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AS센터] 금수저를 무너뜨린 흙수저 신화에 김민석 탈당이 불러온 역풍… 김문수+한덕수 단일화에 없는 모험과 승부.
6·3 대선을 코앞에 두고 국민의힘이 단일화 진통을 겪고 있다. 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김문수와 무소속 예비후보 한덕수가 단일화 방식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9일 오후 김문수 측은 지지 정당과 관계없는 여론조사를 주장했다. 한덕수 측은 국민의힘 경선 방식인 당원 50%와 역선택 방지 조항이 적용된 여론조사 50%를 주장했다. 각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고수하다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단일화를 둘러싼 ‘김덕수’의 이전투구가 입길에 오르내리며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도 재조명되고 있다. 한덕수 캠프 대변인 이정현은 “이재명 후보보다 우리가 집권해야 나라 위기를 잘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게 당 사람이 아닐지라도 같이 뭉치자는 게 단일화 아니냐”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전 후보가 그렇게 (단일화를) 해서 노 전 대통령이 결국 승리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노·정 단일화는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2002년 노·정 단일화는 왜 성공했나.
- 시청자를 열광케 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이 정몽준에게 “완전 국민경선 방식을 통한 후보 단일화를 공식 제안한다”고 밝힌 시점은 12·19 대선을 한 달하고 보름여 앞둔 시점이었다. 이회창(한나라당), 정몽준(국민통합21), 노무현 구도가 1강 2중으로 굳어지던 때였다.
-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 “정당은 당의 정체성과 정강 정책을 가지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대선 후보를 선정해 국민 앞에 제시한다. 그런데 당 통합 방식이 아니라 당의 정체성과 기본적인 정강 정책이 서로 다른 두 당의 후보가 오로지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기 위해 단일화한다는 것은 선택권자인 국민의 판단 기준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고 정당주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바야흐로 정치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막장극으로 치닫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회창은 여론조사 2, 3위 후보끼리의 단일화였기 때문에 판을 뒤집지 못할 거라 전망했다. 하지만 노·정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자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합법성이나 정당성의 문제를 떠나 정당과 이념이 전혀 다른 두 후보가 여론조사로 후보를 단일화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변화를 선호하는 국민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한판승부에 올인한 도박사 같았다.”
- 노무현으로 단일 후보가 결정되자 여론이 뒤집혔다. 3자 대결 여론조사에서 꼴찌였던 노무현이 단일화 직후 이회창을 꺾는 여론조사가 발표되는 등 전세가 180도 뒤바뀐 것이다.
- 이회창은 이렇게 평가했다. “불리한 처지에 있던 노무현 후보는 건곤일척의 모험수로 정 후보와의 TV 토론과 여론조사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이 적중했다. 마치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있던 도박사가 모든 것을 한판승부에 걸어 도박판을 휩쓰는 것과 같았다. 많은 국민들은 이런 모험과 승부에 열광했고 대역전의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 “또 하나의 역전의 요인(아마도 결정적 요인일 수 있다)은 노무현과 정몽준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노무현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고 정몽준은 대표적 금수저 출신이다. 한쪽은 무산대중과 서민을 대변하고 다른 층은 재벌과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모양새였다. 이 대결에서 흙수저 출신이 금수저 출신을 쓰러뜨렸으니 관중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세력의 구세력, 기득권 세력에 대한 혁신과 변화처럼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 “정몽준 후보 자신은 인식했는지 모르나 한때 후보 교체에까지 몰린 노 후보를 되살렸을 뿐 아니라 시대 변화의 상징처럼 떠오르게 한 훌륭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차 범위’도 무시한 여론조사.
- 정몽준 측과 단일화 협상을 한 인물은 이해찬(전 국무총리)이다. 노·정 양측은 ‘여론조사 오차를 무시하자’는 데 합의했다. 오차는 여론조사 결과가 실제와 얼마나 차이 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필수 정보다. 지지율이 50%이고 오차 범위가 ±3%P라면, 실제 지지율은 47%에서 53% 사이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두 후보 지지율이 오차 범위 안에 있다면 우위를 가릴 수 없는 것이다.
- 이해찬은 회고록에 이렇게 회상했다.
- “제일 문제는 오차를 어떡할 거냐, 였어요. 오차 범위 내에서 나온 여론조사 결과로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거든. 다시 해야 해요. 그러면 여론조사를 수십 번 해서 오차 범위 밖의 것만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오차를 무시하자고 했어요. 단 1%라도 앞선 사람이 이긴 걸로 하자. 나로서는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지. 직전 여론조사를 보면, 정몽준 23%, 노무현 17% 정도가 나왔어요. 6% 차이 밖에 안 돼.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오차를 인정하지 않기로 합의가 됐어요. 0.1%라도 앞선 사람이 이기는 걸로.”
- 오차 범위를 무시하자는 발상은 도박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비과학적인 한국 정치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지지율 열세(이회창 30%대, 정몽준 20% 중반, 노무현 15%)에 있던 노무현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 이해찬은 “나는 단일화를 해도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렵다고 봤다. 노 후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론이 달랐다”며 “나는 어차피 안 될 거 단일화를 못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선택을 하자. 노 후보는 단일화가 안 되면 어차피 떨어진다, 그러니 이 방법 밖에 없지 않느냐…”라고 했다.
“정몽준 집? 아무리 생각해도 못 가겠다.”
- 노무현 캠프는 단일화에 승리했지만 선거 전날 정몽준이 돌연 후보 단일화를 철회하며 ‘멘붕’에 빠진다. 이해찬이 그날 밤을 기록한 대목도 특기할 만하다.
- “캠프에 다들 모였지. 비상 상황이잖아요. 노무현 후보를 설득했어요. 정몽준 집으로 가서 달래야 한다. 근데 안 돼요. 안 가겠다는 거예요. 다들 포기하고 나왔어요. 나보고 얘기를 해 보라는데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이 기획본부장이지 않냐, 그래요. 할 수 없이 후보한테 갔는데 나도 화가 나는 거야. 소리를 쳤어요.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다, 당신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러려고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냐, 당장 일어나서 가시라. 하, 그래도 꿈쩍을 안 하더구만. 내가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나왔어요. ‘이런 식이면 앞으로 정치하지 마시라’, 그런 비슷한 말을 했어요.(중략) 아무튼 그러고 화를 내고 나왔더니 조금 지나서 후보가 마음을 바꿨어요. 정몽준한테 가겠다고. 그때가 열한 시쯤 됐을 거예요. 정대철 위원장(민주당 선대위원장)이 후보를 수행해서 갔는데 좀 있다가 전화가 와요. 가는 중에 후보가 또 차를 돌리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가겠다고 그런다…. 그때 정대철 위원장이 울고불고했대요. 그렇게 어렵게 찾아갔는데 정몽준이 만나 주질 않았지. 정몽준이 술에 취해서 자고 있었다고 하더구만.”
- 당혹감을 넘어 합의를 깬 것에 대한 분노 및 배신감, 신의를 저버린 상대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굴욕감을 감수하며 찾아갔으나 정몽준은 노무현을 문전박대했고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며 조소했다. ‘고집’을 꺾고 정몽준 자택 행을 결정한 노무현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승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표심 중 가장 무서운 게 동정표라는 말도 있다.

“노 지지 철회, 정치 인생서 나를 힘들게 한 때.”
- 정몽준은 자서전에서 “20여년간 정치 인생에서 나를 힘들게 한 때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마지막 순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던 밤”이라고 썼다. “집에까지 찾아온 노 후보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박대한 듯한 인상을 준 건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 정몽준은 노무현이 단일화 과정에서 합의했던 한미 관계에 대한 입장을 뒤집어 지지를 철회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날 명동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는 ‘북한과 미국이 싸우면 우리가 말리겠다’며 기존의 한미관계를 부정하는 교묘한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종로 유세에서 노 후보가 정동영 의원을 데리고 (단상에) 올라갔다. 단일화와 공동 정부를 나타내는 나와 노 후보의 협력 모습은 사라지고, 노 후보를 양옆의 두 사람이 떠받드는 이상한 모양이 연출됐다”고 썼다.
“김민석이 정몽준에 가면서 지지층이 뭉쳤다.”
- 2002년 단일화 국면에 ‘활약’한 이들이 2025년 대선 정국에도 등장한다. 이해찬이 회고록에 언급한 정대철(헌정회장)은 당시 민주당 선대위원장이었고, 지금은 ‘개헌 빅텐트’를 명분으로 한덕수의 대선 출마를 적극 권유한 인물로 알려졌다. 정대철은 김·한 단일화 방식에 관해 “2002년 노·정 단일화와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민주당 상임공동선대위원장 김민석은 2002년 당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해 큰 충격을 줬다. 이후 오랫동안 ‘철새’라는 오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 지지층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 최근 중앙일보가 공개한 비공개 대화록을 보면, 노무현은 집권 1년차였던 2003년 11월5일 주요 일간지 편집국장들과 청와대 만찬에서 “정몽준이 뜨면서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그때도 당 내에서 소위 재신임 문제가 거론됐다”면서 “그런데 김민석이 탈당, 정몽준 쪽으로 가면서 내 지지층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정말 김민석이 아니었으면 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감동 없는 ‘김덕수’ 단일화…그들은 심판 대상.
- 노·정 단일화와 비교하면 김문수와 한덕수 단일화는 감동도, 재미도 없는 촌극에 다름 아니다. 국민의힘 ‘1호 당원’이자 내란 우두머리 혐의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열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윤석열을 비호해온 김문수와 윤 정부 2인자 한덕수는 여전히 윤석열과 선을 긋지 않고 있다. 윤석열 탄핵에 찬성한 유권자 눈에 그들은 심판 대상일 뿐이다.
- 특히, 한덕수는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선 후보 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선거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무소속 후보를 할 바엔 차라리 사퇴하겠다는 것이다. 국힘 지도부 뒤에 숨어 무임승차만 바란다는 비판이 나온다. “모든 것을 한판승부에 걸었던” 노무현과 견주기엔 부끄러운 행보다.
- 대표 보수지 조선일보는 10일자 사설에서 혀를 찼다. “이런 단일화는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다 한들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혐오만 키울 뿐이다. 무능과 추태의 바닥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의 심정만 참담할 뿐이다.” 사설 제목은 “막장, 바닥 다 보여준 뒤 단일화한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