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트위터 타임라인, 그 위에서 무수히 많은 트윗들이 한순간에 명멸해갑니다. 슬로우뉴스는 트윗 한줄도 아주 소중한 언론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트윗스케치’는 너무 쉽게 잊혀지는 순간의 트윗을 포착합니다.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인상적인 대화와 논쟁, 단상과 촌평에 주목합니다. 그 찰나의 의미를 붙잡아 독자들과 함께 한 번 더 사유하기 위함입니다. (편집자)[/box]
그들은 소통을 내걸고 출범했다. 그들이 말하는 소통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팀블로그 ‘리트머스’ 얘기다.
문제의 시작은 박권일씨가 리트머스에 올린 글이었다. ‘관성적 야권연대 넘어 탈핵연대로’. 그 내용인즉 이렇다. 진짜 전선은 바로 탈핵이며, 핵 마피아들과의 전쟁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야권연대가 ‘핵발전소 전면 재검토’를 합의했으나 이것은 탈핵 원칙의 후퇴다. 글은 링크를 통하면 바로 읽어볼 수 있다.
혹자의 표현을 빌자면, 이 글은 한 줄의 슬로건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탈핵”. 그것도 아주 강력한 탈핵 주장이다. 실제로 박권일씨는 이 문제에 대해 그리 전문적 식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 한 트위터 유저의 “대안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전문가가 아니라 기술적인 논의를 잘 알진 못한다”며 프레시안의 기사를 링크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런 단순한 슬로건은 자연히 여러 반박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한국은 바로 작년만 해도 대규모의 정전사태를 겪은 적이 있고, 전력 소모량이 많아지는 계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비율이 10% 수준까지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력거래소에서 실시간 전력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탈핵을 넘어 화력으로 회귀함이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대안 에너지의 개발은 시한을 정해놓고 끝낼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원전 사고의 피해는 심하게 축소될 수도 있고 (직접 사망자를 기준으로 볼 경우), 심하게 확대되기도 하여(환경단체 등의 추정) 이런 저런 논박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한 트위터 사용자가 이런 논리를 정리하여 박권일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원전은 기술적 이해가 중요한 문제다. 그러데 박권일씨의 글에는 어떠한 기술적으로 탄탄한 논거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저 언론기사 몇 개 옮기고, 선언적인 구호들만 남았을 뿐이다. 이런 글에 열광한다면, 그 결과는 지극히 재앙적일 것이다. 탈핵이 국민적 여론으로 정해진다면, 온실가스 배출 증가나 에너지의 대대적 감축을 무릅쓰고라도 진행될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에 동의하진 않는다. 모든 것에 앞서 탈핵이 제1과제라고 외치는 그들이야말로 마피아가 아닌가? “탈핵”은 장기 과제다. 일본처럼 원전을 모두 끄고, 블랙 아웃들이 몇 번 지나가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닌 것이다. 최소 한 세대는 걸린다. 그런데 반핵론자들은 마치 한번에 모두 끝낼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w***d)
그리 쎈 반박도 아니었고, 욕이나 비하적인 표현도 없었다. 실제로 박권일씨의 글은 기술적 논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다. 그가 논거로 드는 것은 기껏해야 언론 기사, 그것도 일방적 성향이 뚜렷한 인터넷 매체의 기사 뿐이다. 불합리한 반박이라 보기 어렵다.
여기까지는, 사실 흔한 구도다. 큰 의제가 나오고, 그 의제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여러 반박이 나오고, 재반박이 나오고, 논의하고, 논의하고.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박권일씨의 반응이 심상찮다. 헛소리하지 마라. 글이나 똑바로 읽어라. 약치지 마라. 분노와 비하와 조롱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헛소리 하지 말고 글이나 똑바로 읽고 인용이나 제대로 하세요. 내가 ‘기술 일반’에 반대한 것처럼 약치지 말고.”(박권일)
이것이 그가 보인 최초의 반응이다. 이때 이미 소통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박권일씨가 문제의 글을 올린 ‘리트머스’의 주요 목표 중에 ‘심층성’과 ‘소통’이 있음을 생각해보면 이건 실로 아이러니한 풍경이었다.
데이터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 태도도 주목할 만 하다. 논쟁 중 “후쿠시마에 비견될 만한 제 3세계 플랜트 사고가 있느냐”고 묻더니만, 상대가 만 단위의 사망자를 내는 등 실제 막대한 피해를 낸 플랜트 사고를 예시하자 “그게 후쿠시마에 비견될 사고냐”며 또 묻는다. 이에 상대가 “박권일씨야말로 후쿠시마 피해 규모를 어느 정도로 보는 것이냐”고 되묻자, “후쿠시마 사고의 사고 규모는 산출기관에 따라 다르다, 숫자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식의 논변을 전개한다.
박권일씨가 보는 데이터의 의의는 이중적이다. 그는 상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요구하지만(후쿠시마 사고에 비견할 만한 플랜트 사고의 사례), 상대는 그에게 데이터를 요구할 수 없다(산출기관에 따라 수치는 다르다, 숫자로 장난치지 말라). 이래서는 논의가 가능할 리가 없다. 대체 그가 말하는 ‘비견’이란 무슨 뜻인가. 숫자를 갖고 장난치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인가.
이후로도 박권일씨는 이 이슈를 말할 때마다 계속해서 반대 논리에 대해 ‘약을 판다’ ‘물을 탄다’ ‘지껄이는 자들’ 등의 비하적이고 조롱하는 표현들로 자신의 논리를 대신 채운다. 그러면서 “그럼 토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란다. (토륨은 미래 원자력발전 수단의 하나로 여겨지는 가장 대표적인 원소다.)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강력한 슬로건을 내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슬로건의 절대성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약장수로 전락시킬 수 있는가.
나는 에너지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 관련 전공자가 수두룩하고, 보고서 하나를 읽으려고 해도 수백 페이지,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거다. 큰 방향성 자체에는 공감하고 또 주장도 할 수 있지만, 그 세부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가르침을 청하고 의견을 듣고 “이건 이렇지 않을까” 하고 반문해보는 것이다.
그도 모른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기껏해야 언론 기사를 링크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의 의견을 ‘약을 팔고 물을 타고’ 같은 식으로 조롱하고 비하할 수 있단 말인가. 탈핵을 주장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반대의견에 대해 몇 번이나 반복하며 비하하고, 조롱하고, 상대에겐 데이터를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데이터를 내놓을 필요가 없다 여기는, 그런 논의의 틀 자체가 대단히 불쾌하다. 이런 식으로 대체 뭘 논할 수 있나.
거기에는 어느새 도그마가 자리한다. 절대 뒤바꿀 수 없는, 이미 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독단적 주장. 아마 거기에는 리트머스가 꿈꾸는 소통 대신, 처음부터 이미 붉게 변해버린 리트머스 종이만 자리할 것이다.
이런 딜레마가 문제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지요. 좋은 스냅샷이네요. 간과하던 지점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일반이 논하기엔 전문적인 데이터가 부족하여 위험하고 전문가가 되고 보면 문제에 이해관계가 얽히기 십상이니… 기술전문가들이 철학적 훈련을 받아야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