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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리트머스는 나꼼수까인가? : 대안 미디어의 전문성 활용에 대해

최근 우리의 어그로 히어로 진중권을 비롯한 몇몇 유명 논객들이 리트머스 블로그를 열었다. 나꼼수의 대항매체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딱히 나꼼수보다 낫다고 할 구석은 없어 보인다. 그들이 내세우는 심층과 소통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게으른 호모 사피엔스이므로 대충 읽으려는 분들을 위해 요약 매뉴얼을 첨부했다.

요약 / 목차

이 글의 주장 : 활동가/논객을 전문가와 구별짓지 말고, 자기 층위와 활동을 하되, 전문가와 폭넓게 링크하고 주장을 계속적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전문가는 숨어있는 ‘우리 모두’다. 어떤 작은 이슈라도 자신의 생활 영역, 관심 영역이라면 누군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A. 심층과 소통에서 가장 거리가 멀던 논객 진중권이 주축이 되어 ‘안티 나꼼수’가 아닌, 심층과 소통의 장을 열겠다고 ‘리트머스’라는 팀블로그를 열었다. 훌륭한 뜻이다.

B.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심층성 없는 글을 쓰고서는 논리가 빈약하기에 심층성을 더해야 한다는 요구를 무시하고, 심지어 조롱하고 있다. 이래서야 나꼼수가 훌륭해 보일 뿐!

C. 이는 그들의 전문가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전문가는 믿을 수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자신들만으로 심층성과 소통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듯.

D. 하지만 복잡화,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 전문가의 역량과 도움은 더욱 강하게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라도 미디어적 가치를 위한 소통을 열고, 심층성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E. 웹은 대중의 지혜와 전문성을 모으고, 대중성과 심층성을 상호보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미 주류 언론에서도 조금씩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방향을 추구하지 않는 한 전통 저널리즘의 단점을 벗어날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창을 닫으면 좋다. 그래도 관심 있는 사람은 각 알파벳 제목 아래의 요약만 봐도 좋다. 진중권과 리트머스를 까고 싶은 분은 B와 C만 읽어도 좋다. 또 심층과 소통을 어떻게 더해서 미디어적 가치를 높일 것인지에 관심이 있으면 D와 E만 읽어도 좋다. 시간이 넘치는 사람은 다 읽고 독후감을 써도 좋다.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고 싶다면 얼음을 넣어 마시면 좋고…

 

A. 심층과 소통을 무시하는 진중권, 심층과 소통에 도전하다!

간단 요약 : 소통과 심층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여 온 진중권이 리트머스 팀블로그를 필진들과 만들어 소통과 심층을 내세웠다. 진중권이 어떤 모습을 보였듯 이는 미디어에 매우 중요한 가치다. 그래서 잘 됐을란가?

최근 리트머스라는 팀블로그가 생겼다. 오오! 리트머스, 이것은 산성인지 염기성인지 가려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아닌가! 그는 이를 통해 ‘합리적 담론이 오가는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진중권의 해당 트윗은 여기서 확인하자.

그런데 진중권이 ‘합리적 담론’이라니! 일단 그가 그간 트위터에서 행동부터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서 무슨 토론과 논쟁인가? 글자 수는 140자로 제한, 뒤섞이는 타임라인, 상호간 토론은 없고 왜곡된 트윗이 난무하고. 이쯤되면 축구장에서 피겨할 수 없다고 물 채워 얼리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간 진중권이 보인 행태도 매우 좋지 않았는데, 논점 이탈, 상대방의 주장 곡해는 물론 진중권에게 실망하다, 정말로, 심각하게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 사실관계를 무시하는 글을 올리고도, 올바른 비판에 욕설과 조롱으로 대응하고는 했다. 합리적 담론을 하자는 사람이 이미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소통과 연대의 현장.jpg

그래서 진중권은 ‘나꼼수에 반하는 매체를 만드는 게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됐다. 하지만 리트머스 팀은 ‘리트머스’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글을 통해 자신들은 ‘안티 나꼼수’가 아닌 ‘심층성’과 ‘소통’을 전면에 내건 사이트라 주장했다. ‘악화를 구축’과 ‘연대’라는 원칙이 추가로 있지만, 이 둘은 심층성과 소통에 부대된 원칙이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운 원칙은 완전히 뭉개지고 있다. 트위터 사용자 @B모 씨의 ‘리트머스는 왠지 점점  나꼼수 까고 싶은 글쟁이, 먹물들의 모임이 되어가는 듯한데’라는 트윗 그대로의 느낌까지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박권일의 관성적 야권연대 넘어 탈핵연대로라는 글을 둘러싼, 리트머스 필자들의 반응을 통해 잘 보여지고 있다.

리트머스가 내세운 심층성과 소통은 매우 훌륭한 지향점으로, 모든 미디어가 포용해야 할 할 미덕이다. 지금까지도 이런 논의는 많았으나 돈, 시스템, 관성을 빙자한 귀차니즘 등의 한계로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성 언론과 리트머스가 이를 실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소통’과 ‘심층’에 대한 개념을 좀 잘못 짚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은 모두 소통을 단순히 댓글 달고 이야기 나누는 정도로 생각한다. 또 심층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자체 조직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미디어적 가치에서 바라볼 때 점점 소통은 심층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소통을 통해 다양한 비판과 대안을 수렴하고, 열린 모델을 통해 자체 조직 외부에서의 전문성을 끌어들여 심층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리트머스가 어떻게 심층성과 소통을 무시했는지 일련의 사건을 재구성하며 살펴보고, 심층성과 소통을 살리는 대안적 미디어 모델에 대해 모색해 보도록 하겠다.

B. 리트머스가 펼친 심층과 소통의 아름다운 현장 : 망했어요…

간단 요약 : 필진 박권일은 반핵 글을 썼으나 기술적 고려가 전혀 없음으로 심층성 측면에서 실패. 기술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비판에 대해 상대에게만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며, 무시하고 조롱함으로 소통에서도 실패. 더군다나 리트머스 필진 고은태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임.

박권일은 앞서의 글을 통해 ‘반핵’을 이야기한다. 이 글은 ‘반핵’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는데, 전혀 ‘심층성’이 없이 기술적인 이해와 검토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단순히 ‘반핵’을 외치는 것은 쉽지만, 이러한 논리가 먹히기 위해서는 예산과 기술을 검토해야 한다. 핵문제는 환경 문제인 동시에 에너지 수요공급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적인 에너지 수요가 존재한다면, 향후 어떻게 이 에너지 수요를 조절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 없이는 반핵이 불가능하다.

그냥 넘기기에는 난관이 많다. 제 5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따르면, 한국의 에너지 수요는 2024년까지 연평균 3.1%늘어나게 된다. 기업에 대한 역누진세도 문제시되지만, 신한금융투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기준 한국의 산업용 대비 가정용 전기요금은 1.48배로 일본의 영국, 일본, 미국과 별 차이가 나지 않으며, 프랑스는 2.82배에 이른다.

또 독일을 예로 들지만 2011 해외전력산업동향에 따르면, 독일은 2030년 예상 전력 수요가 지금과 전혀 차이가 없다. 게다가 인접국 프랑스 등에서 전기를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하는데 프랑스는 원자력 점유율이 51%에 이르는 대표적인 원전 국가 중 하나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전력 수입이 거의 불가능한 몇 안 되는 나라라는 점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중국을 통해 서해바다 건너 공급받는 방법이 있겠으나, 전선 길이도 문제고 서해에는 상어가 있기에 피복을 굉장히 두껍게 해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또 북한으로부터 받기에는…

모르겠다, 노래나 한 곡 상큼하게 듣고 계속하자.  일단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대체 누구를 믿고-_-…

 여기에다가 해외에서는 되려 향후 재생에너지 비중을 축소하고 핵발전소 증강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는 흔히 OCI 등의 주식보고서에서는 경제위기 때문으로 해석되지만, 사실 온난화 문제가 더 크다. nature에서도 지적하듯, 원자력 발전은 저탄소라는 점에서도 가치의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다. 온난화는 원자력의 문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문제로 안용열 박사는 이에 대해 원자력이 ‘유일한 대안일 수도 있다’고 할 정도. 이 밖에 다양한 자료를 원하신다면 위키피디아를 훑는 것도 좋겠다.

뭔 소리냐면 삼성의 지분구조만큼 복잡한 문제라는 거다.

토성이라는 트위터 이용자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박권일은 토성의 기술적 논의 필요성을 ‘약치지 말라’는 표현까지 쓰며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이며 논쟁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토성에게 대규모 시설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를 요구하는 등 심층성을 요구하는 반면,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기 위한 심층성은 내놓지 않고 ‘전문가 카르텔의 조작된 진실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후에는 선언적 글을 쓴 것뿐이라 주장하지만, 처음부터 선언적 글임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토성에게 “그래서 후쿠시마에 비견될 만한 플랜트 사고가 무엇이 있느냐” 등의 팩트를 요구한 순간 이미 수사적 차원에 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에도 ‘숫자가지고 장난치지 마라’고 대응한다. 이래서는 논의가 진행될 수 없다.

참고로 박권일이 무시하는 보팔가스 누출사고는 20세기 이후 최대의 참사였다. 오죽하면 엔하위키에서는 “보팔 참사, 보팔 대참사 등으로 불리는 20세기 최대의 산업 재해 중 하나. 인명피해만큼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환경 재앙이라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가뿐히 능가한다. 영문으로는 아예 Bhopal disaster라 하여 네임드 재앙으로 취급.”이라고 설명할 정도. 당장 한글 위키피디아만 찾아봐도 사고규모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사실 ‘수사적 구호’의 영역에서만 보자면 박권일의 주장과 토성의 주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정도는 다르지만) 핵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다만 토성은 대규모 시설이 지닌 잠재적 위험성 중에서 핵의 위험성이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으며, 에너지 수요 문제가 크기 때문에 당장의 전면적 폐지는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때문에 우선 원자력을 어떻게 안전하게 활용하며 줄일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박권일은 ‘탈핵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며 좀 더 급진적인 자세를 보이다가, 캡콜드의 투자를 통한 재생에너지 기술 발전이라는 (구체성 없는) 대안에 동의하기도 한다. 이 정도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토성을 왜 그리 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박권일은 수사적 구호 자체에 매몰되어서 마피아라는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논리로 대응하고, 그 과정에서 비꼬고 상대를 무시하는 언사도 다수 등장했고, 고은태는 ‘거들 뿐’ 모드이다. 여기서는 거의 화룡정점이다.

반지성주의는 리트머스 멤버인 이택광으로부터 유행했는데, 전문가의 방언과 대중의 자학에서 알수 있듯 정작 이택광 자신이 논리가 서지 않는 글로 대중을 비판한다는 문제가 제기된 개념이며, 정확한 의미도 없는 대중혐오적 말장난에 가깝게 쓰인다. 또 반문명, 반기술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토성이 이야기하는 건 기술을 무시하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쪽에 가깝다. 이는 오히려 경시하면 안 되는 필수 요소가 아닌가? 아무리 넘어가도 이는 ‘소통’이라는 원칙과도 거리가 멀다. 이쯤 되면 상대방이 자기 의견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일단 조롱하고 까고 보는 진중권 바이러스(…)라도 도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참고로 진중권은 이런 책도 썼다. 유사품 박홍의 레드 바이러스에 주의할 것

C. 전문가를 불신하고 혼자서 해결하려면 심층은 불가능!

간단 요약 : 리트머스 필진인 한윤형, 고은태, 박권일은 전문가는 믿을 수 없고 현실 저널리즘에서 필요도 없다고 강변. 결국 자신들은 문제가 없다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논리는 심층성과 소통을 내세운 취지와 반대되는 무책임한 모습. 또 기본적 언론 윤리와도 어긋남.

이들은 심층과 소통에서부터 멀어진 것일까? 사실 이게 다 통하지만 편의상 먼저 심층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한윤형은 (글을 안 본건 차치하고라도) 이를 ‘활동가의 층위’니까 괜찮다고 이야기하는데, 심층성 은 까마득히 잊은 모양이다. 그리고 활동가들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많고, 또 그래야 설득력도 강해진다.

그렇다면 리트머스 필진들이 스스로 ‘심층성’을 들고 나왔음에도 심층성, 전문성이 필요 없다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이는 그들의 트윗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주요 논리는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 전문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므로 신뢰성이 낮다 : 신뢰도 문제
2. 매체에 인용되는 전문가는 정파적 논리에 이용될 뿐이다 : 매체 정파성 문제
3. 전공 전문가들은 저널적 지식인보다 현실문제 발언에 더 무능하다 : 스킬/대중성 문제
4. 괜찮은 전문가 찾으려면 못 찾을 건 아닌데 시간이 없다 : 시간 문제

요즘 걸그룹 단신 써니, 전효성, 전보람 등이 맹활약하는 기념으로 땅콩처럼 하나하나 까보자.

1.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므로 신뢰성이 낮다 : 신뢰도 문제

고은태가 이걸 무지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또 박권일의 핵 마피아론도 상당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고은태는 ‘교통문제에 대해 교통 전문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은 기껏해야 대중교통, 지능형교통망 등 교통에 돈이 들어가는 길 뿐’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대중교통을 교통수요 대책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대책이 교통수요 대책이 될 수 있는 건가? 전문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논리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선동에 그칠 뿐이다.

그보다 고은태는 최소한의 사실관계 체크부터 좀(…)

2. 매체에 인용되는 전문가는 정파적 논리에 이용될 뿐이다 : 매체 정파성 문제

한윤형과 박권일이 이를 이야기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자기 정당화는 실패다.

내 지인 중에도 전현직 기자가 꽤 있는데, “멘트 한 마디 따려고 수십 마디를 해야 돼”라고 고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현재 올드 미디어의 문제이고, 리트머스는 그 문제를 넘어 심층으로 나아가려고 만든 매체가 아니던가?

또 훌륭한 기자들을 보면 그래도 전문가를 잘 활용한다. 다양한 질문을 통해 자신이 잘 모르는 지식을 보완하고, 더 쉽게 독자들에게 사실관계를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노력도 없이 기존 매체가 그런데 우리한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따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기존 매체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따라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3. 실제 전문가들은 저널적 지식인보다 현실문제 발언에 더 무능하다 : 스킬/대중성의 문제

한윤형의 말인데 역시 맞는 말이고 자기 정당화는 실패다. 의외로 중요한 부분인데 ‘현실문제 발언에 더 무능’한 이유는 바로 ‘글을 못 쓰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한윤형은 이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며 전문가 무용론을 강화한다.

일단 여기에는 전문가, 특히 기술 분야에서 일하는 이에 대한 오해가 깔려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연구하거나 현업 종사자다. 당연히 이 쪽 관련 글을 쓰는 방식으로 훈련되어 있고, 이 글을 쉽게 전달하는 건 저널리즘 종사자의 몫이다. 1차적 문제는 현업 종사자와 연구자의 글이 어렵기보다 저널리즘 종사자의 노력 부족이 크다. 기술 쪽에도 엄청 전문적인 논문만 있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리뷰 논문’이 있다. 리뷰 논문의 서론, 결론부라도 읽는 정도의 공부도 없이 ‘어차피 이해 안 가’식으로 근거 없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 어떻게 하겠는가?

또 글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 문제도 편집자의 노력에 의해 보완 가능하다.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을 받아 인용, 활용할 수 있음은 물론, 필요한 자료를 요구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해당분야 검색력은 일반인과 다르다) 이번 반핵 문제만 해도 행정가 레벨은 아니겠지만 토성, 베트남 갑오징어, 최우형 등이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부여준 바 있다. 또 좀 어렵다 싶으면, 글을 요구한 후 편집자가 교정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글을 못 쓴다는 이유로 그들에게서 전문성을 활용해 조언을 얻는 것조차 포기한다는 건 심층성을 좇겠다는 취지를 무시한 게으름에 지나지 않는다.

4. 괜찮은 전문가 찾으려면 못 찾을 건 아닌데 시간이 없다. : 시간 문제

한윤형은 동아리 회원이 아니라 기자다. 그거 하라고 월급 주는 거다(…) 물론 기자들도 층위가 다양해서 어떻게든 사실관계에 조금이라도 더 심층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기자부터, 적당히 월급 먹고 살자는 생활형 기자까지 다양하니까 그 중 어디를 선택하는지는 본인의 자유이다. 뭐, 회사 일이 아니라 해도 리트머스 필진들 스스로가 ‘심층성’을 좇는다고 글을 쓰지 않았는가?

D. 마인드의 변화가 필요하다 : 심층을 위한 소통, 소통을 위한 심층!

간단 요약 : 리트머스 필진들이 심층과 요약을 놓친 데는 결국 전문가에 대한 과한 불신으로 자기 역량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웹은 열린 모델로 전문성 있는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기 너무나 좋은 공간이다. 이제 모든 미디어는 열린 소통 모델로 전문성을 더해가야 한다.

반복학습이 중요하다고 하니, 앞서 리트머스 팀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 전문가는 자기 이익에 흔들리는 존재이고
– 매체들은 자기 정파성에 맞춰 전문가를 이용할 뿐이고
– 전문가는 글도 못 쓰고, 사람들이 알아먹지도 못하고,
– 괜찮은 사람이야 있겠지만 찾을 시간도 없기에
– 나는 전문가를 활용하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나 논리… 좀 위험하다고 본다. 그냥 이슈파이팅 한다면야 상관 없지만, 정말 심층, 소통… 이런 거 추구해서 좋은 미디어가 되려고 한다면 이들의 생각은 동의하기 힘들다.

여기서 한 트위터 사용자 @ye***의 말을 빌려오자. 이 부분에 대한 ye***의 생각은 반핵 : 슬로건과 도그마 사이에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옳은 말이다. 좀 더 합리적인 해결책을 위해서는 논지를 펼치기 이전에 다양한 지식들을 접하고 경청하여, 이해도를 높여야 아젠다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없으면 논리는 마치 나경원의 피부만큼이나 연약해지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의 도움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전문가 자체를 적대시, 현실에 무능력하다고 판단함으로 스스로 심층성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버려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심층성을 포기한 순간 이미 그들에게 소통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소통은 그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에 대해 ‘네,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등의 대응이 아니다. 피드백을 통해 더 나은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렴해 기존의 논리를 강화, 수정하는 과정이 미디어적 가치에서의 소통이다. 즉 전문적 의견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의 소통이 필요하다.

E. 대안 : 미디어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미덕

그렇다면 대안 미디어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미덕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웹에 전문가는 널려 있다. 미디어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활용해야 한다.
2. 우리 모두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다.
3. 심층과 소통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4. 대중성과 심층성은 충돌하지 않는다.
5. 모든 웹 문서는 베타 버전이다.

들어가기 앞서 심층성과 소통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많은 경우 기성 언론은 소통을 그저 댓글과 게시판을 여는 정도로 생각했고, 심층성을 제한된 전문가 풀에게서 좀 더 많은 정보를 받아적는 데 할애했다. 하지만 올바른 ‘미디어적 가치’에서 본다면 이는 열린 미디어 모델을 통해 부족했던 심층성을 다양한 통로를 통해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용하며 ‘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1. 웹에 전문가는 널려 있다. 미디어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활용해야 한다.

사실 요즘만큼 전문가를 찾기 쉽고, 또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심층성을 더하기 쉬운 세상이 없다. 당장 엔하위키만 봐도 그냥 알아서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을 내놓지 않는가? 심지어 진중권이 링크를 트위터로 던지며 자기 정당화를 꾀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들도 가끔 전문성의 부족과 저널리즘 훈련의 부족으로 그들이 만든 지식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류 또한, 더 많은 소통을 통해 지적하고 수정해낸다. 그리고 저널리즘 측면에서 훈련이 되어 있는 이들은 잘못된 팩트와 논리를 찾아내는 데 매우 유용하다.

또 게시판과 블로그에도 각종 이슈에 밝은 전문가들이 많다. 황우석 논문조작에서의 문제점을 제대로 제기한 곳은 BRIC 게시판이었고, 이택광의 오류를 지적한 곳도 아이추판다라는 블로거였다. 이처럼 네티즌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덕후성을 다양한 공간에서 발휘하고 있다. 이들에게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이끌어낸다면, 이전처럼 어렵게 전문성을 확보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트위터에서도 떡밥을 던지면 전문가가 등장할 때가 많다. 요즘만큼 많은, 다양한 전문가 자산을 쉽게 쓰는 일은 15년 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2. 우리 모두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다.

자수성가해 서울대를 가고 국회의원에 연예인까지 된 강용석같은 엄친아는 많지 않다. 배도 만들고, 장사도 해 보고, 국보법까지도 반대해 본 전지전능한 각하처럼 경험이 다양한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도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하나씩은 좀 특출난 지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간 TV와 신문은 항상 문제에 걸맞은 ‘타이틀’을 지닌 사람들을 원했다. 그래서 게임이 일으키는 공격성을 실험하기 위해 PC방 전원을 내리고는 심리학 교수의 인터뷰를 따는 뻘짓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굳이 그 타이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미 재야에는 특정 분야에 대해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 많다. 게임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만 해도 한둘인가? 페이스북의 게임 셧다운제 반대운동본부 그룹에서 다리 한 번만 건너면 아마 많은 전문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한윤형이 “이승환 류의 “먹물꺼져. 사실 오덕이 모든 걸 알고 있다.”인 듯”이라는 트윗을 올린 적이 있다. 이 내용은 상당한 곡해인데, 근거로 쓰인 글을 좀 알려주면 좋겠다. 각설하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겠다. 오덕이란 특정 분야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성 언론은 항상 직업과 직책 등 ‘타이틀’에 주목했기에, 이들의 지식에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전문지식은 놀라울 수준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글쟁이의 영역을 잠식할 거라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글쟁이에게 전문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번 반핵 이야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준전문가들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왜 리트머스는 그들에게서 전문성을 공짜로 부여 받을 기회를 걷어찼는가?

세상에는 별의별 전문가가 다 있다

위의 태연 손 사진처럼, 굳이 그렇게 큰 이슈가 아니라고 해도 작은 동네 교통 전문가 등등 사소한 이슈에 강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 아버지는 새누리당 만세를 외치지만 경주에서 운전수로 근무하기에, 적어도 생활인으로서 경주의 교통은 꽤나 잘 알 것이다.

이렇듯 굳이 ‘오덕’ 레벨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한두 가지는 남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겠다. 우리 모두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다! 그리고 향후 미디어가 지닐 심층성은 이러한 저변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3. 심층과 소통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반복 학습. 미디어적 가치에서 ‘소통’은 단순히 덕담이나 주고받는 게 아니다. 오류를 수정하고, 더 강한 근거를 받아들임으로 논지를 탄탄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업이든, 오덕이든 전문가들로부터 자료를 받으면 그게 소통이다. 대형 언론인 가디언은 아예 기사 아이템까지 독자들과 나누며 소통한다. 이처럼 자신의 지식만으로 완결된 글을 만들기보다, 지속적으로 정보를 업데이트하며 논리를 추가하면 그게 자동으로 심층성으로 연결될 것이다.

반핵을 예로 들어보자. 간단하게 갈겨 둔 메모식 원고를 올리고 의견을 달라고 하면 어떨까? 리트머스는 나름 네임드이니 에너지를 공부하는 연구자, 현업 종사자, 덕후들이 의견을 줄 것이다. 이 중 누군가는 찬성의 논리를 강화해주고, 누군가는 반대의 논리로 비판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데이터와 논리를 제공받으며 논지를 강화해 나갈 수 있다. 반대면 더욱 고맙고! 아, 물론 필자가 오류 가능성을 기반에 두고 있지 않는다면 말짱 황이겠지만.

남한의 대표적 소통 전문가

북한의 대표적 소통 전문가

4. 대중성과 심층성은 충돌하지 않는다.

그들은 ‘글이 어렵다’며 전문성과 대중성을 대립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 둘은 얼마든지 조화시킬 수 있다. 물론 대중이 너무 딱딱하고 긴 글을 읽을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여기까지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사랑한다. 아무튼 뭐,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필자는 어느 정도 책임감을 지니고 조금이라도 공부해야 하는 건 당연한 소리고…

대중성과 심층성 역시 상호보완적인 관계인데 이게 너무 따로 놀면 곤란하다. 대중성 있는 글을 전문성 있는 이가 보면서 의견을 내야 하는데, 여기서 근거가 너무 나약하면 그 전문성 있는 인력의 좋은 의견을 받을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글이 지나치게 길어지지 않도록 너무 어렵고 복잡한 부분은 하이퍼링크를 통해 레퍼런스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너무 지나치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심층성을 함께 갖출 수 있다.

일정 이상의 심층성이 없이는 애초에 제대로 된 대화와 반박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냥 대중적인 아젠다 던지고 이를 통해 이해와 설득을 해야만 한다고 포장하면 곤란하다.

5. 모든 웹 문서는 베타 버전이다.

기존의 신문은 과거형(ed)이었다면, 현재의 웹은 현재진행형(be+ing)이다. 한 번의 글로 멈추지 말고 계속 수정, 업데이트해 나가자는 거다. 하나의 글은 그 글로 완결된다는 건 고전적 신문의 논리다. 그러니까 무게감을 일단 버리자. 주장하다보면 논리 좀 틀릴 수 있고, 근거도 잘못될 수 있다. 22조원이 든다는 4대강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는데(…) 뭐 우리 같은 미물이 그렇게 딱딱해야 하겠는가? 대신 잘못되었거나 부족한 점은 인정하고 고치고 업데이트하면서 점점 완성된 논리로 나아가면 된다. 따지고 보면 위키피디아가 바로 그런 모델 아니던가? 위키트리 말고(…)

이를 좀 더 본격화하면 지속적인 정보 갱신을 통해 관심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알 자지라의 더 스트림을 떠올려보자. 이 매체는 트위터로부터 제보를 받아 한진 중공업 파업의 김진숙을 세계로 퍼뜨렸다. 그리고 이후에도 다시 여러 제보를 받아 다시 써먹는 등 지속적인 소통으로 시청자들의 이해를 깊게 했다.

F. 훈훈한 마무리

전통적인 저널리즘이라면 리트머스 필진들의 생각이 옳을 수 있다. 당시 언론을 생각해 보자. 낮에 죽도록 취재하고, 저녁에 미치도록 정리한다. 밤에는 신문이 미치도록 찍히고, 아침에 사람들은 받아본다. 이 과정이 죽도록 반복되며 많은 기자들이 이혼한다(…)

이처럼 20년 전 신문은 한 번 찍어내면 ‘낙장불입’이었기 때문에 이 프로세스가 유지됐다. 그래서 ‘단독’ 하나만 붙으면 기자는 마치 ‘야구여신’ 최희라도 만난 듯 어깨를 당당하게 폈지만, 오보 하나 터뜨렸다면 ‘형저메’ 최희섭에게 빠따질이라도 당한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그것이 그 때의 언론 환경이었고, 그 때의 언론 윤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웹에 있다. 우리의 언론관과 미디어 윤리는 더 이상 괜찮은 전문가 없고, 찾기도 힘들고, 있어봐야 글도 못 쓰고, 그러니까 나 혼자 글 쓰는 게 좋은 세상이 아니다. 손정의는 트위터를 하면서 수백만의 지성들이 모이는 것이 마치 ‘외뇌(外腦)’를 얻은 것 같다고 했다. 언론에서도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리트머스 분들은 자기가 주장하는 하나의 사설에 모든 게 담기고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어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이건 고전적 신문사설 마인드다. 세상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똑똑하고 글 잘 쓰는 리트머스 멤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보안업계에서 일하는 분들은 진중권보다 선관위 음모론에 대해 더 합리적 의견을 내놓을 수 있고, 원자력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박권일보다 더 반핵에 대해 합리적 의견을 내세울 수 있다. 안티조선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건 그들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전문성이 있었기 때문임을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되도록 많은 표를 끌어오는 게 목표다. 그렇다면 논리의 세계에서는? 되도록 많은 팬을 끌고 오는 게 미디어 바닥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되도록 많은 지성’을 끌어오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심층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가장 효율적인 길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수단은 ‘소통’이다. 그냥 인사치레하는 소통 말고 전문성을 끌어들이기 위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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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차 블로거, 4년차 생활인. 프로필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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