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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3. 근대 중앙아시아 지식인들의 탄생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자 이슬람 카리모프. 헌법을 개정해 종신 집권이라는 영생을 꿈꿨던 독재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6년 9월 2일 뇌출혈로 사망한 카리모프. 그의 죽음 뒤에도 우즈베키스탄 민중의 삶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국가, 우즈베키스탄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과 정치, 사회와 경제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이 연재는 총 10회 이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편집자)

  1.  카리모프와 그의 나라
  2. 러시아의 붉은 새벽: 혁명, 혼란, 숙청 
  3. 근대 중앙아시아 지식인들의 탄생
  4.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파벌의 등장
  5. 두 거인의 시대

소련이 세워지고 5개년 계획 드라이브를 걸기 이전에 우즈베키스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와서 소련에 편입되거나, 혹은 축출되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다시 시간을 뒤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우즈베키스탄의 근대 역사도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전통과 소련 정부의 근대화 정책이라는 두 가지 상황이 맞닿은 결과이므로 소련 이전의 우즈베키스탄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간을 더 뒤로 돌리겠습니다.

티무르의 죽음과 우즈베크 족의 유입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그 유명한 아미르 티무르(Amir Temur, 1336년~1405년)가 사망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때 북쪽 러시아를 지배하던 몽골 제국의 후계국가, 킵차크 칸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점차 밀려나면서, 중앙아시아로 새로운 민족집단이 유입되게 됩니다. 바로 그들이 샤이바니가 이끌던 우즈베크 족이었습니다.

소련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 '위대한 티무르 '가 죽자 중앙아시아에는 혼돈이 찾아온다.

소련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 ‘위대한 티무르 ‘가 죽자 중앙아시아에는 혼돈이 찾아온다.

1700년대가 되면 중앙아시아는 세 칸국(Khanate)이 나름 안정된 세력기반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 히바 칸국: 서쪽부터 노예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
  • 부하라 칸국: 티무르 시대 이래로 중앙아시아의 심장 실크로드의 중심지.
  • 코칸드 칸국: 청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

이들 국가의 지배집단은 모두 샤이바니와 함께 내려온 우즈베크 족을 그 기원으로 하나, 사실 서로 같은 우즈베크 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건조기후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경향이 크죠. 우즈베크 족들에게는 국가나 민족을 기반으로 한 공통의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관료 국가화가 덜 진행된 곳일수록 당연히 제도, 규범보다는 혈연과 지연을 비롯한 개인적인 후원 관계가 인간을 규정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공통의 가치를 위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협력보다는, 자신의 협소한 사회적 관계망을 챙겨주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국가재산은 가족들과 함께 ‘해먹어야’ 할 눈먼 돈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 사회, 가족들이 설령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 정도는 봐줘야지 가족인데’ 이런 소리가 나오는 사회지요. 앞서 살펴본 소련의 당 관료라는 놈들도 사실 이랬는데, 중앙아시아는 러시아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습니다.

러시아의 동방 진출 

이 때문에 우즈베크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회는 서쪽에서 밀려오는 러시아의 힘에 대응할 역량이 없었습니다. 몽골인들을 쫓아낸 러시아인들은 이제 동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 유명한 이반 뇌제(1530년~1584년)는 타타르의 중심도시 카잔을 정벌(1552년)하고, 그 뒤에 예르마크(?~1585년)가 이끄는 코사크들이 시베리아의 시비르 칸국까지 점령(1581년)하면서 파죽지세로 동방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피 상인들과 코사크가 이끄는 시베리아 진출과 달리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정벌은 꽤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비교적 인구가 적어서 깃발만 꽂으면 자기 땅이 되는 시베리아와 달리 이곳에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현지 주민들의 군사력이 러시아인들에게 적대적인 자연환경 덕분에 계속 저항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즈벡인들이 국가 단위로 협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지역사회는 단단한 신뢰와 결속력을 자랑했기에 지속해서 러시아인들에게 피해를 주기는 쉬웠죠.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큰 악몽을 안겨준 곳인 체첸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일찍이 이러한 말을 한 바가 있지요.

“우리는 유럽에서 타타르인 취급을 받지만, 아시아에서는 우리도 유럽이다.”

유럽에 비하면 심히 후진적이긴 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러시아는 서유럽에서 진행된 기술적 진보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는데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 정벌은 훨씬 쉬워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제 중요했던 것은 현지인들의 저항이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이냐는 문제였죠.

목화와 “그레이트 게임”

인도를 사수하고자 했던 영국과 바다로 나가고자 했던 러시아의 갈등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놓고 펼친 거대한 게임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그레이트 게임”의 시대였죠. 특히 러시아는 크림 전쟁의 패배 이후 자신의 안보를 동쪽에서의 세력 확대를 통해 보장받고자 하였는데 이 시기 조선, 캅카스,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이 가시화됩니다. 거기에 중앙아시아를 매력적으로 만든 요소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이후에 우즈베키스탄 역사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떠오를 하얀 황금, ‘목화’였습니다.

목화

마침 멀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남북전쟁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북부군은 남부가 면화로 전쟁자금을 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해 남부의 모든 항구를 봉쇄했습니다. 세계 면화 시장에 공급되는 물량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산 면화가 산업혁명으로 막 팽창하고 있는 유럽의 공업지대에 공급되지 못하자 목화 값이 폭등했습니다. 당연히 세계 경제가 같이 요동쳤습니다.

세계시장에 수출하여 외화를 확보하고 자국의 산업화에 필요한 목화를 수급하기 위해서, 이집트, 브라질, 영국령 인도 등을 비롯한 각지의 농경지에서 목화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가 그 목화를 얻을 곳은 바로 중앙아시아였습니다.

이런 정치, 경제적인 요인에 힘입어 마침내 1865년 러시아군은 타슈켄트(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차례로 부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마르칸트를 뜯어낸 뒤 부하라를 자치공국으로 만들었고, 히바에도 똑같은 일을 해줍니다. 여기서부터 우즈베키스탄 각 지역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지배와 맞물리면서 서로 분화하게 됩니다.

러시아, ‘타슈켄트’를 기반으로 중앙아시아 관리 

우선 타슈켄트와 그 근교의 페르가나 계곡은 러시아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어 가장 일찍 급속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타슈켄트는 일찍이 코칸드 칸국 시절에도 번창하던, 매우 유서깊은 중앙아시아의 도시였는데, 러시아와 청제국, 인도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결절지였지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이곳에 오기 전부터 러시아 경제의 영향권에 들어서 있던 곳인지라, 주요 도시 중에서는 가장 일찍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투르케스탄 총독부가 이곳에 설치되었습니다.

러시아는 타슈켄트를 기반으로 하여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관리하였고, 안보적 필요성에 따라 러시아 본토에서 타슈켄트와 연결되는 철도를 부설했습니다. 이 철도가 매우 중요했는데 1906년에 철도가 (푸시킨의 그 유명한 소설인 [대위의 딸]의 배경이기도 한) 러시아 동방진출의 기지인 오렌부르크와 연결 되고나서 타슈켄트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철도 기차

철도를 따라 러시아 관료와 노동자가 타슈켄트로 몰려들었다.

철도가 지나는 곳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기회를 찾고자 한 러시아인 노동자들과 관료들이 물밀 듯이 타슈켄트로 들어왔습니다. 더하여 타슈켄트 근처의 페르가나, 안디잔, 나망간 지역(앞으로 페르가나로 묶겠습니다)은 러시아 시장과의 접근성이 좋았기에, 우크라이나와 시베리아를 통해 식량을 수입하면서 밀 재배를 점차 줄여나가고 목화 재배를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현지의 토지 소유 구조를 비롯한 사회질서가 뒤흔들렸습니다.

부하라 

반면 부하라는 자신의 정치적인 자치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러시아의 영향도 상대적으로 제한적으로 받았습니다. 물론 부하라도 그 이전에 비하면 러시아 경제와의 연결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변동과 충격을 견뎌내야 했습니다만, 타슈켄트와 페르가나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타슈켄트 철도역이 오렌부르크에서 러시아인들을 끊임없이 태워올 동안 부하라 칸국은 러시아인들이 보기 싫다고 철도역을 부하라 시내가 아닌 외곽의 카간에 설치하기도 했습니다(여담인데 이 때문에 여행할 때 조금 귀찮습니다).

페르가나의 경작지의 44%가 목화로 개조당하고 타슈켄트에 유럽식 건물이 들어설 동안 부하라 경작지는 13%만이 목화로 사용되었고 에미르는 제국을 파멸시킨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여름 별궁을 짓고 있었습니다.

러시아화(타슈켄트) vs. 이슬람 정체성(부하라) 

이런 차이로 두 지역의 엘리트 그룹(혹은 잠재적 엘리트 그룹) 또한 전혀 다른 노선을 걷게 됩니다. 경제적 변동과 전통사회가 겪는 위기, 그리고 차르 체제의 균열로 중앙아시아 또한 러시아처럼 아래 위로부터 새로운 움직임들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지역이 외부의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였고 자신들을 어떻게 규정하였는지에 따라 차이를 보이게 되지요.

앞서 언급했듯 타슈켄트는 강력한 러시아화에 직면해야 했고, 도시에는 많은 러시아인과 유럽계 주민이 있었습니다. 타슈켄트의 중앙아시아인들은 얼마든지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나가서 일하고 러시아인들의 생각을 타슈켄트로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향후 러시아 사회를 장악하게 될 볼셰비키와의 접점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쉬켄트에 지어진 러시아 정교회 성당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3.0) https://en.wikipedia.org/wiki/Tashkent#/media/File:%D0%A5%D1%80%D0%B0%D0%BC_%D0%90%D0%BB%D0%B5%D0%BA%D1%81%D0%B0%D0%BD%D0%B4%D1%80%D0%B0_%D0%9D%D0%B5%D0%B2%D1%81%D0%BA%D0%BE%D0%B3%D0%BE_(%D0%A2%D0%B0%D1%88%D0%BA%D0%B5%D0%BD%D1%82).png

타슈켄트에 지어진 러시아 정교회 성당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3.0)

반면 부하라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집단은 전통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중심지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더 충실했습니다. 이들은 총독부가 조심스럽게 실시한 러시아식 교육을 받아 근대적 소양을 익혔으면서도 전통 무슬림 사회에 끈을 두고 있는 새로운 지식인 집단에 그 기원을 둡니다. 그리고 이들은 러시아 제국에 일찍부터 합병되어 더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무슬림 집단들, 크림과 카잔의 타타르인들과 교류를 시작합니다.

부하라 (출처: 유네스코) http://whc.unesco.org/uploads/thumbs/site_0602_0016-750-0-20130729144635.jpg

부하라 (출처: 유네스코)

이런 흐름 속에서 “우술리 자디드(새로운 교육)”이라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자디드 운동이라고 하는 교육개혁운동이지요. 서구의 기술문명과 이슬람의 전통을 같이 가르치자고 하는, 중앙아시아판 동도서기였던 겁니다. 자디드 운동가들은 기존 봉건사회의 질서와 후진성에는 신물이 나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중앙아시아 각 민족문화와 이슬람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들을 찾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처음부터 타슈켄트와 부하라가 이렇게 확 갈린 것은 아닙니다. 부하라에도 서구적 지식인들이 있었을 것이며 타슈켄트에는 확실히 자디드 학교와 언론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후에 상이한 길을 걸은 두 엘리트 그룹이 어느 쪽에 더 친숙함을 느끼며 자신들의 세력기반으로 삼을지에 관한, 배경조건의 차이가 생긴 것이죠.

볼셰비키 혁명 직후, 중앙아시아 엘리트의 세 가지 선택지 

이 시기, 특히 1905년 혁명의 성과가 차르 정부의 반동으로 역행할 때 중앙아시아는 아직 무언가 명확한 비전과 노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밑이 요동치기 시작했죠. 제1차 세계대전이 러시아 제국을 완전히 박살 내버린 것입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나자 중앙아시아의 무슬림은 완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일단 대책을 논의하고자 전 러시아 무슬림 회의 같은 것도 열고 하면서 이제 무슬림은 새로운 비전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특히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고 내전이 시작되자 사회와 경제가 파탄 나면서 더욱 시급해졌습니다. 혁명 정권이 자리를 잡기 전의 유동적 상황에서 크게 세 가지 비전이 제시되었습니다.

1. 친러시아 공산주의자 

한쪽 끝에는 러시아인들과 협조하여 적극적으로 소련 체제의 건설자가 되고자 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열렬한 공산주의자로서 중앙아시아를 철저히 근대화하고 모든 봉건적 전통을 일소하고자 했습니다.

2. 민족주의적 성향의 바스마치 운동가 

그리고 다른 쪽 끝에는 ‘바스마치’ 운동가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빈농, 종교지도자, 지역 유력자 등 하여간 공산주의는 당연하고 기존 러시아의 지배도 거부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터키에서 등장한 범투르크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최고 수뇌부였던 엔베르 파샤가 1차 세계대전 후에 직접 이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러시아 제국 전체를 접수하고자 했던 소련 입장에서는 상당한 골칫거리였죠. 그리하여 미하일 프룬제(1885년~1925년) 장군이 지휘하는 붉은 군대가 투입되어 이들을 징벌했습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는 이를 기념하여 소련 시절 그 이름을 프룬제로 바꾸었죠.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프룬제

3. 부하라 중심의 자디드 운동가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는 부하라를 중심으로 한 자디드 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자디드 운동가들 중 다수는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근대화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볼셰비키와 협조하고자 하였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볼셰비키의 일반적인 노선하고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가 근대화되고 자립할 수 있는, 폭넓은 자치권과 이슬람 전통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지역이 되기를 원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에 협조하면서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일단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부하라의 자디드 운동가들은 볼셰비키와 동맹을 맺은 정치결사를 조직하였고, 자신들 주도하에 부하라와 히바의 군주들을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각각 부하라 인민 공화국과 히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예고하면,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다음 편의 주인공인 파이줄라 호자예프입니다.

바스마치 운동 소멸 후의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운동(The Basmachi Movement)은 최종적으로 사라지는 데 10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는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습니다. 투르키스탄(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이제 소련 공산당이라는 유일한 정치조직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치조직은 단일한 실체라고 보기엔 너무나 다른 두 그룹이 섞여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러시아인과 연계되고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열혈 볼셰비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룹은 모스크바에 협조해주긴 하되 러시아 주도의 근대화에 중앙아시아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자디드 운동가들이었죠.

그와 동시에 이제 모스크바라는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혹은 투르키스탄이라는 광의의 지역은 이전에 없던 카자흐, 우즈베크, 키르기스, 투르크멘, 타지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이 어떤 식으로 중앙아시아를 재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들 두 엘리트 집단이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다음 편에서 찾아뵙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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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명묵
초대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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