기계화와 피로를 그린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감정의 끝’에 서 있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가영을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 상실은 윤리적 타락이 아니라, 시대의 증상이다. 감정이 과잉된 사회, SNS의 연출된 공감, ‘좋아요’와 ‘감정 이모티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된다.
가영은 타인의 감정을 흉내 내며 살아남는다. 그녀의 차가움은 방어이고, 그녀의 무표정은 자본의 윤리 속에서 감정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다. 결국 김은숙은 가영을 통해 ‘감정 노동의 피해자’이자 ‘비감정의 실천자’로서의 현대인을 그린다. 무감정은 악이 아니라, 공감이 강요된 시대의 부산물이다.
기가영의 회사는 AI를 이용해 감정을 측정하고, 사용자의 기분에 따라 콘텐츠를 추천한다. 기가영은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알고리즘이 대신 느껴주니까”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냉소처럼 들리지만, 사실 김은숙이 던지는 가장 철학적인 질문이다. 기가영은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이자, 알고리즘이 만든 인간이다.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 감정과 데이터의 경계 위에 서 있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그 경계에서 감정의 존재론을 다시 묻는다.
감정 과잉에서 감정의 부재로
‘다 이루어질지니’는 김은숙 서사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도깨비’에서 감정의 신화를 썼고, ‘더 글로리’에서 감정의 복수를 그렸다면, 이제 ‘다 이루어질지니’에서는 감정의 부재 자체를 서사화한다. 이것은 단순한 주제의 변화가 아니다. 그녀가 수십 년간 구축한 ‘감정의 제국’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선언이다. 김은숙의 대사는 여전히 리드미컬하지만, 이제 그 리듬은 침묵과 공백을 전제로 한다. ‘다 이루어질지니’에서는 말보다 정적이 더 중요하다.
기가영은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감정을 계산한다. 이때 감정은 감동의 재료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가 된다. 김은숙은 그 권력의 언어를 분석하며, 자신이 만든 감정의 제국을 해체한다. 하지만 ‘다 이루어질지니’는 그저 냉소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김은숙은 감정이 결여된 세계 속에서도 ‘새로운 윤리’를 찾아간다.
가영은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타인을 통제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감정이 없는 인간이지만, 그 무감정 속에서 ‘무감정의 윤리’라고 부를 만한 자기 책임의 형태를 배운다. 감정의 과잉이 도덕을 부패시켰던 시대에, 가영의 냉정함은 오히려 진실의 공간을 만든다. 그녀는 울지 않지만, 정직하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지만, 위선적이지 않다.

김은숙의 대사와 수지의 절제가 만나 이전의 어떤 김은숙 작품보다 정적(靜寂)의 미학에 치중한다. 이제 시청자는 울지 않고도 감정의 밀도를 느낀다. 얼굴은 항상 정제되어 있고, 표정은 최소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 미세한 눈동자의 흔들림, 목소리의 간격, 손끝의 긴장감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감정을 흉내 낼 때의 불안’을 표현한다. 그것이 ‘다 이루어질지니’가 제시한 새로운 ‘멜로드라마의 윤리’다.
한편, 김은숙은 이번 작품을 통해 ‘공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피로한지를 보여준다. ‘더 글로리’가 ‘복수의 윤리’를 물었다면, ‘다 이루어질지니’는 ‘공감의 윤리’를 의심한다. 가영은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도 울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아픈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당신의 데이터예요.”
이 대사는 잔혹하지만 정직하다. 김은숙은 이를 통해 감정이 진실의 보증이 되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 감정은 윤리의 근거가 아니라, 플랫폼에서 거래되는 소비재의 하나일 뿐이다.
감정과 사랑의 알고리즘을 넘어서
‘도깨비’의 불멸, ‘미스터 션샤인’의 기억, ‘다 이루어질지니’의 데이터. 이 세 작품은 김은숙이 감정을 사유하는 세 가지 방식이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낭만의 언어로 시작하지만, 끝은 인간의 구원으로 수렴한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그 종착점에서 감정의 자동화를 거부한다.
20년간 김은숙은 감정 서사를 통해 한국 사회의 로맨틱한 욕망을 포착해왔다. 그러나 감정의 상품화가 극에 달한 현재, 그녀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부정한다. 김은숙은 이제 ‘감정 없는 시대의 드라마’를 쓴다. 그녀는 ‘감정의 작가’에서 ‘비감정의 분석가’로 이동한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그 이동의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김은숙이라는 작가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자기비평의 서사다.
생각해 보라. 김은숙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은 오랫동안 ‘사랑받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기가영은 다르다. 그녀는 사랑받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자기 존재를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김은숙이 구축한 여성 서사의 진화다. ‘도깨비’의 은탁이 구원받는 여자였다면, ‘다 이루어질지니’의 기가영은 스스로 구원하는 여자다. 그는 감정의 부재 속에서 자율을 발견한다. 이 변화는 단순히 캐릭터의 전환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 속 여성 서사의 지평을 확장한다. 감정이 없는 여성 주인공, 사랑을 거부하는 여성 주인공, 그 자체가 이미 일종의 시대적 선언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청자 또한 가영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김은숙의 의도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시청자에게 ‘공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드라마다. 그 대신 관찰하라, 생각하라, 느끼려 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로써 드라마는 감정의 소비 구조를 거부한다. 시청자는 감동의 피로에서 벗어나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서사의 실험이 아니라, 시청 경험의 혁신이다. 김은숙은 이제 시청자를 울리는 대신, 시청자에게 감정의 본질을 묻는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제목부터 역설이다. 모든 것을 이룬 주인공,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 그 완성은 곧 공허다. 이 작품은 김은숙 드라마의 종착지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녀는 감정의 제국을 스스로 붕괴시키며, 그 폐허 위에 ‘비감정의 윤리’라는 새로운 세계를 세운다.
수지의 가영은 그 세계의 첫 주민이다. 그녀는 차갑지만 정직하고, 무표정하지만 살아 있다. 그녀의 무감각 속에는 현대인의 피로한 감정의 잔향이 깃들어 있다. ‘다 이루어질지니’는 김은숙이 쓴 가장 조용한 선언이다. 이제 사랑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의심할 때다. 그리고 기가영은 그 회의를 담은 얼굴이다. 그녀는 감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초상이며, 감정의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냉정한 인간의 얼굴이다.
이제 김은숙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울지 않는 여자를 통해, 감정의 끝에서 다시 인간을 말하기 시작한다. AI가 김은숙의 대사를 완벽히 모방할 날이 오더라도, 김은숙의 세계는 여전히 ‘감정의 실패’를 사랑하는 인간의 서사로 남는다. 그 실패가 바로 인간다움이며,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낭만의 마지막 숨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