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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중국: 4. 시진핑은 어떻게 황제가 되었나(2010-2017)

이 글은 다시 불붙은 노선투쟁의 화염(2008)에서 이어집니다. 

 

노선 갈등은 2010년에 이어진 정치개혁 논쟁으로 더 격화되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2010년 9월 선전시 경제특구 지정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전시가 주도하여 중국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정치개혁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성과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원자바오는‘빠르고 좋은 성장’(又快又好·성장 우선)에서 ‘좋고 빠른 성장’(又好又快·분배 우선)으로, 즉 ‘분배에서 성장을 찾자’(好中求快)고 강조했다(참조: 서울신문).

중국의 6대 총리('03~13) 원자바오 (2008년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분배와 자유를 강조하는 ‘정치개혁’을 주장한 중국의 6대 총리(’03~13) 원자바오 (2008년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원자바오는 공산당의 권력도 법치의 테두리 안에 가둬야 하며 중국에 자유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수차례에 걸쳐 주장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연속적으로 정치개혁이 주요 화두로 등장하며 논쟁의 최전선에 자리하게 된다.

계속되는 원자바오의 정치개혁 요구에 보수파는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상하이방의 핵심이자 원자바오보다 높은 당내 서열 2위의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포문을 열었다. 우방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국이 서구식 다당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정치개혁 요구를 일축했다.

원자바오의 정치개혁 요구를 일축한 우방궈

원자바오의 정치개혁 요구를 일축한 우방궈

한편 정치개혁 논쟁은 공산당 주요 정치인들을 넘어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내 보수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관지인 광명일보는 원자바오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한편, 개혁성향의 남방일보는 광명일보의 사설에 대한 재반박 논평을 게재했다. 논쟁이 계속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정치국이 직접 움직이기까지 했다.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논쟁의 자제를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논쟁은 식을 줄 몰랐다. 중국은 곧 18차 당대회의 권력 교체를 앞두고 있었다. 격대지정 관행에 따라 상하이방의 장쩌민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장쩌민은 덩샤오핑만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했기에 후계자는 당내의 합의를 바탕으로 선정되어야 했다. 2007년 17차 당대회를 통해 후보군으로 진입한 이는 크게 세 명이었다. 푸젠성과 저장성에서 근무한 태자당의 시진핑, 그리고 허난성과 랴오닝성에서 근무한 공청단의 리커창, 역시 공청단 소속으로 베이징과 장쑤성에서 근무한 리위안차오가 그들이었다.

시진핑

시진핑은 왕양을 설득하러 내려간 것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비교적 보수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반면 리커창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심복이었고, 리위안차오도 왕양과 함께 거론될 정도로 대표적인 개혁주자였다. 후진타오의 권력이 점점 레임덕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후계 구도를 향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개혁파와 보수파의 경쟁구도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와일드 카드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였다.

보시라이는 누구였는가

보시라이는 혁명 원로 보이보의 아들로 태자당의 일원이다. 당초 열렬한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그는 1992년부터는 다롄시 시장을 맡고 다롄을 중국에서 손꼽히는 미항으로 만들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2001년부터는 랴오닝성 성장을 맡으면서 승진을 거듭했다.

야심 넘치는 보시라이는 중앙 정계 최고지도부로 진입하기를 원했고, 분명 최고지도자 자리까지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중한 개혁파인 후진타오는 보시라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는 2007년의 17차 당대회에서 사실상 충칭시 서기로 좌천되기에 이른다. 이제 보시라이의 정치역정은 지방 지도자 쯤에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였다.

보시라이 (2011년)

보시라이 (2011년)

그가 가장 자유주의적인 중국 정치인인 왕양의 후임을 맡아 충칭시에서 시작한 행보는 그래서 돌출적이었다. 보시라이는 왕양의 이전 충칭시 심복들을 제거하고, 과거 왕양의 조치들 대신 자신의 창홍타흑 정책을 중국 전역에 요란스럽게 선전했다. 보시라이는 충칭치 지역 방송국에서 상업광고를 금지하고 대신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사상을 홍보하는 광고를 편성했다.

농민공들을 위해 대규모 공공주택 보급을 실시해서 민심을 얻었고, 카리스마적 외모를 적극 활용해 반부패, 범죄조직 타도 캠페인을 벌였다. 전임자인 왕양이 광둥에서 광둥모델을 만들고 있을 때 그는 충칭모델을 만들었다.

누구도 원치 않던 좌파의 부상

정치국 상무위원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두 거물 정치인들의 상반되는 행보는 자연스럽게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파이 논쟁으로도 여겨진다. 충칭모델은 파이를 나누자는 분배론이고, 광둥모델은 파이를 키우자는 성장론이라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보시라이의 충칭모델을 태자당의 반격이라고 여겼다. 핏줄만 잘 타고났고 실제 능력은 별 거 없다는 인상이 만연하던 태자당이 보시라이 덕분에 정책 기획 능력과 탁월한 비전 제시 능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또한, 공청단을 견제하기 위해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저우융캉을 통해 보시라이를 적극 후원한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이라는 파벌 간 권력투쟁에 초점을 맞춘 기존 시각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같은 태자당인 시진핑은 보시라이를 인정사정 없이 철저히 처벌한 것인가? 보시라이에 대해서는 세 개 파벌 간 권력투쟁 대신, 양대 파벌의 노선투쟁 구도로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노선 구도에서, 보시라이는 링 바깥의 와일드카드였고, 공청단의 개혁파나 태자당, 상하이방의 보수파 모두에게 심대한 도전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태자당인 시진핑이 보시라이를 그렇게 가차 없이 처벌한 것이다.

우선 태자당과 상하이방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산당에서 언급도 금기시하는 문화대혁명 분위기를 조성하고, 균형 발전을 외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단파가 자꾸 정치개혁을 언급하는 데 위기의식을 느낀 몇몇 인사들이 보시라이에서 돌파구를 찾았을 수 있다. 공안기관의 수장이자 국영기업을 통해 거물로 성장한 저우융캉 같은 이들 말이다. 그 밖에 시진핑을 포함한 많은 인사들이 충칭을 찾아 보시라이와 충칭모델을 추켜세워줬다. 하지만 다수는 보시라이를 진지한 대안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진핑은 물론이고 장쩌민과 같은 인사들도 문화대혁명 땐 모두 피해를 보았다.

문화대혁명,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당중앙을 보위하자!"(윗줄)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마오주석을 보위하자!"(아랫줄)

문화대혁명(1966~1976),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당중앙을 보위하자!”(윗줄)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마오주석을 보위하자!”(아랫줄)

허를 찔린 개혁파

단파 입장에서 보시라이는 훨씬 더 당황스러웠다. 본디 도농 및 지역격차 축소에 매진하는 균형발전론과 개혁개방이 만들어낸 부정부패 척결, 사회적 혼란의 해소는 자신들이 밀던 정책 기조였다. 그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개혁의 동시추진론을 주장했다. 우선 과도한 부채를 줄이고, 국영기업을 구조조정하고, 대신 시장과 민영기업이 성장을 견인해야했다.

그러나 단파는 경제개혁은 당의 권력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하여 견제와 균형 원리를 도입하고, 정치 과정을 투명하게 하며, 하향식 강요와 상향식 협의의 타협점을 찾는 정치개혁과 동시에 추진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이것이 후진타오가 원래 원했던 충칭모델의 모습이었다. 아직 보시라이가 충칭에 부임하기 전인 2007년 3월 전인대에서 후진타오는 아직 왕양이 경영하던 충칭에 ‘314 총체전략’을 제시했다. 장강의 주요 교통 요지인 충칭을 연해지역과 내륙지역 통합과 균형성장의 가교로 삼고, 도농격차를 해소하는 재분배 정책을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보시라이가 등장하여 전혀 다른 수단으로 314 총체전략을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개혁개방이 만들어낸 사회적 병폐를 국영기업의 역할 확대, 당의 전방위적 통제력 강화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왕리쥔 망명 시도 사건으로 정치적 타격을 받고 지도부에 의해 비판 받았을 때도 자신은 그저 314 총체전략에 충실했던 것뿐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단파 입장에서는 한 방 먹은 셈이었다. 보시라이가 자신들이 진저리를 치는 그 방식으로 자신들이 내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니 기존의 파벌 구도는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 쪽에는 당의 통제력을 유지하며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에 매진하고자 하는 태자당과 상해방의 연합파벌이 있었다. 다른 쪽에는 개혁개방이 초래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당의 통제력을 놓아주고 민간영역과 시민사회의 참여를 독려해야한다는 공청단의 개혁파벌이 있었다. 그런데 보시라이가 등장하여 당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며 개혁개방의 부작용을 해소하겠다는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왕양의 광둥모델이 파이만 키우자는 성장론으로만 여겨진 것은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그가 구조조정과 경제체질개선,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을 위해 실업 문제에 소홀히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왕양은 농촌 문제와 빈곤 문제를 잊지 않았다. 소위 우칸촌 사태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광둥의 우칸촌에서 토지 강제수용과 촌민 부정선거를 둘러싸고 시위가 일어났을 때, 왕양은 촌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선거까지 허용했다. 요컨대 왕양의 광둥모델은 구조조정의 고통을 잠시 감내하여 광둥의 경제를 지속가능한 구조로 바꾸고, 균형발전도 이루겠다는 단파 모델의 일파였다.

하지만 ‘신좌파’ 보시라이의 화려한 등장으로 왕양은 자연스레 ‘신우파’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는 성장지상주의자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물불 안 가리는 성장지상주의자였다면 시진핑 정부에서 부총리로 활약하며 정부 역점사업인 빈곤퇴치에서 성과를 보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오히려 왕양이 원래부터 분배 문제와 균형발전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신좌파' 보시라이 vs. '신우파' 왕양

‘신좌파’ 보시라이 vs. (보시라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우파를 대표하게 된) ‘신우파’ 왕양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의 사이에서

정책적 아젠다를 빼앗긴 단파는 물론이고 갑작스럽게 안정을 뒤흔드는 신흥 세력의 부상에 상하이방, 태자당 연합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진심으로 보시라이를 후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우융캉의 지원을 받아, 보시라이가 다음 당대회 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이라도 했다면 일은 정말로 복잡해졌을 것이다.

이 경우 기존 두 개의 노선이 갈등하는 것을 넘어 세 개의 노선이 정치국 안에서 병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안 그래도 당의 지도력 약화를 근심하는 지도부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분열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원자바오가 보시라이에게 “문화대혁명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한다”고 직접 강도 높게 판판한 것은 이와 같은 합의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12년, 보시라이 스캔들이라는 위태로운 고비를 넘긴 중국 공산당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성장률이 둔화되고 사회적 불만은 급증하고 있었으며 선동가가 등장하여 그 불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 것인가? 상하이방과 태자당의 보수파(엘리트주의 그룹) 입장에서 더는 단파가 주장하는 균형발전과 공부론을 부정하기란 이제 불가능했다. 더 직접적인 환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고, 이에 눈을 감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상하이방: 장쩌민, 우방궈, 장더장, 쩡칭훙, 천량위, 왕후닝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3ÔÂ15ÈÕ£¬Ê®¶þ½ìÈ«¹úÈË´óÎå´Î»áÒéÔÚ±±¾©ÈËÃñ´ó»áÌñÕÄ»¡£Ï°½üƽ¡¢Àî¿ËÇ¿¡¢ÓáÕýÉù¡¢ÁõÔÆɽ¡¢ÍõáªÉ½¡¢ÕŸßÀöµÈµ³ºÍ¹ú¼ÒÁìµ¼ÈËÔÚÖ÷ϯ̨¾Í×ù¡£ ¡¡¡¡Ð»ªÉç¼ÇÕß À¼ºì¹â Éã

상하이방: 장쩌민, 우방궈, 장더장, 쩡칭훙, 천량위, 왕후닝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하지만 단파의 정치개혁도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는 힘들었다. 분명 법치주의의 확립과 부패 척결 같은 종류의 개혁은 시급해보였다. 공산당의 도덕적 해이와 대중으로부터의 유리도 심각한 문제였으며, 국영기업의 과도한 부채와 특권은 분명 조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지도력을 뒤로 물리는 자유주의적 개혁이 어떤 통제불가능한 파급효과를 낼지는 점점 불투명해졌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그 이후 유로존 위기는 민주주의 회의론을 부추겼다. 민주주의의 양대 축인 미국과 유럽도 자국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발전도 하지 못했고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진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시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애초에 민주주의를 할 필요가 있을까? 민주주의를 당면과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기는 개혁파들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수십년이나 된 두 가지 망령이 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쪽에는 사회경제적 불만이 누적되어 마오이즘의 외피를 둘러쓰고 폭발하는 문화대혁명의 망령이 있었다. 반대쪽에는 정치적 통제력을 어설프게 놓아줄 때 공산당의 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 발호할 천안문의 망령이 있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 이 두 망령이 활보하게 방치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시라이 사건으로 인해, 전자의 망령이 이미 고개를 들었음이 확실해졌다. 어떤 종류든 개혁은 진행 되어야 했다. 그렇게 두 주요 세력 모두 망령들을 피해가며 합의에 도달해야할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천안문 광장을 지키는 인민무장경찰부대 소속 상등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2.0)

천안문 광장을 지키는 인민무장경찰부대 소속 상등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2.0)

합의로 뽑힌 황제

내가 던진 문제는 단순하다. 왜 후진타오는 전례를 깨고 시진핑에게 당 총서기와 국가 주석, 그리고 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한번에 넘겨주었을까? 그리고 시진핑은 어떻게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게 된 것일까? 이제 그 답을 할 때가 왔다.

시진핑은 전방위적 위기에 맞닦드린 중국 공산당의 두 파벌이 빚어낸 위기 의식의 산물이다. 나는 후진타오가 중국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제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은 당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집단지도체제의 틀을 바꾸기를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정원이 9명에서 7명으로 줄어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신 후진타오는 자신이 추구하던 개혁의 바통을 시진핑이 이어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는 시진핑이 내세운 주요 슬로건에서 드러난다. 그는 2013년 3중전회를 통해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할 것을 선포했고, ‘중앙 전면심화 개혁영도소조’를 조직해 자신이 직접 개혁을 총지휘할 것을 예고했다. 이는 공산당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전방위적인 개혁에 공감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더이상 성장률에 목메는 대신 환경보호와 빈곤퇴치, 지역균형발전, 지속가능한 도시화 등에 역점을 둔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번 당대회에서 그가 중국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라 지적한 것은 불균형 발전의 문제였다. 이는 전통적인 태자당-상하이방 연합의 정책이 아니다. 이런 개혁 프로그램에는 명백히 단파의 비전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혁을 내세웠다고 해서 단파의 꼭두각시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진핑에게는 두 파벌의 상호모순되는 합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의 슬로건은 이 점 또한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2015년부터 4개 전면(전면적 소강사회 확립, 전면적 심화개혁, 전면적 의법치국, 전면적 종엄치당)을 내세워 통치철학으로 삼겠다고 했다.

시진핑의 정치적 슬로건인 '중국의 꿈'을 청나라 건륭 황제가 절대 권력을 누리며 서방에 복종을 요구한 1793년에 빗대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코노미스트(2013년 5월호)

시진핑의 정치적 슬로건인 ‘중국의 꿈’을 청나라 건륭 황제가 절대 권력을 누리며 서방에 복종을 요구한 1793년에 빗대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코노미스트(2013년 5월호)

의법치국(법치주의)은 개혁적인 성향이 확실히 드러나는 구호였다. 하지만 종엄치당(당을 엄격히 다스림)이 있는 한 의법치국은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진정으로 법치주의가 확립되면 종엄치당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며, 종엄치당이 있는 한 전면적 의법치국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면적 의법치국이 완성되려면 중국의 국회 역할을 하는 전인대의 자율성이 보장 받아야 하고, 헌법에 의거한 헌정이 실시되고 사법부가 독립하여 정치적 압력과 관계 없이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정말로 이럴 경우 굳이 당을 엄격하게 다스릴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원에게 부패가 있다면 법원으로 가서 헌법과 형법에 의해 처벌하면 될 일이지, 당 내부의 독자적 규약으로 처리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나는 공산당의 주류 보수파가 당의 절대적 자율성과 권한을 침해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모순을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한다.

시진핑이 집권 2기에 특히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국영기업 개혁도 비슷하다. 원래 경제 분야는 전통적으로 총리가 담당하는 것이고, 리커창 총리가 그 자신의 ‘리코노믹스'(리커창+이코노믹스)를 통해 이를 주도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리커창의 권한은 차츰 약화되었다. 그 대신 시진핑의 경제 참모로 불리우는 류허가 주도하는 ‘시코노믹스'(시진핑+이코노믹스)가 부상했다(참조: 연합뉴스).

사실 리코노믹스와 시코노믹스의 정책목표는 어느 정도 유사하다. 공급과잉을 해소하고 서비스 영역의 비중을 높이고 내수 소비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다만 리코노믹스는 민영화와 시장의 힘을 활용한 구조조정이라는 보다 단파의 지향점에 가까운 노선인 반면, 시코노믹스는 구조조정에 당과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완전한 민영화보다는 민자를 국영기업 지분에 폭넓게 도입하는 ‘혼합소유제’ 개혁을 특징으로 한다. 경제 영역에서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겠지만 그 이면에서 당의 통제력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왜 그는 권력을 탐하는가

이런 모든 움직임이 집단지도체제가 종말을 고하거나 시진핑이 마오쩌둥과 같은 위치로 부상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기엔 아직은 섣부르다. 반대로 내가 시진핑이 당내 지도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시진핑은 자신만의 야심과 개혁에 대한 의지, 당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다. 그런 야망 덕분에 그는 덩샤오핑 이래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이 권력욕과 사명감,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의 권력에 제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진핑의 권력은 공산당에서 나온다. 따라서 그의 권력은 힘을 집중할 필요성을 느낀 공산당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빚어낸, 파벌 간 합의의 결과물인 것이다. 만약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 즉 당의 절대적 통제력을 회복하고 이를 활용해 중국의 전면적 재구조화를 추진하겠다는 목표가 당내 합의에 부합한다면, 그의 권력에는 제약이 없어 보일 수는 있다.

모택동 마오쩌둥 등소평 덩샤오핑 시진핑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친위사단을 형성하고 각 지방정부와 정부부처의 핵심 요직에 배치했다. 또한, 보시라이 사건을 빌미로 당, 정부, 군대의 부패 인사들을 몰아내는 사정 정국을 만들었다. 시진핑이 추진하고자 하는 강력한 국가 주도의 개혁은 덩샤오핑이 만들어놓은 기존 체제에서 보는 이익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군부의 독자적인 이권추구와 일탈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쉬차이허우와 궈보슝 같은 이들을 숙청해야한다.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할 필요가 있다.

지방정부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GDP 단일기준에 집착하는 지역 지도부, 국영기업에 개입해서 막대한 이권을 보는 관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 수장을 바꿔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시진핑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전면적 개혁의 논리적 결과물이다. 그는 복잡한 이익집단의 거미줄을 맞닦드릴 것이고 그걸 뚫고 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이전 후진타오와 다르게 각종 영도소조의 조장과 부조장 자리를 직접 맡으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파편화된 정책결정기구를 유기적으로 원활히 통합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공산당은 권력의 원천이자 권력의 한계

그렇다면 시진핑 권력의 한계는 어디서 생겨날 수 있을까? 물론 이를 지금 말하는 것은 너무 이른 예측일 수도 있다. 시진핑 지도부가 처음 출범했을 때 사람들은 시진핑의 권력이 이렇게까지 커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중국 정치는 그만큼 불투명하고 외부인이 보기에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시진핑이 3기 임기 연장을 시도하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분명 시진핑은 영도의 핵심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사상은 당장에 삽입되었으며, 후계구도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그가 완전한 절대권력을 쥐었다고 하기엔 아직 부족한 점도 있다.

장쩌민은 영도핵심이었지만, 절대적 권력을 갖추지 못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긴 문구는 그가 전임지도자들의 아이디어에 빚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 칠상팔하의 관행은 여전히 지켜졌으며, 정치국 내에서의 파벌 간 안배도 이루어졌다. 당 주석직도 부활하지 않았다. 시진핑, 리잔수, 자오러지는 시진핑의 직속이고, 한정과 왕후닝은 상하이방이라고 여겨지며, 리커창과 왕양은 공청단의 대표주자들이다. 3:2:2로 균형을 맞춘 셈이다.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파):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파): 후진타오, 리커창, 후춘화, 왕양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래서 시진핑 지도부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국내외의 혼란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소재는 되려 시진핑 본인에게 돌려질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자신에게로 책임이 집중되기에 더 취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시진핑이 마오쩌둥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시진핑은 마오쩌둥과 같지 않다. 마오쩌둥은 그가 직접 중국 공산당을 만든 사람이다. 그의 권위는 당을 초월하며, 중국을 지배하는 당을 전적으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시진핑의 권위는 당에서 시작해서 당에서 끝난다. 비유컨대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향해 움직이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괴물, 야수와도 같다. 만약 시진핑이 당의 고삐를 죄며 당이 원하는 먹이를 던져줄 수 없게 된다면, 당이 되려 시진핑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관리인을 찾아나설 것이다.

관전포인트, 국영기업 개혁과 법치 문제

그렇다면 시진핑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을까? 시진핑의 중국은 결국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바로 그 점이 이제부터 지켜봐야할 사안이다.

집권 1기에 걸쳐 그는 당, 정부, 군대에 걸쳐 확실한 통제력과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렇다면 이제 거리낄 것 없는 집권 2기부터는 그의 개혁 드라이브가 어떤 강도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집권 2기의 시진핑은 무엇보다 국영기업 개혁과 지방정부 재정문제, 부채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내외에서 지적하는 중국의 최대 난제로 여겨진다. 온갖 이권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어서 함부로 칼을 대기가 쉽지 않으며, 성장에 자칫 악영향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권 1기의 공급측 개혁과 디레버리징(deleveraging; 부채 축소)은 그의 화려한 수사에 비해서는 비교적 미흡했다는 평가가 존재했다. 이는 집권 1기의 추진력이 보기보다 부족했고 당내외 이익집단들의 반발에 부딪혀 개혁이 탄력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국영기업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힘을 그가 어디까지 인정하려 할지, 또 정경 유착을 어떻게 끊어내려 할지 주의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경제개혁을 성공하고, 사회를 투명하게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개혁의 경우 상황은 더 복잡하다. 2015년 3월에 열린 전인대에서 입법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개정안에는 전인대의 자율성과 대표권을 신장시키고, 지방입법권을 확대했으며, 조세법정주의를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어서 2017년 3월의 전인대에서는 민법총칙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국민이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당이 권리를 쥐어주는 곳에서 이 모든 개혁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착할 수 있을까? 과연 종엄치당과 의법치국을 양립시키려는 그의 줄타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당이 외부의 감시를 받지 않고도, 그 스스로의 역량으로 쇄신하고 자기감시를 이뤄낼 수 있을까? 중국에서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닌 ‘법의 지배(rule of law)’는 가능할 것인가?

정의 재판 법원 판사 판결

역사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공산당

전혀 다른 해결책을 내세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모든 후발 국가는 ‘중진국 함정’이라든가 ‘민주화 이행구간’이라는 것을 거쳐야만 했다. 개발도상국이 소득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경제 전반의 활력과 기반시설, 생산성이 워낙 낮은 상태기 때문에 요소투입으로도 성장을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득 수준이 중진국 수준에 달하고 점차 대내외적 개방도가 높아지면 모든 사회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제는 요소 투입이 아닌 혁신과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를 끌어올려야 한다. 만약 정부가 권위주의 정부라면, 국민들이 정권에 대해 갖는 반발이 심해져 정치, 사회적인 불안정이 찾아온다.

여기서 정치적 불안정을 이겨내고 민주화로 나아가고 기존의 경제적 기득권 세력을 공정한 법의 테두리로 가둘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선진국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장애물을 넘지 못한다면, 성장은 결국 멈추게 되고 특권세력의 입지는 공고해지면서 정치, 사회적 불안정은 계속 커진다. 장애물을 뛰어넘은 나라에는 한국과 대만이 있고, 뛰어 넘지 못한 나라들에는 터키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이 있다.

후진타오 시대가 끝날 무렵, 중국은 1인당 GDP 5천 달러에 진입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중국도 중진국 함정과 민주화 이행구간의 도전에 대처해야 할 때가 왔다고 이야기 했다. 후진타오 시대 말기에 보인 징후들은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경제성장률은 둔화되고 있었고, 성장은 생산성 향상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요소투입이 이끌고 있었다.

특권층의 권력남용으로 국민들은 분노했으며, 중산층으로 올라선 이들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것을 지키기 위해 재산권, 인격권 등의 각종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이 불안정을 고통스러운 이행구간을 거쳐 해소하거나, 끝내 해소하지 못하고 다시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2006년, 정치경제 리스크 컨설팅 회사인 유라시아 그룹의 설립자 이언 브레머는 [J 커브]라는 책을 출간했다. 폐쇄국가가 경제적 위기에 대응해 개방도를 높일 경우, 국가의 안정성은 급격히 추락한다. 그러나 이 이행구간을 관리하면서 대내외적 개방을 꾸준히 밀고나가다 보면, 안정성은 빠르게 회복되어 국가의 번영을 이어갈 수 있다. 그는 이 모양이 마치 알파벳 J자와 같기에 이름을 ‘J커브’라고 붙였다. 그리고 책 [J 커브]에서 이언 브레머는 중국은 불안정 구간을 통과하지 않으면서 이 구간을 이행하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책 J 커브

1984와 ‘디지털 레닌주의’

어쩌면 브레머 교수의 가설이 사회적 안정을 되찾고 불균형 발전을 해소하고자 개혁을 추진함과 동시에 당의 정치적 통제의 고삐를 쥐려는 시진핑의 정책으로 확인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진핑의 이와 같은 시도는 ‘디지털 레닌주의’라는 형태로 실현될 수도 있다.

국가 권력이 간섭할 수 없는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은, 개인의 수많은 데이터를 모아서 상상도 못 하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2014년, 중국 국무원은 ‘사회신용시스템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개인의 금융 데이터와 사회 연결망, 소비행태 등을 종합하여 점수로 환산하고 시민들에게 차별적으로 혜택을 부여하거나 처벌을 내리는 시스템이다.

사회신용시스템은 현재 알리바바와의 합작 하에 항저우 등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 중에 있다. 예컨대 점수가 높은 사람들은 승진 기회를 받을 수도 있고, 주택 보증금이나 수수료가 면제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만약 더 높은 사회신용점수를 얻기 위해 정부에 순응하려 하고, 반발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1984

한 중국의 중산층을 상상해보자. 그 자신의 저항 행동이 자녀의 학교 진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는 과연 저항을 선택할 수 있을까? 레닌과 스탈린이 꿈꿨던 당중앙의 노선 아래 통일된 사회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동시에 또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긍정적인 방향일 수도 있으나 더 섬뜩할 수도 있다.

만약 당국이 막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대중들의 요구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불만을 느낄 여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공산당은 그렇다면 4천년 간 중국을 괴롭힌 왕조 순환의 덫에 빠지지 않은 채, J 커브를 돌파하여 14억 명의 영원한 통치기구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참조).

당의 목적은 언제나 같다

시진핑의 의도가 디지털 레닌주의를 통한 완벽한 빅브라더 체제의 구축에 있든, 중국의 불균형을 해소해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나아가는지에 있든, 덩샤오핑의 유산은 점차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선부론은 공부론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집단지도체제는 돌파력을 실어주기 위한 일인중심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면에서 덩샤오핑이 의도했던 바는 사실 바뀌지 않았다. 천안문 사태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보다시피, 덩샤오핑 또한 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할 유일한 정치세력이라는 확신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 역시도 중국이 더욱 부강해져 국제사회에서 이전처럼 무시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다.

덩샤오핑은 마거릿 대처가 홍콩 반환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자 단번에 일축해버리고 티베트에서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양안의 통일을 그의 생전에 볼 수 없는 것에 애통해했다. 선부론과 집단지도체제는 그저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덩샤오핑이 공산당의 영도라는 대전제를 해치지 않기 위해 내린 답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 상황은 신창타이로 바뀌었다. 이제 당 지도부는 신창타이 시대에 공부론과 일인지도체제, 당의 절대영도, 또는 디지털 레닌주의가 중국의 꿈을 이루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

신창타이

따라서 시진핑의 덩샤오핑을 저버렸다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국의 지도부는 하나의 목표와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그를 위해선 부유해져야 하며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룩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세력이자 정당성을 갖춘 유일한 세력은 중국 공산당이다.” 다만 당의 간부들마다 중국에 대해 인식하는 바가 다르기에, 이 대전제 위에서 펼쳐지는 노선과 파벌이 서로 갈라지는 것 뿐이다. 시진핑은 이 하나의 목표를 ‘중국의 꿈’이라는 말로 아주 명확히 표현했다.

물론 이 전제를 거부하는 공산당원들도 존재했다. 정치개혁을 외친 원자바오가 그랬을 것이고, 과거의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도 어쩌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서방 세계의 많은 학자들도 결국은 이 길만이 정답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서구식 민주주의의 권위에는 타격이 왔다. 거기에 보시라이의 갑작스러운 돌출행동으로 공산당의 위기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당의 대전제를 벗어나는 것은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운도 따라주지 못했다. 당의 권력을 제한하고 시민사회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던 리커창은 하필 경제 분야 전문가로 통하고 있었다. 그가 허난성 당 서기로 근무했을 때에는, 전임 지도부 때 만연한 매혈 풍습 때문에 에이즈 위기가 터졌다. 그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건이었지만 리커창은 위기대응 능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반면 시진핑은 상하이 시장과 베이징 올림픽 위원장을 지내며 철저히 위기를 피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제뿐이 아닌 전방위적 관리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당이 경제를 넘어서 불균형 발전 문제에 매진하고자 했을 때 오히려 리커창이 부적합해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중국,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동안 많은 관찰자가 시진핑을 보면서 마오쩌둥으로의 회귀, 독재적 일인체제의 구축, 야심과 권력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이런 시각을 거부한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들이, 노선과 파벌, 인물과 자신들의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끌어낸 논리적 결과물이다. 이는 서구 세계의 논리적 결과물인 리커창이나 원자바오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이질적이고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의 정책 결정이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결국,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도전자들에 대해 철저히 알 필요가 있다.

중국 북경 천안문

따라서 우리는 시진핑이 어떻게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의 비전은 무엇인지, 중국은 어디로 가는지 끝없이 질문해보고 수많은 가능성을 하나하나 따져보아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시진핑은 당내 합의의 결과물이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그가 3기 연임에 성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인지 반문할 수 있다.

여기에 나는 불확실성이 높고 또 위험성도 높을 수록, 당면한 모든 가능성과 대책을 강구해보는 것 역시 지극히 상식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과거 냉전 시대, 미국의 전략가들은 소련이 내부적 취약성 때문에 오래 패권국가로서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보다 소련 체제는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 뒤 몇십 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소련 체제가 생각보다 견고하며 21세기에도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소련 체제는 몇달 만에 종잇장처럼 무너졌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예측에서 틀릴 수는 있다. 그러니 단 하나의 가능성만 남겨두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인 것이다.

죽의 장막 밖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 제19차 당대회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당대회였다. 중국의 일은 이제 중국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며 중국 공산당은 세계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만 살펴보고 중국의 미래를 논하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경찰이자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논하지 않으면서 미국 이야기를 끝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직 살펴보지 않은 덩샤오핑의 유산을 살펴봐야 한다. 바로 도광양회다. 시진핑의 중국은 이제 신형 국제관계와 일대일로 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조용히 힘을 키우고 함부로 잡음을 내지 말라는 도광양회의 메시지와는 정반대되는 일하고 있다. 무엇이 중국으로 하여금 도광양회를 버리도록 만들었나? 그리고 그것이 한국과 나아가 세계에 끼칠 영향은 무엇일까?

이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넘어서 그 바깥까지 조망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우리는 인도양과 유라시아로 간다. (‘시진핑의 중국’ 끝)

¶ 이 글은 ‘중국과 오래된 미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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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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