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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한때 한국 언론사에 종사했지만, 나는 한국 언론이 대단히 비겁하고 위선적이며, 그래서 ‘언론’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고 생각한다.

무지 + 게으름 = 과잉친절

항공기 기내 난동 장본인의 행동(얼굴 포함)이 그대로 드러난 리차드 막스의 사진(왼쪽)과 난동자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보도한 한국 언론의 기사 화면(오른쪽)
항공기 기내 난동 장본인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리차드 막스의 사진(왼쪽)과 난동자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보도한 한국 언론의 기사 화면(오른쪽)

위 사진은 언론의 무지 혹은 게으름에 기댄 ‘과잉 친절’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저런 ‘친절한’ 모자이크 처리가 역으로 공익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이다. 왼쪽은 만천하에 공개된(publicly available) 리처드 막스의 페이스북 페이지고, 오른쪽은 이를 인용 보도한 언론의 페이지다.

한국일보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언론 사이트가 이렇게 대한항공 기내 난동 장본인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범법자의 이름도 A 모, 임 모 등으로 익명 처리했다. 이미 공개된 정보는 개인정보가 아니다. ‘뉴스 가치’가 명백한 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언론의 무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사례 1. 건물 간판 가리기 

JTBC 뉴스룸을 보면서 나는 자주 아내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아니, 저긴 왜 모자이크 처리했대?”

“아니, 왜 저 얼굴에 모자이크를 했어?”

“아니, 저 간판들은 왜 다 가렸어?”

뉴스 화면을 보다가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자주 큰소리를 낸 탓이었다. 하도 황당해서 내놓은 감탄사거나 비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무질서부터 배우는 학원가? 학원가가 맞나? 온통 모자이크라서 학원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무질서부터 배우는 학원가? 학원가가 맞나? 온통 모자이크라서 학원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학원가가 밀집한 강남 도심에 나와 있다고 말하는 취재 기자 뒤로 고층 빌딩이 빼곡히 서 있다. 그런데 빌딩의 모든 간판이 다 흐릿하게 모자이크 처리되었다. 도대체 왜? 설마 그 학원 이름들에 무슨 프라이버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그대로 노출하면 특정 기업이나 브랜드를 광고하게 될까 봐 우려돼서? 아니면 비판하는 보도 내용에 노출된 간판의 해당 학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까 봐?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처럼 과도한 모자이크 처리 탓에 취재 보도의 흐름이 끊기고, 결국 보도 내용 자체의 신뢰감조차 스스로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사례 2. 기업 명칭 가리기

“A 그룹, B 그룹, C 자동차, ㅎ 그룹의 ㅂ 회장”

언제부터 기업 이름이 생명을 얻었을까, 하여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얻었을까? 아니, 주로 대기업들이 언론 보도에서 알파벳이라는 커튼 뒤로 숨기 시작한 시점은, 아마도 대기업들이 광고주로서 확고한 ‘갑’의 지위에 서고, 방송과 신문, 잡지는 굽신굽신 ‘을’의 지위로 전락한 시점과 엇비슷하게 맞물리는 건 아닐까?

코미디로도 봐주기 어려운 ‘기업 명칭 가리기’의 끔찍한 유행은 [영화가 좋다] (KBS2)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헐크 같은 이른바 ‘슈퍼 히어로’를 잔뜩 거느린 양대 만화 제국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를, 세상에나, ‘M사’, ‘D사’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아니 왜? 미친 거 아냐? 내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저 극단적 이름 가리기에, 문득 멘붕이 왔다. 내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한국 방송계의 규정을 모르고 있는 건가?

사례 3. 얼굴·이름 모자이크

우병우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저들은 공무상, 업무 수행의 맥락에서 저 자리에 앉은 것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아니, 가리지 말아야 한다.
우병우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저들은 공무상, 업무 수행의 맥락에서 저 자리에 앉은 것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아니, 가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얼굴을 가려주는 모자이크는, 가능하면 ‘프라이버시’ 차원이려니 이해하려 무진 애를 썼다. 더욱이 캐나다에서 밥 벌어먹는 내 직업이 언필칭 ‘정보 프라이버시 전문가’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닌 거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이, 저 방송이나 신문이, 정말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프라이버시의 범위와 수준을 고민해 본 적이 있었을까 의심되는 순간이, 수도 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가장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례는 최순실의 딸로 독일에 도피 중인 정유라의 얼굴 가리기다. 2016년 11월 18일 보도부터 정유라의 얼굴을 그대로 공개한 SBS를 빼곤 대다수 언론, 특히 TV 방송사들은 아주 충실하게 정유라의 얼굴을 모자이크로 가려줬(었)다.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사안의 맥락, 공공의 이익, 국민의 알 권리, 언론의 역할 등에 기대어 따져보면, 그래서는 안 된다. 얼굴을 가려줌으로써, 언론은 결과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를 막고, 더 나아가 범죄의 은폐에 일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18일 보도부터 그때까지 모자이크로만 처리됐던 정유라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SBS
2016년 11월 18일 보도부터 그때까지 모자이크로만 처리됐던 정유라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SBS

최순실 국정 농단을 보도하면서 청와대의 수석이나 보좌관들의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조 모 박 모 따위로 익명 처리하는 것도, 사실은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프라이버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의 결과라고 판단한다. 그 보도에서 청와대 수석이나 대통령 보좌관들의 얼굴, 이름은, 개인 자격이 아닌, 그들에게 부과된 공적 업무·공적 책임과 연관된 공인의 자격이고, 따라서 이때 나오는 얼굴과 이름은 프라이버시의 보호를 요구하는 ‘개인 정보’(personal information)로 취급되지 않는다.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전문가, 전문가 검토진의 이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한 마디로 황당한 판단. 가려져 있다면 도리어 노력해서 이름을 밝혔어야 할 대목인데, 언론이 알아서 가려준다. 이건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전문가, 전문가 검토진의 이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한 마디로 황당한 판단. 가려져 있다면 도리어 노력해서 이름을 밝혔어야 할 대목인데, 언론이 알아서 가려준다. 이건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다시 말해 개인 자격(personal)과 직업인·공인·전문인으로서의 자격(business capacity 또는 professional capacity)은 엄연히 구분되고, 후자는 개인 정보로 평가되지 않는다. 보도되는 청와대 수석이나 보좌관들의 얼굴과 이름은 따라서 모자이크 처리의 필요성이 없다. 아니, 그렇게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언론의 과잉 친절? 얼굴도 모자이크 처리, 이름도 익명 처리. 이미 널리 공개되어 '프라이버시'의 의미가 사라진 정보를 굳이 가림으로써 이 뉴스는 언론 보도의 ABC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카더라' 전언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 언론의 과잉 친절? 얼굴도 모자이크 처리, 이름도 익명 처리. 이미 널리 공개되어 ‘프라이버시’의 의미가 사라진 정보를 굳이 가림으로써 이 뉴스는 언론 보도의 ABC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카더라’ 전언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그보다 더 명백한 엉터리는 미국의 팝 가수 리처드 막스가 페이스북에 정황을 올려 큰 화제가 된 한 중소기업 사장 아들의 기내 난동 사건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다. 앞에 언급한 정유라의 경우처럼, 기내 난동은 이미 공익과 관련된 사안이다. 명백한 범죄 행위이고, 가해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사건을 제보한 리처드 막스의 페이스북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된(publicly available) 상태다. 이 경우, 한국 언론은 이미 공개된 사안을 그저 전달할 뿐이므로, 가해자 얼굴을 가릴 필요나 이유도, ‘모 중소기업 사장의 아들인 A 씨 (혹은 임 모 씨)’라고 익명으로 처리할 까닭도 전혀 없다. 프라이버시가 뭔지 몰라도, 이미 다른 매체나 창구를 통해 널리 공개된 정보를 다시 인용하는 데는 대부분 아무런 제약도 없다. 이런 사실 정도는, 한국 언론도, 아무리 무식하고 게으르고 비겁하기로 소문난 한국 언론이라도, 알았어야 했지 않나?

사례 4. 담배, 칼, 총, 수갑, 수인 번호 가리기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차은택이나 최순실을 비출 때마다, 방송은 그들의 가슴에 박힌 수인 번호표와 수갑을 아주 충실하고 성실하게 가려준다. 왜, 아예 수의 전체를 다 모자이크 처리하시지, 수의도 보기 흉하잖아?

보도 화면을 뿌연 '안개 속의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송사의 과도한 모자이크.
보도 화면을 뿌연 ‘안개 속의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송사의 과도한 모자이크. (출처: YTN)

이런 모자이크 처리가 지나치다는 점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널리 인지됐고, 그래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06년부터 자연스러운 상호·상표 등의 노출을 제재하지 않는다. 과도한 가림 처리는 시청자 몰입을 방해할 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 자체를 왜곡한다.

칼부림 장면이나 총격 장면에서 칼과 총을 가리면 그게 뭐가 되나? [영화가 좋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틀면서 담배, 칼, 총 따위를 가린다. 심지어 영화 아래 적힌 한글 자막을 모자이크로 가린 뒤, 그 위에 해당 방송국에서 만든 자막을 얹은 경우도 보았다. 이건 대체?

KBS2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 [영화가 좋다] 중에서
KBS2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 [영화가 좋다]는 마블 코믹스를 M사로, DC 코믹스를 D사로 부른다. 슈퍼맨과 어벤져스가 웃을 황당한 일이다.

언론의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다

한국 언론은 지금이라도 모자이크 남발 현상을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더불어 ‘프라이버시’와 ‘개인 정보 보호’라는 사안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해서, 기자는 물론 프로그램 제작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프라이버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교육’해야 모자이크 오남용을 줄이고, 나아가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공익을 더 충실히 반영할 수 있다.

한국 언론은 가장 비겁하고 위선적이라는 내 주장이 지나쳤다면, ‘너무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정도로 바꿔 보자.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안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몰랐다’라는 언론의 변명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최순실이 그런 줄 몰랐으므로 무죄’라는 박근혜의 주장이 통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무지와 무식은, 하여 직무 유기는, 결코 타당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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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후기

이 글은 한국 언론의 포토 저널리즘, 특히 공적 사건 당사자와 공인의 ‘모자이크 처리’를 소재로 합니다.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담론 시장의 건강함과 다양성을 위해 이 글을 기꺼이 발행하자고 중론을 모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어떤 비판과 보론 기고도 환영합니다.

앞서 강조했듯, 이 글의 소재에 관해선 다양한 입장과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국 형법은 대다수 외국과는 다르게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도 일정한 조건에서 ‘명예훼손’ 범죄가 성립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시민)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공개 표현)해도 형사 책임에서 무조건 면책되지 않습니다. 또한, 형사 책임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보도된 장본인이 초상권 침해를 사유로 해당 언론사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보상을 청구하면, 이에 관한 민사적 책임은 따로 존재합니다.

참고로 위 리차드 막스가 고발한 ‘항공기 기내 난동 사건’의 장본인 경우에도 이를 보도한 언론사의 명예훼손 책임, 즉 형사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은 대단히 낮지만, 해당 난동자가 언론사를 상대로 초상권 침해를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경우에는 그 민사상 책임(정신적 피해보상 ‘위자료’)을 법정에서 충분히 다툴만한 사안이라는 것이 제가 자문한 한 법률 전문가의 의견이었습니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 혹은 언론 출판의 자유에 적대적인 물리적인 법적 조건은 어떤 기자가 비겁하거나 게을러서 습관적으로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법의 테두리에서 피해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르기 위한 조화로운 절충일 수도 있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눈이 ‘모자이크’ 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듯, 저널리즘의 눈도 원칙적으로 특별한 사정이 존재하지 않는 한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어떤 가공도 없이 어떤 가감 없이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의 권리와 독자의 알 권리만 우선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아직 기소되지 않은 피의자나 아직 재판으로 확정 판결받지 않은 피고인에게도 당연히 무죄 추정의 대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하물며 죄를 지은 자도 인간으로서의 인격권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인 합의이기도 합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2004)과 강호순(2009)의 얼굴 공개를 둘러싼 ‘진통’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언론의 권리(독자의 알 권리)와 공적 책무는 때로 특정 개인의 인격권(초상권 등)과 충돌합니다. 이 두 개의 권리가 서로 충돌할 때 어느 하나의 권리를 무조건 우선한다고 선언하거나 주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보도 대상인 행위의 공적 성질을 엄격히 판단해야 합니다. 해당 행위가 공인으로서의 행위인지 사인으로서의 행위인지 먼저 살펴야 하고, 사안의 구체성을 따져야 하며, 해당 보도가 공익적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는지, 특정인의 사회적 평가나 인격을 공적 행위와 무관하게 침해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에 관해 여러모로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합니다.

후기가 길어졌습니다. 독자에게도 필자에게도 비례가 아니었는지 걱정입니다만, 모쪼록 넉넉한 양해를 구합니다. 이 글이 다양한 해석과 대화를 통해 좀 더 나은 방법을 마련하고, 더 성숙한 토론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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