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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 기형도, ‘늙은 사람’, [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나는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이신 정치와 어머니이신 경제의 자식들이다. 늙은 사람이 쌓아놓은 썩은 정치와 더 썩어빠진 경제의 규칙들에 젊은 사람이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일이다.

물론 그 저항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몽상적이고, 실체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이다. 경제와 정치의 시스템, 그 운동원리는 뼛속까지 권위 추종적이고, 권위 종속적이니까. 힘 있는 놈이 장땡이고, 돈 있는 놈이 장땡이다. 이토록 자명한 규칙을 본 적 있는가. 그 규칙을 만든 늙은 사람이든 그 규칙을 따라야 하는 젊은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마음으로 부정해도 몸으로 복종하고, 몸으로 저항해도 마음으로 어느새 투항한다. 몸과 마음은 서로 부정하고, 분열한다.

그래서 권위를 부정하는 젊은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저항은 그 권위의 약한 고리, 늙은 사람의 타락을 공격하는 일이다. 늙은 사람들은 대체로 그 세월만큼 타락한 존재들이다. 여기에는 유무식이 따로 없고, 남녀가 따로 없으며 돈과 권력의 많고 적음이 따로 없다. 네루다의 시어를 빌리면, 늙은 사람은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과 같은 존재니까.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우리는 타락의 자식들이기도 하니까.

노을 강가 강
nachans, CC BY

그래서 가장 필요한 건 늙은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희생이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건 늙은 사람의 훈계가 아니라 기도다. 그게 없으면 훈계질에 길들여진 꼰대들의 잘난 위로가 젊은 사람의 진심 어린 적대감을 무장 해제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기도(기도는 반성 혹은 성찰로 바꿔도 무방하다)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면 단 한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나도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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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나이든 이 하나가 젊은이 하나에게 훈계대신 희생을 한다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겠죠.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더 필요한 건 개인의 깨달음보다는 시스템을 바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있는 젊은이들 몫이고요. 그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울 정신력이라도 가질수 있게 키워줬더라면 우리들의 죄책감이 좀 덜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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