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에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줄거리 일부가 본문 중반 이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box]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새로운 블록버스터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3월 28일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지난 2월 말에 개봉한 저예산 드라마 영화 [더 포스트]와 동시기에 촬영된 영화이다.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르며 여전히 스필버그의 드라마적 감각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입증했던 [더 포스트]와 달리,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개봉하는 순간까지 설왕설래가 오갔던 작품이었다.
가장 크게 지적받았던 문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과 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주전쟁](2005)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가 카메라를 잡은 대형 블록버스터는 흥행이 좋으면 연출적인 측면에서 쓴 소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영화 자체의 품질이 괜찮으면 흥행에서 쓴 맛을 면치 못했다.
전자에 속하는 작품이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2008)이었다면, 후자에 속하는 작품은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였다. 특히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일찌감치 북미에서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CGV 단독으로 축소 개봉하며 약 12만 명의 관객만이 영화를 관람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걱정 반 불안 반’ 스필버그의 뉴 프로젝트
스필버그의 최근 연출한 블록버스터들이 흥행에서 실패하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죠스] (1975)와 [E.T.] (1982), [쥬라기 공원] (1993) 등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이어 흥행시키는 것은 물론 비평가들의 찬사까지 놓치지 않으며 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기준을 제시한 이가 바로 스필버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에 제작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은 2000년대 이후 제작되는 전쟁 영화들이 필수적으로 참고할 정도로 기념비적 존재에 오른 작품이었다. 할리우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정작 블록버스터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대신 [워호스] (2011)이나 [링컨] (2012), [스파이 브릿지] (2015), [더 포스트] (2018)까지 총 제작비 1억 달러 미만으로 제작된 저예산 드라마 장르의 작품들에서 흥행과 비평을 모두 거머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지적받았던 문제는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레디 플레이어 원] (2011) 그 자체였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작가이자 어니스트 클라인은 일찌감치 ‘서브컬처 매니아’로 활동을 해왔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도 패러디되는 컬트 SF 영화 [카우보이 밴자이의 모험](The Adventures of Buckaroo Banzai Across the 8th Dimension, 1984]의 팬픽션을 데뷔 전에 만든 것은 물론, 그가 극작가로 데뷔한 작품 역시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팬들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 [팬보이즈] (2008)였다. 지속적으로 1970-80년대 대중문화에 탐닉해왔던 만큼, 자신이 경험한 대중문화의 작품들과 캐릭터를 집대성한 [레디 플레이어 원]을 집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오버워치] 같이 2010년대 인기를 끌고 있는 서브컬처까지 총망라한 영화와 달리 철저하게 어니스트 클라인 자신이 청소년-청년 시절을 보냈고, 관심 있게 파고든 1970~90년대의 서브컬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주인공 일행들은 TRPG 게임 [던전 앤 드래곤]을 구현한 가상 세계에서 처음 만나고, 주어진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남코 사의 전설적인 아케이드 게임 [팩맨](1980)을 마지막 탄까지 깨야만 한다. 이외에도 어니스트 클라인은 소설 중간 중간에 자신이 열광한 다양한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특촬 등의 요소를 가득히 삽입하며 X세대 문화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문제는 어니스트 클라인이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서브컬쳐에 대한 흥미를 자꾸 드러낼수록 그에 반비례해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계속 떨어졌다는 것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제 존재하는 서브컬처에서 영감을 얻는 설정이 드러나면 그에 대한 설명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스토리의 전개나 묘사에 있어서도 어니스트 클라인은 나름대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게임에 기반을 둔 액션과 판타지, 그리고 스릴러를 모두 담아내려 시도를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결과물은 그가 집필한 영화 제목처럼 ‘팬보이’(fanboy, 서브컬처에 열광하는 남성들을 지칭하는 미국 속어)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인공의 구성 역시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레즈비언 여성, 아시아계 남성 등 다양성을 추구했지만, 여전히 중심은 백인 남성인 ‘웨이드 와츠’에 머물러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소설이지만, 동시에 한계도 극명했던 작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소설의 원작자인 어니스트 클라인이 영화판에도 각본으로 참여하며 더욱 불안을 가중시켰다. [에너미 라인즈] (2001), [X맨 : 최후의 전쟁] (2006), [인크레더블 헐크] (2008) 등의 블록버스터의 각본을 집필한 자크 펜도 함께 참여했지만, 자크 펜 역시 그간 각본진으로 참여한 작품 대다수가 흥행에서는 성공했을지도 몰라도 비평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비평을 포기하고 흥행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스티븐 스필버그 특유의 감각으로 그간의 모든 장벽을 넘어 새로운 장을 선보일 것인가.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많은 이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스필버그의 새 영화를 기다렸다.
스필버그가 새롭게 구현한 서브컬처의 세계
그리고 마침내 스필버그가 새롭게 재창조한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가 공개되었다. 영화의 큰 틀은 원작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45년,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온갖 문제들로 온 세계는 암울한 상황에 처해있다. 낡고 위험한 컨테이너촌의 친척집에 얹혀사는 고아 주인공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천재 프로그래머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가 개발한 VR 세계 ‘오아시스’가 모든 이들을 휘어잡은 지 오래다. 게다가 몇 년 전 할리데이가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에 더욱 열성적으로 ‘오아시스’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의 유언은 단순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오아시스’ 곳곳에 숨겨진 세 개의 열쇠, 그 열쇠들을 모두 찾으면 ‘이스터 에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스터 에그를 차지하는 이는 할리데이가 남긴 유산은 물론 ‘오아시스’의 통제권까지 모두 가지게 된다. 하지만 유언이 발표된 이후로 지난 몇 년 간 첫 번째 열쇠조차 아무도 찾지 못한 상태다.
웨이드와 ‘오아시스’에서 만난 그의 친구들은 과연 이스터 에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대체 그 이스터 에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렇게 말로만 푸니 대체 이 영화가 무슨 재미일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레디 플레이어 원]을 스크린으로 보는 순간, CG와 모션 캡처로 구현된 VR 서브컬처의 세계는 관객들을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압도한다. 작품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드로리안’ 레이스는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에 바치는 오마주인 동시에, 스피디한 감각을 극대화한 형태로 연출되어 흥미를 낳는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아이언 자이언트’와 ‘메카 고질라’, 그리고 ‘기동전사 건담’ 간의 대결 장면에서는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박력이 넘치는 액션이 빈발한다.
개봉 전 수많은 서브컬처에 대한 오마주에 휘말려 정작 작품이 실종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스필버그는 적절하게 연출의 완급을 조절하며 균형을 맞춘다. 확실하게 임팩트를 심어야 할 때는 긴장감 넘치는 흐름을 심으며, 그 이외의 서브컬처 요소들도 사소하지만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준으로 삽입한다. 만약 이 영화를 IMAX나 4DX 같은 포맷으로 감상한다면, VR 헤드셋을 쓰지 않고도 미래의 VR 세계 속에 빠진 듯한 착시 현상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핵심 1: 게이머들이 지니는 ‘외로움’의 문제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퀀스 연출이 인상적인 만큼, 전하고자 하는 스토리도 인상적일까. 영화의 기본적인 플롯은 비교적 단순하며 고전적이다. 평범해보였던 일상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비일상으로 바뀌고, 그 안에서 어린이 혹은 청소년 주인공들은 어른들의 음모에 맞서 나가며 마침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 (1876)이 연상되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슈퍼맨] 시리즈를 연출한 리처드 도너가 감독으로 참여한 [구니스] (1985)가 떠오르는 구성이다. [구니스]의 주인공들이 미지의 동굴을 탐험했다면,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들은 온갖 서브컬처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한 VR 세계를 탐험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구니스]의 주인공들이 최소한 같은 마을에 산다는 공간적인 동질성으로 똘똘 뭉쳤다면,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외로운’ 존재기 때문이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핵심적인 주제이자, 원작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외로움’이다. 주인공 웨이드는 철저한 외톨이다. 부모님이 모두 사망해 고아가 된 것은 물론, 주변에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구도 없다. 함께 살고 있는 이모가 있어도, 이모 역시 그 외로움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며칠 째 자신만의 VR룸에 틀어박혀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오아시스’에서 아바타 ‘퍼시발’로 행동하며, 그렇게 알게 된 VR 속의 친구들만이 유일하게 친밀한 인간관계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웨이드만이 겪는 감정이 아니다. 웨이드가 사는 컨테이너촌의 주민들은 물론, 웨이드가 ‘퍼시발’로써 사귄 VR 속 친구들도, 심지어는 ‘오아시스’를 개발한 할리데이 역시 예외는 될 수 없다.
동시에 그 ‘외로움’은 단순히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이 놓인 현실 속 ‘게임 플레이어’들이 겪는 문제기도 하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2000년대 이후로 급속도로 발전한 ‘온라인 게임’ 덕분에 더 이상 게이머들은 외롭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PC방 문화가 독보적으로 발달한 국가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이 당연하게 된 마당인데, 대체 ‘외로움’을 느낄 새가 언제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함께 게임을 즐기니 외로움을 잊는다’는 전제는 ‘PC방’이나 ‘친구’와 같은 공간이나 대상이 존재해야만 게임을 외롭지 않게 즐길 수 있음을 뜻한다. 심지어는 그 ‘친구’도 원래부터 오프라인에서 잘 알던 친구가 아니라 순전히 게임으로만 알게 된 사이라면, 그 인연의 깊이는 더욱 얕을 수밖엔 없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WoW, 와우)나 [파이널 판타지 14] 같이 게임 특성상 ‘파티 플레이’가 강조되는 작품이 틈만 나면 회자되는 것은 대다수의 게임이 지니고 있는 ‘혼자 놀기’의 특성을 쉽게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영화 속에서 ‘오아시스’를 즐기는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갇혀 게임을 하는 장면은 이러한 모순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스필버그는 이 ‘외로움’의 문제를 한 발 더 나아가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에서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래머’의 입장까지 나아간다. 미국 ‘밸브’(Valve) 사의 대표인 ‘게이브 뉴웰’처럼 어느 정도 유명세를 지니지 않은 이상, 대다수의 플레이어는 프로그래머의 존재를 쉽게 망각한다.
그나마 ‘엔딩’이 있어 스탭롤을 통해 프로그래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던 1인용 게임과 다르게, 온라인 게임 대다수는 애초에 ‘엔딩’이 존재하지 않기에 스탭롤을 따로 게임에서 제공하지 않는 이상 프로그래머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무리 유명하고 잘 나가는 게임을 만들어도, 남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프로그래머는 플레이어 이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된다.
그러기에 영화의 중대한 클라이맥스가 ‘게임의 스탭롤’과 연관되는 순간은 많은 감동을 주는 한편, 스필버그가 얼마나 ‘게임 문화’를 깊게 파고들며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쉽게 지치고, 그들이 즐기는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래머 역시 고독하다.
모두가 고독한 상황 속에서 ‘점수’와 같이 쉽게 눈으로 보이며, 수치로 환산이 가능한 요소를 가지고 경쟁하는 행위가 자연스레 게임의 기본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쟁을 하고, 스코어보드의 상위권에 올라도 계속 혼자 게임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지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모두가 끊임없이 외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게임을 진정으로 ‘같이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핵심과 질문은 이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핵심 2 : 게임은 어떻게 ‘같이’ 할 수 있는가?
게임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게임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다양한 가치들을 삽입해야 한다. 남성의 시선에만 머물러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눈요기 거리 장면들을 삽입하는 대신, 여성 플레이어도 즐길 수 있도록 게임의 시나리오나 플레이 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 특정 문화권과 연령대만을 노려보는 대신 다양한 문화권, 제각기 다른 연령대로 확장하여 게임을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고민하고, 반영해야 하는 가치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 가치는 성적 정체성이 될 수도 있으며, 장애 여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굳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작품들이 이미 구현하려 노력한 바 있다. 한국의 [달빛조각사], 일본의 [소드 아트 온라인] 같은 ‘게임 판타지 소설’들은 게임의 요소를 작중의 현실에 맞닿으며 게임과 현실이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작년에 개봉한 박광현 감독의 영화 [조작된 도시]는 ‘게임 캐릭터’와 캐릭터를 실제 조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하며 게임은 ‘남성’들만의 것이 아님을 조금은 드러내려 시도했다.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 역시 앞서 언급한대로 주인공들의 특성을 다양하게 설정하며 ‘플레이어의 다양성’을 비춰냈다.
스필버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각의 주인공 캐릭터에 저마다의 ‘주체성’을 삽입하려 시도한다. 그 시도는 단순히 ‘당차고 기센’ 여성 플레이어를 구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일례로, 주인공 일행들이 열쇠를 찾기 위한 여정 중 ‘사랑’과 관련된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을 들 수 있겠다. 적들이 목표로 하는 여성 NPC 캐릭터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모두가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한다. 그러던 사이 여성 주인공은 거침없이 발을 내딛어 여성 NPC를 발견하고, 그렇게 사랑에 대한 미션이 겨우 해결된다.
이전의 게임이었으면 이러한 장면들은 ‘남성 주인공’의 전유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더라도, 상대 NPC는 남성이거나 플레이어를 강제적으로 수동적으로 만드는 각종 지문들이 나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여기에 어떠한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고, 여성 주인공이 ‘사랑’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해결하는 장면을 묘사하며 게임이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성별, 연령, 인종,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저마다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이들을 ‘플레이어’로 환영하며, 그렇게 게임에서 만난 이들은 다시 현실에서 서로를 만난다.
비록 [레디 플레이어 원] 역시 헐리우드 영화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로는 나이브하게 그려질 때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혼자’ 게임을 가지고 놀며 외로움을 느끼는 감성에서 ‘다양성’의 중요함을 발견하고, 다시 그 지점에서 게임과 현실은 무관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게임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단순히 시스템으로만 같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함께 소통하며 게임을 한다. ‘소통’을 위해서는 결코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실감 넘치는 VR 세계는 역설적으로 VR의 ‘리얼리티’(reality)가 현실(real)과 분리할 수 없음을 극명히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한국 ‘플레이어’들은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레디 플레이어 원]은 때로는 짜릿하게, 때로는 낭만적으로 게임과 현실이 서로 만나 조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그린다. 물론 현실은 영화와 다르고, 때로는 픽션 이상으로 잔혹할 때도 있다. 당장 [레디 플레이어 원]이 등장한 미국만 해도 인터넷 커뮤니티 ‘4chan’을 중심으로 뭉친 남성 게이머들이 집단적으로 여성 프로그래머, 여성 게임 평론가를 공격하며 심지어는 살인 협박까지 가한 ‘게이머게이트’ (Gamergate) 사건이 2014년에 벌어졌다. 지배적인 시선과 다른 시선으로 게임을 말하고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은 온갖 악성 루머와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게이머게이트’는 미국의 여러 언론들이 비판하고, 다른 게임 웹진이나 게임 개발자들이 연대를 선언하며 그간의 게임 문화에 대해서 반성할 여지를 심는 형태로 수습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가. 게이머게이트에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페미니즘적인 가치를 말한, 또는 그러한 가치를 외친 이들에게 연대한 창작자들을 혐오와 차별의 정서로 가득찬 이들이 집단적으로 공격을 가한다.
이들이 고용되거나 계약을 맺은 ‘회사’는 가해에서 이들을 보호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도리어 혐오의 흐름을 함께하며 사과를 요구하거나 심하면 회사에서 퇴출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전문지’로써 문제를 심도있게 파고들어야 할 게임 매체 다수는 해당 문제를 회피하거나 피해자의 책임론이나 양비론을 들고 있다.
특히 2018년 3월에 접어들며 한국 게임계에서 터진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의 게임계가 놓인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 시작은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이었다. 본래대로라면 3월 중에 새로운 캐릭터 ‘K7’가 업데이트 되었어야 했지만, [소녀전선]의 한국 서비스는 예정과 다르게 캐릭터를 제때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K7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본인의 트위터에 [82년생 김지영]과 관련된 트윗을 리트윗했다며 유저들이 항의하자, [소녀전선]의 한국 서비스를 담당하는 운영진들이 “특정 극단주의 페미니스트 조직의 경향을 전달한 정황”이 있다는 “객관적인” 이유로 업데이트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 관련 기사:
- 핀치 – ‘객관적인 이유’?, 2018년 3월 22일
- 핀치 – 소녀전선 개발사 “더 피해 끼치지 않도록 주의해달라” 한국 유통사 “한국버전 정식입장 아냐”, 2018년 3월 23일
2016년 성우 김자연이 “소녀는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담긴 티셔츠를 트위터에 인증했다는 이유로 [클로저스]와의 목소리 사용 계약이 해지된 이후, 다시 한 번 게임계가 페미니즘을 주장한 개발진을 내친 사건이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여전히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덕분이었을까. 이제 이들은 인디 게임 [마녀의 샘] 시리즈에도, IMC게임즈가 개발하고 넥슨이 서비스하는 [트리 오브 세이비어]에도, 심지어는 일본 팔콤 사의 게임 [이스 Ⅷ: 라크리모사 오브 다나]에도 게임에 참여한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구를 SNS에 쓰거나, 공유했다는 이유로 무수한 집단 공격이 가하는 중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리 오브 세이비어]의 개발사 IMC게임즈의 대표이자,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개발해 이름을 알린 유명 프로그래머 김학규는 공격을 받은 일러스트레이터를 보호하는 대신 그가 ‘한국여성민우회’나 ‘페미디아’처럼 페미니즘과 관련된 단체나 매체의 계정을 팔로우하고, 급진적인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구가 담긴 내용을 공유한 것을 추궁했다. 동시에 ‘한국여성민우회’나 ‘페미디아’를 ‘반사회적인 단체’로 규정한 것이 함께 논란이 되었다.
¶ 관련 기사:
스티븐 스필버그는 올해로 만 71세를 맞이했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지 오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쉴 틈 없이 변하는 게임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면서 게임이 지녀야 할 다양한 가치 역시 자연스레 장르의 틀로 녹여내며 ‘업데이트’를 완벽히 마쳤음을 입증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게임의 다양한 가치’를 꺼내는 것은커녕 페미니즘과 관련된 계정을 그저 ‘팔로우’했다는 이유로 무수한 공격에 시달린다. 적절한 보호 조치는 이뤄지지 않으며, 도리어 게임업체들은 혐오와 차별의 가치를 함께하며 피해자를 다그칠 따름이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은 얼마나 한국의 ‘게이머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전에, 다양한 시선과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식을 ‘업데이트’할 ‘준비’는 되어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